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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一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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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문 종체(宗體)를 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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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론(論)을 해석함에 있어 대략 세 문(門)이 있다. 첫째는 종체(宗體)를 표하고, 둘째는 제명(題名)을 해석하며, 셋째는 문(文)에 의거하여 의(義)를 드러낸다.
제1 종체를 표함
대저 대승(大乘)의 체(體)란 적연(寂然)하여 공적(空寂)하고 담연(湛然)하여 충현(沖玄)하다. 현(玄)하고 또 현하니 어찌 만상(萬像)의 표(表)에서 벗어나겠는가. 적(寂)하고 또 적하니 오히려 백가(百家)의 담론 속에 있도다. 상(像)의 표(表)가 아니니 오안(五眼)으로도 그 몸을 볼 수 없고, 언어 속에 있으니 사변(四辯)으로도 그 모습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하자니 안으로 들어가도 내(內)가 없어 빠뜨림이 없고, 미세하다고 하자니 밖을 포용해도 외(外)가 없어 남음이 있다. 유(有)에서 끌어내면 한결같이 용(用)하면 공(空)이 되고, 무(無)에서 얻으면 만물이 이를 타고 생겨난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억지로 이름하여 대승(大乘)이라 한다.
【별기(別記)】
그 체(體)는 광활하기가 태허(太虛)와 같아 그 사(私)가 없고, 탕연(蕩然)하기가 거해(巨海)와 같아 지극한 공(公)이 있다. 지극한 공이 있으므로 동정(動靜)이 따라 이루어지고, 그 사(私)가 없으므로 염정(染淨)이 이에 융합된다. 염정이 융합되므로 진속(眞俗)이 평등하고, 동정이 이루어지므로 승강(昇降)이 참차(參差)하다. 승강이 참차하므로 감응(感應)의 길이 통하고, 진속이 평등하므로 사의(思議)의 길이 끊긴다. 사의가 끊기므로 이를 체득한 자는 영향(影響)을 타고 방소(方所)가 없고, 감응이 통하므로 이를 기원(祈願)하는 자는 명상(名相)을 초월하여 귀의처가 있다. 소위 영향(影響)을 탄다 함은 형상도 아니고 설법도 아닌 것이며, 이미 명상을 초월하였으니 무엇을 초월하고 무엇으로 귀의한다는 말인가. 이를 일러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이며, 그러하지 않은 대연(大然)이라 한다.
두 입을 닫은 대사(大士)나 목격으로 체득한 장부(丈夫)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언(離言)에서 대승을 논하고 절려(絶慮)에서 깊은 믿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마명보살(馬鳴菩薩)이 무연대비(無緣大悲)로 저 무명(無明)의 망풍(妄風)이 심해(心海)를 흔들어 쉽게 표류하게 함을 애처로이 여기고, 이 본각진성(本覺眞性)이 긴 꿈에 잠들어 깨어나기 어려움을 민망히 여겨, 이에 동체지력(同體智力)으로 능히 이 론(論)을 지었다. 여래(如來)의 깊은 경전의 오묘한 뜻을 찬술(贊述)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잠시 한 권의 책을 펼쳐 삼장(三藏)의 취지를 두루 탐색하게 하고, 도를 닦는 자로 하여금 영원히 만 가지 경계를 쉬고 마침내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다.
【별기(別記)】
그 론(論)으로서의 성격을 논하면, 세우지 않음이 없고 타파하지 않음이 없다. 중관론(中觀論)·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은 모든 집착을 두루 타파하고 또 타파한다는 것도 타파하지만, 타파하는 주체와 타파되는 대상을 다시 허용하지 않으니 이를 일러 '가고 두루하지 않는 론(往而不徧論)'이라 한다. 유가론(瑜伽論)·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은 심천(深淺)을 통달하여 법문(法門)을 판별해 세우지만, 스스로 세운 법을 융화하여 버리지 않으니 이를 일러 '주면서 빼앗지 않는 론(與而不奪論)'이라 한다. 지금 이 론(論)은 지혜롭고도 인자하며 현묘하고도 넓어서, 세우지 않음이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타파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다시 허용한다. 다시 허용하는 것은 저 '가는 것'이 극에 달하면 두루 세움을 드러내고, 스스로 버리는 것은 이 '주는 것'이 극에 달하면 빼앗음을 밝힌다. 이를 일러 모든 론의 조종(祖宗)이요, 뭇 쟁론의 평주(評主)라 한다.
서술한 내용이 넓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일심(一心)에 두 문(門)을 열어 마라(摩羅)의 백팔(百八) 가르침을 총괄하고, 상염(相染)에서 성정(性淨)을 보임으로써 유사(踰闍)의 십오(十五) 심오한 취지를 두루 종합하였다. 곡림(鵠林)의 일미종(一味宗), 취산(鷲山)의 무이취(無二趣), 금고(金鼓)의 동성삼신(同性三身)의 극과(極果), 화엄(華嚴)·영락(瓔珞)의 사계(四階) 깊은 인(因), 대품(大品)·대집(大集)의 광탕(曠蕩)한 지도(至道), 일장(日藏)·월장(月藏)의 미밀(微密)한 현문(玄門) 등 이 모두는 중衆 전적(典籍)의 간심(肝心)으로서, 이것들을 일관하는 것은 오직 이 론(論)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 "여래의 광대심법(廣大深法)의 무변한 의(義)를 총섭하고자 하므로 이 론(論)을 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론(論)의 뜻이 이미 이와 같으니, 열면 무량무변한 의(義)가 종(宗)이 되고 합하면 이문일심(二門一心)의 법(法)이 요(要)가 된다. 이문 안에 만 가지 의(義)를 용납하되 어지럽지 않고, 무변한 의(義)가 일심(一心)을 함께하여 혼융(混融)된다. 이로써 개합(開合)이 자재하고 입파(立破)가 무애하니, 열어도 번잡하지 않고 합해도 좁지 않으며, 세워도 얻음이 없고 타파해도 잃음이 없다. 이것이 마명(馬鳴)의 묘술(妙術)이요 초신(超信)의 종체(宗體)이다. 그러나 이 론(論)의 의취(意趣)가 심오하므로 예로부터 해석한 자들이 그 종(宗)을 갖추기 어려웠는데, 이는 각자 익힌 것을 지키며 문장에 끌려 허심(虛心)으로 취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론주(論主)의 뜻에 가깝지 못하여, 혹은 근원을 바라보다 흐름에서 미혹되고, 혹은 잎을 잡다가 줄기를 잃으며, 혹은 옷깃을 잘라 소매를 깁고, 혹은 가지를 꺾어 뿌리를 달기도 하였다. 지금은 이 론(論)의 문장에 직접 의거하여 서술한 경전의 본문에 속당(屬當)하니, 같은 취지를 가진 자들이 그 소식(消息)을 얻기 바랄 뿐이다.
종체를 표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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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제명(題名)을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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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大乘)이란】
대(大)는 해당 법의 명칭으로 광포(廣包)가 그 뜻이고, 승(乘)은 비유에 기탁한 칭호로 운재(運載)가 그 공능이다. 총체적으로는 그러하나 그 안에서 분별하면 두 문(門)이 있으니, 먼저 경(經)에 의거하여 설하고 뒤에 론(論)에 의거하여 밝힌다.
【경(經)에 의거하여 설함】
허공장경(虛空藏經)에 이르기를, "대승이란 무량·무변·무애하므로 일체에 두루 편재함이 허공이 광대하게 일체 중생을 용납하는 것과 같고, 성문(聲聞)·벽지불(辟支佛)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대승이라 이름한다. 또한 승(乘)이란 사섭법(四攝法)에 바르게 머묾으로써 바퀴[輪]를 삼고, 십선업(十善業)을 선정(善淨)함으로써 바퀴살[輻]을 삼으며, 정공덕 자량(淨功德資糧)으로써 바퀴통[轂]을 삼고, 견고하고 순일하며 지극하고 오로지한 뜻으로써 바퀴 고정구[輨轄釘鑷]를 삼으며, 제선해탈(諸禪解脫)을 선성(善成)함으로써 수레채[轅]를 삼고, 사무량(四無量)으로써 잘 조복함[善調]을 삼으며, 선지식(善知識)으로써 어자(御者)를 삼고, 때와 때 아닌 것을 앎으로써 출발[發動]을 삼으며,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의 소리로써 구책(驅策)을 삼고, 칠각(七覺)의 보배 끈으로써 고삐[靷]를 삼으며, 오안(五眼)을 청정히 함으로써 줄고리[索帶]를 삼고, 넓고 단정하며 대비(大悲)로써 깃발[旒幢]을 삼으며, 사정근(四正勤)으로써 멈춤[軔軫]을 삼고, 사념처(四念處)로써 평직(平直)을 삼으며, 사신족(四神足)으로써 속진(速進)을 삼고, 오력(五力)을 이김으로써 감진(鑒陳)을 삼으며, 팔성도(八聖道)로써 직진(直進)을 삼고, 일체 중생에 대해 장애 없는 혜명(慧明)으로써 난간[軒]을 삼으며, 무주(無住) 육바라밀(六波羅蜜)로써 살반야(薩般若)에 회향하고, 무애(無礙)한 사제(四諦)로써 피안(彼岸)에 이르나니 이것이 대승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건대, 위에서 이십(二十) 구절로 비유를 들어 법에 상황지어 승의(乘義)를 드러낸 것이다. 또 아래 문장에서 "이 승(乘)은 모든 부처님이 받아 지니시는 바이고, 성문·벽지불이 관(觀)하는 바이며, 일체 보살이 타는 바이고, 석범(釋梵)·호세(護世)가 공경해 예배해야 하는 바이며, 일체 중생이 공양해야 하는 바이고, 일체 지자(智者)가 찬탄해야 하는 바이며, 일체 세간이 귀의해야 하는 바이고, 일체 모든 마(魔)가 능히 파괴하지 못하는 바이며, 일체 외도가 능히 헤아리지 못하는 바이고, 일체 세간이 능히 겨루지 못하는 바"라고 하였다. 해석하건대, 위에서 열 구절로 사람에 대하여 대승을 드러낸 것이다.
【론(論)에 의거하여 밝힘】
칠(七)이 있고 삼(三)이 있다. 삼종(三種)의 대의(大義)는 아래 문장에서 설하리라. 칠종(七種)을 말하면 두 가지 칠이 있다.
첫째는, 대법론(對法論)에서 이르기를 "일곱 가지 대성(大性)에 상응하므로 대승이라 이름한다. 칠종은 무엇인가. 첫째 경대성(境大性)이니 보살도가 백천 등 무량한 경전의 광대한 교법을 경계로 연(緣)하는 까닭이다. 둘째 행대성(行大性)이니 일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광대한 행을 바르게 행하는 까닭이다. 셋째 지대성(智大性)이니 광대한 보특가라(補特伽羅)의 법무아(法無我)를 요지(了知)하는 까닭이다. 넷째 정진대성(精進大性)이니 삼대겁 아승기야(阿僧祗耶) 동안 방편으로 부지런히 무량한 난행(難行)을 닦는 까닭이다. 다섯째 방편선교대성(方便善巧大性)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는 까닭이다. 여섯째 증득대성(證得大性)이니 여래의 모든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畏]과 불공불법(不共佛法) 등 무량무수한 대공덕을 얻는 까닭이다. 일곱째 업대성(業大性)이니 생사의 끝까지 일체 성보리(成菩提) 등을 시현하여 광대한 불사(佛事)를 건립하는 까닭이다. 이 중 앞의 다섯은 인(因)이고 뒤의 둘은 과(果)이다"라고 하였다.
둘째는, 현양론(顯揚論)에서 이르기를 "대승성(大乘性)이란 보살승이 일곱 가지 대성에 함께 상응하므로 대승이라 이름한다. 칠종은 무엇인가. 첫째 법대성(法大性)이니 십이분교(十二分敎) 중 보살장(菩薩藏)에 속한 방편광대한 가르침이다. 둘째 발심대성(發心大性)이니 이미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을 발한 것이다. 셋째 승해대성(勝解大性)이니 앞에서 설한 법대성의 경계에서 수승한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이다. 넷째 의락대성(意樂大性)이니 이미 승해행지(勝解行地)를 초과하여 정정승의락지(淨勝意樂地)에 들어간 것이다. 다섯째 자량대성(資糧大性)이니 복지(福智) 이종(二種)의 대자량(大資糧)을 성취하므로 능히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한다. 여섯째 시대성(時大性)이니 삼대겁 아승기야 시간에 능히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일곱째 성만대성(成滿大性)이니 곧 무상정등보리 자체가 성만(成滿)된 보리 자체로서, 나머지 성만 자체와 비교하면 오히려 같은 것도 없는데 하물며 초과하여 뛰어남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유가(瑜伽)·지지(地持)에서도 모두 이와 같이 설한다. 유가론(瑜伽論)에서 이르기를 "이 중 법대성에서 시대성에 이르는 여섯 가지는 모두 원증대성(圓證大性)의 인(因)이고, 원증대성은 앞의 여섯 가지 대성의 과(果)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건대, 이와 같은 두 가지 칠종대성은 수(數)가 비록 같아도 건립의 뜻은 다르니, 건립의 뜻은 찾아보면 알 수 있다. 대승을 해석함을 마친다.
【기신(起信)이란】
이 론(論)의 문장에 의거하여 중생의 신(信)을 일으키므로 기신(起信)이라 한다. 신(信)이란 결정하여 그러하다고 하는 말이니, 소위 이치가 실제로 있음[信理實有]을 믿고, 닦으면 얻을 수 있음[信修可得]을 믿으며, 닦아 얻을 때 무궁한 덕이 있음[信修得時有無窮德]을 믿는 것이다. 이 중 실유(實有)를 믿는 것은 체대(體大)를 믿는 것이니, 일체법을 얻을 수 없다고 믿는 까닭이다. 즉 평등법계(平等法界)가 실유함을 믿는 것이다. 가득(可得)함을 믿는 것은 상대(相大)를 믿는 것이니, 성공덕(性功德)을 갖추어 중생을 훈습하는 까닭이다. 즉 상(相)의 훈습으로 반드시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무궁한 공덕의 용(用)이 있음을 믿는 것은 용대(用大)를 믿는 것이니, 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 만약 사람이 이 삼신(三信)을 일으킬 수 있다면 능히 불법에 들어가 모든 공덕을 생기게 하고 모든 마경(魔境)에서 벗어나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것이다. 경게(經偈)에 이르기를, "신(信)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이며, 일체 선근(善根)을 증장(增長)하고[增長一切諸善根], 일체 의혹을 제멸(除滅)하며[除滅一切諸疑惑], 무상도(無上道)를 시현개발(示現開發)하고[示現開發無上道], 신(信)은 능히 중마경(衆魔境)에서 초출(超出)하게 하며[信能超出衆魔境], 무상해탈도(無上解脫道)를 시현하고[示現無上解脫道], 일체 공덕의 불괴종(不壞種)이며[一切功德不壞種], 무상보리수(無上菩提樹)를 출생한다[出生無上菩提樹]"고 하였다. 신(信)에는 이와 같은 무량공덕이 있으며, 론(論)에 의거하여 발심(發心)하므로 기신(起信)이라 한다.
【론(論)이란】
건립하고 결요(決了)하여 규범이 될 수 있는 문언(文言)이며, 심심한 법상(法相)의 도리를 판설(判說)하는 것이다. 결요(決了)하고 판별(判別)한다는 뜻에 의거하여 론(論)이라 이름한다. 총괄하여 말하자면, 대승(大乘)은 론(論)의 종체(宗體)이고 기신(起信)은 론(論)의 승능(勝能)이다. 체(體)와 용(用)을 함께 들어 제목[題目]을 표하니, 그러므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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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수문현의(隨文顯意) — 문장을 소석(消釋)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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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는 세 분(分)이 있다. 처음 세 행의 게(偈)는 삼보(三寶)에 귀경(歸敬)하고 뜻을 서술하며, '논왈(論曰)' 이하는 론체(論體)를 바르게 세우고, 최후의 한 게송은 총결(總結)하여 회향(廻向)한다.
【삼보에 귀경(歸敬)함】
귀명진시방(歸命盡十方), 최승업편지(最勝業徧知), 색무애자재(色無礙自在),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 급피신체상(及彼身體相), 법성진여해(法性眞如海).
무량공덕장(無量功德藏), 여실수행등(如實修行等).
처음 귀경(歸敬) 중에 두 가지가 있다. '귀명(歸命)' 두 글자는 능귀상(能歸相)이고, '진시방(盡十方)' 이하는 소귀덕(所歸德)을 드러낸다.
능귀상(能歸相): 경순(敬順)의 뜻이 귀(歸)의 뜻이고 추향(趣向)의 뜻이 귀의 뜻이다. 명(命)은 명근(命根)을 말하니, 모든 근(根)을 총어(總御)하여 한 몸의 요처(要處)로 오직 명(命)이 주(主)가 된다. 만생(萬生)의 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이 둘도 없는 명(命)을 들어 무상(無上)의 존(尊)에 받들어 올린다. 신심(信心)의 극(極)을 표하므로 귀명(歸命)이라 한다. 또한 귀명(歸命)은 환원(還源)의 뜻이다. 그 이유는 중생의 육근(六根)이 일심(一心)에서 일어났으나 자신의 근원을 등지고 육진(六塵)에 달산(馳散)하기 때문이다. 지금 명(命)을 들어 육정(六情)을 총섭(總攝)하여 그 본래의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니, 그러므로 귀명이라 한다. 귀의하는 바의 일심이 곧 삼보(三寶)이기 때문이다.
【소귀덕(所歸德)】
'진시방(盡十方)' 이하는 소귀덕(所歸德)을 드러낸다. 문장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불(佛)·법(法)·승(僧)이다. 먼저 심덕(心德)을 찬탄하고, 다음에 색덕(色德)을 찬탄하며, 세 번째 구절은 사람을 들어 찬탄을 맺는다. 심덕 중에서 용(用)과 체(體)를 찬탄한다.
'진시방최승업(盡十方最勝業)'이란 업용(業用)을 찬탄하는 것이니, 시방계(十方界)에 두루 삼세(三世)의 제(際)에 편만(徧滿)하여 교화할 수 있는 모든 이를 따라 불사(佛事)를 짓는 팔상(八相) 등의 화중생업(化衆生業)을 현(現)함을 말한다. '편지(徧智)'란 지체(智體)를 찬탄하는 것이니, 업용이 시방에 두루하는 까닭은 그 지체(智體)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지체가 주변(周徧)하므로 편지(徧智)라 한다.
다음은 색덕(色德)을 찬탄한다. '색무애(色無礙)'는 색체(色體)의 묘함을 찬탄하고, '자재(自在)'는 색용(色用)의 뛰어남을 찬탄한다. 여래의 색신(色身)은 만행(萬行)으로 이루어지고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이루어졌으니, 비록 묘색(妙色)이 있으나 장애가 없다. 일상(一相) 일호(一好)가 제한이 없고 한계가 없으므로 색무애(色無礙)라 한다. '자재(自在)'란 그 색용(色用)을 찬탄하는 것이니, 오근(五根)이 서로 용(用)하고 십신(十身)이 서로 짓는 등이므로 색자재(色自在)라 한다.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는 세 번째 구절로 사람을 들어 찬탄을 맺는 것이다. 부처님은 마치 대장자(大長者)와 같아 중생을 자식으로 여기시고 삼계(三界) 화택(火宅)에 들어가 모든 불타는 고통을 구하시니 구세(救世)라 한다. 구세의 덕이 바로 대비(大悲)이니, 자타(自他)의 비(悲)를 떠난 무연(無緣)의 비(悲)로 모든 비(悲) 중에 뛰어나므로 대비(大悲)라 한다.
'급피신체상(及彼身體相)'이란 앞에서 말한 여래의 몸, 곧 보불(報佛)이 바로 법계(法界)를 자체(自體)로 삼음을 말하는 것이니, 저 몸의 체상(體相)이라 한다. 이는 불(佛)을 들어 법(法)을 취한 것이다. 아래 구절은 법보(法寶)의 체상을 바르게 드러낸다. 법성(法性)이란 열반(涅槃)이니, 법의 본성(本性)이므로 법성(法性)이라 이름한다. 진여(眞如)란 버릴 것이 없으면 진(眞)이라 하고 세울 것이 없으면 여(如)라 한다. 해(海)란 비유를 기탁하여 법(法)을 드러내는 것이니, 해(海)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매우 깊고[甚深], 둘째 광대하며[廣大], 셋째 백보(百寶)가 무궁하고[百寶無窮], 넷째 만상(萬像)이 영현(影現)한다[萬像影現]. 진여대해(眞如大海)도 마땅히 그러하니, 영원히 백비(百非)를 끊기 때문이고, 만물을 포용(苞容)하기 때문이며, 갖추지 않은 덕이 없기 때문이고, 나타나지 않는 상(像)이 없기 때문이다.
'무량공덕장(無量功德藏)'이란 덕을 들어 사람을 취한 것이니 지상보살(地上菩薩)을 말한다. 한 행(行)을 닦을 때마다 만행(萬行)이 집성(集成)되어 그 하나하나의 행이 법계(法界)와 평등하여 한량이 없으니, 공을 쌓아 얻은 까닭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이라 한다. 이와 같은 공덕이 총체적으로 보살에게 속하니, 사람이 능히 덕을 포섭하므로 장(藏)이라 이름한다. '여실수행등(如實修行等)'이란 행덕(行德)을 바르게 찬탄하는 것이다.
귀경삼보를 마친다.
【다음으로 조론(造論)의 대의(大意)를 서술함】
위욕령중생(爲欲令衆生), 제의사사집(除疑捨邪執), 기대승정신(起大乘正信),
불종부단고(佛種不斷故).
조론(造論)의 대의는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위의 절반은 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이고, 아래 절반은 위로 불도(佛道)를 홍양(弘揚)함이다.
【하화중생(下化衆生)】
중생이 생사의 바다에 오래 침몰하여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오직 의혹(疑惑)과 사집(邪執)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요체는 의혹을 제거하고 사집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범론하자면 의혹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으나, 대승을 구하는 자의 의혹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法)을 의심함으로써 발심(發心)을 장애하고, 둘째는 문(門)을 의심함으로써 수행을 장애한다.
법을 의심한다[疑法]는 것은, "대승의 법체(法體)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나라면 이법(異法)이 없고, 이법이 없으므로 모든 중생이 없을 것인데 보살이 누구를 위하여 홍서원(弘誓願)을 발하겠는가. 여럿이라면 일체(一體)가 아니고, 일체가 아니므로 물아(物我)가 각별할 것인데 어떻게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는 의혹을 짓는 것이니, 이 의혹으로 인해 발심할 수 없다. 문을 의심한다[疑門]는 것은, 여래가 세운 교문(敎門)이 많으니 어느 문에 의거하여 수행을 처음 발하겠는가. 모두 함께 의거할 수 있다면 돈입(頓入)할 수 없고, 하나 둘에 의거한다면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하겠는가라는 의혹이니, 이 의혹으로 인해 수행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두 가지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일심법(一心法)을 세우고 이종문(二種門)을 열었다. 일심법을 세움은 초혹(初惑)을 제거하는 것이니, 대승의 법에는 오직 일심(一心)만이 있고 일심 밖에 다시 별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다. 다만 무명(無明)이 자신의 일심을 미혹하여 파랑을 일으켜 육도(六道)에 유전할 뿐이다. 비록 육도의 파랑을 일으켜도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으니, 진실로 일심이 육도를 동(動)하여 짓는 까닭에 홍제(弘濟)의 원(願)을 발할 수 있고,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에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의혹을 제거하면 대심(大心)을 발할 수 있다.
이종문(二種門)을 열음은 제이혹(第二惑)을 제거하는 것이니, 모든 교문이 비록 많더라도 처음 수행에 들어감은 두 문을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다. 진여문(眞如門)에 의거하여 지행(止行)을 닦고, 생멸문(生滅門)에 의거하여 관행(觀行)을 일으켜 지관(止觀)을 쌍운(雙運)하면 만행(萬行)이 갖추어진다. 이 이문(二門)에 들어가면 모든 문에 모두 통하나니, 이와 같이 의혹을 제거하면 수행을 일으킬 수 있다. 사집(邪執)을 버린다는 것은 두 가지 사집이 있으니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이다. 이를 버리는 뜻은 아래 문장에서 설하리라.
【상홍불도(上弘佛道)】
이하 두 구절은 위로 불도(佛道)를 홍양함이다. 저 이변(二邊)의 의혹을 제거하여 결정의 신(信)을 일으키고, 대승이 오직 일심(一心)임을 신해(信解)하므로 대승정신(大乘正信)을 일으킨다고 한다. 앞의 이집(二執)을 버린 분별을 떠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어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 능히 불위(佛位)를 계승하니, 그러므로 불종부단(佛種不斷)이라 한다.
귀경술의(歸敬述意)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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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론체(論體)를 바르게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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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총표허설(總標許說)】
론왈(論曰): 유법능기마하연신근(有法能起摩訶衍信根), 시고응설(是故應說).
처음 중에서 '유법(有法)'이란 일심법(一心法)을 말한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능히 해득하면 반드시 광대한 신근(信根)을 일으킬 것이니, 그러므로 능히 대승의 신근을 일으킨다고 한다. 신근의 상(相)은 제명(題名)에서 설한 바와 같다. 신근이 이미 서면 곧 불도(佛道)에 들어가고, 불도에 들어가면 무궁한 보(寶)를 얻나니, 이와 같은 큰 이익이 론(論)에 의거하여 얻어지므로 응설(應說)이라 한다.
【제2 거수개장(擧數開章)】
설유오분(說有五分), 운하위오(云何爲五). 일자인연분(一者因緣分), 이자입의분(二者立義分), 삼자해석분(三者解釋分), 사자수행신심분(四者修行信心分), 오자권수이익분(五者勸修利益分).
인연분(因緣分)이란 까닭 없이 론(論)의 단(端)을 짓는 것이 아니니 지자(智者)가 하는 바로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입의분(立義分)이란 인연을 이미 진술하였으니 마땅히 정의(正義)를 세워야 하니, 만약 간략히 세우지 않으면 종요(宗要)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석분(解釋分)이란 종(宗)을 이미 간략히 세웠으니 다음에 응당 광변(廣辯)해야 하니, 만약 개석(開釋)하지 않으면 의리(義理)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란 해석에 의거하여 신(信)을 일으켰으니 반드시 진수(進修)해야 하니, 해(解)가 있고 행(行)이 없으면 론(論)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란 비록 수행신심의 법문(法門)을 보여도 선근이 박(薄)한 자는 기꺼이 닦으려 하지 않으므로 이익을 들어 반드시 닦아야 함을 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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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설인연분(初說因緣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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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왈(問曰): 유하인연이조차론(有何因緣而造此論)? 답왈(答曰): 시인연유팔종(是因緣有八種). 운하위팔(云何爲八)? 일자인연총상(一者因緣總相), 소위위령중생리일체고(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 득구경락(得究竟樂), 비구세간명리공경고(非求世間名利恭敬故). 이자위욕해석여래근본지의(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 령제중생정해불류고(令諸衆生正解不謬故). 삼자위령선근성숙중생(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 어마하연법감임불퇴신고(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 사자위령선근미소중생수습신심고(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修習信心故). 오자위시방편소악업장(五者爲示方便消惡業障), 선호기심(善護其心), 원리치만(遠離癡慢), 출사망고(出邪網故). 육자위시수습지관(六者爲示修習止觀), 대치범부이승심과고(對治凡夫二乘心過故). 칠자위시전념방편(七者爲示專念方便), 생어불전(生於佛前), 필정불퇴신심고(必定不退信心故). 팔자위시이익권수행고(八者爲示利益勸修行故). 유여시등인연(有如是等因緣), 소이조론(所以造論).
처음 물음은 알 수 있다. 답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 별석(別釋), 후총결(後總結)이다. 제2 별해(別解)에서 팔인연(八因緣) 중 처음 하나는 총상인(總相因)이고 뒤의 일곱은 별상인(別相因)이다. 처음 총상(總相)에 두 뜻이 있으니, 첫째는 무릇 선보살(善菩薩)이 짓는 바는 항상 중생을 위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하게 하는 것으로 이 조론(造論)의 인연에만 있지 않으니 총상이라 한다. 둘째는 이 인(因)이 비록 입의분(立義分)의 문장에 인연이 되지만, 저 입의분이 해석분 등의 본(本)이 되므로 이 인(因)도 또한 두루 저것의 인연이 되니, 이 뜻에 의거하여 총상을 해석한다.
'일체고를 여읜다[離一切苦]'란 분단(分段)·변역(變易)의 일체 고(苦)이다. '구경락(究竟樂)'이란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대열반락(大涅槃樂)이다. '세간을 구하지 않는다[非求世間]'는 후세의 인천부락(人天富樂)을 바라지 않음이다. '명리공경(名利恭敬)'은 현재의 허위(虛僞)한 일을 구하지 않음이다.
이하 칠종(七種)이 별인(別因)이니 오직 이 론(論)을 위하여 인(因)이 되는 까닭이다. 제2인은 해석분 안의 세 단계 중 두 단계를 위한 인연이니, 현시정의(顯示正義)와 대치사집(對治邪執)을 말한다. 현시정의(顯示正義) 중에서 "일심법(一心法)에 의거하여 두 종류의 문(門)이 있으니 이 이종문(二種門)이 각각 일체법을 총섭한다. 마땅히 이것이 여래가 설하신 일체 법문의 근본의(根本義)임을 알아야 한다. 이 일심이문(一心二門) 안에 하나의 법의(法義)도 포섭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의 근본의를 해석하고자 한다고 한다.
저 제2단인 대치사집(對治邪執)이란 중생으로 하여금 인법(人法) 두 가지 망집(妄執)을 사리(捨離)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중생이 바르게 해득하여 틀리지 않게 한다고 한다. 제3인은 해석분 안의 제3단 문장을 위한 인연이니, 저 문장에서 발취도상(發趣道相)을 분별하여 이근자(利根者)로 하여금 결정코 발심하여 대도(大道)에 진취하여 불퇴위(不退位)에 머물기에 감당하게 하는 까닭이다. 제4인은 아래 수행신심분의 초사종신심(初四種信心) 및 사수행(四修行)의 문장을 위한 인연이다. 제5인은 아래 제4 수행 말미에서 "다시 사람이 비록 신심을 닦더라도 선세(先世)로부터 많은 중죄악업장(重罪惡業障)이 있으므로" 이하 제장법(除障法)을 설한 문장을 위한 인연이다. 제6인은 저 "어떻게 지관(止觀)을 수행하는가" 이하 "지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능히 들어갈 수 없다"까지의 문장을 위한 인연이다. 제7인은 저 수행신심분 말미의 "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 이하 정토에 태어나기를 권하는 문장을 위한 인연이다. 제8인은 저 제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의 문장을 위한 인연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이 있으므로 론(論)을 지었다"는 것은 제3 총결이다.
문왈(問曰): 수다라(脩多羅) 중에 이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하러 다시 설하는가? 답왈(答曰): 수다라 중에 비록 이 법이 있어도 중생의 근행(根行)이 같지 않고 수해(受解)의 연(緣)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위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중생이 이근(利根)이었고 설하는 사람의 색심업(色心業)이 뛰어났으며, 원음(圓音)이 한 번 연(演)하면 이류(異類)가 평등하게 해득하니 론(論)이 필요하지 않았다. 만약 여래가 멸도하신 후에는 혹 어떤 중생은 자력(自力)으로 넓게 들어 해득하는 자가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도 많이 해득하는 자가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자심력(自心力)이 없어 광론(廣論)에 의거하여 해득하는 자가 있고, 혹 어떤 중생은 광론(廣論)의 문장이 많음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이 소문(少文)으로 다의(多義)를 총섭하기를 즐겨 능히 해득하는 자가 있다. 이와 같이 이 론은 여래의 광대심법(廣大深法)의 무변한 의(義)를 총섭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론을 설해야 한다.
제2 견의(遣疑)에 대한 답은 세 가지이다. 간략히 답함, 광석(廣釋), 제3 간략히 결답(結答). 이 네 종류 중 앞의 셋은 지금의 대상이 아니고, 지금의 대상은 제4인이다. '여시(如是)' 이하는 제3 결답이다. '여시(如是)'는 앞의 사종인(四種人)을 통틀어 든 것이다. '차론(此論)' 이하는 제4인에 대별하여 이 론(論)이 반드시 필요한 뜻을 결명(結明)한다. 지금 이 론(論)은 문장이 오직 일권(一卷)이지만 일체 경(經)의 뜻을 두루 섭취한다. 그러므로 여래의 광대심법의 무변한 의(義)를 총섭한다고 하는 것이다. 저 제4품(品)의 총지(總持)를 즐겨하는 부류는 반드시 이 론(論)에 의거하여 오도(悟道)를 얻을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론을 응설(應說)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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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입의분(立義分)을 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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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인연분(已說因緣分), 차설입의분(次說立義分). 마하연자(摩訶衍者), 총설유이종(總說有二種). 운하위이(云何爲二)? 일자법(一者法), 이자의(二者義). 소언법자(所言法者), 위중생심(謂衆生心). 시심즉섭일체세간법출세간법(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 의어차심현시마하연의(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 하이고(何以故)? 시심진여상(是心眞如相), 즉시마하연체고(卽示摩訶衍體故). 시심생멸인연상(是心生滅因緣相), 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 소언의자(所言義者), 즉유삼종(則有三種). 운하위삼(云何爲三)? 일자체대(一者體大), 위일체법진여평등불증감고(謂一切法眞如平等不增減故). 이자상대(二者相大), 위여래장구족무량성공덕고(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 삼자용대(三者用大), 능생일체세간출세간선인과고(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일체제불본소승고(一切諸佛本所乘故). 일체보살개승차법도여래지고(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제2 입의분(立義分)을 설한다. 문장 중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전기후(結前起後)이고, '마하(摩訶)' 이하는 제2 정설(正說)이다. 이종(二種) 장문(章門)을 세우니 법(法)과 의(義)이다. 법(法)은 대승의 법체(法體)이고 의(義)는 대승의 명의(名義)이다.
처음 법(法)을 세움 중에도 이립(二立)이 있다. 하나는 체(體)에 나아가 총립(總立)함이고, 둘째는 문(門)에 의거하여 별립(別立)함이다. 처음 중에서 '소언법자 위중생심(所言法者 謂衆生心)'이란 자체(自體)를 법(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지금 대승 중의 일체법에는 각각 별체(別體)가 없고 오직 일심(一心)을 자체로 삼으니, 그러므로 법이란 중생심을 말한다고 한다. '시심즉섭일체(是心卽攝一切)'란 대승법이 소승법과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마음이 통하여 모든 법을 섭하고,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일심이니, 소승의 일체법이 각각 자체가 있는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일심을 대승법이라 한다.
'하이고(何以故)' 이하는 문(門)에 의거하여 별립(別立)함이다. 이 한 문장 안에 두 뜻이 함축되어 있으니, 위를 향해서는 총의(總義)를 해석하고 아래를 향해서는 별문(別門)을 세운다. 마음의 법은 하나이나 대승의 의(義)가 넓으니, 무슨 이유로 이 마음에 의거하여 곧 대승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이고(何以故)'라 한다. 아래의 해석 뜻에 이르기를, 심법(心法)이 비록 하나이나 이문(二門)이 있어서 진여문(眞如門) 중에 대승의 체(體)가 있고 생멸문(生滅門) 중에 체(體)·상(相)·용(用)이 있으니, 대승의 의(義)는 이 셋을 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심에 의거하여 대승의 의를 드러낸다.
'시심진여(是心眞如)'란 진여문(眞如門)을 총거(總擧)한 것이고, '시심생멸(是心生滅)'이란 생멸문(生滅門)을 총거한 것이다. '인연(因緣)'이란 생멸인연이고, '능시마하연자체(能示摩訶衍自體)'란 생멸문 안의 본각심(本覺心)이니, 생멸의 체이고 생멸의 인이다. 그러므로 생멸문 안에 있다. 그런데 진여문 중에서는 곧 대승체(大乘體)라 하고 생멸문 중에서 자체(自體)라 한다는 것은 깊은 까닭이 있으니, 아래 해석 중에서 그 뜻이 스스로 드러날 것이다.
이하 제2 입의장문(立義章門)에서 대의(大義) 중 체대(體大)는 진여문(眞如門)에 있고, 상(相)·용(用) 이대(二大)는 생멸문(生滅門)에 있다. '여래장(如來藏)에 무량성공덕(無量性功德)이 구족하다'는 것은 이종장(二種藏) 안의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과 삼종장(三種藏) 중의 능섭여래장(能攝如來藏)의 성공덕의(性功德義) 및 용대의(用大義)이다. 승의(乘義) 중에 두 구절이 있으니, '일체제불이 본래 타셨다[一切諸佛本所乘]'는 것은 과(果)를 세워 인(因)에 대하여 승의(乘義)를 해석한 것이고, '일체보살이 모두 이 법을 타고 여래지(如來地)에 이른다[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는 것은 인(因)에 의거하여 과(果)에 대하여 승의를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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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해석분(解釋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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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입의분(已說立義分), 차설해석분(次說解釋分). 해석분유삼종(解釋分有三種). 운하위삼(云何爲三)? 일자현시정의(一者顯示正義), 이자대치사집(二者對治邪執), 삼자분별발취도상(三者分別發趣道相).
개장(開章) 중에서 '현시정의(顯示正義)'란 입의분(立義分) 중에서 세운 것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대치사집(對治邪執)과 발취도상(發趣道相)'이란 사(邪)를 떠나 정(正)에 나아가는 문(門)을 밝히는 것이다.
【현시정의(顯示正義)】
의일심법(依一心法), 유이종문(有二種門). 운하위이(云何爲二)? 일자심진여문(一者心眞如門), 이자심생멸문(二者心生滅門). 시이종문(是二種門), 개각총섭일체법(皆各總攝一切法). 차의운하(此義云何)? 이시이문불상리고(以是二門不相離故).
처음 중에서 '의일심법유이종문(依一心法有二種門)'이란, 경(經) 본문에 이르기를 "적멸(寂滅)한 것을 일심(一心)이라 이름하고 일심을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이란 저 경의 '적멸자 명위일심(寂滅者 名爲一心)'을 해석한 것이고, 심생멸문(心生滅門)이란 경 중의 '일심자 명여래장(一心者 名如來藏)'을 해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일체법이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어 본래 적정(寂靜)하여 오직 일심이니 이를 심진여문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적멸자 명위일심'이라 한다. 또한 이 일심의 체는 본각(本覺)이나 무명(無明)을 따라 생멸을 동(動)하여 짓는다. 그러므로 이 문(門)에서 여래의 성(性)이 숨어 드러나지 않으니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이문(二門)이 이와 같으니 일심(一心)이란 무엇인가. 이를 말하자면 염정(染淨)의 모든 법이 그 성(性)이 둘이 없고 진망(眞妄)의 이문(二門)이 다를 수 없으므로 일(一)이라 이름한다. 이 불이처(不二處)는 모든 법 중의 실(實)이어서 허공과 같지 않고, 성(性)이 스스로 신해(神解)하므로 심(心)이라 이름한다. 이미 둘이 없으니 어찌 하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도 있는 바가 없으니 누구에게 심(心)이라 하겠는가. 이와 같은 도리는 언어를 떠나고 사려(思慮)를 끊은 것이어서 무어라 칭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억지로 일심(一心)이라 이름한다.
'이이종문이 각각 일체법을 총섭한다'는 것은 위의 세움 중 '이 심이 일체 세간법·출세간법을 섭한다'는 것을 해석한다. 진여문은 염정(染淨)의 통상(通相)이니, 통상 밖에 따로 염정이 없으므로 염정의 모든 법을 총섭한다. 생멸문은 염정을 별현(別顯)하니, 염정의 법이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또한 일체법을 총섭한다. 통(通)과 별(別)이 비록 다르나 모두 버리는 것이 없으므로 이문(二門)이 상리(相離)하지 않는다고 한다. 총석의(總釋義)를 마친다.
【별기(別記)】
진여문(眞如門)은 모든 법의 통상(通相)이니, 통상 밖에 따로 모든 법이 없고 모든 법이 모두 통상에 포섭된다. 마치 미진(微塵)이 와기(瓦器)의 통상이어서 통상 밖에 따로 와기가 없고 와기가 모두 미진에 포섭되는 것과 같으니, 진여문도 이와 같다. 생멸문(生滅門)이란 이 진여가 선불선(善不善)의 인이 되어 연(緣)과 화합하여 모든 법을 변화하여 지으니, 비록 실로 모든 법을 변화하여 짓지만 항상 진성(眞性)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에서도 진여를 섭한다. 마치 미진성(微塵性)이 모여 와기를 이루어도 항상 미진의 성상(性相)을 잃지 않아 와기문이 곧 미진을 섭하는 것과 같으니 생멸문도 이와 같다.
설령 이문(二門)이 별체(別體)가 없더라도 이문이 서로 어긋나 통하지 않는다면, 진여문 중에서는 이(理)를 섭하되 사(事)를 섭하지 않고 생멸문 중에서는 사(事)를 섭하되 이(理)를 섭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문이 서로 융통하여 제한의 경계가 없으니, 이 때문에 모두 각각 일체의 이사(理事) 모든 법을 통섭한다. 그러므로 이문(二門)이 상리(相離)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問): 이 이문(二門)이 각각 이사(理事)를 섭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진여문 중에서는 다만 마하연체(摩訶衍體)를 시(示)하고 생멸문 중에서는 자체(自體)·상(相)·용(用)을 통시(通示)하는가? 답(答): 섭(攝)하는 뜻과 시(示)하는 뜻이 다르다. 진여문은 상(相)을 민(泯)하여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니, 상을 민해도 제거하지 않으므로 상을 섭할 수 있고, 상을 민하되 존재하지 않으므로 상을 시(示)하지 않는다. 생멸문은 이(理)를 통람(攬)하여 사(事)를 이루는 것이니, 이를 통람해도 파괴하지 않으므로 이를 섭할 수 있고, 이를 통람하되 민(泯)하지 않으므로 또한 체(體)를 시(示)한다. 이 뜻에 의거하여 잠시 같지 않다 하지만, 통하여 논한다면 이의(二義)도 같다. 그러므로 진여문 중에서도 사상(事相)을 시(示)해야 하겠지만 간략하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문(二門)의 차별에 대해 논하자면, 진여문 중의 사법(事法)은 분별성(分別性)이니 모든 법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본래 적정(寂靜)하지만 다만 망념(妄念)에 의거하여 차별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사법은 의타성(依他性)이니 모든 법이 인연화합(因緣和合)하여 생멸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이 이성(二性)은 비록 하나가 아니지만 또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인연소생(因緣所生)의 생멸하는 모든 법이 망념(妄念)을 떠나지 않고 차별이 있으므로 분별성(分別性)이 의타(依他)와 다르지 않아 생멸문에도 있다. 또한 인연의 생(生)이 자(自)·타(他)·공(共) 모두 얻을 수 없으므로 의타성(依他性)이 분별(分別)과 다르지 않아 진여문에도 있다. 이와 같이 이성(二性)이 비록 다르지 않지만 또한 하나가 아니다. 분별성(分別性)의 법은 본래 있지 않고 또한 없지도 않으며, 의타성(依他性)의 법은 비록 있지 않지만 또한 없지도 않다. 이 때문에 이성(二性)도 잡란(雜亂)되지 않는다. 섭론(攝論)에서 이른 바와 같이 "삼성(三性)이 서로 대하면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지 않지 않다[不異非不異]"고 하니,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 만약 이 삼성(三性)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뜻을 능히 해득하는 자라면 백가(百家)의 쟁론(爭論)이 화합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문(二門)이 섭하는 이(理)가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자면, 진여문 중의 이(理)는 비록 진여라 하지만 얻을 수 없고 또한 없지도 않아 불(佛)이 있거나 없거나 성상(性相)이 상주(常住)하여 변이(變異)가 없고 파괴할 수 없으니, 이 문(門)에서 진여(眞如)·실제(實際) 등의 이름을 가립(假立)한다. 생멸문 안의 이(理)는 비록 이체(理體)가 생멸상(生滅相)을 여의었으나 또한 상주(常住)의 성(性)을 지키지 않고 무명연(無明緣)을 따라 생사에 유전하며, 비록 실로 오염되었으나 자성(自性)이 청정하다. 이 문에서 불성(佛性)·본각(本覺) 등의 이름을 가립한다.
지금 이 론(論)에서 서술하는 능가경(楞伽經) 등은 통하여 이문(二門)을 종체(宗體)로 삼는다. 이 이의(二義)도 다름이 없으니, 비록 생멸을 여의었으나 상주성(常住性)도 얻을 수 없고, 비록 수연(隨緣)이라 하나 항상 부동(不動)하여 생멸성(生滅性)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 뜻에 의거하여 진여문 중에서는 다만 가명(假名)을 파괴하지 않고 실상(實相)을 설하며 실제(實際)를 부동(不動)하고 제법(諸法)을 건립한다고 설하고, 생멸문 중에서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풍(無明風)으로 인해 동(動)하여 불염이염(不染而染)하고 염이불염(染而不染)한다고 설한다.
문(問): 진여문 중에서 오직 공의(空義)를 설하고 생멸문 안에서 불공의(不空義)를 설한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가? 답(答): 일왕(一往) 서로 배대(配對)한다면 이 뜻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위의 입의분 진여상 중에서 다만 마하연체를 시할 수 있다고 설하고, 생멸문 중에서 또한 대승의 상(相)·용(用)을 현시한다고 설하였다. 실(實)에 나아가 말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아래 론문(論文)에서 이문(二門)이 모두 불공의(不空義)를 설한다.
문(問): 생멸문 안에 이의(二義)가 함께 있다면 불공의(不空義)는 수연(隨緣)하여 생멸을 짓는 뜻이 있을 수 있겠지만, 공의(空義)는 없는 것[無]인데 어찌 수연하여 유(有)를 지을 수 있겠는가? 답(答): 이의(二義)는 하나여서 다르다고 설할 수 없다. 공의(空義)에 의거하더라도 유(有)를 지을 수 있으니, 만약 공이 결정코 공이라면 유를 짓지 못해야 할 것이지만 이 공도 또한 공[空亦空]이므로 유를 지을 수 있다. 이 공공(空空)에도 두 뜻이 있다. 하나는 법성공(法性空)이 있어 이 공(空)도 공하니, 유(有)와 공(空)이 모두 얻을 수 없어 이와 같은 공공(空空)이 진여문에 있다. 둘은 마치 유(有)가 유성(有性)이 없으므로 공이라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공(空)이 공성(空性)이 없으므로 유(有)를 지을 수 있으니 이를 공공(空空)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은 공공(空空)이 생멸문에 있다. 이와 같은 공공은 십주보살(十住菩薩)도 오히려 털끝만큼 조금 얻으니 하물며 나머지 사람이겠는가. 이문의 차별을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위에서 위의 총립법(總立法)을 해석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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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1권 끝
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二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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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진여문(心眞如門) 별석(別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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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위의 별립(別立)을 해석한다. 이문(二門)을 별석하니 두 분(分)이 된다. 진여문 중에도 두 뜻이 있으니, 처음은 진여(眞如)를 해석하고 뒤는 여상(如相)을 해석한다. 또한 처음은 총석(總釋)이고 뒤는 별해(別解)이다. 또한 처음 문장은 불가설(不可說)을 밝혀 이(理)가 언어를 끊음을 드러내고, 뒤의 문장은 가설(可說)을 밝혀 언어를 끊지 않음을 드러낸다.
【별기(別記)】
처음 문장 중에서 '이언설상(離言說相) 이명자상(離名字相)'이라 한 것에서 '진여(眞如)'라고 말하는 것은 인언유언(因言遣言)이다. 뒤의 문장 중에서 '의언설분별유이종의(依言說分別有二種義)', 즉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을 설한다. 그런데 뒤의 문장에서도 또한 일체분별(一切分別)이 모두 불상응(不相應)이라 하니, 마땅히 일체언설(一切言說)도 불상응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이(理)가 언어를 떠나고 사려를 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처음 문장 중에서는 반드시 인언유언(因言遣言)의 언(言)에 의거하여야 이(理)가 언어를 끊음을 드러낼 수 있으니, 이것도 이(理)가 언설상(言說相)을 떠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언어로 이(理)가 실로 언어를 끊는다고 설할 수 있다 한다면 자종상위과(自宗相違過)에 떨어진다. 먼저 절언(絶言)의 언(言)이 절(絶)하지 않는데 이(理)는 실로 언어를 끊기 때문이다. 만약 절언(絶言)의 언(言)도 또한 언(言)이 끊긴다 한다면 자어상위과(自語相違過)에 떨어진다. 먼저 절언의 언도 끊기는데 언(言)으로 언(言)을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問): 이(理)를 실제로 말한다면 언어가 끊기는가, 끊기지 않는가. 만약 언어가 끊기지 않는다 하면 정체지(正體智)가 언어를 여의니 이(理)에 위(違)하고, 만약 실로 언어가 끊긴다 하면 후득지(後得智)가 언(言)을 대동(帶同)하니 이(理)에 어긋난다. 또 끊기지 않는다 하면 처음 단(段)의 론문(論文)이 쓸데없는 말이 되고, 실로 언어가 끊긴다 하면 뒤의 단의 론문이 헛되이 허설(虛設)이 된다. 마치 허공을 금은(金銀) 등이라 하는 것과 같다.
해석하건대, 이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理)는 언어가 끊기는 것도 아니고 끊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뜻에 의거하여 이(理)는 또한 언어가 끊기기도 하고 또한 언어가 끊기지 않기도 한다. 이런 즉 저 어려운 물음은 해당하지 않음이 없다.
【별기(別記)】
이와 같은 등의 말은 해당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해당하는 바가 없다. 해당하는 바가 없으므로 해당하지 않음이 없다. 진여문 중의 절(絶)과 불절(不絶)의 뜻이 이미 이와 같으니, 생멸문 중에서도 이와 같이 설한다.
잠시 방론(傍論)을 그치고 돌아와 본문(本文)을 해석한다.
심진여(心眞如)란 곧 일법계(一法界)의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이다. 이른바 심성(心性)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거하여 차별이 있을 뿐이다. 만약 심념(心念)을 여의면 곧 일체 경계의 상(相)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법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고 명자상(名字相)을 여의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 필경(畢竟)코 평등하여 변이(變異)가 없고 파괴할 수 없어 오직 일심(一心)이니 진여(眞如)라 이름한다. 일체 언설이 가명(假名)으로 실(實)이 없고 다만 망념을 따를 뿐이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문장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약표(略標), 둘은 광석(廣釋), 셋은 왕복제의(往復除疑)이다. 약표(略標) 중에서 '즉시일법계(卽是一法界)'란 진여문의 소의체(所依體)를 드는 것이다. 일심이 곧 일법계이므로, 이 일법계가 이문(二門)을 통섭하지만 지금은 별상(別相)의 문(門)을 취하지 않고 그 중에서 다만 총상(總相)의 법문(法門)만을 취한다. 총상 중에 네 품(品)이 있는데 삼무성(三無性)이 드러내는 진여를 설하므로 대총상(大總相)이라 하고, 진해(眞解)를 산출하므로 법(法)이라 하며, 열반에 통해 들어가므로 문(門)이라 한다. 마치 일법계 전체가 생멸문을 짓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전체가 진여문이 되니, 이 뜻을 드러내기 위해 체(體)라 한다.
이하 광석(廣釋).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진여체(眞如體)를 드러내고 둘은 진여명(眞如名)을 해석한다.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실성(眞實性)에 해당하여 진여를 드러내고, 둘은 분별성(分別性)에 대하여 진여의 절상(絶相)을 밝히며, 셋은 의타성(依他性)에 나아가 진여의 이언(離言)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심성(心性)'이란 진여문에 의거하여 그 심성을 논하는 것이니, 심성이 평등하여 삼제(三際)를 원리(遠離)하였으므로 심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한다. 제2 중에 두 구절이 있다. 처음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망념에 의거하여 차별이 있다'는 것은 변계소집(徧計所執)의 상(相)을 드는 것이다. 다음 '만약 심념을 여의면 곧 일체 경계상이 없다'는 것은 소집상(所執相)에 대하여 무상성(無相性)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3 중에 세 구절이 있다. 먼저 의타성(依他性)의 법에 의거하여 이언절려(離言絶慮)를 밝히고, 다음으로 이절(離絶)의 뜻에 의거하여 평등진여를 드러내며, 뒤에 평등이절(平等離絶)의 이유를 해석한다. 처음 중에서 '이 때문에 일체법'이란 연(緣)을 따라 생겨나는 의타기(依他起)의 법을 말한다. '언설상을 여읜다[離言說相]'는 것은 음성이 설하는 바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명자상을 여읜다[離名字相]'는 것은 명구(名句)가 전(詮)하는 바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심연상을 여읜다[離心緣相]'는 것은 명언분별(名言分別)이 능연(能緣)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타기(依他起)의 법이 허공 중의 새 자취의 차별과 같으니, 새의 형태를 따라 공상(空相)이 현현(顯現)하되 현현의 상(相)은 실로 차별이 있지만 볼 수 있는 상(相)의 차별을 여의었다. 의타기법(依他起法)도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니, 여러 훈습의 차별을 따라 현현하되 말할 수 있는 성(性)의 차별을 여의었다. 이미 말할 수 있고 연(緣)할 수 있는 차별을 여의었으니 곧 평등진여(平等眞如)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필경코 평등하다고 하고 내지 진여라 이름한다고 한다. 이것이 제2 진여의 평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체문(以一切下)'은 그 이유를 해석한다. 진여가 평등하여 언어를 여읜 이유는, 모든 언설이 오직 가명(假名)이므로 실성(實性)에서 끊지 않을 수 없고, 저 언설이 다만 망념(妄念)을 따르므로 진지(眞智)에서 여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도리에 의거하여 이절(離絶)을 설한다. 체(體)를 드러내는 문장을 마친다.
진여(眞如)란 또한 상(相)이 없으니, 이른바 언설의 극(極)으로서 언(言)으로 인해 언(言)을 버린다[因言遣言]. 이 진여의 체는 버릴 것이 없으니 일체법이 모두 진(眞)하기 때문이고, 또한 세울 것이 없으니 일체법이 모두 여(如)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일체법은 설할 수도 없고 념(念)할 수도 없으므로 진여라 이름한다.
석명(釋名) 중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입명(立名)의 뜻을 표하니, 이른바 인언유언(因言遣言)은 마치 소리로써 소리를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 다음은 명(名)을 바르게 해석한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은 진체(眞體)로써 속법(俗法)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모두 진(眞)하다'는 것은 의타성(依他性)의 일체 모든 법이 가언설(假言說)을 여의었으므로 모두 진(眞)하다는 것이다. 모두 진(眞)하다는 것은 차별을 파괴하지 않고 곧 평등하다는 것이니, 평등하므로 따로 세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가 모두 여(如)하다고 한다. '마땅히 알라' 이하는 제3 명(名)을 결(結)한다. 직접 진여를 드러내는 문장을 마친다.
문왈(問曰):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 등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 능히 득입(得入)할 수 있겠는가? 답왈(答曰): 만약 일체법이 비록 설해도 능설(能說)·가설(可說)이 없고, 비록 념(念)해도 또한 능념(能念)·가념(可念)이 없음을 안다면 이를 수순(隨順)이라 이름한다. 만약 념(念)을 여의면 득입(得入)이라 이름한다.
왕복의문(往復疑問) 중에서 '어떻게 수순할 수 있는가'는 방편(方便)을 묻는 것이고, '능히 득입할 수 있는가'는 정관(正觀)을 묻는 것이다. 답 중에 차례로 이 두 물음에 답한다. 처음 중에서 '비록 설하고 비록 념한다'는 것은 법이 없지 않음을 밝히는 것으로 악취공견(惡取空見)을 여의기 때문이다. '능설(能說)·가설(可說)이 없다' 등은 법이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집착유견(執著有見)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중도관(中道觀)에 수순하므로 수순(隨順)이라 이름한다. 제2 중에서 '념(念)을 여읜다'는 것은 분별념(分別念)을 여읨이고, '득입(得入)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입관지(入觀智)를 드러낸다.
다시, 이 진여는 언설(言說)의 분별에 의거하면 두 가지 의(義)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여실공(如實空)이니 능히 구경(究竟)코 실(實)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둘은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자체(自體)가 있어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이 구족하기 때문이다.
제2 진여상(眞如相)을 밝힌다. 문장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수(數)를 들어 총표하고, 둘은 수에 의거하여 개장(開章)하며, 셋은 장(章)에 의거하여 별해(別解)한다. 별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소언공(所言空)이란 본래부터 일체 염법(染法)이 불상응(不相應)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체법의 차별상(差別相)을 여의어 허망심념(虛妄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진여의 자성(自性)은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아니고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며, 유무구상(有無俱相)도 아니다. 일상(一相)도 아니고 이상(異相)도 아니며, 비일상(非一相)도 아니고 비이상(非異相)도 아니며, 일이구상(一異俱相)도 아니다. 내지 총설하면, 일체 중생이 망심(妄心)이 있어 념념(念念)히 분별하니 모두 불상응(不相應)이므로 공(空)이라 설한다. 만약 망심을 여의면 실로 가히 공(空)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먼저 공(空)을 밝히는 중에 세 구절이 있으니, 약명(略明), 광석(廣釋), 제3 총결이다. 처음 중에서 '일체 염법이 불상응(不相應)하다'는 것은 능소분별(能所分別)이 불상응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차별상을 여읜다'는 것은 소취상(所取相)을 여이기 때문이다. '허망심념이 없다'는 것은 능취견(能取見)을 여이기 때문이니, 곧 이(離)의 뜻으로써 공(空)을 해석한다.
광석(廣釋) 중에서 사구(四句)의 끊음을 밝힌다. 사구(四句)가 비록 많지만 그 요(要)는 둘이니 유무등(有無等)과 일이등(一異等)이다. 이 두 사구(四句)로써 모든 망집(妄執)을 포섭하므로 이 둘에 대하여 진공(眞空)을 드러낸다.
광백론(廣百論)에서 이르기를, "다시 세간에서 집착하는 모든 법이 모두 진실이 아님을 드러내고 외도(外道)의 집착이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해 게(偈)를 설하기를, '유비유구비(有非有俱非), 일비일쌍민(一非一雙泯). 수차응배속(隨次應配屬), 지자달비진(智者達非眞)'이라 하였다. 해석하기를, 일체 세간의 색(色) 등 구의(句義)는 언설이 표하고 심혜(心慧)가 아는 바로서 정집(情執)이 같지 않으니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유(有)·비유(非有)·구허(俱許)·구비(俱非)이다. 차례로 사사집(四邪執)에 배대하면 일(一)·비일(非一)·쌍허(雙許)·쌍비(雙非)이다"라고 하였다.
수론외도(數論外道)는 유성(有性) 등이 모든 법과 하나라 집착하니 유구(有句)에 해당하여 이 집착은 진실이 아니다. 승론외도(勝論外道)는 유성 등이 모든 법과 하나가 아니라 설하니 비유구(非有句)에 해당하여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무참외도(無慙外道)는 유성 등이 저 모든 법과 하나이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집착하니 역유역비유구(亦有亦非有句)에 해당하여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사명외도(邪命外道)는 유성 등이 저 모든 법과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고 집착하니 비유비비유구(非有非非有句)에 해당하여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이와 같이 세간이 네 가지 방(謗)을 일으키니 유(有)·비유(非有)·쌍허(雙許)·쌍비(雙非)로서 차례로 증익(增益)·손감(損減)·상위(相違)·희론(戱論)이다. 이 때문에 세간의 집착은 실(實)이 아니다. 지금 이 문장 중에서 '비유상(非有相)'은 초구(初句)를 버리고, '비무상(非無相)'은 제2구를 버리며, '비비유상 비비무상(非非有相 非非無相)'은 제4구를 버리고, '비유무구(非有無俱)'는 제3구를 버린다. 일이사구(一異四句)는 준용하여 해석할 수 있다. '내지(乃至)' 이하는 제3 총결이니, 그 중에 두 구절이 있다. 이 이하 내지 '공(空)이라 설한다'는 것은 순결(順結)이고, '만약 망심을 여이면' 이하는 반결(反結)이다.
소언불공(所言不空)이란 법체(法體)가 공(空)하여 망(妄)이 없음을 이미 드러냈기 때문이니, 곧 진심(眞心)이 항상(恒常)하여 불변(不變)하고 정법(淨法)이 만족하므로 불공(不空)이라 이름한다. 또한 취할 수 있는 상(相)도 없으니, 이념(離念)의 경계여서 오직 증상응(證相應)하기 때문이다.
불공(不空)을 해석하는 중에도 세 구절이 있다. 처음은 공문(空門)을 서(牒)하니 '이미 법체(法體)가 공하여 망이 없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다음은 불공(不空)을 드러내니 '곧 진심(眞心)이 항상하여 불변하다'에서 '불공이라 이름한다'까지이다. '또한 상(相)이 없다' 이하는 제3 공(空)과 불공(不空)이 둘이 아닌 차별을 밝힌다. 비록 불공이라 하나 취할 수 있는 상(相)이 없으니, 이 때문에 불공이 공(空)과 다르지 않다. 이념(離念)의 소연경계(所緣境界)를 여이고 오직 무분별증상응(無分別證相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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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생멸문(生滅門)을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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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생멸문을 해석한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정광석(正廣釋)이고, '복차유사종훈습(復次有四種熏習)' 이하는 인언중현(因言重顯)이다. 처음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위의 입의분 중 '시심생멸(是心生滅)'을 해석하고, 둘은 '복차생멸인연(復次生滅因緣)' 이하에서 위의 생멸인연을 해석하며, 셋은 '복차생멸상(復次生滅相)' 이하에서 위의 생멸상을 해석한다. 처음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체(體)에 나아가 총명(總明)하고 둘은 의(義)에 의거하여 별해(別解)한다.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거하여 생멸심(生滅心)이 있다.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生滅)과 화합(和合)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非一非異] 아뢰야식(阿黎耶識)이라 이름한다.
처음 중에 세 구절이 있으니 하나는 체(體)를 표하고, 둘은 상(相)을 변(辯)하며, 셋은 명(名)을 세운다. 처음 중에서 '여래장에 의거하여 생멸심이 있다'는 것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여래장이라 이름하는데 무명풍(無明風)으로 인해 생멸을 동(動)하여 짓기 때문에 생멸이 여래장에 의거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별기(別記)】
그러나 불생멸심(不生滅心)과 생멸심은 심체(心體)가 둘이 아니다. 다만 이의(二義)로써 심(心)을 취하여 둘로 삼아 의거함을 설할 뿐이다. 마치 부동수(不動水)가 바람에 불려 동수(動水)가 되는 것과 같으니, 동(動)과 정(靜)이 비록 다르나 수체(水體)는 하나이다. 정수(靜水)에 의거하여 동수가 있다고 설할 수 있음을 마땅히 이 중의 도리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사권경(四卷經,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장이 무시(無始)의 악습(惡習)에 훈(熏)해져서 식장(識藏)이라 이름하고, 또한 이르기를 찰나(刹那)는 식장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별기(別記)】
마땅히 알라, 여기서 생멸심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식장(識藏)을 말한다. 지금 소의(所依)인 여래장과 능의(能依)인 생멸심을 통합하여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삼으니, 그러므로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거하여 생멸심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을 버리고 생멸심을 취하여 생멸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아래 문장에서 '이 식(識)에 두 가지 의(義)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의(二義)가 모두 생멸문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위(所謂)' 이하는 제2 상(相)을 변(辯)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위의 여래장이다.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생멸을 동(動)하여 짓되 서로 버리지 않으니 화합(和合)이라 이름한다. 아래 문장에서 "마치 대해수(大海水)가 바람으로 인해 파랑이 동(動)하되 수상(水相)과 풍상(風相)이 서로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물의 동(動)은 풍상(風相)이고 동(動)의 습(濕)은 수상(水相)이다. 물이 전체(擧體)로 동(動)하므로 물은 풍상(風相)을 여의지 않는다. 동함이 아닌 것에 습(濕)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동(動)은 수상(水相)을 여의지 않는다. 심(心)도 이와 같으니, 불생멸심이 전체로 동(動)하므로 심은 생멸상(生滅相)을 여의지 않는다. 생멸의 상(相)이 신해(神解)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생멸은 심상(心相)을 여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서로 여의지 않으므로 화합(和合)이라 이름한다.
【별기(別記)】
심(心)의 생멸은 무명(無明)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생멸의 심은 본각(本覺)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이체(二體)가 없어 서로 버리지 않으므로 화합이다. 이것은 불생멸심이 생멸과 화합한 것이지, 생멸이 불생멸과 화합한 것이 아니다.
비일비이(非一非異)란, 불생멸심이 전체로 동(動)하므로 심과 생멸이 다르지 않고[非異], 항상 불생멸의 성(性)을 잃지 않으므로 생멸과 심이 하나가 아니다[非一]. 또 만약 하나라면 생멸식상(生滅識相)이 멸진(滅盡)할 때 심신(心神)의 체(體)도 따라 멸하여 단변(斷邊)에 떨어질 것이고, 만약 다르다면 무명풍(無明風)이 훈(熏)하여 동(動)할 때 정심(靜心)의 체가 수연(隨緣)하지 않아야 하니 곧 상변(常邊)에 떨어진다. 이 양변(兩邊)을 여의므로 비일비이(非一非異)이다.
【별기(別記)】
비록 두 의(義)가 있으나 심체(心體)가 둘이 아니다. 이 두 의(義)가 불이(不二)한 심(心)을 합하여 이름하여 이야식(棃耶識)이라 한다.
사권경(四卷經)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니단(泥團)과 미진(微塵)이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 않은 것[非異非不異]과 같으니, 금장엄구(金莊嚴具)도 이와 같다. 만약 니단(泥團)과 미진(微塵)이 다르다면 저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나 실로 저것으로 이루어지니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니단과 미진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전식(轉識)과 장식(藏識)의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藏識)이 인(因)이 아닐 것이고,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轉識)이 멸할 때 장식도 마땅히 멸해야 할 것이나 자진상(自眞相)은 실로 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자진상식(自眞相識)이 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업상(業相)이 멸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론주(論主)가 바로 저 문장을 해석하므로 비일비이(非一非異)라 한다. 이 중에서 업식(業識)이란 무명력(無明力)으로 불각(不覺)하여 심이 동(動)하므로 업식이라 이름한다. 또 동심(動心)에 의거하여 능견(能見)으로 전변(轉變)하므로 전식(轉識)이라 이름한다. 이 둘은 모두 이야식위(梨耶識位)에 있다.
【별기(別記)】
이야식(梨耶識) 안의 생멸견상(生滅見相)을 전식(轉識)이라 이름하고, 그 중의 체(體)를 장식(藏識)이라 이름한다.
십권경(十卷經)에서 이르기를 "여래장이 곧 아뢰야식이어서 칠식(七識)과 함께 생겨 전멸상(轉滅相)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전상(轉相)이 이야식(梨耶識) 안에 있음을 안다. 자진상(自眞相)이란 십권경(十卷經)에서 진명(眞名)을 자상(自相)이라 한다. 본각(本覺)의 심이 망연(妄緣)을 빌리지 않고 성(性)이 스스로 신해(神解)하니 자진상(自眞相)이라 이름한다. 이는 불일(不一)의 의문(義門)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또 무명풍(無明風)을 따라 생멸을 지을 때 신해(神解)의 성(性)이 본래와 다르지 않으므로 또한 자진상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불이(不異)의 의문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별기(別記) 문답】
문(問): 유가론(瑜伽論) 등에서는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 하여 일향(一向) 생멸한다고 설하는데, 무슨 까닭에 이 론에서는 이 식(識)이 이의(二義)를 구함(俱含)한다고 설하는가?
답(答): 각각 서술하는 바가 있어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 이 미세한 심(心)에 대략 두 가지 의(義)가 있다. 만약 업번뇌(業煩惱)가 감(感)한 의변(義邊)을 논하면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으로 일향 생멸한다. 만약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동(動)한 의변(義邊)을 논하면 정(靜)을 훈(熏)하여 동(動)하게 하는 것으로 동정(動靜)이 일체(一體)이다. 저 유가론 등은 심밀경(深密經)에 의거하여 하나[一]이고 상(常)이라는 견(見)을 제거하기 위해 업번뇌가 감(感)한 의문(義門)에 의거하여 이 식이 일향 생멸하고 심심수법(心心數法)이 차별하여 전(轉)한다고 설한다. 지금 이 론은 능가경(楞伽經)에 의거하여 진속(眞俗)이 별체(別體)라는 집착을 다스리기 위해 무명이 동(動)한 의문(義門)에 나아가 불생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다르지 않다고 설한다. 그러나 이 무명이 동(動)한 상(相)도 또한 곧 저 업감(業感)에 감(感)된 것이니, 두 뜻이 비록 다르나 식체(識體)는 둘이 아니다.
문(問): 심체(心體)는 상주(常住)하고 심상(心相)은 생멸하여 체상(體相)이 불리(不離)하여 합하여 일식(一識)이 된다 해야 하는가, 아니면 심체가 상주하되 또한 곧 심체가 생멸한다 해야 하는가?
답(答): 득의(得意)한다면 두 의(義) 모두 허용된다. 그 상주를 논하면 타(他)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으니 체(體)라 하고, 그 무상(無常)을 논하면 타를 따라 생멸하니 상(相)이라 한다. 체는 상(常)이고 상(相)은 무상(無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멸이라 함은 생(生)의 생(生)이 아니고 멸(滅)의 멸(滅)이 아니므로 생멸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심(心)의 생(生)이고 심의 멸(滅)이므로 생멸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심체(心體)가 생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물의 동(動)을 파랑이라 이름하는 것과 같아서, 끝내 동(動)이 물의 동(動)이 아니라고 설할 수 없다. 마땅히 이 중의 도리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설령 심체가 동(動)하지 않고 다만 무명상(無明相)만이 동한다면 범부(凡夫)를 전화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이치가 없을 것이니, 무명상이 일향(一向) 멸하기 때문이고 심체(心體)가 본래 범부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난(難)하여 이르기를, 만약 심체가 생멸한다면 진심(眞心)이 다함이 있을 것이니 생멸할 때 상주(常住)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심체가 본래 정(靜)하다가 수연(隨緣)하여 동(動)한다면 생사(生死)에 시작이 있게 되어 큰 허물이 된다. 본래 정(靜)할 때 생사가 없기 때문이다. 또 만약 심이 수연(隨緣)하여 생멸로 변한다면, 또한 일심이 수연하여 다심(多心)으로 변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뜻은 세울 수 없다.
해석하건대, 이 뜻은 무방하다. 지금 뒤에서부터 답하겠다. 상심(常心)이 무명연(無明緣)을 따라 무상(無常)의 심으로 변한다 하여도 그 상(常)의 성(性)은 항상 스스로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일심(一心)이 무명연(無明緣)을 따라 다(多)의 중생심(衆生心)으로 변하여도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일미(一味)의 약이 흐르는 곳에 따라 종종의 다름이 있으나 그 약의 참된 맛은 산(山)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를 말한다.
또 비록 본래 정(靜)하다가 수연(隨緣)하여 동(動)한다 하여도 생사에 시작이 있다는 허물이 없으니,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는 동정(動靜)이 모두 무시(無始)이기 때문이다. 론(論)에서 이른 바와 같이 "먼저는 과보(果報)이고 뒤는 도리어 인(因)이 되어 항상 전전(展轉)하는 인과(因果)가 모두 무시(無始)이다"라고 하였다. 마땅히 이 중의 도리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또 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항상 심체는 상주하니 불일불이(不一不異)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심체가 둘이 아니면서 일성(一性)이 없고, 동정(動靜)이 하나가 아니면서 이성(異性)이 없다. 그러므로 물[水]이 상속문(相續門)에 의거하면 유동(流動)이 있고 생멸문(生滅門)에 의거하면 항상 부동(不動)한 것과 같으니, 불상(不常)불단(不斷)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 중의 도리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제시된 세 가지 어려움이 모두 해소된다.
제3 입명(立名).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불생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비일비이(非一非異)하므로 총명(總名)하여 아뢰야식이라 한다. 번명(飜名)하고 석의(釋義)함은 능가종요(楞伽宗要) 중에서 설한 바와 같다. 체(體)에 나아가 총명(總明)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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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의(義)에 의거하여 별해(別解)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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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의(義)에 의거하여 별해(別解)한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의(義)를 열어 총표(總標)하며 공능(功能)을 간략히 밝히고, 둘은 의(義)에 의거하여 별석(別釋)하며 체상(體相)을 넓게 드러내며, 셋은 동이(同異)를 밝힌다.
이 식(識)에 두 가지 의(義)가 있어 능히 일체법을 섭하고 일체법을 생(生)한다.
처음 중에서 '이 식에 두 가지 의가 있어 일체법을 섭하고 일체법을 생한다'는 것은, 섭(攝)하는 의(義)는 앞에서 넓게 설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이문(二門)이 각각 일체를 섭한다 하였고 지금은 일식(一識)에 이의(二義)가 있음을 밝히니, 이 일식이 일체를 섭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이의(二義)가 각각 일체를 섭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이의(二義)가 오직 생멸문 안에서 설하기 때문이다. 또 위의 이문(二門)은 다만 섭의(攝義)를 설하였으니 진여문에 능생의(能生義)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식(識)에서 또한 생의(生義)를 설하니 생멸문 중에 능생의(能生義)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불각의(不覺義)가 본각(本覺)을 훈(熏)하기 때문에 모든 염법(染法)을 생(生)하고, 또 본각(本覺)이 불각(不覺)을 훈(熏)하기 때문에 모든 정법(淨法)을 생(生)한다.
마땅히 알라, 일심(一心)의 의(義)는 넓어서 이문(二門)을 총섭(總攝)하고, 이 식(識)의 의(義)는 좁아서 생멸문 안에 있다. 이 식의 이의(二義)가 이미 일문(一門) 안에 있으므로 문(門)이 넓고 의(義)가 좁음을 알아야 한다.
【별기(別記) 문답】
문(問): 위에서 '일심에 이종문(二種門)이 있다'고 하고 지금 '이 식에 이종의(二種義)가 있다'고 하니, 저 심(心)과 이 식(識)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해석하건대, 위에서 이체(理體)에 나아가 일심이라 이름하고 체(體)가 절상(絶相)·수연(隨緣)의 이의문(二義門)을 함축하므로 일심에 이종문이 있다 한다. 경(經) 본문에서 이른 바와 같이 "적멸자(寂滅者)를 일심이라 이름하고 일심자(一心者)를 여래장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지금 이 중의 식(識)은 다만 일심(一心)의 수연문(隨緣門) 안에서 이사(理事)가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의 신려(神慮)에 나아가 일식(一識)이라 이름하니, 체(體)가 각(覺)과 불각(不覺)의 이의(二義)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 식에 이종의(二種義)가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심(心)이 넓고 식(識)이 좁으니 심이 이문(二門)의 식(識)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또 문(門)이 넓고 의(義)가 좁으니 생멸문이 이의(二義)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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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의(覺義) —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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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각의(覺義)이고 둘은 불각의(不覺義)이다.
제2 광석(廣釋)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 '무엇이 둘인가'는 수(數)를 들어 발기(發起)한다. 다음 '각의·불각의'는 수에 의거하여 명(名)을 열거한다. '소언(所言)' 이하는 제3 별해(別解)이다. 먼저 각의(覺義)를 해석하고 뒤에 불각(不覺)을 해석한다. 각(覺)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략(略)하고 뒤에 광(廣)하다.
소언각의(所言覺義)란 심체(心體)가 이념(離念)함을 말한다. 이념의 상(相)은 허공계(虛空界)와 평등하여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法界)가 일상(一相)이니 곧 이것이 여래의 평등법신(平等法身)이다. 이 법신에 의거하여 본각(本覺)이라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본각의(本覺義)란 시각의(始覺義)에 대하여 설하는 것이니, 시각이란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의(始覺義)란 본각(本覺)에 의거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고, 불각(不覺)에 의거하기 때문에 시각(始覺)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략(略)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본(本)이고 뒤에 시(始)이다. 본각(本覺)을 밝히는 중에도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 본각체(本覺體)를 밝히고 뒤에 본각의(本覺義)를 해석한다. 처음 중에서 '심체이념(心體離念)'이란 망념(妄念)을 여읨을 말하니 불각(不覺)이 없음을 드러낸다. '등허공계(等虛空界)'란 어둠만 없는 것이 아니라 혜광명(慧光明)이 있어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어 평등무이(平等無二)함이다. '하이고(何以故)' 이하는 제2 의(義)를 해석하는 것으로 시각(始覺)에 대하여 본각(本覺)의 의(義)를 해석한다. 본각을 밝힘을 마친다. 다음으로 시각(始覺)을 해석한다.
이 중의 대의(大意)는 시각(始覺)이 불각(不覺)을 기다리고, 불각이 본각(本覺)을 기다리며, 본각이 시각을 기다림을 밝히고자 한다. 이미 서로 기다리니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으면 각(覺)이 있지 않은 것이다. 각(覺)이 있지 않은 것은 서로 기다림으로 인해 상대(相待)하여 이루어지므로 각이 없지 않은 것이다. 각이 없지 않으므로 각이라 이름하나니, 자성이 있음을 각이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별기(別記)】
각의(覺義)란 두 가지가 있으니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다. 본각이란 이 심성(心性)이 불각상(不覺相)을 여이고 각조성(覺照性)이니 본각이라 이름한다. 시각이란 이 심체(心體)가 무명연(無明緣)을 따라 망념을 동(動)하여 짓되 본각(本覺)의 훈습력으로 인해 점점 각용(覺用)이 있어 구경(究竟)에 이르러 본각과 같아지나니 시각이라 이름한다.
불각의(不覺義)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근본불각(根本不覺)이고, 둘은 지말불각(枝末不覺)이다. 근본불각이란 이야식(梨耶識) 안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불각이라 이름한다. 지말불각이란 무명이 일으키는 일체 염법(染法)이 모두 불각이라 이름한다.
만약 식상(識相)의 차별로 본(本)과 말(末)을 구별하는 의문(義門)에 의거하면, 이야식 중에는 오직 본각(本覺)과 본불각(本不覺)만이 있다. 만약 식체(識體)의 불이(不二)로 말(末)을 거두어 본(本)으로 귀(歸)하는 의문에 의거하면, 저 시각(始覺) 및 말불각(末不覺)도 이야식 안의 의(義)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이 식에 이의(二義)가 있다'고 한 것은 이와 같은 이종(二種)의 뜻을 통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해석 중에서 본시(本始) 이각(二覺) 및 이불각의(二不覺義)를 통거(通擧)하여 설한다.
문(問): 심체(心體)에 오직 불각(不覺)이 없으므로 본각이라 이름하는가, 아니면 심체에 각조용(覺照用)이 있으므로 본각이라 이름하는가. 만약 오직 불각이 없으므로 본각이라 이름한다면 또한 각조(覺照)가 없으므로 불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각조가 있으므로 본각이라 이름한다면, 이 각이 혹을 끊는지 모르겠다. 만약 혹을 끊지 않으면 조용(照用)이 없고, 만약 끊음이 있다면 범부가 없을 것이다.
답(答): 어둠만 없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밝음의 비춤이 있다. 비춤이 있으므로 또한 혹을 끊음이 있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만약 먼저 잠들었다가 나중에 깨어남을 각(覺)이라 이름한다면 시각(始覺)에 각이 있고 본각 중에는 없다. 만약 본래 잠들지 않음을 각이라 이름한다면 본각이 각이고 시각은 각이 아니다. 끊음의 뜻도 이와 같으니, 먼저 있다가 뒤에 없음을 단(斷)이라 이름한다면 시각에 단이 있고 본각에는 단이 없다. 본래 혹을 여읨을 단이라 이름한다면 본각이 단이고 시각은 단이 아니다.
이 뜻에 의거하면 본래 끊었으므로 본래 범부가 없다. 아래 문장에서 "일체 중생이 본래 상주(常住)하여 열반의 보리법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록 본각이 있으므로 본래 범부가 없다 하나, 시각이 없으므로 본래 범부가 있다. 이 때문에 허물이 없다.
만약 '본각이 있으므로 본래 범부가 없다 하면 끝내 시각이 없을 것인데 무엇을 바라보고 범부가 있다'고 한다면, 상대도 끝내 시각이 없으면 본각이 없을 것인데 어떤 본각에 의거하여 범부가 없다 설하겠는가. 마땅히 알라, 본각이 있으므로 본래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으므로 끝내 시각이 없으며, 시각이 없으므로 본래 본각이 없다. 본각이 없음에 이른 것은 근원적으로 본각이 있기 때문이고, 본각이 있는 것은 시각이 있기 때문이며, 시각이 있는 것은 불각이 있기 때문이고, 불각이 있는 것은 본각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아래 문장에서 "본각의(本覺義)는 시각의에 대하여 설하며, 시각이란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다. 시각의란 본각에 의거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고 불각에 의거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고 하였다.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며 서로 의거하는 것이 곧 모든 법이 없지 않으면서 없고 없지 않으면서 없지 않음을 드러낸다.
문(問): 이 본각성(本覺性)은 통하여 염정(染淨)의 인성(因性)이 되는가, 아니면 다만 모든 정법(淨法)의 성(性)인가. 만약 다만 정법의 인(因)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경(經)에서 "여래장이 선불선(善不善)의 인이다"라고 하는가. 만약 통하여 염정을 짓는다면 무슨 까닭으로 오직 성공덕(性功德)이 구족하다고만 설하고 성염환(性染患)이 구족하다고는 설하지 않는가.
답(答): 이 이(理)는 통하여 염정의 성(性)이 된다. 이 때문에 오직 성공덕이 있다고 설한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이(理)가 정성(淨性)을 여의었으므로 수연(隨緣)하여 모든 염법(染法)을 지을 수 있고, 또 염성(染性)을 여의었으므로 수연하여 모든 정법(淨法)을 지을 수 있다. 염정의 법을 지을 수 있으므로 통하여 염정의 성(性)이 된다. 염정의 성(性)을 여의었으므로 오직 성공덕(性功德)이다. 어째서 염정의 성을 여이어야 모든 공덕을 이루는가. 염정의 성을 취착(取著)하면 모두 망상(妄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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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시각(廣釋始覺) — 사위(四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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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이각(二覺)을 광석(廣釋)한다. 그 중에 먼저 시각을 해석하고 뒤에 본각을 넓힌다.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만(滿)·불만(不滿)의 의(義)를 총표하고, 둘은 시각(始覺)의 차별을 별해(別解)하며, 셋은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총명(總明)한다.
또한 심원(心源)을 각(覺)하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하고, 심원을 각하지 못하므로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총표(總標) 중에서 '심원을 각하므로 구경각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불지(佛地)에 있는 것이고, '심원을 각하지 못하므로 비구경각이다'는 것은 금강심(金剛心) 이전이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예컨대 범부(凡夫)는 전념(前念)이 악(惡)을 일으킴을 각지(覺知)하므로 후념(後念)을 제지하여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 비록 각(覺)이라 이름하나 곧 불각(不覺)이다. 예컨대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념이(念異)를 각하여 념(念)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著相)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 예컨대 법신보살(法身菩薩) 등은 념주(念住)를 각하여 념에 주상(住相)이 없으니,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한다. 예컨대 보살지(菩薩地)가 다하여 방편을 만족하여 일념(一念)이 상응하여 각심(覺心)이 처음 일어날 때 심(心)에 초상(初相)이 없으니, 미세념(微細念)을 원리(遠離)하였기 때문에 심성(心性)을 보아 심이 곧 상주(常住)하니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한다. 이 때문에 수다라(脩多羅, 경전)에서 이르기를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관할 수 있다면 곧 불지(佛智)로 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별해(別解) 중에서 사상(四相)에 의거하여 설한다. 이 중에서 먼저 사상(四相)을 밝히고 뒤에 문장을 소석(消釋)한다.
문(問): 이 중의 사상(四相)은 동시(同時)인가 전후(前後)인가?
혹 설하기를 이것은 살바다종(薩婆多宗, 설일체유부)의 사상(四相)에 의거한 것이니, 사체(四體)는 동시이고 사용(四用)은 전후이다. 용(用)이 전후이므로 각(覺)하는 때가 차별이 있고, 체(體)가 동시이므로 구시(俱時)에 있다고 이름한다. 혹 설하기를 이것은 성실(成實)의 전후 사상에 의거한 것인데 구시에 있다고 한 것은 본각(本覺)이 사상(四相)에 대하면 사상의 전후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혹 설하기를 이것은 대승의 비밀 사상(四相)이니, 사상을 각(覺)하는 때가 전후 천심(淺深)이고 각해지는 사상은 구시에 있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심성(心性)이 본래 생멸상(生滅相)을 여의었는데 무명(無明)이 자심성(自心性)을 미혹하여, 심성의 적정(寂靜)을 어기므로 동념(動念)의 사상(四相)을 생기(生起)할 수 있다. 사상과 무명이 화합한 힘 때문에 심체(心體)로 하여금 생(生)·주(住)·이(異)·멸(滅)하게 한다. 마치 소승의 논의에서 심이 미래에 있어 아직 생멸을 겪지 않았으나 업력(業力)으로 인해 사상(四相)을 이끌어 심법(心法)으로 하여금 생주이멸(生住異滅)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대승의 사상(四相)도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총설은 그러하지만 그 중에서 분별하면, 사상(四相) 안에 각각 차별이 있으니 생(生)은 셋이고[三], 주(住)는 넷이며[四], 이(異)는 여섯이고[六], 멸(滅)은 일곱이다[七].
생상삼(生相三)이란, 첫째는 업상(業相)이라 이름하니 무명(無明)으로 인해 불각(不覺)하여 염(念)이 동(動)하여 비록 기멸(起滅)이 있으나 견상(見相)이 아직 분(分)하지 않은 것으로 마치 미래의 생상(生相)이 장차 정용(正用)의 때에 이르는 것과 같다. 둘째는 전상(轉相)이니 동념(動念)에 의거하여 전변하여 능견(能見)이 되는 것으로 마치 미래의 생상(生相)이 정용의 때에 이른 것과 같다. 셋째는 현상(現相)이니 능견(能見)에 의거하여 경계상(境界相)을 현(現)하는 것으로 마치 미래의 생상이 현재에 이른 것과 같다. 무명이 이 삼상(三相)과 화합하여 일심체(一心體)를 동(動)하여 전(轉)하여 현(現)에 이르니, 마치 소승의 미래장심(未來藏心)이 생상(生相)을 따라 전하여 현재에 이르는 것과 같다. 지금 대승 중의 여래장심(如來藏心)이 생(生)에 따라 현(現)에 이르는 의(義)도 이와 같다. 이 셋은 모두 아뢰야식위(阿梨耶識位)의 차별이다.
주상사(住相四)란, 이 무명이 생상과 화합하여 생겨나는 심에 무아(無我)·아소(我所)를 미혹하므로 사종주상(四種住相)을 생기한다. 이른바 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이다. 이 네 가지가 생상에 의거하여 심체(心體)를 일으켜 주위(住位)에 이르러 내연(內緣)하여 머무니 주상이라 이름한다. 이 넷은 모두 제7식위(第七識位)에 있다.
이상육(異相六)이란, 무명이 저 주상과 화합하여 아아소(我我所)가 공(空)함을 불각(不覺)하여 이로 인해 육종이상(六種異相)을 일으킨다. 이른바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견(見)이다. 무명이 이 여섯 가지와 화합하여 주심(住心)을 이상(異位)으로 이르게 하여 밖을 향해 반연(攀緣)하니 이상(異相)이라 이름한다. 이 여섯은 생기식위(生起識位)에 있다.
멸상칠(滅相七)이란, 무명이 이 이상(異相)과 화합하여 외진(外塵)의 위순(違順)이 성(性)을 여읨을 불각(不覺)하여, 이로 인해 칠종멸상(七種滅相)을 발기(發起)한다. 이른바 신구칠지악업(身口七支惡業)이다. 이와 같은 악업이 이심(異心)을 멸하여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하므로 멸상이라 이름한다.
이 때문에 사상(四相)이 생기하여 일심이 유전한다. 일체가 모두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 인하나니, 경에서 이르기를 "무명주지(無明住地)의 힘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 이 론(論)에서 이르기를 "마땅히 알라, 무명력(無明力)이 능히 일체 염법(染法)을 생(生)한다"고 하였다.
총사상(總四相)을 일념(一念)이라 이름한다. 이 일념사상(一念四相)에 의거하여 사위(四位)의 계강(階降)을 밝힌다. 본래 무명불각(無明不覺)의 힘에 의거하여 생상(生相) 등 종종의 몽념(夢念)을 일으켜 심원(心源)을 동(動)하여 멸상에 이르기까지 전변하여 삼계(三界)에 장면(長眠)하여 육취(六趣)에 유전한다. 지금 본각(本覺)의 불가사의한 훈(熏)으로 인해 염고(厭苦)의 심을 일으켜 점점 본원(本源)으로 향하여 멸상에서 시작하여 내지 생상에 이르기까지 식(息)하고, 낭연(朗然)히 대오(大悟)하여 자심(自心)이 본래 소동(所動)이 없고 지금 소정(所靜)도 없이 본래 평등하여 일여상(一如牀)에 머무름을 각료(覺了)한다. 경(經)에서 설하는 몽도하유(夢度河喩)와 같다.
다음으로 문장을 소석(消釋)한다. 사상(四相)에 의거하여 사위(四位)를 별(別)하니, 사위 중에 각각 사의(四義)가 있다. 하나는 능각인(能覺人), 둘은 소각상(所覺相), 셋은 각이익(覺利益), 넷은 각분제(覺分齊)이다.
초위(初位) 중에서 '예컨대 범부(凡夫)와 같다'는 것은 능각인(能覺人)이니 위(位)는 십신(十信)이다. '전념이 악을 일으킴을 각지(覺知)한다'는 것은 소각상(所覺相)을 드러내는 것이다. 십신(十信)에 들기 이전에 칠지악업(七支惡業)을 구기(具起)하였으나 지금 신위(信位)에 들어 칠지가 실로 불선(不善)임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멸상(滅相)을 각함이다. '후념을 제지하여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각이익(覺利益)이다. '비록 각이라 이름하나 곧 불각(不覺)이다'는 것은 각분제(覺分齊)를 밝히는 것이니, 비록 멸상이 실로 불선임을 알아도 멸상이 꿈임을 아직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2위 중에서 '이승관지(二乘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십해(十解) 이상의 삼현보살(三賢菩薩)이니 능각인이다. '념이(念異)를 각한다'는 것은 소각상(所覺相)을 밝히는 것이다. 앞에서 설한 육종이상(六種異相)에서 내외(內外)를 분별하여 아아소(我我所)를 계(計)하는데, 이 삼승인(三乘人)이 무아(無我)를 요지(了知)하니 념이(念異)를 각한다고 한다. '념에 이상(異相)이 없다'는 것은 각이익(覺利益)이니 이미 이상(異相)의 꿈을 각하였으므로 육종이상이 영멸(永滅)하기 때문이다. '추분별집착상을 버렸으므로 상사각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각분제(覺分齊)이다.
제3위 중에서 '법신보살(法身菩薩) 등'은 초지(初地) 이상의 십지보살(十地菩薩)이니 능각인이다. '념주(念住)를 각한다'는 것은 소각상(所覺相)이다. '념에 주상(住相)이 없다'는 것은 사종주상(四種住相)이 멸하여 일어나지 않으니 각이익(覺利益)이다.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여의었으므로'에서 인아집(人我執)은 분별(分別)이라 이름하고, 법아집(法我執)은 추념(麤念)이라 이름한다. 비록 이미 무분별각(無分別覺)을 얻었으나 아직 생상(生相)의 꿈에 잠들어 있으므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하니 각분제(覺分齊)이다.
제4위 중에서 '보살지(菩薩地)가 다함'은 무구지(無垢地)를 말한다. '방편을 만족한다'는 것은 방편도(方便道)이고, '일념이 상응한다'는 것은 무간도(無間道)이다. '각심(覺心)이 처음 일어남'은 소각상(所覺相)을 밝히는 것이다. '심에 초상(初相)이 없다'는 것은 각이익(覺利益)을 밝히는 것이다. 앞의 셋은 비록 여읜 것이 있어도 그 동념(動念)이 오히려 일어나 다하지 않았으므로 '념에 주상이 없다' 등이라 하였다. 지금 구경위(究竟位)에서 동념이 모두 다하여 오직 일심(一心)만이 있으므로 심에 초상이 없다고 한다.
'원리(遠離)' 이하는 각분제(覺分齊)를 밝힌다. 업상동념(業相動念)이 념(念) 중에 가장 세밀하니 미세념(微細念)이라 이름하는데 이 상(相)이 모두 다하여 영원히 남음이 없으므로 원리(遠離)라 한다. 원리(遠離)의 때는 바로 불지(佛地)에 있다. 전래(前來)의 삼위(三位)는 심원(心源)에 이르지 못하여 생상(生相)이 다하지 않아 심(心)이 오히려 무상(無常)하였다. 지금 이 위(位)에 이르러 무명이 영원히 다하여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기동(起動)이 없으니 그러므로 심성(心性)을 보아 심이 곧 상주(常住)한다고 한다. 더 이상 나아감이 없으니 구경각이라 이름한다.
【별기(別記) 문답】
문(問): 만약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같아 생멸을 여인다고 한다면, 이 설이 섭론(攝論)에서 이른 "본(本)이 이미 상주하고 말(末)이 본에 의거하여 상속(相續)이 항상 있다"는 것과 어떻게 통하는가?
답(答): 두 뜻이 다르므로 이치는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 이 론주(論主)의 뜻은 본래 불각(不覺)으로 인해 정심(靜心)을 동(動)하였는데 지금 불각을 쉬어 본래의 정(靜)으로 돌아가 상주(常住)를 이룸을 드러내고자 한다. 저 섭론의 뜻은 법신(法身)이 본래 상주하여 부동(不動)함을 밝히고, 저 법신에 의거하여 복혜(福慧) 이행(二行)을 일으켜 능히 만덕(萬德)의 보과(報果)를 감(感)하는데, 이미 인연으로 일어났으므로 생멸을 여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속(相續)이라 설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덕을 이루는 데 두 의(義)를 갖추어야 한다. 전의(前義)에 의거하므로 상주(常住)하고 후의(後義)에 의거하므로 생멸(生滅)한다. 생멸과 상주가 서로 장애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념(念)이 삼세(三世)에 두루 미혹하되 일념(一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하나의 모공(毛孔)이 모두 시방(十方)에 두루하나 시방에 두루하더라도 모공이 늘어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불불(佛佛)이 이와 같아 무장무애(無障無礙)하다.
인증(引證) 중에서 '무념을 관할 수 있다면 곧 불지로 향한다'는 것은 인지(因地)에 있을 때 비록 아직 념(念)을 여의지 못했어도 능히 무념(無念)의 도리를 관하면, 이 능관(能觀)을 불지(佛地)로 향한다고 설한다. 이로써 불지에 무념(無念)임을 증지(證知)하나니, 이는 인(因)을 들어 과(果)를 증명한 것이다.
통설인과(通說因果)의 문증(文證)을 인용하면, 금고경(金鼓經)에서 이르기를 "제복도(諸伏道)에 의거하여 기사심(起事心)이 멸하고, 법단도(法斷道)에 의거하여 근본심(根本心)이 멸하며, 승발도(勝拔道)에 의거하여 근본심(根本心)이 다한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제복도(諸伏道)'란 삼십심(三十心)을 말하고, '기사심이 멸한다'는 것은 이 론에서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著相)을 버린다'는 것이니 곧 이상(異相)이 멸함이다. '법단도(法斷道)'는 법신위(法身位)에 있고, '근본심이 멸한다'는 것은 이 중에서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버린다'는 것이니 곧 주상(住相)이 멸함이다. '승발도(勝拔道)'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고 '근본심이 다한다'는 것은 이 중에서 '미세념(微細念)을 원리(遠離)한다'는 것이니 생상(生相)이 다함이다. 위에서 시각(始覺)의 차별을 별명(別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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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총명 시각불이본각(始覺不異本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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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심이 일어날 때 알 수 있는 초상(初相)이 없다. 초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無念)을 말한다. 이 때문에 일체 중생은 각(覺)이라 이름하지 못하나니, 본래부터 념념(念念)이 상속하여 일찍이 념(念)을 여읜 적이 없기 때문에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설한다. 만약 무념(無念)을 얻은 자는 곧 심상(心相)의 생(生)·주(住)·이(異)·멸(滅)을 안다. 무념(無念)이 평등하기 때문에 실로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다. 사상(四相)이 구시(俱時)에 있어 모두 자립(自立)이 없고 본래 평등하여 동일각(同一覺)이기 때문이다.
제3 총명(總明) 시각불이본각(始覺不異本覺).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구경각상(究竟覺相)을 거듭 밝히고 둘은 불이본각(不異本覺)을 바르게 밝힌다.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경상(究竟相)을 직접 드러내고, 둘은 각(覺)이 아닌 것을 들어 각을 드러내며, 셋은 경계에 대하여 지(智)의 만족함을 넓게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또한 심이 일어날 때'란 위의 '각심(覺心)이 처음 일어남'의 말을 서(牒)한 것이다. 각(覺)할 때 초상(初相)이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므로 '알 수 있는 초상이 없다'고 한다. '각심(覺心)이 처음 일어나는 상(相)이 있다'고 설하는 것은, 방(方)을 깨달을 때 서(西)가 곧 동(東)임을 아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여래(如來)가 심(心)을 각할 때 처음 동(動)하는 상이 곧 본래 정(靜)임을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곧 무념(無念)을 말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하는 각(覺)이 아닌 것을 들어 각을 드러낸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무념(無念)이 각(覺)이니, 이 때문에 념(念)이 있으면 각이라 이름할 수 없다. 이것이 곧 금강심(金剛心) 이전의 일체 중생은 무시무명(無始無明)의 념(念)을 여의지 못하였으니, 이 뜻에 의거하여 각이라 이름할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사상(四相)의 꿈의 차별에 대하여 점각(漸覺)을 설하였고, 지금 무명의 잠듦[眠]이 다름 없음에 의거하여 불각(不覺)을 설하였다.
'만약 무념을 얻은 자는' 이하에서 경계에 대하여 지(智)를 드러낸다. 만약 심원(心原)에 이르러 무념(無念)을 얻으면 곧 능히 일체 중생의 일심(一心)이 동(動)하여 사상(四相)이 차별함을 두루 알 수 있다. 다음 '무념이 평등하기 때문에'는 위의 뜻을 석성(釋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로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다' 이하는 제2 무이(無異)를 바르게 밝힌다. 비록 무념의 각을 비로소 얻었으나 사상(四相)이 본래 일어남이 없음을 각하나니, 어떤 불각(不覺)을 기다려 시각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실로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다고 한다.
【별기(別記)】
사상(四相)의 생기(生起)는 의(義)에 전후(前後)가 있으나 본래부터 동시(同時)에 서로 의거한다. 사상이 함께 있어 심(心)으로 이루어지고 일심(一心) 밖에 따로 자체(自體)가 없다. 그러므로 '구시에 있어 모두 자립이 없다'고 한다. 모두 자립이 없으므로 본래 평등하여 동일본각(同一本覺)이다.
【별기(別記)】
마치 해수(海水)의 동(動)을 파랑이라 이름하나 파랑은 자체가 없으므로 파랑의 동(動)이 없고, 물은 자체가 있으므로 물의 동이 있는 것과 같다. 심(心)과 사상(四相)의 의(義)도 이와 같다. 이 뜻을 드러내기 위해 사권경(四卷經)에서 이르기를 "대혜(大慧)여, 칠식(七識)은 유전(流轉)하지 않고 고락(苦樂)을 받지 않으며 열반의 인(因)이 아니다. 여래장(如來藏)이 고락을 받아 인(因)과 함께 하여 생(生)하기도 하고 멸(滅)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부인경(夫人經)에서 이르기를 "이 육식(六識)과 심법지(心法智)의 이 칠법(七法)은 찰나(刹那)에 머물지 않아 중고(衆苦)를 심지 않고 고(苦)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지도 못한다. 세존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은 전제(前際)가 없고 불기불멸법(不起不滅法)이어서 중고(衆苦)를 심고 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생사(生死)란 이 이법(二法)이 여래장이다. 세간의 언설에 의거하여 사(死)가 있고 생(生)이 있을 뿐이지 여래장에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경(二經)의 뜻은 같이 곧 여래장(如來藏)이 생사에 유전함을 밝히나, 생사의 근본(根本)은 자체가 없고 자체가 없으므로 별도의 유전이 없다. 상(相)이 이미 전(轉)하지 않으니 체(體)가 무슨 이유로 동(動)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래장에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뜻에 의거하여 사상(四相)이 오직 일심(一心)이고 불각(不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으니, 그러므로 '본래 평등하여 동일각(同一覺)이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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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2권 끝
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三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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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本覺)을 넓힘 — 수염본각(隨染本覺)과 성정본각(性淨本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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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본각(本覺)을 넓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수염본각(隨染本覺)을 밝히고 뒤에 성정본각(性淨本覺)을 드러낸다.
다시, 본각(本覺)이 염(染)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 상(相)을 생(生)한다. 저 본각과 서로 버리지 않는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은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智淨相)이란 법력훈습(法力熏習)에 의거하여 여실수행(如實修行)하고 방편을 만족한 까닭에 화합식(和合識)의 상(相)을 파괴하고 상속심(相續心)의 상(相)을 멸하여 법신(法身)을 현현(顯現)하니 지(智)가 순정(淳淨)하기 때문이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일체 심식(心識)의 상(相)은 모두 무명(無明)이다. 무명의 상(相)은 각성(覺性)을 여의지 않으니 가히 파괴할 수도 없고[非可壞] 파괴하지 않을 수도 없다[非不可壞]. 마치 대해수(大海水)가 바람으로 인해 파랑이 동(動)하되 수상(水相)과 풍상(風相)이 서로 버리지 않는 것과 같아, 물은 동성(動性)이 아니니 만약 바람이 그쳐 멸하면 동상(動相)은 곧 멸하되 습성(濕性)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풍(無明風)으로 인해 동(動)하여 심(心)과 무명이 함께 형상이 없어 서로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심(心)은 동성(動性)이 아니니 만약 무명이 멸하면 상속(相續)은 곧 멸하되 지성(智性)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지정(智淨)에 의거하여 능히 일체 승묘(勝妙)한 경계를 짓는다. 이른바 무량공덕(無量功德)의 상(相)이 항상 단절됨이 없어 중생의 근기(根機)를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종종으로 현(現)하여 이익을 얻게 한다.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총표(總標), 둘은 열명(列名), 셋은 변상(辨相)이다. 처음 중에서 '두 가지 상(相)을 생(生)한다'는 것은 이 이종상(二種相)이 수동문(隨動門)에 있으므로 생(生)이라 한다. 이 둘이 성정본각(性淨本覺)을 여의지 않으므로 '저것과 서로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제2 열명(列名) 중에서 '지정상(智淨相)'은 수염본각(隨染本覺)의 상(相)을 바르게 밝히는 것이고,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은 이 본각이 다시 정(淨)해질 때의 업(業)을 밝히는 것이다.
제3 변상(辨相) 중에서 먼저 지정상(智淨相)을 변(辨)한다. 그 안에 법(法)·유(喩)·합(合)이 있다. 법(法)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직명(直明)과 중현(重顯)이다. 처음 중에서 '법력훈습(法力熏習)'이란 진여법(眞如法)의 내훈(內熏)의 힘을 말한다. 이 훈습력에 의거하여 자량(資糧)을 수습하여 지상(地上)의 여실수행(如實修行)을 발(發)하고, 무구지(無垢地)에 이르러 방편을 만족한다. 이로 인해 화합식(和合識) 안의 생멸의 상(相)을 파괴하여 불생불멸의 성(性)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화합식(和合識)의 상을 파괴하여 법신(法身)을 현현한다'고 한다. 이때 상속심(相續心) 안의 업상(業相)·전상(轉相)을 멸하여 수염본각(隨染本覺)의 심으로 하여금 마침내 근원으로 돌아가 순정한 지(智)를 이루게 하니, 그러므로 '상속심(相續心)의 상(相)을 멸하여 지(智)가 순정(淳淨)하다'고 한다.
이 중에서 상속식(相續識)은 화합식(和合識) 안의 생멸의 심이다. 다만 법신을 현현하기 위해 화합식을 파괴한다고 설하고, 응신(應身)의 정지(淨智)를 이루기 위해 상속심(相續心)의 상(相)을 멸한다고 설한다. 그러나 상속심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속심의 상(相)을 멸하는 것이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이하는 앞에서 설한 멸(滅)과 불멸(不滅)의 뜻을 거듭 드러낸다. '일체 심식의 상이 모두 무명이다'란 업식(業識)·전식(轉識) 등의 모든 식상(識相)이 무명으로 일어나 모두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든 식의 불각상(不覺相)이 수염본각(隨染本覺)의 성(性)을 여의지 않으니 각성(覺性)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무명상(無明相)과 본각성(本覺性)이 비일비이(非一非異)하니, 다르지 않으므로 가히 파괴할 수 없고[非可壞], 하나가 아니므로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非不可壞].
유(喩) 중에서 '물은 동성(動性)이 아니다'는 것은 지금의 동(動)이 자성(自性)의 동이 아니라 다만 타(他)를 따라 동함을 밝히는 것이다. 합(合) 중에서 '무명이 멸한다'는 것은 근본무명이 멸하는 것으로 풍멸(風滅)에 합한다. '상속(相續)이 곧 멸한다'는 것은 업식(業識) 등이 멸하는 것으로 동상(動相)이 멸함에 합한다. '지성(智性)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은 수염본각(隨染本覺)의 신해(神解)의 성(性)을 지성(智性)이라 이름하는 것으로 습성(濕性)이 파괴되지 않음에 합한다.
다음으로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을 해석한다. '지정(智淨)에 의거한다'는 것은 앞의 수염본각의 심이 비로소 순정(淳淨)해진 것이니 시각지(始覺智)이다. 이 지력(智力)에 의거하여 응화신(應化身)을 현(現)하므로 무량공덕(無量功德)의 상(相)이라 한다. 이 현(現)하는 상(相)은 무시무종(無始無終)하여 상속부절(相續不絶)이므로 무단(無斷)이라 한다.
문(問): 자리(自利)를 비로소 얻고 나서 이타업(利他業)을 일으키는데, 어째서 이타(利他)가 무시(無始)라고 하는가?
해석하건대, 여래의 일념(一念)이 삼세(三世)에 두루 응(應)하니, 응하는 바가 무시이므로 능응(能應)도 무시이다. 마치 일념의 원지(圓智)가 무변(無邊)의 삼세지경(三世之境)에 두루 통달하되 경(境)이 무변이므로 지(智)도 무변인 것과 같다. 무변의 지(智)가 현(現)하는 상이므로 무시이고 또한 무종(無終)일 수 있다. 이것은 심식의 사량(思量)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불사의업(不思議業)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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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본각(性淨本覺) — 사종대의(四種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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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각체상(覺體相)이란 네 가지 대의(大義)가 있어 허공(虛空)과 평등하고 마치 정경(淨鏡)과 같다.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일체 심경계상(心境界相)을 원리(遠離)하여 현(現)할 수 있는 법이 없고 각조(覺照)의 의(義)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은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이른바 여실불공(如實不空)으로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안에 현(現)하되 출(出)하지도 않고 입(入)하지도 않으며 실(失)하지도 않고 괴(壞)하지도 않아 항상 일심(一心)에 머무르니 일체법이 곧 진실성(眞實性)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 염법(染法)이 능히 염(染)하지 못하여 지체(智體)가 부동(不動)하여 무루(無漏)를 구족하여 중생을 훈(熏)하기 때문이다. 셋은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이른바 불공법(不空法)이 번뇌애(煩惱礙)·지애(智礙)에서 출리(出離)하여 화합상(和合相)을 여의어 순정명(淳淨明)하기 때문이다. 넷은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이른바 법출리(法出離)에 의거하여 중생의 심(心)을 두루 비추어 선근(善根)을 닦게 하고 념(念)을 따라 시현(示現)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상(相)을 밝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총표(總標)이고 둘은 별해(別解)이다. 처음 중에서 '허공과 평등하다'는 것은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고, '마치 정경(淨鏡)과 같다'는 것은 垢를 여의고 영상(影像)을 현(現)하기 때문이다. 사종(四種)의 의(義) 중에 제1과 제3은 리구(離垢)의 의(義)에 의거하여 정경(淨鏡)에 비유하고, 제2와 제4는 현상(現像)의 의(義)에 의거하며 또한 정의(淨義)가 있다.
별해(別解) 중에서 이 안의 전이(前二)는 인성(因性)에 있고 후이(後二)는 과지(果地)에 있다. 전이(前二)는 공(空)과 지(智)를 밝히는 것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불성(佛性)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이고 제일의공(第一義空)은 지혜(智慧)라 이름한다. 지자(智者)는 공(空)과 불공(不空)을 보고, 우자(愚者)는 공(空)과 불공(不空)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 처음 중에서 '일체 심경계상을 원리한다'는 것은 저 경의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드러내는 것이고, '현(現)할 수 있는 법이 없고 각조의 의가 아니다'는 것은 공(空)과 불공(不空)을 보지 못함을 해석한다.
제2 중에서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안에 현한다'는 것은 저 경의 '지자(智者)는 공(空)과 불공(不空)을 본다'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다만 생사(生死)의 경계를 현(現)하되 이미 경(鏡)에 현(現)하므로 출(出)하지 않는다 하고, 경(鏡)을 염(染)하지 않으므로 입(入)하지 않는다 한다. 현(現)하는 상(像)을 따라 본각(本覺)의 양(量)과 같아 허공계와 평등하여 삼세제(三世際)에 편만하므로 념(念)의 실(失)도 없고 멸진(滅盡)의 괴(壞)도 없으니, 불실불괴(不失不壞)하여 항상 일심(一心)에 머문다.
제3 중에서 '이애(二礙)에서 출리(出離)하여 순정명(淳淨明)이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인훈습경(因熏習鏡)이 전(纏)에서 출(出)할 때 법신(法身)이 됨을 밝힌다. 제4 중에서 '법출리(法出離)에 의거하여 중생의 심을 두루 비춘다'는 것은 저 본각(本覺)이 현현(顯現)할 때 물기(物機)를 평등하게 비추어 만화(萬化)를 시현하니, 그러므로 '념을 따라 시현한다'고 한다.
이것이 앞에서 설한 불사의업(不思議業)과 무엇이 다른가? 저것은 응신(應身)의 시각(始覺)의 업(業)을 밝히고 이것은 본각(本覺)의 법신(法身)의 용(用)을 드러낸다. 하나의 교화를 일으킴에 이 두 가지 의(義)가 있다. 총설은 그러하나 그 안에서 분별하면, 시각(始覺)이 일으키는 문(門)을 논하면 연(緣)을 따라 상속(相屬)하여 이익을 얻게 하고, 본각(本覺)이 드러내는 문(門)을 논하면 기(機)가 숙(熟)한 것을 두루 이익 주되 상속(相屬)을 가리지 않는다.
【별기(別記)】
사종경(四種鏡) 중에서 제2 인훈습경(因熏習鏡)이란 이 성공덕(性功德)이 능히 정인(正因)이 되어 중생의 심을 훈(熏)하여 염고구락(厭苦求樂) 및 모든 가행(加行)과 내지 불과(佛果)를 일으킬 수 있으니, 인훈습(因熏習)이라 이름한다. 일체 모든 법이 모두 그 안에 현(現)하므로 경(鏡)이라 이름한다. 제4 연훈습경(緣熏習鏡)이란 비로소 원지(圓智)를 일으켜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중생의 심을 훈(熏)하여 염고구락 및 모든 가행과 내지 불과를 일으키게 하니 연훈(緣熏)이라 이름한다. 이 모든 행덕(行德)이 원지(圓智)를 여의지 않으니 저 지(智)의 영(影)이므로 경(鏡)이라 이름한다. 나머지 이종경(二種鏡)은 의(義)가 명확하므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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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각의(不覺義) —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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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불각(不覺)을 해석한다.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 근본불각(根本不覺)을 밝히고 다음으로 지말불각(枝末不覺)을 드러내며 제3은 본말불각(本末不覺)을 총결한다.
소언불각의(所言不覺義)란 진여법(眞如法)의 일(一)함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심(不覺心)이 일어나 념(念)이 있다. 념(念)은 자상(自相)이 없어 본각(本覺)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방(方)에 의거하므로 미혹하는 것과 같으니, 만약 방(方)을 여의면 곧 미혹이 없다. 중생도 이와 같으니 각(覺)에 의거하므로 미혹하는 것이어서 만약 각성(覺性)을 여의면 불각(不覺)이 없다. 불각(不覺)의 망상심(妄想心)이 있으므로 능히 명의(名義)를 알아 진각(眞覺)을 설할 수 있다. 만약 불각의 심을 여의면 진각(眞覺)의 자상(自相)을 설할 것도 없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불각(不覺)이 본각(本覺)에 의거하여 성립함을 밝히고 뒤에 본각도 불각을 기다림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유(喩)·합(合)이다. 처음 중에서 '진여법의 일(一)함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이니 마치 방(方)을 미혹하는 것과 같다. '불각심이 일어나 념이 있다'는 것은 업상(業相)의 동념(動念)이니 사방(邪方)과 같다. 정동(正東)을 여읨에 따로 사서(邪西)가 없는 것과 같으므로 '념은 자상이 없어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으로 본각(本覺)도 불각을 기다림을 밝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 '불각의 망상심이 있으므로'란 무명이 일으키는 망상분별이니, 이 망상으로 인해 명의(名義)를 알 수 있어 언설이 있어 진각(眞覺)을 설한다. 이것은 진각의 명(名)이 망상을 기다림을 밝힌다. '만약 불각을 여의면 진각의 자상을 설할 것도 없다'는 것은 설(說)하는 진각이 반드시 불각을 기다림을 밝히는 것이니, 서로 기다리지 않으면 자상(自相)이 없다. 타(他)를 기다려 있는 것도 자상이 아니다. 자상이 이미 없으니 어찌 타상(他相)이 있겠는가. 이는 모든 법이 소득(所得)이 없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하 지말불각(枝末不覺)을 넓게 드러낸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세상(細相)을 밝히고 뒤에 추상(麤相)을 드러낸다.
다시, 불각(不覺)에 의거하여 세 가지 상(相)이 생(生)하니 저 불각(不覺)과 상응(相應)하여 떠나지 않는다. 무엇이 셋인가? 하나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不覺)에 의거하여 심이 동(動)하므로 업(業)이라 설한다. 각(覺)하면 동(動)하지 않으니 동(動)하면 고(苦)가 있어 과(果)가 인(因)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은 능견상(能見相)이니 동(動)에 의거하여 능견(能見)이 있고 부동(不動)이면 견(見)이 없기 때문이다. 셋은 경계상(境界相)이니 능견(能見)에 의거하여 경계(境界)가 망현(妄現)하고 견(見)을 여이면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와 별석(別釋)이다. 처음 중에서 '저 불각과 상응하여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本)과 말(末)이 서로 의거하므로 상응(相應)이라 한다. 왕수(王數)가 상응하는 의(義)와 같지 않으니 이는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이기 때문이다.
【별기(別記)】
이 중에서 먼저 삼상(三相)은 미세하여 아직 아뢰야식위(阿棃耶識位)에 있다. 뒤의 육추상(六麤相)은 나머지 칠식(七識)이다. 다만 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대하면 모두 일으켜진 말(末)이니 통칭하여 지말불각(枝末不覺)이라 한다.
별석(別釋) 중에서 '무명업상(無明業相)'이란 무명(無明)으로 인해 동(動)하니 업상(業相)이라 이름하는 것이고, 기동(起動)의 의(義)가 업(業)의 의이기 때문이다. '각(覺)하면 동(動)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를 들어 드러내는 것이니, 시각(始覺)을 얻을 때 동념(動念)이 없다. 이로써 지금의 동(動)이 오직 불각(不覺)으로 인함을 안다. '동(動)하면 고(苦)가 있다'는 것은 적정(寂靜)을 얻으면 곧 극락이므로 지금 동(動)하면 곧 고(苦)이다. 업상(業相)은 무고(無苦)이고 무명은 무집(無集)이니, 이와 같이 인과가 구시(俱時)에 있다.
그런데 이 업상은 비록 동념(動念)이 있으나 극히 세밀하여 능소(能所)가 아직 분(分)하지 않은 것이다.
제2 능견상(能見相)이란 곧 전상(轉相)이니, 앞의 업상(業相)에 의거하여 전변하여 능연(能緣)이 된다. 성정문(性靜門)에 의거하면 능견(能見)이 없으니 '부동(不動)이면 견(見)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전상(轉相)은 비록 능연(能緣)이 있으나 아직 소연경상(所緣境相)을 드러낼 수 없어 곧장 밖을 향할 뿐이고 경(境)에 의탁하지 않는다.
제3 경계상(境界相)이란 곧 현상(現相)이니 앞의 전상(轉相)에 의거하여 능히 경계를 현(現)하므로 '능견(能見)에 의거하여 경계(境界)가 망현(妄現)한다'고 한다. 사권경(四卷經,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대혜(大慧)여, 간략히 설하면 세 가지 식(識)이 있고 넓게 설하면 팔상(八相)이 있다. 셋이란 무엇인가? 진식(眞識)·현식(現識)·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비유하면 명경(明鏡)이 모든 색상을 지니는 것과 같이 현식(現識)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별기(別記)】
'돈분별(頓分別)'이란 능견상(能見相)이고, '자심(自心)과 현(現) 등'은 경계상(境界相)이다. 유가론(瑜伽論) 중에서도 이와 같이 설한다. 이와 같은 등의 문장은 후이상(後二相)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이 둘은 비록 이분(二分)이 있으나 업상(業相)을 여의지 않는다. 이 셋은 모두 이숙식(異熟識)에 속하나 다만 업번뇌(業煩惱)에 미혹된 의변(義邊)에서는 업상(業相)·동전(動轉)의 차별을 별도로 논하지 않으므로 총설하여 이숙식이라 한다. 무명풍(無明風)에 동(動)된 의변(義邊)에서 세세(細細)에서 추(麤)로 동전(動轉)의 차별이 있으므로 세분(細分)하여 삼종상(三種相)을 세운다. 또한 이 셋은 다만 무명으로 동(動)된 것이므로 제8식에 있다. 뒤의 여섯은 경계로 동(動)되므로 칠식(七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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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종추상(六種麤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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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연(境界緣)이 있으므로 다시 여섯 가지 상(相)이 생(生)한다. 무엇이 여섯인가? 하나는 지상(智相)이니 경계에 의거하여 심이 분별하여 애(愛)와 불애(不愛)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은 상속상(相續相)이니 지(智)에 의거하여 고락(苦樂)을 생(生)하여 각심(覺心)이 념(念)을 일으켜 상응부단(相應不斷)하기 때문이다. 셋은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에 의거하여 경계를 연념(緣念)하여 고락(苦樂)에 머물러 심이 착(著)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은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망집(妄執)에 의거하여 가명(假名)의 언상(言相)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은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에 의거하여 명(名)을 찾아 착(著)을 취하여 종종의 업(業)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은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業)에 의거하여 과(果)를 받아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추상(麤相)을 밝힌다. 처음 '경계연이 있으므로'란 앞의 현식(現識)이 현(現)하는 경계에 의거하여 칠식(七識) 중에 육종추상(六種麤相)이 일어남을 말한다.
【별기(別記)】
경계연이 있으므로 육상(六相)이 생(生)한다는 것은, 앞의 세상(細相) 중에서 능견(能見)에 의거하여 경계를 현(現)하되 경계가 능견을 동(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뒤의 육상(六相)은 저 현(現)된 경계가 동(動)하는 것이지 이 여섯이 저 경계를 현(現)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별석(別釋) 중에서 처음 하나의 상은 제7식이고, 다음 네 상은 생기식(生起識)에 있으며, 마지막 하나는 저 소생(所生)의 과(果)이다. 처음 '지상(智相)'이란 제7식의 추상(麤相) 중의 시작이니, 처음으로 혜수(慧數)가 있어 아진(我塵)을 분별하므로 지상(智相)이라 이름한다. 만약 선도(善道)에 있으면 가애법(可愛法)을 분별하여 아아소(我我所)를 계(計)하고, 악도(惡道)에 있을 때는 불애법(不愛法)을 분별하여 아아소를 계한다. 그러므로 '경계에 의거하여 심이 분별하여 애(愛)와 불애(不愛)를 일으킨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식(本識)을 연(緣)하여 아(我)라 계(計)하고 현(現)하는 경계를 연하여 아소(我所)라 계한다. 그런데 지금 이 중에서 추현(麤顯)에 나아가므로 경계에 의거하여 심이 일어남을 설한다. 또한 이 경계는 현식(現識)을 여의지 않으니 마치 영상(影像)이 경면(鏡面)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제7식은 곧바로 내향(內向)하여 아아소(我我所)를 계하되 심외(心外)에 별도로 진(塵)이 있다고 계하지 않는다.
【별기(別記)】
다만 아집(我執)의 경(境)에 나아가므로 식(識)을 연(緣)한다고 설하고, 아소집(我所執)의 경(境)을 제외하므로 경계도 연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제2 상속상(相續相)이란 생기식(生起識)이다. 식온(識蘊)은 추분별(麤分別)이어서 모든 법을 변계(徧計)하여 장상속(長相續)하고, 또 능히 애취(愛取)를 일으켜 과거의 모든 행(行)을 인지(引持)하여 불단(不斷)하게 하며, 또한 능히 윤생(潤生)하여 미래 과보(果報)를 상속하게 한다. '지(智)에 의거한다'는 것은 앞의 지상(智相)을 소의(所依)의 근(根)으로 삼아 생겨나기 때문이다. 소의(所依)는 세밀하여 오직 사수(捨受)이고, 능의(能依)는 추(麤)하여 고락(苦樂)을 구기(具起)하므로 '고락을 생(生)한다'고 한다. 또 소의의 지상(智相)은 내연(內緣)하여 외진(外塵)을 계(計)하지 않으므로 마치 잠든 것과 같다. 이 상속식(相續識)은 내외를 변계(徧計)하여 각관(覺觀)으로 분별하니 마치 깨어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각심(覺心)이 념(念)을 일으킨다'고 한다. '념(念)을 일으킴'이 곧 법집(法執)의 분별이니 식온(識蘊)이 이 추집(麤執)과 상응하여 모든 경(境)에 달려다니므로 '상응부단(相應不斷)이다'라고 한다.
제3 집취상(執取相)이란 곧 수온(受蘊)이다. 식온(識蘊)에 의거하여 위순(違順)을 분별하여 고락(苦樂)을 영납(領納)한다. 제4 계명자상(計名字相)이란 곧 상온(想蘊)이다. 앞의 수온(受蘊)에 의거하여 위순 등의 명언상(名言相)을 분별한다. 제5 기업상(起業相)이란 곧 행온(行蘊)이다. 상온(想蘊)이 취하는 명상(名相)에 의거하여 사수(思數)가 일어나 선악을 조작한다. 제6 업계고상(業繫苦相)이란 앞의 행온(行蘊)이 짓는 업(業)에 의거하여 삼유(三有) 육취(六趣)의 고과(苦果)를 받는다.
마땅히 알라, 무명이 능히 일체 염법(染法)을 생(生)하니 일체 염법이 모두 불각상(不覺相)이기 때문이다.
제3 총결. 앞에서 설한 육종추상(六種麤相)은 현상(現相)이 현(現)하는 경계에 의거하여 일어나고, 삼종세상(三種細相)은 무명(無明)에 친의(親依)한다. 이와 같이 육·삼이 모든 염(染)을 총섭하니, 이 때문에 마땅히 알라, 무명주지(無明住地)가 능히 일체 염법(染法)의 근본을 생(生)한다. 모든 염상(染相)이 비록 추세(麤細)가 있어도 모두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불각(不覺)하고, 불각의 상(相)이 무명(無明)의 기(氣)이므로 '일체 염법이 모두 불각상(不覺相)이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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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覺)과 불각(不覺)의 동상(同相)과 이상(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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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각(覺)과 불각(不覺)에 두 가지 상(相)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동상(同相)이고 둘은 이상(異相)이다. 동상(同相)이란 비유하면 종종의 와기(瓦器)가 모두 미진(微塵)의 성상(性相)과 같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종종 업환(業幻)이 모두 진여성상(眞如性相)과 같다. 이 때문에 수다라(脩多羅) 중에서 이 진여의(眞如義)에 의거하여 '일체 중생이 본래 상주(常住)하여 열반보리법(涅槃菩提法)에 들어 있으니, 수(修)할 수 있는 상(相)도 아니고 작(作)할 수 있는 상도 아니어서 필경코 얻을 것도 없고, 또한 볼 수 있는 색상(色相)도 없다. 그러나 색상을 봄이 있는 자는 오직 염업환(染業幻)이 지은 바이지 지색불공(智色不空)의 성(性)이 아니니 지상(智相)은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이상(異相)이란 종종의 와기가 각각 같지 않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이 염환(染幻)을 따라 차별하고 성염환(性染幻)이 차별하기 때문이다.
제3 동이상(同異相)을 밝힌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열명(列名)·차제변상(次第辨相)이다. 변상(辨相) 중에서 먼저 동상(同相)을 밝힌다.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인유(引喩)·합유(合喩)·인증(引證)이다.
제2 중에서 '무루(無漏)'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고, '무명(無明)'이란 본말불각(本末不覺)이다. 이 둘은 모두 업용(業用)의 현현(顯現)이 있으나 정유(定有)가 아니므로 업환(業幻)이라 이름한다.
제3 중에서 '본래 상주하여 열반보리법에 들어 있다'는 것은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른 바와 같이, 마땅히 이 중의 성정보리(性淨菩提)와 본래청정열반(本來淸淨涅槃)에 의거하여 모든 중생이 본래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修)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는 것은 인행(因行)이 없기 때문이고, '작(作)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는 것은 과기(果起)가 없기 때문이며, '필경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은 능득자(能得者)도 없고 득시(得時)도 없고 득처(得處)도 없기 때문이다.
이상(異相)을 밝히는 중에서 합(合) 중에서 '염환차별(染幻差別)을 따른다'는 것은 무루법(無漏法)이고, '성염환차별(性染幻差別)'은 무명법(無明法)이다. 본말무명(本末無明)은 평등성(平等性)을 어기므로 그 성(性)에 스스로 차별이 있다. 모든 무루법(無漏法)은 평등성에 수순(隨順)하여 직접 그 성(性)에 두면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 다만 염법(染法)의 차별상(差別相)을 따르므로 무루에 차별이 있다고 설한다. 이른바 업식(業識) 등 염법의 차별에 대하여 본각(本覺)의 항사(恒沙)의 성덕(性德)을 설하고, 또 이 모든 법의 차별을 대치하므로 시각(始覺)의 만덕(萬德)의 차별이 이루어진다.
【별기(別記)】
이 때문에 무루(無漏)는 다만 저 염(染)을 따라 차별이 있을 뿐이지 자성(自性)으로 인해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염정(染淨)은 모두 상대(相待)로서 현현(顯現)이 없지 않으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통칭하여 환차별(幻差別)이라 한다.
위에서 입의분(立義分) 중의 '시심생멸(是心生滅)'을 광석(廣釋)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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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생멸인연(生滅因緣)을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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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그 인연(因緣)을 해석한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생멸이 인연에 의거하는 의(義)를 밝히고 뒤에 소의인연(所依因緣)의 체상(體相)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와 별석(別釋)이다.
다시, 생멸인연(生滅因緣)이란 이른바 중생이 심(心)·의(意)·의식(意識)에 의거하여 전(轉)하기 때문이다.
처음 중에서 '인연(因緣)'이란 아뢰야심체(阿棃耶心體)가 변화하여 모든 법을 짓는 것이 생멸의 인(因)이고,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심체를 훈동(熏動)하는 것이 생멸의 연(緣)이다. 또 무명주지(無明住地)의 모든 염의 근본이 모든 생멸을 일으키므로 인(因)이라 설하고, 육진경계(六塵境界)가 능히 칠식파랑(七識波浪)을 동(動)하는 생멸이 생멸의 연(緣)이다. 이 이의(二義)에 의거하여 인연(因緣)을 드러낸다. 모든 생멸상(生滅相)이 취집(聚集)하여 생겨나므로 중생(衆生)이라 이름하되 별체(別體)가 없고 오직 심체(心體)에 의거하니 그러므로 '심에 의거한다'고 한다. 능의중생(能依衆生)이 의(意)와 의식(意識)이니 그러므로 '의(意)·의식(意識)이 전(轉)한다'고 한다.
이하 별석(別釋).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의심(依心)을 해석하고, 다음에 의전(意轉)을 해석하며, 뒤에 의식전(意識轉)을 해석한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아뢰야식(阿棃耶識)에 의거하여 무명이 있다고 설한다.
처음 중에서 '아뢰야식'이란 위에서 설한 심(心)이 곧 생멸의 인(因)이고, '무명이 있다고 설한다'는 것은 뢰야식(棃耶識) 안에 있어 곧 생멸의 연(緣)이다.
【별기(別記)】
마땅히 알라, 무명주지(無明住地)는 칠식(七識)에 속하지 않고 또한 저 훈습종자(熏習種子)도 아니다.
불각(不覺)하여 일어나 능견(能見)·능현(能現)·능취경계(能取境界)·기념상속(起念相續)하므로 의(意)라 설한다. 이 의(意)에 다시 오종명(五種名)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하나는 업식(業識)이라 이름하니 무명력(無明力)으로 불각(不覺)하여 심이 동(動)하기 때문이다. 둘은 전식(轉識)이라 이름하니 동심(動心)에 의거하여 능견상(能見相)이 있기 때문이다. 셋은 현식(現識)이라 이름하니 이른바 능히 일체 경계를 현(現)함이 마치 명경(明鏡)이 색상(色像)을 현(現)하는 것과 같아 현식(現識)도 이와 같다. 오진(五塵)을 따라 대(對)에 이르면 곧 현(現)하여 전후(前後)가 없으니 일체 시(時)에 임운(任運)하여 일어나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은 지식(智識)이라 이름하니 염정법(染淨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은 상속식(相續識)이라 이름하니 염(念)이 상응(相應)하여 부단(不斷)하기 때문이다. 과거 무량세 등의 선악업(善惡業)을 주지(住持)하여 실(失)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능히 현재·미래의 고락(苦樂)의 과보(果報)를 성숙시켜 차위(差違)가 없기 때문이다. 능히 현재에 이미 지난 일을 홀연히 념(念)하게 하고, 미래의 일을 불각(不覺)하고 망려(妄慮)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삼계(三界)의 허위(虛僞)는 오직 심(心)이 지어 유심소작(唯心所作)이니 심을 여의면 곧 육진경계(六塵境界)가 없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심(心)에서 일어나 망념(妄念)으로 생(生)하기 때문이다. 일체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다. 심은 심을 볼 수 없으니 얻을 수 있는 상(相)이 없다. 마땅히 알라, 세간의 일체 경계는 모두 중생의 무명망심(無明妄心)에 의거하여 주지(住持)된다. 이 때문에 일체법은 경중상(鏡中像)과 같아 얻을 수 있는 체(體)가 없고 오직 심(心)의 허망(虛妄)이니, 심이 생(生)하면 종종의 법이 생(生)하고 심이 멸(滅)하면 종종의 법이 멸(滅)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의전(意轉)을 해석한다.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의전(意轉)을 간략히 밝히고, 둘은 전상(轉相)을 넓게 드러내며, 셋은 의심(依心)의 의(義)를 결성(結成)한다.
처음 중에서 오종식상(五種識相)을 밝힌다. '불각(不覺)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소의심체(所依心體)가 무명(無明)의 훈(熏)으로 인해 전체(擧體)로 기동(起動)하니 곧 업식(業識)이다. '능견(能見)이다'는 것은 저 심체(心體)가 전변하여 능견(能見)이 되니 전식(轉識)이다. '능현(能現)이다'는 것은 저 심체가 다시 능현(能現)이 되니 현식(現識)이다. '능취경계(能取境界)이다'는 것은 현식(現識)이 현(現)하는 경계를 취하니 지식(智識)이다. '기념상속(起念相續)이다'는 것은 취하는 경계에서 모든 추념(麤念)을 일으키니 상속식(相續識)이다. 이 오의(五義)에 의거하여 차제로 전성(轉成)하여 능히 모든 경계에 대하여 의식(意識)을 생(生)하므로 이 다섯을 의(意)라 설한다.
【별기(別記)】
이 중의 제5는 오히려 의식(意識)이지만 뒤를 낳는 의(義)에 의거하여 통하여 의(意) 중에 들어가 섭(攝)한다.
이 의(意) 이하는 제2 광명(廣明)이다. 별석(別釋) 중에서 '무명력(無明力)'이란 소의연(所依緣)을 드는 것이고, '불각심동(不覺心動)'이란 업(業)의 의(義)를 해석하는 것이다. 전식(轉識) 중에서 '동심에 의거하여 능견상(能見相)이 있다'는 것은 앞의 업식(業識)의 동(動)에 의거하여 전변하여 능견(能見)의 상(相)이 됨이다. 그런데 전식(轉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명에 동(動)되어 전변하여 능견이 된 것은 본식(本識)에 있고, 경계에 동(動)되어 전변하여 능견이 된 것은 칠식(七識)을 말한다. 이 중의 전상(轉相)은 첫 번째 의(義)에 의거한다.
현식(現識) 중에서 '일체 경계를 현(現)한다'는 것은 앞의 전식(轉識)의 견(見)에 의거하여 다시 능현(能現)의 용(用)을 일으킨다. 합(合) 중에서 '오진(五塵)'이란 추현(麤顯)을 들어 색상(色像)에 합한 것이다. 실로는 통하여 일체 경계를 현(現)하기 때문이다. '일체 시(時)에 임운(任運)하여 일어나 항상 앞에 있다'는 것은 제6·7식처럼 때때로 단멸(斷滅)이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증(文證)에 의거하여 마땅히 이 셋이 모두 본식(本識) 안의 별용(別用)임을 알아야 한다.
【별기(別記)】
삼현상(三現相)이란 오히려 위의 삼상(三相) 중의 경계상(境界相)이다. 다만 이 중에서 전식(轉識)을 여의고 따로 경상(境相)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 능현(能現)을 들어 소현(所現)의 경계를 밝힌다. '일체 시(時)에 임운(任運)하여 일어나 항상 앞에 있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현식(現識)이 결정코 제8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업식(業識) 등이 이것의 본(本)이 되어 그 상(相)이 더욱 세밀하다. 어찌 억지로 칠식(七識) 중에 두겠는가.
제4 지식(智識)이란 제7식으로 위의 육상(六相) 안의 처음 지상(智相)이다. 염정법(染淨法)을 분별하여 아아소(我我所)를 계(計)하므로 '염정법을 분별한다'고 한다. 제5 상속식(相續識)이란 곧 의식(意識)으로 위의 육상 중 상속상(相續相)이다. '념이 상응하여 부단하다'는 것은 법집(法執)이 상응하여 장상속(長相續)함이다.
다음 '이미 지난 일을 념하고 미래의 일을 망려(妄慮)한다'는 것은 이 식의 용(用)이 추현(麤顯)한 분별이어서 지식(智識)의 미세한 분별과 다름을 드러낸다. 이로써 이 식이 오직 의식(意識)에 있고 위에서 설한 상속심(相續心)과 다름을 안다.
이 때문에 이하는 제3 의심(依心)의 의(義)를 결명(結明)한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략(略)하고 뒤에 광(廣)하다. 처음 '이 때문에'란 앞에서 설한 오종식(五種識) 등이 심(心)에 의거하여 이루어짐이다. 이 뜻에 의거하여 삼계(三界)의 모든 법이 오직 심이 지었으니 그러므로 삼계유심소작(三界唯心所作)이다.
'이 의가 무엇인가' 이하는 광석(廣釋)이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모든 법이 없지 않으면서 있지 않음을 밝히고, 뒤에 모든 법이 있지 않으면서 모두 없지 않음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일체법이 모두 심에서 일어나 망념으로 생한다'는 것은 모든 법이 없지 않음이 현현함을 밝힌다. '일체 분별이 곧 자심을 분별하는 것이고 심은 심을 볼 수 없어 얻을 수 있는 상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이 있지 않음의 의이다.
【별기(別記) 문답】
문(問): 집량론(集量論)에서 "모든 심심법(心心法)이 모두 자체를 증득하는 것을 현량(現量)이라 이름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은 응당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는데, 이 중의 경(經)에서는 '자(自)를 볼 수 없다'고 하니 이와 같이 서로 위배된다. 어떻게 회통하는가?
답(答): 이 두 가지 의(義)에 다른 뜻이 있으므로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 이 경론(經論)의 뜻은 견분(見分) 밖에 따로 상분(相分)이 없어 상분(相分)은 현(現)하나 볼 것이 없고, 또한 이 견분이 반(反)하여 견분을 본다고 설할 수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두 용(用)이 아니고 밖을 향해 일어나기 때문에 도(刀)와 지(指)를 동법유(同法喩)로 삼은 것이다. 집량론(集量論)의 뜻은 비록 견분이 스스로 볼 수 없으나 자증분(自證分)의 용(用)이 있어 견분의 체(體)를 증득할 수 있다. 용이 다르고 안을 향해 일어나기 때문에 등염(燈燄)을 동법유로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
'마땅히 알라' 이하는 다음으로 있지 않으면서 없지 않음의 의(義)를 밝힌다. 처음 '마땅히 알라, 세간이 내지 얻을 수 있는 체가 없고 오직 심(心)의 허망이다'는 것은 있지 않음을 밝힌다. 다음 '심이 생하면 법이 생한다' 이하는 없지 않음을 드러낸다. 무명력(無明力)으로 불각심이 동(動)하고 내지 능히 일체 경계를 현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명심(無明心)이 멸하면 경계가 따라 멸하여 모든 분별식(分別識)이 모두 멸진(滅盡)하니 '심멸(心滅)하면 종종의 법이 멸한다'고 한다. 찰나(刹那)로써 생멸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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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의식(意識)을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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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의식(意識)이란 이 상속식(相續識)이 모든 범부(凡夫)의 취착(取著)이 전전(轉轉)히 깊어져 아아소(我我所)를 계(計)하여 종종의 망집(妄執)으로 사(事)를 따라 반연(攀緣)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하니 의식(意識)이라 이름한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이름한다. 이 식은 견애번뇌(見愛煩惱)의 증장의(增長義)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의식(意識)을 해석한다. 의식은 곧 앞의 상속식(相續識)이다. 다만 법집(法執)의 분별이 상응하여 뒤를 낳는 의문(義門)에 나아가면 의(意)라 설하고, 능히 견애번뇌(見愛煩惱)를 일으키는 전생문(前生門)에 의거하면 의식(意識)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의식이란 이 상속'이라 하고 내지 '육진을 분별하니 의식이라 이름한다'고 한다.
이 론(論)은 일의식의(一意識義)에 나아가므로 안(眼) 등의 오식(五識)을 별출(別出)하지 않고 의식이 육진을 분별한다고 설한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육근(六根)에 의거하여 육진(六塵)을 별취(別取)하는 것이니 말나(末那)처럼 별근(別根)에 의거하지 않으므로 분리(分離)라 이름한다. 또 능히 거래(去來) 내외(內外)의 종종의 사상(事相)을 분별하므로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이름한다. '견애번뇌의 증장의에 의거하기 때문이다'는 것은 분별사식의 의(義)를 해석하는 것이다. 견수번뇌(見修煩惱)의 증장에 의거하므로 종종의 사(事)를 분별할 수 있다. 위의 육상(六相) 안의 수(受)·상(想)·행(行)의 온(蘊)이 상종(相從)하여 이 의식 중에 들어가 섭(攝)된다. 위에서 생멸이 인연의(因緣義)에 의거함을 넓게 밝힘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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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3권 끝
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四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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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소의인연체상(所依因緣體相)을 거듭 드러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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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소의인연(所依因緣)의 체상(體相)을 거듭 드러낸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인연(因緣)의 심심(甚深)함을 간략히 밝히고, 둘은 인연의 차별을 넓게 드러낸다.
무명훈습(無明熏習)으로 일어난 식(識)은 범부가 능히 알 수 없고,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로도 각(覺)할 수 없다. 이른바 보살이 초정신(初正信)으로 발심(發心)하여 관찰하여 만약 법신(法身)을 증(證)하면 소분(少分)이나 알 수 있고, 내지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서도 능히 다 알 수 없으며 오직 부처님만이 궁료(窮了)하신다. 무슨 까닭인가? 이 심(心)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청정하면서도 무명(無明)이 있어 무명에 물들어 염심(染心)이 있다. 비록 염심이 있어도 항상 변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이 의(義)는 오직 부처님만이 아신다.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 심심(甚深)함을 표(標)하고 다음에 해석하며 뒤에 결(結)한다. 처음 중에서 '무명훈습으로 일어난 식'이란 위에서 설한 '아뢰야식에 의거하여 무명이 있어 불각하여 일어난다' 등을 서(牒)한 것이다.
【별기(別記)】
만약 이 심체(心體)가 일향(一向) 생멸하여 바로 염심(染心)이라면 알기 어렵지 않다. 또 일향 상주(常住)하여 오직 정심(淨心)이라면 이(離)하여 알기도 어렵지 않다. 설령 체는 실로 정(淨)하나 상(相)이 염(染)과 비슷하다면 또한 쉽게 해득할 수 있다. 만약 식체(識體)가 동(動)하면서 공성(空性)이 정(靜)하다면 알기 어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심의 체(體)는 정(淨)하면서 체(體)가 염(染)하고 심이 동(動)하면서 심이 정(靜)하여, 염정(染淨)이 무이(無二)하고 동정(動靜)이 막별(莫別)하다. 무이무별(無二無別)이면서 또한 하나가 아니니, 이와 같은 절경(絶境)이므로 알기 어렵다.
'하이고(何以故)' 이하는 심의(深義)를 해석한다.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면서도 무명에 물들어 염심이 있다'는 것은 정(淨)하면서 항상 염(染)함을 밝힌다. '비록 염심이 있어도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動)하면서 항상 정(靜)함을 밝힌다. 이 도리로 인해 심심(甚深)하여 측량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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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인연차별(廣顯因緣差別) — 육문(六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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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인연의 차별을 넓게 드러낸다. 그 안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심성인(心性因)의 체상(體相)을 밝히고, 둘은 무명연(無明緣)의 체상을 드러내며, 셋은 염심(染心)의 모든 연(緣)의 차별을 밝히고, 넷은 무명(無明)의 치단위지(治斷位地)를 드러내며, 다섯은 상응(相應)·불상응(不相應)의 의(義)를 해석하고, 여섯은 지애(智礙)·번뇌애(煩惱礙)의 의(義)를 변(辨)한다.
이른바 심성(心性)은 항상 무념(無念)하므로 불변(不變)이라 이름한다.
처음 중에서 위의 '비록 염심이 있어도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의(義)를 해석한다. 비록 전체(擧體)로 동(動)하나 본래 적정(寂靜)하므로 '심성은 항상 무념이다'라고 한다.
일법계(一法界)에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불상응(心不相應)하여 홀연히 념(念)이 일어나니 무명(無明)이라 이름한다.
제2 중에서 '심불상응(心不相應)'이란 이 무명이 최극미세(最極微細)하여 아직 능소(能所)의 왕수(王數)의 차별이 없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심불상응이다'라고 한다. 오직 이것이 근본(根本)이 되고 이것보다 세밀하게 그 앞에 있는 별도의 염법이 없다. 이 뜻에 의거하여 홀연히 일어난다고 설한다. 본업경(本業經)에서 이르기를 "사주지(四住地) 앞에 다시 일어나는 법이 없으므로 무시무명주지(無始無明住地)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 앞에 별도로 시작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오직 이것이 근본이므로 무시(無始)라 한다. 이것은 세(細)와 추(麤)가 서로 의거하는 문(門)에서 앞이 없다고 설한 것으로, 또한 홀연히 일어난다고도 한다. 시절(時節)에 의거하여 홀연히 일어난다고 설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위에서 '자성이 청정하면서도 무명이 있어 무명에 물들어 염심이 있다'는 구절을 해석한다.
【별기(別記)】
다만 염심(染心)이 추(麤)에서 세(細)로 나아가면서 능히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 하여금 따라 점점 사(捨)하고 점점 그치는 의(義)가 있게 한다. 이 뜻에 의거하여 무명의 치단(治斷)을 뒤에서 비로소 설한다.
염심(染心)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섯인가? 하나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二乘)의 해탈(解脫)과 신상응지(信相應地)에 의거하여 원리(遠離)하기 때문이다. 둘은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信相應地)에서 방편을 수학(修學)하여 점점 능히 사(捨)하여 정심지(淨心地)를 얻어 구경리(究竟離)하기 때문이다. 셋은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거하여 점점 여의고 내지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서 구경리(究竟離)하기 때문이다. 넷은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거하여 능히 여의기 때문이다. 다섯은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에 의거하여 능히 여의기 때문이다. 여섯은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의거하여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능히 여의기 때문이다.
제3 염심(染心)의 모든 연(緣)의 차별을 밝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와 별석(別釋)이다. 별석 중에서 겸하여 치단(治斷)을 드러낸다. 이 중의 육염(六染)이 곧 위의 의식(意識) 및 오종의(五種意)이다.
제1 집상응염(執相應染)이란 곧 의식이다. 견애번뇌(見愛煩惱)의 증장의(增長義)이며 추분별집(麤分別執)이 상응(相應)하기 때문이다. 이승인(二乘人)이 나한위(羅漢位)에 이르면 견수번뇌(見修煩惱)가 구경리(究竟離)하고, 보살을 논하면 십해(十解) 이상에서 원리(遠離)할 수 있다. '신상응지(信相應地)'란 십해위(十解位)에 있어 신근(信根)이 성취되어 퇴실(退失)이 없으니 신상응이라 이름한다. 이 위(位)에 들어갈 때 이미 인공(人空)을 얻어 견수번뇌가 현행(現行)을 얻지 못하므로 리(離)라 이름한다.
【별기(別記)】
종자(種子)를 논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경론에서 설하는 치단위지(治斷位地)와도 크게 다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제2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란 오종의(五種意) 중의 상속식(相續識)이다. 법집(法執)이 상응하여 상속생기(相續生起)하니 부단(不斷)이 곧 상속의 다른 이름이다. 십해위(十解位)에서 유식관(唯識觀)과 심사방편(尋思方便)을 닦고 내지 초지(初地)에서 삼무성(三無性)을 증(證)하면 법집분별(法執分別)이 현행을 얻지 못하므로 '정심지(淨心地)를 얻어 구경리한다'고 한다.
제3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란 오종의 중의 제4 지식(智識)이다. 칠지(七地) 이전에서 이지(二智)가 일어날 때 현행(現行)을 얻지 못하고 관(觀)에서 나와 사(事)를 연할 때 임운심(任運心)에서는 또한 현행할 수 있으므로 '점점 여읜다'고 한다. 칠지 이상에서는 장시(長時) 입관(入觀)하므로 이 말나(末那)가 영원히 현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서 구경리한다'고 한다.
【별기(別記)】
이 의(義)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의 설과 같다. 그 종자를 논하면 금강심(金剛心)에 이르러 바야흐로 돈단(頓斷)한다. 위의 삼염(三染)은 행상(行相)이 추(麤)하고 삼등(三等)의 의(義)가 갖추어지므로 상응(相應)이라 이름한다.
제4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란 오종의 중의 제3 현식(現識)이다. 마치 명경(明鏡) 중에 색상(色像)을 현(現)하는 것 같으므로 현색불상응염이라 이름한다. '색자재지(色自在地)'는 제8지(地)이다. 이 지(地)에서 이미 정토(淨土)의 자재(自在)를 얻었으므로 예토(穢土)의 추색(麤色)을 현(現)하지 못한다. 제5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란 오의(五意) 안의 제2 전식(轉識)이다. '심자재지(心自在地)'는 제9지이다. 이 지에서 이미 사무애지(四無礙智)를 얻었으므로 유애능연(有礙能緣)이 현기(現起)하지 못한다. 제6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란 오의 안의 제1 업식(業識)이다. '보살진지(菩薩盡地)'는 제10지이다. 무구지(無垢地)가 이 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불요일법계의(不了一法界義)란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고 학단(學斷)하여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수분(隨分) 득리(得離)하고 내지 여래지(如來地)에서 구경리(究竟離)할 수 있다.
제4 무명(無明)의 치단(治斷)을 밝힌다. 무명주지(無明住地)에는 두 가지 의(義)가 있다. 작득주지(作得住地)의 문(門)을 논하면 초지(初地) 이상에서 점단(漸斷)할 수 있다. 생득주지(生得住地)의 문에 나아가면 오직 불(佛)의 보리지(菩提智)만이 능히 단(斷)할 수 있다. 지금 이 론(論) 중에서 생(生)·작(作)을 분별하지 않고 합설하여 이 둘을 통칭 무명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수분(隨分) 득리하고 내지 여래지에서 구경리할 수 있다'고 한다.
상응의(相應義)란 이른바 심(心)·념(念)·법(法)이 다르고 염정(染淨)의 차별에 의거하여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기 때문이다. 불상응의(不相應義)란 이른바 심(心)이 곧 불각(不覺)하여 항상 별이(別異)가 없어 지상(知相)·연상(緣相)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제5 상응(相應)·불상응(不相應)의 의(義)를 밝힌다. 육종염(六種染) 중에서 앞의 삼염(三染)은 상응이고 뒤의 삼염(三染) 및 무명은 불상응이다. 상응 중에서 '심념법이(心念法異)'란 심법(心法)의 명칭이다. '염정의 차별에 의거한다'는 것은 염정의 모든 법인 견(見)·만(慢)·애(愛) 등의 차별을 분별하는 것이다. '지상이 같다[知相同]'는 것은 능지상(能知相)이 같음이고, '연상이 같다[緣相同]'는 것은 소연(所緣)이 같음이다. 이 중에서 삼등(三等)의 의(義)에 의거하여 상응이라 설하니, '심념법이'란 체등(體等)의 의이고 '지상이 같다'는 것은 지등(知等)의 의이며 '연상이 같다'는 것은 연등(緣等)의 의이다.
문(問): 유가론(瑜伽論)에서 "모든 심심법(心心法)이 동일소연(同一所緣)이나 동일행상(同一行相)은 아니다"고 하는데, 지금 이 중에서 지상(知相)도 같다고 설한다. 이와 같이 서로 위배된다. 어떻게 회통하는가?
답(答): 두 의(義)가 함께 있으므로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 예컨대 아견(我見)은 견성(見性)의 행(行)이고 아애(我愛)는 애성(愛性)의 행이니, 이와 같이 행이 다른 것을 동일행상이 아니라 이름한다. 그러나 견(見)·애(愛) 등이 모두 아해(我解)를 짓는다. 이 의에 의거하여 지상이 같다[知相同]고 이름한다.
불상응 중에서 '심이 곧 불각하여 항상 별이가 없다'는 것은 체등(體等)의 의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니, 심을 여의고 별도의 수법(數法)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체등이 없으니 나머지 둘은 어디에 의기(依寄)하겠는가. 그러므로 동지(同知)·동연(同緣)의 의(義)가 없다. 그러므로 '지상·연상과 같지 않다'고 한다. 이 중의 '불(不)'은 없다[無]는 뜻이다.
또한 염심(染心)의 의(義)는 번뇌애(煩惱礙)라 이름하니 능히 진여근본지(眞如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무명(無明)의 의(義)는 지애(智礙)라 이름하니 능히 세간자연업지(世間自然業智)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염심(染心)에 의거하여 능견(能見)·능현(能現)하여 망취(妄取)하는 경계가 평등성(平等性)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항상 적정(寂靜)하여 기상(起相)이 없는데 무명(無明)이 불각(不覺)하여 망연(妄然)히 법(法)을 어기기 때문에 능히 세간의 일체 경계의 종종지(種種知)를 수순하여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6 이애(二礙)의 의(義)를 밝힌다. 현료문(顯了門) 중에서는 이장(二障)이라 이름하고 은밀문(隱密門) 안에서는 이애(二礙)라 이름한다. 이 의(義)는 이장장(二障章)에서 자세히 설한다. 지금 이 문장 중에서 은밀문을 설한다. 처음 중에서 '염심의(染心義)'란 육종염심(六種染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근본지(根本智)'란 조적혜(照寂慧)로서 적정(寂靜)을 어기므로 번뇌애(煩惱礙)라 이름한다. '무명의(無明義)'란 근본무명이고, '세간업지(世間業智)'란 후득지(後得智)이다. 무명이 혼미(昏迷)하여 분별이 없으므로 세간의 분별의 지(智)를 어긴다. 이 의에 의거하여 지애(智礙)라 이름한다.
【별기(別記)】
이장(二障)의 의(義)에 대략 두 문(門)이 있다. 하나는 이승(二乘)에 통하는 것으로 십사번뇌(十使煩惱)가 능히 유전(流轉)하게 하여 열반과(涅槃果)를 장애하니 번뇌장(煩惱障)이라 이름한다. 보살에 별도로 있는 것으로 법집(法執) 등의 혹(惑)이 소지경(所知境)을 미혹하여 보리과(菩提果)를 장애하니 소지장(所知障)이라 이름한다. 이 문(門)은 나머지 경론의 설과 같다. 둘은 일체 동념취상(動念取相) 등의 심(心)이 여이지(如理智)의 적정성(寂靜性)을 위반하니 번뇌애(煩惱礙)라 이름한다. 근본무명(根本無明)이 혼미불각(昏迷不覺)하여 여량지(如量智)의 각찰용(覺察用)을 위반하니 지애(智礙)라 이름한다. 지금 이 론(論) 중에서는 후문(後門)의 의(義)에 의거하므로 육종염심(六種染心)을 번뇌애라 하고 무명주지(無明住地)를 지애라 한다.
위에서 제2 생멸인연의(生滅因緣義)를 광석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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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생멸의 상(相)을 넓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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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위의 입의분(立義分) 중의 생멸상(生滅相)을 넓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생멸의 추세(麤細)한 상을 밝히고 뒤에 추세한 생멸의 의(義)를 드러낸다.
다시, 생멸상(生滅相)을 분별하면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추(麤)이니 심과 상응(相應)하기 때문이고, 둘은 세(細)이니 심과 불상응(不相應)하기 때문이다. 또 추중지추(麤中之麤)는 범부(凡夫)의 경계이고, 추중지세(麤中之細) 및 세중지추(細中之麤)는 보살의 경계이며, 세중지세(細中之細)는 불(佛)의 경계이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추세(麤細)를 바르게 밝히고 둘은 사람에 대하여 분별한다. 처음 중에서 '하나는 추이니 심과 상응하기 때문이다'는 것은 육종염(六種染) 중의 앞의 삼염(三染)이 심상응(心相應)이니 그 상이 추현(麤顯)하여 경(經) 중에서 상생멸(相生滅)이라 이름한다. '둘은 세이니 심과 불상응하기 때문이다'는 것은 뒤의 삼염심(三染心)이 불상응이니 심심법(心心法)의 추현한 상이 없고 그 체가 미세(微細)하여 항류부절(恒流不絶)하므로 경 중에서 상속생멸(相續生滅)이라 이름한다.
대인분별(對人分別) 중에서 추중지추(麤中之麤)란 앞의 셋 중의 처음 둘이다. 추중지세(麤中之細)란 이 셋 중의 마지막 하나이다. 뒤의 처음 둘은 능현(能現)·능견(能見)이니 능소(能所)의 차별이 있으므로 보살이 아는 것이다. 최후의 하나는 능소(能所)가 아직 분(分)하지 않았으므로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신다.
이 이종생멸(二種生滅)은 무명훈습(無明熏習)에 의거하여 있다. 이른바 인(因)에 의거하고 연(緣)에 의거한다. 인에 의거한다는 것은 불각의(不覺義)이기 때문이고, 연에 의거한다는 것은 망작경계의(妄作境界義)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이 멸하면 곧 연도 멸한다. 인이 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하고, 연이 멸하기 때문에 상응심(相應心)이 멸한다.
문왈(問曰): 만약 심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相續)하는가? 만약 상속한다면 어떻게 구경멸(究竟滅)을 설하는가?
답왈(答曰): 소언멸(所言滅)이란 오직 심상(心相)이 멸하는 것이지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바람이 물에 의거하여 동상(動相)이 있는 것처럼, 만약 물이 멸하면 풍상(風相)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을 것이다. 물이 멸하지 않으므로 풍상이 상속한다. 오직 바람이 멸하기 때문에 동상(動相)이 따라 멸하는 것이지 물이 멸하는 것이 아니다. 무명도 이와 같으니 심체에 의거하여 동(動)한다. 만약 심체가 멸하면 중생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을 것이다. 체(體)가 멸하지 않으므로 심이 상속할 수 있다. 오직 치(癡)가 멸하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따라 멸하는 것이지 심지(心智)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제2 생멸의(生滅義)를 밝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생연(生緣)을 밝히고 뒤에 멸의(滅義)를 드러낸다.
통(通)하여 말하면 추세이식(麤細二識)이 모두 무명주지(無明住地)에 의거하여 일어나므로 '이종생멸은 무명훈습에 의거하여 있다'고 한다. 별(別)하여 말하면 무명인(無明因)에 의거하여 불상응심(不相應心)이 생(生)하고, 경계연(境界緣)에 의거하여 상응심(相應心)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인에 의거한다는 것은 불각의이기 때문이고 연에 의거한다는 것은 망작경계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별기(別記)】
불각의(不覺義)란 근본무명이고 망작경계(妄作境界)란 현식(現識)이 현(現)하는 경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각 두 가지 인(因)이 있다. 사권경(四卷經)에서 이르기를 "대혜(大慧)여, 불사의훈(不思議熏)과 불사의변(不思議變)이 현식(現識)의 인(因)이다. 종종진(種種塵)을 취함과 무시망상훈(無始妄想熏)이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인이다"라고 하였다. 불사의훈(不思議熏)이란 무명이 능히 진여를 훈(熏)하되 훈(熏)할 수 없는 곳에서 능히 훈하기 때문이다. 불사의변(不思議變)이란 진여가 무명의 훈(熏)을 받아 변이할 수 없는데도 변이하기 때문이다. 이 훈과 변이 지극히 미세하고 은밀하므로 그 일으키는 현식(現識)의 행상(行相)이 미세하다. 그 안에도 전식(轉識)·업식(業識)이 있으나 추(麤)를 들어 세(細)를 겸하므로 다만 현식이라 이름한다. '종종진을 취한다'는 것은 현식이 취하는 종종의 경계가 능히 심해(心海)를 동(動)하여 칠식파랑(七識波浪)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무시망상훈(無始妄想熏)'이란 저 현식을 망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본래부터 일찍이 상(想)을 여읜 적이 없으므로 무시망상이라 이름한다.
'만약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한다' 이하는 다음으로 멸의(滅義)를 드러낸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직명(直明)이고 '문왈(問曰)' 이하는 왕복제의(往復除疑)이다. 처음 중에서 '만약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한다'는 것은 어떤 위(位)에서 대치(對治)를 얻을 때 무명인(無明因)이 멸하면 경계가 따라 멸함을 말한다. '인이 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한다'는 것은 삼종불상응심(三種不相應心)이 무명인에 친의(親依)하여 생(生)하기 때문이다. '연이 멸하기 때문에 상응심(相應心)이 멸한다'는 것은 삼종상응염심(三種相應染心)이 경계연에 친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왕복제의(往復除疑) 중에서 먼저 물음이고 뒤에 답이다. 문 중에서 '만약 심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는가'는 외도(外道)의 설에 대하여 이와 같은 물음을 짓는 것이다. 지금 이 론에서 이에 의거하여 묻는다. 만약 무상정(無想定)·멸진정(滅盡定)에 들 때 심체가 멸한다면 어떻게 다시 상속하는가. 그러므로 '만약 심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는가'라고 한다. 만약 그 때 심체가 멸하지 않고 다시 상속한다면 이 상속상(相續相)은 무엇으로 인해 영원히 멸하는가. 그러므로 '어떻게 구경멸을 설하는가'라고 한다.
답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유(喩)·합(合)이다. 처음 법(法) 중에서 소언멸(所言滅)이란 무상(無想) 등에 들 때 모든 식이 멸한다고 설하는 것은 다만 추식(麤識)의 상(相)이 멸함이지 아뢰야심체(阿棃耶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심상이 멸한다'고 한다. 또한 위에서 '인이 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이 멸한다'고 설한 것은 다만 심 중의 업상(業相) 등이 멸함을 설한 것이지 자상심체(自相心體)가 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喩) 중에서 '바람이 물에 의거하여 동상이 있다'는 것은 무명풍이 심에 의거하여 동함을 비유한다. '물이 멸하지 않으므로 풍상이 상속한다'는 것은 무상(無想) 등에 들 때 심체가 멸하지 않으므로 모든 식이 상속함을 비유한다. 이것이 초문(初問)에 답한 것이다. '오직 바람이 멸하기 때문에 동상이 따라 멸한다'는 것은 불지(佛地)에 이를 때 무명이 영원히 멸하므로 업상(業相) 등의 동(動)도 따라 멸진(滅盡)하되 그 자상심체(自相心體)는 멸하지 않으니 '물이 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후문(後問)에 답하여 구경멸(究竟滅)을 밝힌다. '비심지멸(非心智滅)'이란 신해(神解)의 성(性)을 심지(心智)라 이름하니 위에서 '지성(智性)이 파괴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문(問): 이 식(識)의 자상(自相)은 일향(一向) 염연(染緣)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또한 연을 따르지 않는 의(義)가 있는가?
답(答): 혹 설하기를 이야심체(棃耶心體)는 이숙법(異熟法)으로 다만 업혹(業惑)이 변생(辨生)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업혹이 다할 때 본식(本識)이 모두 다한다. 그러나 불과(佛果)에서 또한 복혜이행(福慧二行)이 감(感)하는 대원경지(大圓鏡智)와 상응하는 정식(淨識)이 있으니, 두 처소에서 심의(心義)는 같다. 이 의로써 심이 불과(佛果)에 이른다고 설한다.
혹 설하기를 자상심체(自相心體)는 전체(擧體)로 저 무명이 일으킨 것이나 이는 동정(動靜)하여 일어나게 하는 것이지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 심의 동(動)은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 업상(業相)이라 이름한다. 이 동(動)하는 심이 본래 스스로 심이니 또한 자상(自相)이다. 자상의 의문(義門)에서는 무명으로 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무명이 동(動)하는 심에도 또한 자류상생(自類相生)의 의(義)가 있으므로 자연(自然)의 허물이 없고 불멸의 의가 있다. 무명이 다할 때 동상(動相)이 따라 멸하여 심이 시각(始覺)을 따라 본원(本源)으로 돌아간다.
혹 설하기를 두 사師의 설이 모두 도리가 있으니 모두 성전(聖典)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초사(初師)의 설은 유가의(瑜伽意)를 얻은 것으로 현료문(顯了門)에 의거하고, 후사(後師)의 의는 기신의(起信意)를 얻은 것으로 은밀문(隱密門)에 의거한다. 또한 언(言)대로 의(義)를 취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만약 초의(初義)와 같이 취한다면 곧 법아집(法我執)이고, 만약 후의(後義)와 같이 취한다면 인아견(人我見)이다. 또 초의를 집착하면 단견(斷見)에 떨어지고 후의를 집착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진다. 마땅히 알라, 두 의(義)는 모두 설할 수 없다. 비록 설할 수 없어도 또한 설할 수 있나니,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렇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생멸문(生滅門) 안의 두 분(分) 중의 처음 정광석(正廣釋)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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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인언중명(因言重明) — 사종훈습(四種熏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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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인언중명(因言重明)이다. 어째서인가? 위의 문장에서 '이 식에 두 가지 의(義)가 있어 능히 일체법을 섭하고 일체법을 생(生)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섭(攝)의 의(義)는 앞에서 이미 넓게 설하였고, 능생(能生)의 의(義)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 때문에 이하에서 이 의를 넓게 드러낸다. 문장 중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수(數)를 들어 총표하고, 둘은 수에 의거하여 명(名)을 열거하며, 셋은 훈습의(熏習義)를 총명(總明)하고, 넷은 훈습의 상(相)을 별현(別顯)하며, 다섯은 진(盡)과 부진(不盡)의 의(義)를 밝힌다.
다시, 네 가지 법(法)의 훈습의(熏習義)가 있으므로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정법(淨法)이니 진여(眞如)라 이름하고, 둘은 일체염인(一切染因)이니 무명(無明)이라 이름하며, 셋은 망심(妄心)이니 업식(業識)이라 이름하고, 넷은 망경계(妄境界)이니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수(數)를 들고 명(名)을 열거하는 문상(文相)은 알 수 있다.
제3 중에서 먼저 유(喩)이고 뒤에 합(合)이다. 합(合) 중에서 '진여정법(眞如淨法)'은 본각의(本覺義)이고 '무명염법(無明染法)'은 불각의(不覺義)이다. 진실로 일식(一識)이 이 이의(二義)를 함축하여 더불어 서로 훈(熏)하여 두루 염정(染淨)을 생(生)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바로 경(經) 본문에서 설한 불사의훈(不思議熏)·불사의변(不思議變)의 의(義)를 해석하는 것이다.
문(問): 섭대승(攝大乘)에서 이르기를 "반드시 네 가지 의(義)를 갖추어야 훈(熏)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상법(常法)은 훈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에 이 중에서 진여를 훈한다고 설하는가?
해석하건대, 훈습의 의(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저 론(論)은 가사의훈(可思議熏)에 의거하여 상법(常法)은 훈을 받을 수 없다고 설한다. 이 론(論)은 불가사의훈(不可思議熏)을 밝히므로 무명이 진여를 훈하고 진여가 무명을 훈한다고 설하니 현의(顯意)가 같지 않으므로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장 중에서 생멸문 안의 성정본각(性淨本覺)을 진여라 설하므로 훈의(熏義)가 있다. 진여문 중의 진여(眞如)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진여문 중에서 능생의(能生義)를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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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훈습(染熏習)과 정훈습(淨熏習)을 별명(別明)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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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4 별명(別明)이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염(染)이고 뒤에 정(淨)이다.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染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眞如法)에 의거하여 무명(無明)이 있다. 무명의 염법인(染法因)이 있으므로 진여를 훈습한다.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妄心)이 있다. 망심이 있으므로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지(了知)하지 못한다. 불각(不覺)하여 념(念)이 일어나 망경계(妄境界)를 현(現)한다. 망경계의 염법연(染法緣)이 있으므로 망심(妄心)을 훈습하여 념착(念著)하게 하여 종종의 업(業)을 짓고 일체의 신심(身心)의 고(苦)를 받는다. 이 망경계의 훈습의(熏習義)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증장념훈습(增長念熏習)이고 둘은 증장취훈습(增長取熏習)이다. 망심훈습의(妄心熏習義)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이니 아라한(阿羅漢)·벽지불(辟支佛)·일체보살의 생멸고(生滅苦)를 받기 때문이다. 둘은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범부(凡夫)의 업계고(業繫苦)를 받기 때문이다. 무명훈습의(無明熏習義)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근본훈습(根本熏習)이니 능히 업식의(業識義)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둘은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熏習)이니 능히 분별사식의(分別事識義)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염(染)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물음이고 뒤에 답이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약명(略明)과 광현(廣顯)이다.
약(略) 중에서 '진여법에 의거하여 무명이 있다'는 것은 능훈(能熏)·소훈(所熏)의 체(體)를 드러내는 것이다. '무명이 진여를 훈습한다'는 것은 근본무명훈습의(根本無明熏習義)이다.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있다'는 것은 무명의 훈(熏)에 의거하여 업식심(業識心)이 있다. 이 망심이 다시 무명을 훈(熏)하여 불료(不了)를 더하므로 전식(轉識) 및 현식(現識) 등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불각하여 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현한다'고 한다.
【별기(別記)】
'불각념기(不覺念起)'는 전상(轉相)이고 '현망경계(現妄境界)'는 현상(現相)이다.
이 경계가 다시 현식(現識)을 훈하므로 '망심을 훈습한다'고 한다. '념착하게 한다'는 것은 제7식을 일으킴이고, '종종업을 짓는다'는 것은 의식(意識)을 일으킴이며, '일체고를 받는다'는 것은 업(業)에 의거하여 과보를 받는 것이다.
다음으로 광설(廣說) 중에서 앞의 삼의(三義)를 넓히되 뒤에서부터 설한다. 먼저 경계를 밝힌다. '증장념(增長念)'이란 경계력으로 사식(事識) 중의 법집분별념(法執分別念)을 증장함이고, '증장취(增長取)'란 사취번뇌장(四取煩惱障)을 증장함이다.
망심훈습 중에서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이란 이 업식이 능히 무명을 훈(熏)하여 무상(無相)에 미혹하여 전상(轉相)·현상(現相)·상속(相續)을 일으킨다. 저 삼승인(三乘人)이 삼계를 벗어날 때 비록 사식(事識)의 분단추고(分段麤苦)는 여의었어도 오히려 변역이야(變易梨耶)의 행고(行苦)를 받으니 '삼승의 생멸고를 받는다'고 한다.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란 범위(凡位)에서 분단고(分段苦)를 설한다.
무명훈습 중에서 '근본훈습(根本熏習)'이란 근본불각(根本不覺)이고,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熏習)'이란 무명이 일으키는 의식(意識)의 견애(見愛)이니 곧 지말불각의(枝末不覺義)이다.
【별기(別記)】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란 의식(意識)의 견애번뇌(見愛煩惱)가 증장하는 바이므로 삼계의 계업(繫業)의 과(果)를 받을 수 있다. '근본훈습(根本熏習)'이란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진여를 훈하여 그 동념(動念)을 일으키니 업식(業識)이라 이름하므로 업식의(業識義)를 성취한다고 한다.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熏習)'이란 근본무명이 일으키는 견애(見愛)가 의식을 훈하여 추분별을 일으키므로 분별사식의(分別事識義)를 성취한다고 한다.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眞如法)이 있으므로 능히 무명(無明)을 훈습한다. 훈습인연력(熏習因緣力)으로 인해 망심(妄心)으로 하여금 생사고(生死苦)를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즐겨 구하게 한다. 이 망심에 염구(厭求)의 인연이 있으므로 진여를 훈습하여 자신의 성(性)을 스스로 믿어 심(心)이 망동(妄動)함을 알고 앞에 경계가 없음을 알아 원리법(遠離法)을 닦는다. 여실(如實)히 앞에 경계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종종의 방편(方便)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취(取)하지 않고 념(念)하지 않는다. 내지 오래고 먼 훈습력(熏習力)으로 인해 무명이 곧 멸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심이 일어남이 없다.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 멸한다. 인연이 함께 멸하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모두 다하나니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름이라 이름한다.
다음으로 정훈(淨熏)을 밝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물음이고 뒤에 답이다. 답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약명(略明)과 광현(廣顯)이다.
약(略) 중에서 먼저 진여훈습을 밝히고 다음에 망심훈습을 밝힌다. 이 중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처음 '이 망심이 내지 자신의 성을 스스로 믿는다'는 것은 십신위(十信位) 중의 신(信)을 밝힌다. 다음 '심이 망동함을 알고 앞에 경계가 없음을 알아 원리법을 닦는다'는 것은 삼현위(三賢位) 중의 수(修)를 드러낸다. '여실히 앞에 경계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는 것은 초지(初地)의 견도(見道)에서 유식관(唯識觀)이 이루어짐을 밝힌다. '종종' 이하 내지 '오래고 먼 훈습력이다'는 것은 십지(十地)의 수도위(修道位) 중의 만행(萬行)을 수(修)함을 드러낸다. '무명이 곧 멸한다' 이하는 다섯 번째로 과지(果地)에서 열반을 증(證)함을 드러낸다.
망심훈습의(妄心熏習義)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니 모든 범부(凡夫)와 이승인(二乘人) 등이 생사고(生死苦)를 싫어하여 능력이 닿는 대로 점점 무상도(無上道)를 향하기 때문이다. 둘은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發心)하여 용맹하게 빠르게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다음 광설(廣說) 중에서 먼저 망훈(妄熏)을 밝힌다. '분별사식(分別事識)'이란 통하여 말하면 칠식이 모두 분별사식이라 이름하지만 강(强)한 것을 취하면 다만 의식(意識)을 취한다. 이 식(識)은 모든 진(塵)이 오직 식(識)임을 알지 못하므로 심외(心外)에 실경계(實境界)가 있다고 집착한다. 범부와 이승이 비록 향(向)함이 있어도 오히려 생사가 싫어할 만하고 열반이 기뻐할 만하다고 계(計)하니 분별사식의 집착과 다르지 않으므로 분별사식훈습이라 이름한다.
의훈습(意熏習)이란 또한 업식훈습(業識熏習)이라 이름한다. 통하여 말하면 오종식(五種識)이 모두 의(意)라 이름하나 본(本)에 나아가 말하면 다만 업식(業識)을 취하니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본(本)이 된다. 그러므로 이 중에서 업식을 의(意)라 이름한다. 이와 같이 업식은 견상(見相)이 아직 분(分)하지 않았으나 모든 보살이 심의 망동(妄動)을 알아 별도의 경계가 없고 일체법이 오직 식량(識量)임을 해득하여 앞의 외집(外執)을 버리고 업식의(業識義)에 수순하므로 업식훈습이라 이름하고 또한 의훈습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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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훈습(眞如熏習) —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과 용훈습(用熏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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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훈습의(眞如熏習義)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고 둘은 용훈습(用熏習)이다.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란 무시세래(無始世來)로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불사의업(不思議業)을 구비하여 경계의 성(性)이 된다. 이 이의(二義)에 의거하여 항상 훈습한다. 힘이 있으므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고(生死苦)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하며 자신의 몸에 진여법(眞如法)이 있음을 스스로 믿어 발심수행(發心修行)하게 한다.
문왈(問曰): 만약 이와 같은 의(義)라면 일체 중생이 모두 진여가 있어 평등하게 모두 훈습하는데 어째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없으며 무량한 전후의 차별이 있는가? 모두 마땅히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평등하게 열반에 들어야 할 것이다.
답왈(答曰): 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무량무변한 무명(無明)이 있어 본래부터 자성이 차별하여 후박(厚薄)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항하사(恒河沙)를 넘는 상번뇌(上煩惱)가 무명에 의거하여 차별을 일으키고, 아견애염번뇌(我見愛染煩惱)가 무명에 의거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이와 같이 일체 번뇌가 무명에 의거하여 일어나 전후에 무량한 차별이 있으니 오직 여래만이 능히 아신다. 또 모든 불법(佛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어 인연이 구족(具足)해야 비로소 성판(成辦)할 수 있다. 마치 나무 중의 화성(火性)이 화(火)의 정인(正因)이나 만약 사람이 알아서 방편을 빌려 능히 나무를 스스로 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이와 같으니 비록 정인훈습(正因熏習)의 힘이 있어도 만약 모든 불보살(佛菩薩)·선지식(善知識) 등을 만나 연(緣)으로 삼지 않으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 수 없다. 비록 외연(外緣)의 힘이 있어도 안의 정법(淨法)에 아직 훈습력(熏習力)이 없다면 구경(究竟)코 생사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자는 이른바 스스로 훈습의 힘이 있고 또 모든 불보살 등의 자비원호(慈悲願護)를 입기 때문에 능히 고(苦)를 싫어하는 심을 일으켜 열반이 있음을 믿고 선근(善根)을 수습한다. 선근의 성숙으로 인해 모든 불보살의 시교이희(示敎利喜)를 만나 내지 능히 진취(進趣)하여 열반도(涅槃道)로 향한다.
진여훈습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수(數)를 들어 총표하고, 둘은 수에 의거하여 명(名)을 열거하며, 셋은 상(相)을 변(辨)한다. 변상(辨相)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별명(別明)이고 둘은 합석(合釋)이다.
처음 별명(別明) 중에서 먼저 자체훈습(自體熏習)을 밝힌다. 처음 중에서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불사의업(不思議業)을 구비한다'는 것은 본각(本覺)의 불공문(不空門)에 있는 것이다. '경계의 성이 된다'는 것은 여실공문(如實空門)의 경(境)에 나아가 설한 것이다. 이 본래 있는 경(境)과 지(智)의 힘에 의거하여 명훈(冥熏)하여 망심을 일으켜 염고구락(厭苦求樂) 등을 일으킨다.
'문왈(問曰)' 이하는 왕복제의(往復除疑)이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번뇌의 후박(厚薄)에 의거하여 그 같지 않음을 밝히고, 뒤는 우연(遇緣)의 참차(參差)를 들어 그 같지 않음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항사등상번뇌(恒沙等上煩惱)'란 모든 법문(法門)의 사(事) 중의 무지(無知)를 미혹함이니 이것은 소지장(所知障)에 속한다. '아견애염번뇌(我見愛染煩惱)'란 이것은 번뇌장(煩惱障)에 속한다. 또 불법(佛法) 이하는 연(緣)의 참차를 밝힌다.
용훈습(用熏習)이란 곧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다. 이와 같은 외연에 무량한 의(義)가 있으나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이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은 평등연(平等緣)이다. 차별연(差別緣)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불보살 등에 의거하여 처음 발의(發意)하여 도를 구하는 시작부터 내지 불(佛)을 얻기까지 그 중에 혹 보거나 혹 생각하거나, 혹 권속(眷屬)·부모(父母)·모든 친(親)이 되거나, 혹 급사(給使)가 되거나, 혹 지우(知友)가 되거나, 혹 원가(怨家)가 되거나, 혹 사섭(四攝)을 일으키거나, 내지 일체 짓는 바의 무량한 행연(行緣)이 된다. 대비훈습(大悲熏習)의 힘을 일으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善根)을 증장하게 하여 보거나 듣거나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근연(近緣)이니 빠르게 득도(得度)하기 때문이고, 둘은 원연(遠緣)이니 오래고 멀리 득도하기 때문이다. 이 근원(近遠) 이연(二緣)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고 둘은 수도연(受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 불보살이 모두 일체 중생을 도탈(度脫)하기를 원하여 자연히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않는다. 동체지력(同體智力)에 의거하므로 응견문(應見聞)에 따라 작업(作業)을 현(現)한다. 이른바 중생이 삼매(三昧)에 의거하여 내지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용훈습 중에서 문장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열명(列名)·변상(辨相)이다. 제2 열명(列名) 중에서 '차별연(差別緣)'은 저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을 위한 연이 된다. '평등연(平等緣)'은 모든 보살의 업식훈습(業識熏習)을 위한 연이 된다. 능히 연이 되는 자는 초지(初地) 이상 내지 모든 부처님이니 반드시 동체지력(同體智力)에 의거해야 평등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 변상(辨相) 중에서 먼저 차별연을 밝힌다. '증장행연(增長行緣)'이란 능히 시(施)·계(戒) 등의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수도연(受道緣)'이란 문(聞)·사(思)·수(修)를 일으켜 도(道)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평등연 중에서 '삼매에 의거하여 평등하게 부처님을 본다'는 것은 십해(十解) 이상의 모든 보살 등이 불보신(佛報身)의 무량상호(無量相好)가 모두 끝이 없어 분제상(分齊相)을 여읨을 보므로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본다'고 한다. 만약 산심(散心)에 있으면 이와 같은 상호(相好)가 분제상을 여읨을 능히 볼 수 없다.
이 체용훈습(體用熏習)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미상응(未相應)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이 의(意)·의식(意識)으로 훈습하여 신력(信力)에 의거하여 수행할 수 있으나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을 얻지 못하여 체(體)와 상응하지 못하고 아직 자재업(自在業)의 수행을 얻지 못하여 용(用)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은 이상응(已相應)이니 법신보살(法身菩薩)이 무분별심(無分別心)을 얻어 모든 불(佛)의 지용(智用)과 상응하여 오직 법력(法力)에 의거하여 자연(自然)히 수행하여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하기 때문이다.
제2 합석(合釋)하는 체용(體用)이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와 별석(別釋)이다. 별석 중에서 먼저 미상응(未相應)을 밝힌다. '의의식훈습(意意識熏習)'이란 범부와 이승은 의식훈습(意識熏習)이라 이름하니 곧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다. '초발의보살 등'은 십해(十解) 이상이 의훈습(意熏習)이라 이름하니 곧 업식훈습(業識熏習)의 의(義)이다.
【별기(別記)】
이 중에서 저 법신보살(法身菩薩)이 법신(法身)을 증(證)할 때 능견상(能見相)을 여의는 것에 대하여 지전보살(地前菩薩)을 의훈습(意熏習)이라 설한다. 업식(業識)에 의거하여 능견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속지(俗智)로 보불(報佛)을 보는 의(義)에 의거하면 금강(金剛) 이전에서 모두 견상(見相)이 있어 통칭 업식훈습(業識熏習)이라 한다.
'아직 무분별심을 얻지 못하여 체와 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의 체와 아직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자재업을 얻지 못하여 용과 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佛)의 응화(應化) 이신(二身)의 용(用)과 아직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응(已相應) 중에서 '법신보살'은 십지보살이다. '무분별심을 얻는다'는 것은 체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佛)의 지용(智用)과 상응한다'는 것은 여량지(如量智)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수행한다'는 것은 팔지(八地) 이상에서 무공용(無功用)이기 때문이다.
인언중현(因言重顯)의 다섯 분(分) 중에서 제4 이종훈습(二種熏習)을 별명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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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이종훈진부진의(二種熏盡不盡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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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염법(染法)은 무시(無始) 이래로 훈습이 부단(不斷)하되 내지 불(佛)을 얻고 난 뒤에는 곧 단(斷)이 있다. 정법훈습(淨法熏習)은 곧 단(斷)이 없어 미래를 다한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진여법(眞如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妄心)이 곧 멸하고 법신이 현현(顯現)하여 용훈습(用熏習)을 일으키므로 단(斷)이 없다.
이하 제5 이종훈(二種熏)의 진부진(盡不盡)의 의(義)를 밝힌다. 염훈(染熏)은 이(理)를 어기고 일어나므로 멸진(滅盡)이 있고, 정법(淨法)의 훈(熏)은 이(理)에 수순하여 생(生)하여 이(理)와 상응하므로 멸진이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문상(文相)은 알 수 있다.
현시정의분(顯示正義分) 안의 정석(正釋) 중의 큰 두 분(分) 중에서 제1 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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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4권 끝
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五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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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의장문(義章門)을 해석함 — 용대(用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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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의장문(義章門)을 해석한다. 위의 입의(立義) 중에서 이종(二種)의 의(義)를 세웠으니 이른바 대의(大義)와 승의(乘義)이다. 지금 이 문장 중에서 대의(大義)를 바르게 해석하고 승의(乘義)를 겸하여 드러낸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체대(體大)·상대(相大)의 두 가지 대(大)를 총석(總釋)하고, 둘은 용대(用大)의 의(義)를 별해(別解)한다.
다시, 진여(眞如)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 범부(凡夫)·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모든 부처님[諸佛]에서 증감(增減)이 없다. 전제(前際)에 생겨난 것도 아니고 후제(後際)에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필경코 항상[恒常]하다. 본래부터 성(性)이 스스로 일체 공덕을 만족(滿足)하고 있다.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의(義)가 있기 때문이고,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는 의(義)가 있기 때문이며, 진실식지(眞實識知)의 의(義)가 있기 때문이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의(義)가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의(義)가 있기 때문이고, 청량불변자재(淸凉不變自在)의 의(義)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항하사(恒河沙)를 넘어 불리(不離)·불단(不斷)·불이(不異)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불법(佛法)을 구족하고 내지 만족하여 결여된 것이 없는 의(義)가 있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고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이름한다.
문왈(問曰): 위에서 진여는 그 체가 평등하여 일체상(一切相)을 여읜다고 설하였는데, 어째서 다시 체에 이와 같은 종종의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가?
답왈(答曰): 비록 실로 이 모든 공덕의 의(義)가 있으나 차별(差別)의 상(相)이 없어 평등동일미(平等同一味)로서 오직 하나의 진여이다. 이 의(義)가 무엇인가? 무분별(無分別)이어서 분별상(分別相)을 여의었으므로 둘이 없다. 다시 무슨 의(義)에 의거하여 차별을 설할 수 있는가? 업식(業識)의 생멸상(生滅相)에 의거하여 시(示)한다. 이것을 어떻게 시(示)하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심(心)이어서 실로 념(念)이 없는데 망심(妄心)이 있어 불각(不覺)하여 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므로 무명(無明)이라 설한다. 심성(心性)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의(義)이다. 만약 심이 일어나 견(見)이 있으면 불견(不見)의 상(相)이 있다. 심성이 견(見)을 여의면 곧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의(義)이다. 만약 심이 동(動)함이 있으면 진실식지(眞實識知)가 아니어서 자성(自性)이 없고 상(常)도 아니고 락(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어서 열뇌(熱惱)하고 쇠변(衰變)하여 자재하지 못하다. 내지 항하사를 넘는 망염(妄染)의 의(義)가 있다. 이 의(義)에 대하여 심성(心性)이 부동(不動)하면 항하사를 넘는 모든 정공덕(淨功德)의 상의(相義)가 시현(示現)됨이 있다. 만약 심이 일어남이 있어 다시 앞의 법이 념(念)할 만한 것을 본다면 결여된 것[所少]이 있다. 이와 같이 정법(淨法)의 무량공덕이 곧 일심(一心)이어서 다시 념할 바가 없으므로 만족(滿足)하니 법신여래지장(法身如來之藏)이라 이름한다.
처음 중에서 '자체상(自體相)'이란 체대(體大)·상대(相大)의 의(義)를 총서(總牒)한다. 다음 '일체 범부 내지 모든 부처님에서 증감이 없고 필경코 상주(常住)한다'는 것은 체대(體大)를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 '본래부터 성이 스스로 만족한다' 이하는 상대(相大)의 의를 해석한다.
문 중의 뜻은 알 수 있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답(總答)과 별현(別顯)이다. 별현(別顯) 중에서 먼저 차별의 무이의(無二義)를 밝히고 뒤에 무이의 차별의(差別義)를 드러낸다. 이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약표(略標)와 광석(廣釋)이다. 약표 중에서 '업식의 생멸상에 의거하여 시(示)한다'는 것은 생멸상 안에 모든 과환(過患)이 있으나 다만 그 본(本)을 드니 업식이라 이름한다. 이 모든 과환에 대하여 모든 공덕을 설한다. '이것을 어떻게 시(示)하는가' 이하에서 모든 과환에 별대(別對)하여 덕의(德義)를 드러낸다. 문상(文相)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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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用大)의 의(義)를 별석(別釋)함 —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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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용대(用大)의 의(義)를 별석(別釋)한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명(總明)과 별석(別釋)이다.
다시, 진여(眞如)의 용(用)이란 이른바 모든 불여래(佛如來)가 본래 인지(因地)에서 대자비(大慈悲)를 발하여 모든 바라밀(波羅密)을 닦고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대서원(大誓願)을 세워 일체 중생계(衆生界)를 모두 도탈(度脫)하고자 하여 겁수(劫數)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를 다하도록 하였다. 일체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취하기 때문이며, 또한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의(義)인가? 이른바 여실(如實)히 일체 중생과 자신의 몸이 진여평등(眞如平等)하여 별이(別異)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大方便智)가 있어 무명을 제멸(除滅)하여 본법신(本法身)을 보아 자연히 불가사의업(不可思議業)의 종종의 용(用)이 있다. 곧 진여와 평등하여 일체처(一切處)에 두루하다. 또한 용상(用相)을 얻을 것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모든 불여래는 오직 법신지상(法身智相)의 신(身)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니 세제경계(世諦境界)가 없어 시작(施作)을 여의었다. 다만 중생의 견문(見聞)을 따라 이익을 얻으므로 용(用)이라 설한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과(果)에 대하여 인(因)을 드는 것이고 둘은 인(因)을 서(牒)하여 과(果)를 드러내는 것이다. 처음 인을 드는 중에도 세 구절이 있으니 먼저 행(行)이고 다음에 원(願)이며 뒤에 방편(方便)을 밝힌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가 있어' 이하는 제2 과(果)를 드러낸다. 그 안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이와 같은 대방편지가 있다'는 것이니 앞의 인(因)을 서(牒)함이다. 다음은 '무명을 제멸하여 본법신을 본다'는 것이니 자리과(自利果)이다. '자연히' 이하는 용상(用相)을 바르게 드러낸다. 이 중에 세 구절이 있으니 처음 '불가사의업의 종종의 용'이란 용이 심심(甚深)함을 밝히고, 다음 '곧 진여와 평등하여 일체처에 두루하다'는 것은 용의 광대함을 드러내며, '또한 이하'는 용이 무상(無相)이면서 수연(隨緣)하여 용(用)함을 밝힌다.
이 용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거하여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의 심이 보는 것이니 응신(應身)이라 이름한다. 전식(轉識)이 현(現)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오는 것으로 보아 색분제(色分齊)를 취하여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은 업식(業識)에 의거하여 이른바 모든 보살이 초발의(初發意)로부터 내지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심이 보는 것이니 보신(報身)이라 이름한다. 신(身)에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으며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다. 의지하는 의과(依果)도 또한 무량하여 종종의 장엄이 있다. 시현(示現)하는 바를 따라 곧 끝이 없어 궁진(窮盡)할 수 없다. 분제상(分齊相)을 여의어 응하는 바에 따라 항상 능히 주지(住持)하여 훼손되거나 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공덕은 모두 모든 바라밀 등의 무루행(無漏行)의 훈(熏) 및 불가사의한 훈(熏)의 성취하는 바이다. 무량한 락상(樂相)이 구족하므로 보신(報身)이라 설한다. 또한 범부가 보는 것은 추색(麤色)이니 육도(六道)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여 종종의 이류(異類)이며 락상(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응신(應身)이라 설한다.
다시,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眞如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소분(少分)으로 보아 저 색상(色相)·장엄(莊嚴) 등의 사(事)가 오고 감이 없고 분제(分齊)를 여이어 오직 심(心)에 의거하여 현(現)하여 진여를 여의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이 오히려 스스로 분별하나니 아직 법신위(法身位)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정심(淨心)을 얻으면 보는 것이 미묘하여 그 용이 더욱 뛰어나고 내지 보살지(菩薩地)가 다하면 보는 것이 구경(究竟)이 된다. 만약 업식(業識)을 여의면 견상(見相)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피차(彼此)의 색상이 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왈(問曰): 만약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능히 현(現)하는가?
답왈(答曰): 이 법신이 곧 색(色)의 체(體)이므로 능히 색에 현할 수 있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심(心)이 불이(不二)이니, 색성(色性)이 곧 지(智)이므로 색체(色體)에 형이 없어 지신(智身)이라 이름한다. 지성(智性)이 곧 색(色)이므로 법신(法身)이 일체처(一切處)에 두루한다고 이름한다. 현(現)하는 색(色)에 분제(分齊)가 없어 심을 따라 능히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나타내어 무량보살(無量菩薩)·무량보신(無量報身)·무량장엄(無量莊嚴)이 각각 차별하지만 모두 분제가 없어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심식(心識)의 분별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자재용의(眞如自在用義)이기 때문이다.
제2 별석(別釋).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별해(別解)·왕복제의(往復除疑)이다. 별해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별용(別用)을 직접 드러내고 둘은 거듭 서(牒)하여 분별한다.
처음 중에서 '분별사식에 의거한다'는 것은 범부와 이승이 유식(唯識)을 알지 못하여 외진(外塵)이 있다고 계(計)하니 분별사식의 의이다. 지금 불신(佛身)을 보아도 또한 심외(心外)로 계하니 의식의(意識義)에 수순하므로 분별사식에 의거하여 본다고 설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전식(轉識)이 능히 색상을 현(現)함을 알지 못하므로 '전식(轉識)이 현(現)함을 알지 못하여 밖에서 오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보신 중에서 '업식에 의거한다'는 것은 십해(十解) 이상의 보살이 유심(唯心)을 해득하여 외진의(外塵義)가 없음을 알아 업식의(業識義)에 수순하여 불신을 보므로 '업식에 의거하여 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신(二身)에 대해 경론(經論)의 설이 다르다. 동성경(同性經)에서 예토(穢土)의 성불(成佛)을 화신(化身)이라 이름하고 정토(淨土)의 성도(成道)를 보신(報身)이라 이름한다. 금고경(金鼓經)에서 삼십이상(三十二相)·팔십종호(八十種好) 등의 상(相)을 응신(應身)이라 이름하고 육도(六道)의 상(相)을 따라 현(現)하는 신(身)을 화신(化身)이라 이름한다. 섭론(攝論)에 의거하면 지전(地前)이 보는 것을 변화신(變化身)이라 이름하고 지상(地上)이 보는 것을 수용신(受用身)이라 이름한다. 지금 이 론(論) 중에서는 범부와 이승이 보는 육도(六道)의 차별상(差別相)을 응신(應身)이라 이름하고 십해(十解) 이상의 보살이 보는 이분제색(離分齊色)을 보신(報身)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이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은 법문이 무량하여 오직 하나의 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범부가 보는 것' 이하는 제2 거듭 서(牒)하여 분별함이다. 먼저 응신을 밝힌다. '다시,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 이하는 보신상(報身相)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소분(少分)으로 본다'는 것은 십해 중에서 인공(人空)의 문(門)에 의거하여 진여이(眞如理)를 보니 상사해(相似解)이므로 소분이라 한다. '만약 업식을 여의면 견상이 없다'는 것은 업식에 의거하여야 전상(轉相) 및 현상(現相)이 있기 때문이다. '문왈(問曰)' 이하는 왕복제의(往復除疑)이다. 문상(文相)은 알 수 있다.
현시정의(顯示正義) 안의 큰 두 분(分) 중에서 제1 소립법의(所立法義)를 바르게 해석함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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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들어감을 개시(開示)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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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멸문(生滅門)에서 곧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감을 드러낸다.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色)과 심(心), 육진경계(六塵境界)를 추구(推求)하면 필경코 념(念)이 없다. 심에 형상이 없으므로 시방(十方)에서 구하여도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미혹하여 동(東)을 서(西)라 하지만 방(方)은 실로 전(轉)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이와 같으니 무명(無明)의 미혹으로 인해 심(心)을 념(念)이라 하지만 심은 실로 동(動)하지 않는다. 만약 능히 관찰하여 심에 념(念)이 없음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갈 수 있다.
제2 생멸의 전(筌)에서 취지(旨趣)에 들어가는 문(門)을 개시(開示)한다.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별석(別釋)·제3 총결(總結)이다. 총표 중에서 '오음의 색과 심을 추구한다'는 것은 색온(色蘊)을 색이라 이름하고 나머지 사온(四蘊)을 심이라 이름한다. 별석 중에서 먼저 색관(色觀)을 해석한다. 모든 색(色)을 분쇄하여 내지 극미(極微)에 이르러도 영원히 얻을 수 없다. 심을 여의고는 념할 수 있는 상(相)이 없으므로 '육진(六塵)이 필경코 념이 없다'고 한다. '심의 형상이 없어 시방에서 구하여도 끝내 얻을 수 없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이하는 다음으로 심법(心法)을 관한다. '심은 실로 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념(動念)을 추구하면 이미 멸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아 머묾이 없으니, 머묾이 없으므로 일어남이 없다. 그러므로 심성(心性)은 실로 동하지 않음을 안다. '만약 능히' 이하는 제3 총결이다. '곧 수순하는 것'은 방편관(方便觀)이고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은 정관(正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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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사집(邪執)을 대치(對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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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사집(邪執)을 대치함이다. 문장에도 네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수(數)를 들어 총표하고, 둘은 수에 의거하여 명(名)을 열거하며, 셋은 명(名)에 의거하여 상(相)을 변(辨)하고, 넷은 구경(究竟)히 집착을 여읨을 총현(總顯)한다.
사집(邪執)을 대치하는 것이란 일체 사집(邪執)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거하니, 만약 아(我)를 여의면 사집이 없다. 이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총표(總標)로 수(數)를 드는 것이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둘은 법아견(法我見)이다.
제2 열명(列名) 중에서 '인아견(人我見)'이란 총상(總相)의 재주자(宰主者)가 있다고 계(計)하는 것이니 인아집(人我執)이라 이름한다. '법아견(法我見)'이란 일체법에 각각 체성(體性)이 있다고 계(計)하므로 법집(法執)이라 이름한다. 법집은 곧 이승이 일으키는 것이고, 이 중의 인집(人執)은 오직 불법(佛法) 안에서 대승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일으키는 것을 취한다.
인아견(人我見)이란 모든 범부에 의거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고 설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하나는 수다라(脩多羅)에서 '여래법신(如來法身)이 필경코 적막(寂寞)하여 허공(虛空)과 같다'고 설한 것을 듣고서 파착(破著)을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여 곧 허공이 여래성(如來性)이라 한다. 어떻게 대치(對治)하는가? 허공상(虛空相)은 망법(妄法)이어서 체(體)가 부실(不實)임을 밝힌다. 색(色)에 대하기 때문에 있고 볼 수 있는 상(相)이어서 심을 생멸하게 한다. 일체 색법(色法)이 본래 심이어서 실로 외색(外色)이 없으니, 만약 외색이 없다면 곧 허공상이 없다. 이른바 일체 경계가 오직 심(心)의 망기(妄起)로 인해 있다. 만약 심이 망동(妄動)을 여의면 일체 경계가 멸하여 오직 일진심(一眞心)이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다. 이를 여래의 광대성지(廣大性智)의 구경의(究竟義)라 이름하나니 허공상(虛空相)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둘은 수다라(脩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코 체공(體空)하며 내지 열반진여(涅槃眞如)의 법도 또한 필경코 공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고 일체상을 여읜다'고 설한 것을 듣고서 파착(破著)을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여 곧 진여(眞如)와 열반(涅槃)의 성(性)이 오직 공(空)이라 한다. 어떻게 대치하는가? 진여법신(眞如法身)의 자체는 불공(不空)하여 무량성공덕(無量性功德)이 구족함을 밝힌다.
셋은 수다라(脩多羅)에서 '여래장(如來藏)에는 증감이 없고 체에 일체 공덕의 법을 구비한다'고 설한 것을 듣고서 해득하지 못하여 곧 여래장에 색심(色心)의 법이 자상(自相)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직 진여의(眞如義)에 의거하여 설하기 때문이고 생멸염의(生滅染義)로 인해 차별을 시현(示現)하여 설한다.
넷은 수다라(脩多羅)에서 '일체 세간의 생사염법(生死染法)이 모두 여래장(如來藏)에 의거하여 있고 일체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을 듣고서 해득하지 못하여 여래장의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본래부터 오직 항하사를 넘는 모든 정공덕(淨功德)만이 불리(不離)·불단(不斷)하여 진여의(眞如義)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항하사를 넘는 번뇌염법(煩惱染法)은 오직 망유(妄有)이어서 성(性)이 스스로 본래 없어 무시세(無始世)로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相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의 체에 망법(妄法)이 있어서 증회(證會)하여 영원히 망(妄)을 쉬게 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은 수다라(脩多羅)에서 '여래장에 의거하기 때문에 생사(生死)가 있고 여래장에 의거하기 때문에 열반(涅槃)을 얻는다'고 설한 것을 듣고서 해득하지 못하여 중생에게 시작[始]이 있다고 한다. 시작을 보기 때문에 다시 여래가 얻은 열반에 끝마침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한다.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如來藏)에 전제(前際)가 없으므로 무명(無明)의 상(相)도 또한 시작이 없다.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의 시작이 있다고 설한다면 곧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다. 또 여래장(如來藏)에 후제(後際)가 없고 모든 부처님이 얻은 열반이 그와 상응하여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
제3 상(相)을 변(辨)하는 중에서 먼저 인아견(人我見)을 밝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표와 별석이다. 별석 중에서 오종(五種)을 별현(別顯)한다. 각각 세 구절이 있으니 처음은 견(見)이 일어나는 유래를 내고, 다음은 집착상(執著相)을 밝히며, 뒤에 대치(對治)를 드러낸다.
위의 오집(五執)은 모두 법신(法身)·여래장(如來藏) 등의 총상(總相)의 주(主)에 의거하여 집착을 일으키므로 통칭하여 인집(人執)이라 한다.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二乘)의 둔근(鈍根)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다만 인무아(人無我)를 설하시니 설함이 구경(究竟)하지 않아 오음(五陰)의 생멸하는 법이 있다고 보아 생사(生死)를 두려워하여 열반(涅槃)을 망취(妄取)한다.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五陰法)은 자성(自性)이 불생(不生)이니 곧 멸이 없어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법아견 중에도 세 구절이 있다. 처음은 견(見)이 일어나는 유래를 밝히고, '견유(見有)' 이하는 다음으로 집착상(執著相)을 드러내며, '운하(云何)' 이하는 그 대치를 드러낸다. 문상(文相)은 알 수 있다.
다시, 구경(究竟)히 망집(妄執)을 여읨이란 마땅히 알라,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모두 서로 상대(相待)하여 설할 수 있는 자상(自相)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色)도 아니고 심(心)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고 식(識)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어서 필경코 설할 수 있는 상(相)이 없다. 그러나 언설(言說)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라,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이 가언설(假言說)로 중생을 인도함이다. 그 지취(旨趣)는 모두 념(念)을 여의어 진여로 돌아가는 것이니, 일체법을 념(念)하면 심을 생멸하게 하여 실지(實智)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4 구경리집(究竟離執)의 의(義).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모든 법이 이언(離言)하는 도리를 밝히고 뒤에 가설언교(假說言敎)의 의(義)를 드러낸다. 문상(文相)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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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발취도상(發趣道相)을 분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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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발취분(發趣分)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대의(大意)를 총표하고 둘은 분별을 별개(別開)한다.
발취도상(發趣道相)을 분별함이란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도(道)이며 일체 보살이 발심(發心)하여 수행하여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의(義)이다.
처음 중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도'는 나아가는 바의 도(道)를 드는 것이다. '일체 보살' 이하는 그 나아갈 수 있는 행(行)을 드러낸다. 보살이 발심하여 불(佛)이 증득하신 도를 향해 나아가므로 '발취도상을 분별한다'고 한다.
이하 제2 분별을 별개(別開)한다.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수(數)를 들어 개장(開章)하고, 둘은 수에 의거하여 명(名)을 열거하며, 셋은 명에 의거하여 상(相)을 변(辨)한다.
간략히 발심(發心)에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한다. 무엇이 셋인가? 하나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고, 둘은 해행발심(解行發心)이며, 셋은 증발심(證發心)이다.
초문(初文)은 알 수 있다. 제2 중에서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위(位)는 십주(十住)이고 십신(十信)을 겸하여 취한다. 십신위(十信位) 중에서 신심을 수습하여 신심이 성취되면 결정심(決定心)을 발하여 곧 십주(十住)에 들어가므로 신성취발심이라 이름한다. '해행발심(解行發心)'이란 십회향(十廻向)에 있고 십행(十行)을 겸하여 취한다. 십행위(十行位) 중에서 법공(法空)을 해득하고 법계에 수순하여 육도행(六度行)을 닦아 육도행이 순숙(純熟)하여 회향심(廻向心)을 발하여 향위(向位)에 들어가므로 해행발심이라 한다. '증발심(證發心)'이란 위(位)는 초지(初地) 이상 내지 십지(十地)이니 앞의 이중(二重)의 상사발심(相似發心)에 의거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하여 진심(眞心)을 발한다.
제3 변상(辨相). 문장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차례로 삼심(三心)을 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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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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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初發心) 안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신성취(信成就)의 행(行)을 밝히고, 둘은 행(行)이 이루어져 발심하는 상(相)을 드러내며, 셋은 발심으로 얻는 공덕을 찬탄한다.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떤 사람에 의거하고 어떤 행을 닦아야 신(信)이 성취되어 능히 발심하기에 감당할 수 있는가? 이른바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 의거하니 훈습선근(熏習善根)의 힘이 있으므로 업과보(業果報)를 믿어 능히 십선(十善)을 일으키고 생사고(生死苦)를 싫어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한다.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승공양(親承供養)하고 신심(信心)을 수행하여 일만겁(一萬劫)을 경(經)한다. 신심이 성취되므로 모든 불보살(佛菩薩)이 발심을 가르친다. 혹은 대비(大悲)로 인해 스스로 발심할 수 있고, 혹은 정법(正法)이 멸하고자 하여 호법(護法)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신심이 성취되어 발심을 얻은 자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코 불퇴(不退)하나니 여래종(如來種) 중에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相應)한다고 이름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소(微少)하고 오래전부터 번뇌가 심후(深厚)하여 비록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여도 인천종자(人天種子)를 일으키거나 이승종자(二乘種子)를 일으킨다. 설령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어도 근(根)이 부정(不定)하여 혹 나아가고 혹 물러난다. 혹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여 일만겁을 경하지 못하고 그 중에 연(緣)을 만나 발심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른바 불색상(佛色相)을 보고 발심하거나, 혹 중승(衆僧)을 공양하기 때문에 발심하거나, 혹 이승인(二乘人)이 발심을 가르쳐 발심하거나, 혹 타인의 발심을 보고 배워 발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발심은 모두 부정(不定)하여 악인연(惡因緣)을 만나면 혹 퇴실(退失)하여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진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물음이고 뒤에 답이다. 물음 중에서 '어떤 사람에 의거하는가'는 능수(能修)의 사람을 묻고, '어떤 행을 닦는가'는 소수(所修)의 행을 묻는 것이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소문(所問)에 정답(正答)하고 둘은 열(劣)을 들어 승(勝)을 드러낸다. 정답(正答) 안에서 처음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 의거한다'는 것은 초문에 답하는 것이다. 분별삼취(分別三聚)에 여러 문이 있으나, 지금 이 문장 중에서 보살의 십해(十解) 이상이 결정불퇴(決定不退)하여 정정취(正定聚)라 이름하고, 아직 십신(十信)에 들어가지 않아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 것을 사정취(邪定聚)라 이름하며, 이 둘의 사이에서 도를 향하는 사람이 무상보리를 구하고자 발심하되 마음이 아직 결정되지 않아 혹 나아가고 혹 물러나는 것이 십신(十信)이니 부정취(不定聚)라 이름한다. 지금 이 사람에 의거하여 소수(所修)의 행을 밝힌다.
'훈습선근력(熏習善根力)이 있다' 이하는 제2문에 답하는 것이니, 부정인(不定人)이 수행하는 바를 밝힌다. '업과보를 믿어 십선을 일으킨다'는 것은 복분선(福分善)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사고를 싫어하여 무상도를 구한다'는 것은 도분심(道分心)을 발한다. '모든 부처님을 만나 신심을 수행한다'는 것은 소수도분선근(所修道分善根)을 바르게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십종신심(十種信心)을 수행함이다.
'일만겁을 경한다' 이하는 제3문에 답하는 것이니, 그 신심이 성취되는 상(相)을 밝힌다. '일만겁에 신심이 성취된다'는 것은 십신(十信)에서 십천겁(十千劫)을 경하여 신심이 성취되면 곧 십주(十住)에 들어간다. 본업경(本業經)에서 이르기를 "이 신상보살(信想菩薩)이 십천겁 동안 십계법(十戒法)을 행하여 마땅히 십주심(十住心)에 들어가야 한다. 초주위(初住位)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들어가는 초주위(初住位)란 십주(十住)의 초발심주(初發心住)의 위이니, 이 위에서 비로소 불퇴신심(不退信心)을 얻는다.
'불보살(佛菩薩)이 발심을 가르친다' 등은 발심의 연(緣)이 여럿이지만 지금 간략히 세 가지 뛰어난 연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이하는 그 발심의 소주(所住)의 위(位)를 드러낸다. '신심이 성취되어 내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십해(十解)의 초발심주(初發心住)에 들어감이다. 그러므로 '필경코 불퇴이다'라고 한다. 곧 그 때 바로 습종성위(習種性位)에 있으므로 '여래종 중에 머문다'고 이름한다. 그 수행이 불성(佛性)에 수순하므로 또한 '정인상응(正因相應)이다'라고 한다.
위에서 앞의 세 가지 물음에 정답함을 마쳤다. '만약 어떤' 이하는 열(劣)을 들어 승(勝)을 드러낸다. 십신위 안에 승(勝)과 열(劣)이 있으니 승(勝)한 자는 위에서처럼 나아가 십주(十住)에 들어가고 열(劣)한 자는 이처럼 퇴(退)하여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진다.
다시,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떤 심(心)을 발하는가?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셋인가? 하나는 직심(直心)이니 진여법(眞如法)을 바르게 념(念)하기 때문이다. 둘은 심심(深心)이니 일체 모든 선행(善行)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다. 셋은 대비심(大悲心)이니 일체 중생의 고(苦)를 뽑고자 하기 때문이다.
문왈(問曰): 위에서 법계(法界)가 일상(一相)이고 불체(佛體)가 무이(無二)라고 설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념(念)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善行)을 구하여 배우는 것을 빌리는가?
답왈(答曰): 비유하면 대마니보(大摩尼寶)가 체성(體性)이 명정(明淨)하나 광석(鑛穢)의 구(垢)가 있는 것처럼, 만약 사람이 비록 보성(寶性)을 념하나 방편으로 종종의 마치(磨治)를 하지 않으면 끝내 정(淨)해질 수 없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법(眞如法)의 체성(體性)이 공정(空淨)하나 무량한 번뇌(煩惱)의 염구(染垢)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를 념하나 방편으로 종종의 훈수(熏修)를 하지 않으면 또한 정(淨)해질 수 없다. 구(垢)가 무량하여 일체법에 두루하므로 일체 선행(善行)을 닦아 대치(對治)로 삼는다. 만약 사람이 일체 선법(善法)을 수행하면 자연히 진여법(眞如法)에 귀순(歸順)하기 때문이다.
간략히 방편(方便)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무생(無生)임을 관하여 망견(妄見)을 여이어 생사(生死)에 머물지 않는다. 일체법이 인연화합(因緣和合)하여 업과(業果)가 실(失)하지 않음을 관하여 대비(大悲)를 일으켜 모든 복덕(福德)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하여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다. 법성(法性)의 무주(無住)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둘은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니 이른바 참괴(慚愧)하고 회과(悔過)하여 능히 일체 악법(惡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한다. 법성(法性)이 모든 허물을 여읨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셋은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니 이른바 부지런히 삼보(三寶)에 공양(供養)하고 예배(禮拜)하며 찬탄(讚歎)하고 수희(隨喜)하며 모든 부처님께 권청(勸請)한다. 삼보(三寶)를 경애(敬愛)함이 순후(淳厚)한 마음이기 때문에 신(信)이 증장되어 내지 능히 무상도(無上道)를 구하는 뜻을 세운다. 또 불법승력(佛法僧力)의 호(護)를 입기 때문에 능히 업장(業障)을 소(消)하여 선근(善根)이 불퇴(不退)한다. 법성(法性)이 치장(癡障)을 여읨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넷은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니 이른바 원(願)을 발하여 미래를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남음이 없게 하며, 모두 구경무여열반(究竟無餘涅槃)을 이루게 한다. 법성(法性)이 단절됨이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법성이 광대하여 일체 중생에 두루하여 평등무이(平等無二)이고 피차(彼此)를 념하지 않아 구경적멸(究竟寂滅)하기 때문이다.
제2 발심의 상(相)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직심(直心)'이란 불곡(不曲)의 의(義)이다. 진여를 념하면 심이 평등하여 다시 별다른 기(歧)가 없으니 어찌 굴곡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여법을 바르게 념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곧 이행(二行)의 근본이다. '심심(深心)'이란 궁원(窮原)의 의(義)이다. 하나의 선(善)도 갖추지 못하면 근원으로 돌아갈 방도가 없으니, 근원으로 돌아가는 성취에는 반드시 만행(萬行)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 모든 선행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곧 자리행(自利行)의 근본이다. '대비심(大悲心)'이란 보제(普濟)의 의(義)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고(苦)를 뽑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곧 이타행(利他行)의 근본이다. 이 삼심(三心)을 발하면 여의지 않는 악이 없고 닦지 않는 선이 없으며 제도하지 않는 하나의 중생도 없으니 이를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이라 이름한다.
보살이 이 심(心)을 발하였기 때문에 곧 소분(少分)으로 법신(法身)을 본다. 법신을 보기 때문에 원력(願力)에 따라 능히 팔종(八種)으로 중생을 이익하게 현한다.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에서 퇴(退)하고, 입태(入胎)하고, 주태(住胎)하고, 출태(出胎)하고, 출가(出家)하고, 성도(成道)하고, 전법륜(轉法輪)하고, 열반(涅槃)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법신이라 이름하지 않으니 그 과거 무량세래(無量世來)의 유루업(有漏業)이 아직 결단(決斷)하지 못하여 태어나는 곳을 따라 미고(微苦)와 상응(相應)하나 업계(業繫)는 아니니 대원자재력(大願自在力)이 있기 때문이다. 수다라(脩多羅) 중에서 혹 악취(惡趣)에 퇴타(退墮)한다고 설하는 것은 실퇴(實退)가 아니라 다만 정위(正位)에 들어가지 않아 해태(懈怠)한 초학보살(初學菩薩)을 공포(恐怖)하게 하여 저들로 하여금 용맹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보살이 일발심(一發心) 후에 겁약(怯弱)을 원리(遠離)하여 필경코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약 무량무변아승기겁(無量無邊阿僧祇劫) 동안 근고난행(勤苦難行)을 하여야 열반을 얻는다고 들어도 또한 겁약하지 않으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제3 발심의 공덕을 드러낸다. 그 안에 네 가지가 있다. 처음은 승덕(勝德)을 드러내고, 다음은 미과(微過)를 밝히며, 셋은 권교(權敎)를 회통(會通)하고, 넷은 실행(實行)을 찬탄한다. 처음 중의 두 구절에서 '소분으로 법신을 본다'는 것은 자리(自利)의 공덕을 밝히는 것이다. 십해보살(十解菩薩)이 인공문(人空門)에 의거하여 법계(法界)를 보나니 상사견(相似見)이므로 소분이라 한다. '원력에 따라' 이하는 이타덕(利他德)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보살' 이하는 그 미과(微過)를 드러낸다. '수다라' 이하는 제3 권교(權敎)를 회통한다. '또한 이 보살' 이하는 제4 실행(實行)을 찬탄하니 영무겁약(永無怯弱)이 곧 저 경(經)의 권교(權敎)이지 실(實)이 아님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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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행발심(解行發心)과 증발심(證發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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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행발심(解行發心)이란 마땅히 알라, 전승(轉勝)하다. 이 보살이 초정신(初正信) 이래로 제1 아승기겁(阿僧祇劫)이 장차 만(滿)하려 하기 때문에 진여법(眞如法) 중에서 깊은 해득이 앞에 현(現)한다. 수행하는 것이 상(相)을 여이어 법성(法性)의 체(體)에 간탐(慳貪)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단바라밀(檀波羅密)을 닦는다. 법성에 염(染)이 없고 오욕(五欲)의 허물을 여읨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시바라밀(尸波羅密)을 닦는다. 법성에 고(苦)가 없고 진뇌(瞋惱)를 여읨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찬제바라밀(羼提波羅密)을 닦는다. 법성에 신심상(身心相)이 없고 해태(懈怠)를 여읨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비리야바라밀(毗棃耶波羅密)을 닦는다. 법성이 항상 정(定)하여 체(體)에 산란(散亂)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선바라밀(禪波羅密)을 닦는다. 법성의 체(體)가 명(明)하여 무명(無明)을 여읨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닦는다.
제2 해행발심(解行發心) 중에서 '제1 아승기(阿僧祇)가 장차 만하려 하기 때문에 진여법 중에서 깊은 해득이 앞에 현한다'는 것은 십회향위(十廻向位)에서 평등공(平等空)을 얻어 진여 중에서 깊은 해득이 앞에 현함이다. 지전(地前)의 일아승기(一阿僧祇)가 다 차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행(解行)으로 얻는 발심을 드는 것이다. 다음 '법성에 간탐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단(檀) 등의 행을 닦는다'는 것은 십행위(十行位) 중에서 법공(法空)을 얻기 때문에 능히 법계에 수순하여 육도행(六度行)을 닦는다. 이것이 발심의 소의해행(所依解行)을 드러낸다.
증발심(證發心) 중에서 문장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여러 지(地)에 통하여 증발심(證發心)을 밝히고 둘은 십지(十地)에 별취(別就)하여 성만덕(成滿德)을 드러낸다.
증발심(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내지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무슨 경계(境界)를 증(證)하는가? 이른바 진여(眞如)이다. 전식(轉識)에 의거하여 경계라고 설하나 이 증자(證者)에는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지(眞如智)이니 법신(法身)이라 이름한다. 이 보살이 일념(一念) 중에 능히 시방(十方)의 무여세계(無餘世界)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전법륜(轉法輪)을 청하며 오직 중생을 개도이익(開導利益)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文字)에 의거하지 않는다. 혹 초지(超地)하여 빠르게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을 시(示)하기도 하나니 겁약(怯弱)한 중생을 위한 때문이다. 혹 내가 무량아승기겁(無量阿僧祇劫) 동안 불도(佛道)를 이룰 것이라고 설하기도 하나니 해만(懈慢)한 중생을 위한 때문이다. 능히 이와 같은 무수(無數)의 방편(方便)을 불가사의하게 시(示)한다. 그러나 실로 보살의 종성(種性)·근(根)이 평등하여 발심(發心)도 평등하고 증(證)하는 것도 평등하여 초과(超過)하는 법이 없으니 일체 보살이 모두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을 경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과 세계가 같지 않고 보고 듣는 것의 근욕성(根欲性)이 다르므로 시(示)하는 행(行)에도 차별이 있음이다.
또 이 보살의 발심상(發心相)이란 세 가지 심(心)의 미세한 상(相)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하나는 진심(眞心)이니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이다. 둘은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하기 때문이다. 셋은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기멸(起滅)하기 때문이다.
처음 중에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위지(位地)를 표(標)하고, 둘은 증의(證義)를 밝히며, '이 보살' 이하는 제3 덕(德)을 찬탄하고, '발심상(發心相)' 이하는 제4 상(相)을 드러낸다. 제2 중에서 '전식에 의거하여 경계라 설한다'는 것은 전식의 상(相)이 능견(能見)의 용(用)이니, 이 능견에 대하여 경계라 설한다. 이 여러 지(地)에서 일어나는 증지(證智)는 반드시 전식에 의거하여 진여를 증득하므로 소의(所依)에 대하여 가설(假說)로 경계라 한다. 증지(證智)에 직접 나아가면 능소(能所)가 없으므로 '증자에는 경계가 없다'고 한다. 제4 중에서 '진심(眞心)'이란 무분별지(無分別智)이고, '방편심(方便心)'이란 후득지(後得智)이며, '업식심(業識心)'이란 두 가지 지(智)의 소의(所依)인 아뢰야식이다. 그런데 이 업식은 발심의 덕(德)이 아니라 다만 이지(二智)가 일어날 때 이 미세한 기멸(起滅)의 누(累)가 있어 불지(佛地)의 순정한 덕(德)과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해 발심상(發心相)으로 합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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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공덕(成滿功德)을 별현(別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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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성만공덕(成滿功德)을 별현(別顯)한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승덕(勝德)을 직접 드러내고 둘은 왕복제의(往復除疑)이다.
또한 이 보살이 공덕이 성만(成滿)하여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일체 세간의 최고대신(最高大身)을 시(示)한다. 이른바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로 무명(無明)이 돈진(頓盡)하니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한다. 자연히 불가사의업(不思議業)이 있어 능히 시방(十方)에 현(現)하여 중생을 이익한다.
처음 중에서 '공덕이 성만(成滿)한다'는 것은 제10지의 인행(因行)이 성만함이다.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최고대신(最高大身)을 시(示)한다' 내지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한다' 등은 십지보살이 제4선천왕(第四禪天王)으로서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성도(成道)하니 곧 보불(報佛)의 타수용신(他受用身)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아뢰야식이 자심(自心)이 현(現)하는 신(身)과 기세간(器世間) 등을 돈분별(頓分別)하는 것과 같이, 보불여래(報佛如來)도 이와 같이 일시(一時)에 모든 중생계를 성취하여 구경천(究竟天)의 정묘궁전(淨妙宮殿)의 수행청정처(修行淸淨處)에 둔다"고 하였다.
【별기(別記)】
지금 이 경의 뜻을 해석하건대, 만약 실수용신(實受用身)의 의(義)를 논하면 법계에 두루하여 있지 않는 바가 없다. 저 천(天)의 신(身)으로만 성불(成佛)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살을 위해 현(現)하는 색상(色相)의 화수용신(化受用身)이지, 실보신(實報身)이 오직 저 천(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의(義)를 드러내기 위해 '界'라 한다.
문왈(問曰): 허공이 끝이 없으므로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으므로 중생이 끝이 없으며 중생이 끝이 없으므로 심행(心行)의 차별도 끝이 없다. 이와 같은 경계는 분제(分齊)할 수 없고 알기 어렵고 해득하기 어렵다. 만약 무명이 단(斷)하여 심상(心想)이 없다면 어떻게 능히 알아 일체종지라 이름하는가?
답왈(答曰): 일체 경계가 본래 일심(一心)이어서 상념(想念)을 여의었다. 중생이 경계를 망견(妄見)하기 때문에 심에 분제(分齊)가 있다. 망념(妄念)을 일으켜 법성(法性)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결료(決了)할 수 없다. 모든 불여래는 견상(見想)을 여이어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다. 심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성(性)이다. 자체(自體)가 일체 망법(妄法)을 현조(顯照)하여 대지용(大智用)과 무량방편(無量方便)이 있어 모든 중생이 응하여 해득해야 할 바를 따라 모두 능히 종종의 법의(法義)를 개시(開示)한다. 이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할 수 있다.
또 문왈(問曰): 만약 모든 부처님에게 자연업(自然業)이 있어 능히 일체처(一切處)에 현하여 중생을 이익한다면 일체 중생이 그 몸을 보거나 신변(神變)을 보거나 그 설(說)을 들으면 이익을 얻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인데, 어째서 세간에 많은 이들이 능히 보지 못하는가?
답왈(答曰): 모든 불여래의 법신(法身)은 평등하여 일체처에 두루하여 작의(作意)가 없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 설한다. 다만 중생의 심(心)에 의거하여 현(現)한다. 중생의 심이란 마치 거울[鏡]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구(垢)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중생의 심에 만약 구가 있으면 법신이 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2 의(疑)를 제거하는 두 번의 문답이 곧 두 가지 의혹을 제거한다.
초답(初答)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 도리를 세우고, 다음에 비(非)를 들고, 뒤에 시(是)를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일체 경계가 본래 일심이어서 상념을 여의었다'는 것은 도리를 세우는 것이다. 이른바 일체 경계는 비록 끝이 없지 않으나 끝이 없지도 않으니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끝이 없지 않으므로 다 알 수 있고, 끝이 없지 않으므로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상념을 여의었다'고 한다. 제2 비(非)를 드는 중에서 '중생이 경계를 망견하기 때문에 심에 분제가 있다' 등은 볼 수 있는 것이 있으므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밝힌다. 제3 시(是)를 드러내는 중에서 '견상을 여이어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이 없으므로 볼 수 없는 것이 없음을 밝힌다. '심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성이다'란 불심(佛心)이 상(想)을 여의어 체(體)가 일심(一心)의 근원이니 망상을 여의었으므로 심진실(心眞實)이라 이름하고, 일심의 체이므로 모든 법의 성이 된다. 이런즉 불심이 모든 망법(妄法)의 체가 되고 일체 망법이 모두 불심의 상(相)이다. 상(相)이 자체(自體)에 현(現)하고 자체가 그 상(相)을 비추니 이와 같이 알기에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러므로 '자체가 일체 망법을 현조(顯照)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제2 의혹을 제거한다. 답 중에서 '거울에 구(垢)가 있으면 색상이 현하지 않고 이와 같이 중생의 심에 구(垢)가 있으면 법신이 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신은 본질과 같고 화신(化身)은 영상(影像)과 같으니, 지금 능현(能現)의 본질에 의거하므로 '법신이 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론(二論)의 비유는 조금 같지 않다. 지금 이 론(論) 중에서 경(鏡)을 비유로 삼아 구(垢)가 있으면 현하지 않는 것은 기(機)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불신(佛身)을 볼 기(機)가 숙(熟)한 것을 무구(無垢)라 설하고, 장(障)이 있어 아직 숙(熟)하지 않은 것을 유구(有垢)라 이름한다. 번뇌가 현행(現行)하면 곧 유구(有垢)라 이름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니 선성비구(善星比丘) 및 조달(調達) 등이 번뇌심 중에서 능히 불(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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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5권 끝
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六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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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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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중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을 들어 대의(大意)를 간략히 표(標)하고, 둘은 법(法)에 나아가 행상(行相)을 넓게 변(辨)하며, 셋은 불퇴(不退)의 방편(方便)을 시(示)한다.
이미 해석분(解釋分)을 설하였으니 다음으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한다. 이 중에서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지 않은 중생에 의거하므로 수행신심(修行信心)을 설한다.
처음으로 대의(大意)를 표한다. 위에서 발취도상(發趣道相)을 설하는 중에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 의거한다'고 하였고, 지금 이 중에서 '아직 정정(正定)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나니, 마땅히 이것도 부정취인(不定聚人)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부정취 안에 열(劣)이 있고 승(勝)이 있으니, 승한 자는 나아가고 열한 자는 물러날 수 있다. 저 승한 사람을 위하여 발취(發趣)를 설하나니 이른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내지 증발심(證發心) 등으로 승한 사람이 차제로 진취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열한 자를 위하여 수신(修信)을 설하나니 이른바 사종신심(四種信心)·오문행(五門行) 등으로 저 열한 사람의 신(信)이 불퇴(不退)하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이 열한 사람이 수신성취(修信成就)하면 다시 발취분(發趣分) 중의 삼종발심(三種發心)에 의거하여 진취한다. 이 때문에 이분(二分)의 소위(所爲)는 다르나 그 향하는 도리는 다름이 없다.
이하 제2 광석(廣釋). 처음에 두 가지 물음을 발하고 뒤에 다시 두 가지로 답한다.
어떤 신심(信心)인가? 어떻게 수행하는가?
간략히 말하면 신심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근본(根本)을 믿는 것이니[信根本] 이른바 진여법(眞如法)을 즐겨 념(念)하기 때문이다. 둘은 불(佛)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이 있음을 믿어 항상 친근(親近)하고 공양(供養)하며 공경(恭敬)함을 념하여 선근(善根)을 발기(發起)하고 일체지(一切智)를 원구(願求)하기 때문이다. 셋은 법(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 항상 모든 바라밀(波羅密)을 수행하기를 념하기 때문이다. 넷은 승(僧)이 능히 바르게 수행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함을 믿어 항상 모든 보살중(菩薩衆)에 친근하기를 즐겨 여실행(如實行)을 구하여 배우기 때문이다.
신(信)에 답하는 중에서 '근본을 믿는다[信根本]'는 것은 진여의 법이 모든 부처님의 귀의처이고 모든 행(行)의 근원이므로 근본이라 한다.
수행(修行)에 답하는 중에서 문장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수(數)를 들어 총표하고, 둘은 수에 의거하여 문(門)을 열며, 셋은 문에 의거하여 별해(別解)한다.
수행에 다섯 문(門)이 있어 능히 이 신(信)을 성취한다.
처음 중에서 '능히 이 신을 성취한다'는 것은 신(信)은 있으나 행(行)이 없으면 곧 신(信)이 성숙하지 않고, 성숙하지 않은 신(信)은 연(緣)을 만나면 퇴(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행(五行)을 닦아 사신(四信)을 성취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하나는 시문(施門)이고, 둘은 계문(戒門)이며, 셋은 인문(忍門)이고, 넷은 진문(進門)이며, 다섯은 지관문(止觀門)이다.
제2 개문(開門) 중에서 '지관문(止觀門)'이란 육도(六度) 중에서 정혜(定慧)를 합수(合修)하므로 이 둘을 합하여 지관문(止觀門)으로 삼는다.
제3 별해(別解)는 이분(二分)하여 해석한다. 앞의 넷은 약명(略明)하고 뒤의 하나는 광설(廣說)한다.
어떻게 시문(施門)을 수행하는가? 만약 일체 와서 구하는 자를 보면 있는 재물(財物)을 힘에 따라 시여(施與)하여 스스로 간탐(慳貪)을 버려 저들로 하여금 환희케 한다. 만약 액난(厄難)·공포(恐怖)·위핍(危逼)을 보면 이미 감당할 수 있는 바를 따라 무외(無畏)를 시여하고,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법(法)을 구하면 이미 능히 해득하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설하되 명리(名利)·공경(恭敬)을 탐구해서는 안 된다. 오직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념하여 보리(菩提)에 회향(廻向)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하는가? 이른바 불살(不殺)·불도(不盜)·불음(不婬), 양설(兩舌)하지 않고 악구(惡口)하지 않으며 망언(妄言)하지 않고 기어(綺語)하지 않으며, 탐질(貪嫉)·기사(欺詐)·첨곡(諂曲)·진에(瞋恚)·사견(邪見)을 원리(遠離)한다. 만약 출가자(出家者)라면 번뇌를 절복(折伏)하기 위해 또한 마땅히 훤동(憒鬧)을 원리(遠離)하여 항상 적정처(寂靜處)에 머물며 소욕지족(少欲知足)·두타(頭陀) 등의 행(行)을 수습하고 내지 작은 죄(罪)에도 심(心)에 공포를 생기게 하여 참괴(慚愧)하고 개회(改悔)한다. 여래(如來)가 제정한 금계(禁戒)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하고 기혐(譏嫌)을 보호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허망히 죄(罪)를 짓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하는가? 이른바 타인의 뇌(惱)를 참아야 하나니 심이 되갚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또한 마땅히 이(利)·쇠(衰)·훼(毁)·예(譽)·칭(稱)·기(譏)·고(苦)·락(樂) 등의 팔법(八法)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문(進門)을 수행하는가? 이른바 모든 선사(善事)에서 심이 해태(懈怠)하여 퇴(退)하지 않으며 뜻을 세움이 견강(堅强)하여 겁약(怯弱)을 원리(遠離)한다. 마땅히 과거 오래고 먼 이래로 일체의 신심(身心)의 대고(大苦)를 헛되이 받아 이익이 없었음을 념(念)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마땅히 부지런히 모든 공덕을 닦아 자리이타(自利利他)하여 빠르게 뭇 고(苦)를 여의어야 한다.
다시, 만약 사람이 비록 신심을 수행하나 선세(先世)로부터 많은 중죄악업장(重罪惡業障)이 있기 때문에 사마(邪魔)·모든 귀신에 뇌란(惱亂)을 당하거나, 혹은 세간의 사무(事務)로 종종에 견전(牽纏)되거나, 혹 병고(病苦)에 뇌(惱)하는 자가 있다. 이와 같은 등의 많은 장애(障礙)가 있으므로 마땅히 용맹정근(勇猛精勤)하여 주야(晝夜) 육시(六時)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禮拜)하고 성심(誠心)으로 참회(懺悔)하며 권청(勸請)·수희(隨喜)·보리(菩提)에 회향(廻向)하여 항상 휴폐(休廢)하지 않는다. 모든 장애를 면하여 선근(善根)이 증장하기 때문이다.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종수행(四種修行)을 별명(別明)하고, '다시, 만약 사람이' 이하는 제2 수행자의 제장방편(除障方便)을 시(示)한다. 이 제2 중에도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 제거할 장애를 밝히고 뒤에 능히 제거하는 방법을 시(示)한다. 방법 중에서 '모든 부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모든 장(障)을 제거하는 방편을 총명(總明)한다. '참회(懺悔)' 이하는 별제사장(別除四障)이다. 사장(四障)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악업장(惡業障)이니 참회로 제멸한다. 둘은 정법(正法)을 비방함이니 권청(勸請)으로 제멸한다. 셋은 타인의 뛰어남을 시기함이니 수희(隨喜)로 대치(對治)한다. 넷은 삼유(三有)에 탐착(貪著)함이니 회향(廻向)으로 대치한다.
지관문(止觀門) 중에서 문장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약명(略明)이고 둘은 광설(廣說)이다.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수행하는가? 소언지(所言止)란 일체 경계상(境界相)을 그치는 것이니 사마타(奢摩他)의 관(觀)의 의(義)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소언관(所言觀)이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이니 비발사나(毗鉢舍那)의 관(觀)의 의(義)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이의(二義)를 점점 수습하여 서로 버리지 않아 쌍으로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초략(初略) 중에서 '일체 경계상을 그친다'는 것은 먼저 분별로 인해 모든 외진(外塵)을 짓더니 지금 각혜(覺慧)로 외진상(外塵相)을 타파하여 진상(塵相)이 이미 그쳐 분별할 것이 없으니 지(止)라 이름한다. 다음 '인연생멸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생멸문(生滅門)에 의거하여 법상(法相)을 관찰하므로 분별이라 한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하는 이 의(義)를 바르게 해석한다. '점점 수습한다'는 것은 능히 수순하는 방편을 밝히고, '현전(現前)하는 것'은 수순되는 바의 정관(正觀)을 드러낸다.
이 중에서 약명(略明)하는 지관(止觀)의 의(義)를 논하면, 상(相)을 따라서 정(定)을 지(止)라 이름하고 혜(慧)를 관(觀)이라 이름한다. 실(實)에 나아가 말하면 정(定)이 지관(止觀)에 통하고 혜(慧)도 이와 같다. 유가론(瑜伽論) 성문지(聲聞地)에서 이르기를 "이와 같이 심일경성(心一境性)이 혹 사마타품(奢摩他品)이고 혹 비발사나품(毗鉢舍那品)이다. 만약 구종심주(九種心住) 중의 심일경성은 사마타품이라 이름하고, 만약 사종혜행(四種慧行) 중의 심일경성은 비발사나품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구종심주(九種心住)는 다음과 같다. 내주(內住)·등주(等住)·안주(安住)·근주(近住)·조순(調順)·적정(寂靜)·최극적정(最極寂靜)·전주일취(專住一趣)·등지(等持)이다.
이 문장의 뜻을 살피면 성문(聲聞)의 지관법문(止觀法門)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으로 대승(大乘)의 경계로 나아가면 곧 대승의 지관(止觀)의 행이 된다. 그러므로 그 구종심주(九種心住)·사종혜행(四種慧行)이 앞에서 설한 것과 다르지 않다. 지관의 상(相)에 대한 약의(略義)가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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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문(止觀門) — 광변(廣辨) (一) 별수지(別修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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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제2 광변(廣辨).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별수(別修)를 밝히고 뒤에 쌍운(雙運)을 드러낸다. 별수(別修) 안에서 먼저 지(止)이고 뒤에 관(觀)이다. 먼저 지(止)를 밝히는 중에 곧 네 단계가 있다. 하나는 지(止)를 수행하는 방법을 밝히고, 둘은 지(止)를 수행하는 승능(勝能)을 드러내며, 셋은 마사(魔事)를 변(辨)하고, 넷은 이익을 시(示)한다.
만약 지(止)를 수행하는 자는 적정처(靜處)에 머물러 단좌(端坐)하여 의(意)를 바르게 한다. 기식(氣息)에 의지하지 않고 형색(形色)에 의지하지 않으며 공(空)에 의지하지 않고 지수화풍(地水火風)에 의지하지 않으며 내지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의지하지 않는다. 일체 모든 상(想)이 념(念)을 따라 모두 제거되고 또한 제거하는 상(想)도 버린다. 일체법이 본래 무상(無相)이어서 념념불생(念念不生)하고 념념불멸(念念不滅)하기 때문이다. 또한 심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념(念)해서도 안 되고, 뒤에 심(心)으로 심을 제거하는 것도 안 된다. 심이 만약 치산(馳散)하면 곧 당겨와서 정념(正念)에 머물러야 한다. 이 정념이란 마땅히 알라, 오직 심(心)이어서 외경계(外境界)가 없다. 곧 다시 이 심도 자상(自相)이 없어 념념불가득(念念不可得)이다. 만약 좌(坐)에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그치며 짓는 바가 있어 일체 시(時)에 항상 방편을 념하여 수순하여 관찰하되, 오래도록 익혀 순숙(淳熟)하면 그 심이 주(住)하게 된다. 심이 주하기 때문에 점점 맹리(猛利)하여 수순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 번뇌를 심복(深伏)하고 신심(信心)이 증장하여 빠르게 불퇴(不退)를 이룬다. 다만 의혹(疑惑)하고 불신(不信)하며 비방(誹謗)하고 중죄업장(重罪業障)이 있으며 아만(我慢)하고 해태(懈怠)한 이와 같은 등의 사람은 능히 들어갈 수 없다.
처음 방법(方法) 중에서 먼저 능히 들어가는 사람을 밝히고 뒤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자를 간(簡)한다. 처음 중에서 '정처(靜處)에 머문다'는 것은 연(緣)이 갖추어짐을 밝히는 것이다. '단좌(端坐)'는 신(身)을 조(調)함을 밝히고, '의(意)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심(心)을 조(調)함을 드러낸다.
'의지하지 않는다' 이하는 지(止)의 차제(次第)를 바르게 밝히어 구종주심(九種住心)을 드러낸다. 처음 '기식(氣息)에 의지하지 않고 내지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1 내주(內住)의 심을 밝히는 것이다. '기식(氣息)'은 수식관(數息觀)의 경(境)이고 '형색(形色)'은 골쇄(骨瑣) 등의 상(相)이다. 공(空)·지(地)·수(水) 등은 모두 사정(事定)의 소연경계(所緣境界)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산심(散心)이 취하는 육진(六塵)을 드는 것이다. 이 모든 진(塵)에서 추구하여 파괴하여 오직 자심(自心)임을 알아 다시 연(緣)에 의탁하지 않으므로 불의(不依)라 한다. 외진(外塵)에 의지하지 않음이 곧 내주(內住)이다.
다음 '일체 모든 상이 념을 따라 모두 제거된다'는 것은 제2 등주(等住)의 심을 밝힌다. 이것이 제거됨이 곧 등주(等住)이다. 다음 '또한 제거하는 상도 버린다'는 것은 제3 안주(安住)의 심을 밝힌다. 앞에서 비록 밖으로 달리는 상(想)을 모두 제거하였으나 오히려 안으로 능제(能除)의 상(想)이 있으니, 내상(內想)이 멸하지 않으면 외상(外想)이 다시 생겨난다. 이 때문에 이 능제(能除)의 상도 버린다. 내를 존(存)하지 않으므로 외를 능히 잊고, 외를 잊어 고요하니 곧 안주(安住)이다.
다음 '일체법이 본래 무상이어서 념념불생불멸이다'는 것은 제4 근주(近住)의 심을 밝힌다. 다음 '또한 심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제5 조순(調順)의 심을 밝힌다. 다음 '뒤에 심으로 심을 제거한다'는 것은 제6 적정(寂靜)의 심을 밝힌다. 다음 '심이 만약 치산하면 곧 당겨와서 정념에 머문다' 내지 '념념불가득이다'는 것은 제7 최극적정(最極寂靜)의 심을 밝힌다.
다음 '만약 좌(坐)에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내지 '심이 주하게 된다'는 것은 제8 전주일취(專住一趣)의 심을 밝힌다. 가행(加行)이 있고 공용(功用)이 있는 심이므로 '항상 방편을 념하여 수순하여 관찰한다'고 한다. 무간무결(無間無缺)한 정심(定心)이 상속하므로 '오래도록 익혀 순숙하여 심이 주하게 된다'고 한다.
다음 '심이 주하기 때문에 점점 맹리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에 수순하여 들어간다'는 것은 제9 등지(等持)의 심을 밝힌다. 전래(前來)의 순숙한 수습력(修習力)으로 인해 무가행무공용심(無加行無功用心)을 얻어 침부(沈浮)를 원리하여 임운(任運)하여 주하므로 등지(等持)라 이름한다. 등지의 심이 진여상(眞如相)에 주(住)하므로 '진여삼매에 들어간다'고 한다. '번뇌를 심복하고 신심이 증장하여 빠르게 불퇴(不退)를 이룬다'는 것은 진여삼매의 역용(力用)을 간략히 드러내는 것이다.
위에서 설한 것은 능히 들어가는 자를 이름하고, '다만 의혹하는' 이하는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자를 간(簡)한다. 수지방법(修止方法)을 마쳤다.
다시, 이 삼매(三昧)에 의거하기 때문에 곧 법계(法界)가 일상(一相)임을 안다.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중생신(衆生身)이 평등무이(平等無二)하니 곧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이름한다. 마땅히 알라, 진여(眞如)는 이 삼매의 근본이다. 만약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무량삼매(無量三昧)를 능히 생(生)할 수 있다.
제2 지(止)를 수행하는 승능(勝能)을 밝힌다. 이것은 앞의 진여삼매에 의거하여 일행삼매(一行三昧) 등의 모든 삼매를 생(生)할 수 있음을 밝힌다. 진여삼매가 이 등의 무량삼매를 생할 수 있으므로 '진여는 삼매의 근본이다'라고 한다.
이하 제3 마사(魔事)가 일어남을 밝힌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약명(略明)과 광석(廣釋)이다.
혹 어떤 중생이 선근(善根)의 힘이 없으면 곧 모든 마(魔)·외도(外道)·귀신(鬼神)에게 혹란(惑亂)을 당한다. 만약 좌중(坐中)에 형(形)을 현하여 공포(恐怖)하게 하거나 혹 단정한 남녀 등의 상(相)을 현하면 마땅히 오직 심(心)임을 념(念)하면 경계가 곧 멸하여 끝내 뇌(惱)하지 않는다.
약(略)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마뇨(魔嬈)를 밝히고 뒤에 대치(對治)를 시(示)한다. 처음 중에서 '모든 마'는 천마(天魔)이고, '귀(鬼)'는 퇴타귀(堆愓鬼)이며, '신(神)'은 정매신(精媚神)이다. 이와 같은 귀신이 불법(佛法)을 뇨란(擾亂)하여 사도(邪道)에 떨어지게 하므로 외도(外道)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모든 마 내지 귀신 등이 모두 능히 삼종오진(三種五塵)으로 변하여 사람의 선심(善心)을 파괴하니, 하나는 두려운 일을 만드는 것이고, 둘은 사랑스러운 일을 만드는 것이며, 셋은 위순(違順)이 아닌 평품오진(平品五塵)으로 행인(行人)의 심을 동란(動亂)케 하는 것이다. '마땅히 념하여' 이하는 대치(對治)를 밝힌다. 만약 능히 앞의 모든 진(塵)이 오직 자심(自心)의 분별이 지은 바이고 자심 밖에 별도의 진상(塵相)이 없음을 사유하면, 능히 이 념(念)을 지으면 경상(境相)이 곧 멸한다.
혹 천상(天像)을 현하거나 보살상(菩薩像)을 현하거나 또한 여래상(如來像)을 지어 상호(相好)를 구족하기도 한다. 혹 다라니(陀羅尼)를 설하거나, 혹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를 설하거나, 혹 평등(平等)·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을 설하기도 하며, 원망도 없고 친(親)도 없으며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어 필경공적(畢竟空寂)이 진열반(眞涅槃)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혹 사람으로 하여금 숙명(宿命)의 과거사를 알게 하고 또 미래의 일을 알게 하며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변재(辯才)가 무애(無礙)하게 하기도 한다.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의 명리(名利)의 일에 탐착(貪著)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진(瞋)하고 자주 희(喜)하게 하여 성정(性情)이 무상(無常)하여 일정한 준칙이 없게 하기도 하고, 혹은 자애(慈愛)가 많거나 수면(睡眠)이 많거나 병(病)이 많게 하여 그 심이 해태(懈怠)하게 하기도 하며, 혹은 갑자기 정진(精進)을 일으켰다가 뒤에 곧 휴폐(休廢)하여 불신(不信)을 생기게 하고 의혹(疑惑)이 많고 사려가 많게 하기도 한다. 혹은 본래의 뛰어난 행(行)을 버리고 잡업(雜業)을 다시 닦게 하거나, 만약 세간의 일에 착(著)하여 종종으로 견전(牽纏)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삼매(三昧)의 소분상사(少分相似)를 얻게 하기도 하나 모두 외도(外道)의 얻는 것이지 진삼매(眞三昧)가 아니다. 혹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일일(一日) 혹 이일(二日) 혹 삼일(三日) 내지 칠일(七日) 동안 정중(定中)에 머물러 자연히 향미(香美)한 음식(飮食)을 얻어 신심(身心)이 적열(適悅)하여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愛著)하게 하기도 한다. 혹 또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분제(分齊)가 없어 많았다 적었다 하여 안색(顏色)이 변이(變異)하게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수행자는 항상 마땅히 지혜로 관찰하여 이 심이 사망(邪網)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正念)하여 취(取)하지 않고 착(著)하지 않으면 능히 이 모든 업장(業障)을 원리할 수 있다.
마땅히 알라, 외도(外道)의 모든 삼매는 모두 견(見)·애(愛)·아만(我慢)의 심을 여의지 않아 세간의 명리공경(名利恭敬)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란 견상(見相)에 머물지 않고 득상(得相)에 머물지 않으며 내지 출정(出定)에도 해만(懈慢)이 없다. 모든 번뇌가 점점 미박(微薄)해진다.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법을 수습하지 않고 여래종성(如來種性)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선삼매(禪三昧)를 닦으면 많이 미착(味著)을 일으켜 아견(我見)에 의거하여 삼계(三界)에 계속(繫屬)되어 외도와 함께하게 된다. 만약 선지식(善知識)의 소호(所護)를 여의면 곧 외도견(外道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제2 광석(廣釋).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마사(魔事)의 차별을 넓게 드러내고, '이 때문에' 이하는 제2 그 대치를 밝히며, '마땅히 알라, 외도' 이하는 제3 진위(眞僞)를 간별(簡別)한다.
처음 중에서 곧 오쌍십사(五雙十事)를 밝힌다. 진형설법(現形說法)이 일쌍(一雙)이고, 득통기변(得通起辯)이 일쌍이며, 기혹작업(起惑作業)이 일쌍이고, 입정득선(入定得禪)이 일쌍이며, 식차안변(食差顏變)이 일쌍이다.
'이 때문에' 이하는 제2 대치를 밝힌다. '지혜로 관찰한다'는 것은 스스로 수분(隨分)의 각혜(覺慧)에 의거하여 모든 마사(魔事)를 관찰하여 다스린다.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하여 취하지 않고 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삼중(三中)의 앞의 두 법을 총현(總顯)한다.
'마땅히 알라, 외도' 이하는 제3 진위를 간별하는 것이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내외를 들어 사정(邪正)을 별(別)한다. '만약 모든 범부' 이하는 다음으로 이사(理事)에 대하여 진위를 간별한다. 그 중에서 처음은 이정(理定)이 진(眞)임을 드러낸다. 수행자가 반드시 진여삼매를 닦아야 종성불퇴위(種性不退位)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것 이외에 달리 들어갈 도(道)가 없다. 그러므로 '수습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세간의 모든 선삼매를 닦으면' 이하는 다음으로 사정(事定)의 위(僞)를 드러낸다. 이른바 부정관(不淨觀)·안나반념(安那槃念) 등을 모두 세간의 모든 삼매라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진여삼매에 의거하지 않고 곧장 이 등의 사삼매(事三昧)를 닦으면 들어가는 경계를 따라 취착(取著)을 여의지 못한다. 법(法)에 취착하면 반드시 아(我)에 착하므로 삼계에 계속(繫屬)되어 외도와 함께한다. 지도론(智度論)에서 이른 바와 같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고 그 나머지 일체는 모두 마사(魔事)이다"라는 것이 이를 말한다. 위에서 제3 마사(魔事)를 밝힘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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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止)를 닦는 십종이익(十種利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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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근(精勤)하여 전심(專心)으로 이 삼매를 수학(修學)하는 자는 현세(現世)에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는다. 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항상 시방(十方)의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호념(護念)하는 바가 된다. 둘은 모든 마(魔)와 악귀(惡鬼)에게 능히 공포(恐怖)를 당하지 않는다. 셋은 구십오종(九十五種)의 외도귀신(外道鬼神)에게 혹란(惑亂)을 당하지 않는다. 넷은 심법(甚深)한 법을 비방함을 원리(遠離)하여 중죄업장(重罪業障)이 점점 미박(微薄)해진다. 다섯은 일체 의혹(疑惑)과 모든 악각관(惡覺觀)이 멸한다. 여섯은 여래의 경계에 대한 신(信)이 증장된다. 일곱은 우회(憂悔)를 원리하여 생사 중에서 용맹하여 겁약(怯弱)하지 않는다. 여덟은 그 심이 유화(柔和)하여 교만(憍慢)을 버려 타인에게 뇌(惱)하지 않는다. 아홉은 비록 아직 정(定)을 얻지 못하였어도 일체 시(時)·일체 경계처(境界處)에서 번뇌를 능히 감손(減損)하여 세간(世間)을 즐기지 않는다. 열은 만약 삼매를 얻으면 외연(外緣)의 일체 음성(音聲)에 놀라 동(動)하지 않는다.
제4 이익(利益). 후세(後世)의 이익은 갖추어 진술할 수 없으므로 지금 간략히 현재의 이익을 시(示)한다. 총표(總標)와 별현(別顯)의 문상(文相)은 알 수 있다. 별명(別明)하는 지문(止門)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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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수관(別修觀)과 지관쌍운(止觀雙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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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약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심이 침몰(沈沒)하거나 혹 해태(懈怠)를 일으켜 중선(衆善)을 즐기지 않고 대비(大悲)를 원리하게 된다. 이 때문에 관(觀)을 닦는다. 관(觀)을 수습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 세간의 유위법(有爲之法)이 오래 머물 수 없고 수유(須臾)에 변괴(變壞)함을 관해야 한다. 일체 심행(心行)이 념념생멸(念念生滅)하나니 이 때문에 고(苦)이다. 마땅히 과거에 념한 모든 법이 황홀하기가 꿈과 같음을 관해야 한다. 마땅히 현재에 념한 모든 법이 번개 빛과 같음을 관해야 한다. 마땅히 미래에 념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음을 관해야 한다. 마땅히 세간의 일체 유신(有身)이 모두 부정(不淨)하여 종종의 예오(穢汚)여서 하나도 즐거운 것이 없음을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땅히 일체 중생이 무시세(無始世)로부터 모두 무명(無明)의 훈습으로 인해 심이 생멸하게 되어 이미 일체 신심(身心)의 대고(大苦)를 받았고, 현재 곧 무량한 핍박(逼迫)이 있으며, 미래의 고(苦)도 분제(分齊)가 없어 버리기 어렵고 여의기 어려운데도 깨닫지 못함을 념해야 한다. 중생이 이와 같으니 심히 가민(可愍)하다. 이 사유를 짓고서 곧 용맹하여 대서원(大誓願)을 세워야 한다. 원하건대 나의 심으로 하여금 분별을 여의게 하여 시방(十方)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선공덕(善功德)을 수행하고 그 미래를 다하도록 무량방편(無量方便)으로 일체 고뇌(苦惱)의 중생을 구발(救拔)하여 열반(涅槃)의 제일의락(第一義樂)을 얻게 하기를 바라노라. 이와 같은 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일체 시·일체처에서 짓는 바의 모든 선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바에 따라 수학(修學)을 버리지 않아 심에 해태(懈怠)가 없다. 다만 좌시(坐時)에 전념(專念)으로 지(止)를 수행하는 것은 제외한다. 나머지 일체에서 모두 마땅히 관찰하여 응작(應作)과 불응작(不應作)을 살펴야 한다.
제2 관(觀)을 밝힌다.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관을 닦는 의(意)를 밝히고, 다음은 관을 닦는 법(法)을 드러내며, 제3은 총결(總結)하여 권수(勸修)한다. 제2 중에서 사종관(四種觀)을 드러낸다. 하나는 법상관(法相觀)이니 무상(無常)·고(苦)·유전(流轉)·부정(不淨)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념하여' 이하는 제2 대비관(大悲觀)이다. '이 사유를 짓고서' 이하는 제3 서원관(誓願觀)이다. '이와 같은 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하는 제4 정진관(精進觀)이다. 이 사문(四門)에 의거하여 간략히 관(觀)을 수행함을 시(示)한다. '다만 좌시에' 이하는 제3 총결(總結)하여 권수(勸修)함이다. 위에서 제1 별명지관(別明止觀)을 마쳤다.
만약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모두 마땅히 지관(止觀)을 함께 행해야 한다[俱行]. 이른바 비록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불생(不生)함을 념하나 다시 곧 인연화합(因緣和合)하여 선악(善惡)의 업(業)과 고락(苦樂)의 보(報)가 불실불괴(不失不壞)함을 념한다. 비록 인연선악업보(因緣善惡業報)를 념하나 또한 곧 성(性)을 얻을 수 없음을 념한다. 만약 지(止)를 닦는 자는 범부(凡夫)의 세간에 주착(住著)함을 대치(對治)하고 이승(二乘)의 겁약(怯弱)한 견(見)을 버릴 수 있다. 만약 관(觀)을 닦는 자는 이승(二乘)의 대비(大悲)를 일으키지 않는 협열(狹劣)한 심의 허물을 대치하여 범부(凡夫)의 선근(善根)을 닦지 않음을 원리한다. 이 때문에 지관(止觀)의 이문(二門)이 서로 도와 이루어 서로 버리지 않는다. 만약 지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보리(菩提)의 도(道)에 능히 들어갈 수 없다.
제2 합수(合修). 그 안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함께 행함을 총표하고[總標俱行], 제2는 행상(行相)을 별명(別明)하며, 셋은 총결(總結)한다. 제2 중에서 두 가지 의(義)를 드러낸다. 먼저 이(理)에 수순하는 구행지관(俱行止觀)을 밝히고 뒤에 장(障)에 대하는 구행지관(俱行止觀)을 드러낸다.
처음 중에서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불생함을 념한다'는 것은 비유문(非有門)에 의거하여 지행(止行)을 닦는 것이다. '다시 곧 업과(業果)가 불실(不失)이다'는 것은 비무문(非無門)에 의거하여 관행(觀行)을 닦는 것이다. 다음 '비록 선악업보를 념하나 곧 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불괴가명이설실상(不壞假名而說實相)에 수순하는 것이니 관행(觀行)을 폐하지 않고 지문(止門)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지를 닦는 자' 이하는 장(障)에 대하여 분별한다. 지(止)를 닦으면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하나는 범부의 주착(住著)의 집(執)을 바르게 제거하는 것이고, 둘은 이승(二乘)의 겁약한 견(見)을 겸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관(觀)을 닦으면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하나는 이승의 협열한 심을 바르게 제거하는 것이고, 둘은 범부의 해태한 뜻을 겸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하는 제3 구행(俱行)을 총결한다. 지관(止觀)의 이행(二行)이 이미 반드시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치 새의 두 날개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니, 두 바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운재(運載)의 능력이 없고 한 날개가 만약 빠지면 어찌 허공으로 솟아오를 힘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능히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수행신심분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람을 들어 대의(大意)를 간략히 표하고, 둘은 법에 나아가 행상을 넓게 변(辨)함이니 이 두 단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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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퇴방편(不退方便) — 염불왕생(念佛往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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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 정신(正信)을 구하고자 하나 그 심이 겁약하여 이 사바세계에 머묾으로써 스스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승공양(親承供養)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신심(信心)이 성취되기 어렵다고 염려하여 물러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알라, 여래에게 뛰어난 방편이 있어 신심을 섭호(攝護)하신다. 이른바 전의(專意)로 불(佛)을 염하는 인연으로 원(願)을 따라 타방불토(他方佛土)에 왕생(往生)하여 항상 불(佛)을 보아 영원히 악도(惡道)를 여읨을 얻는다. 수다라(脩多羅)에서 이른 바와 같이 만약 사람이 전념(專念)으로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하여 닦는 선근(善根)을 회향(廻向)하여 저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구(願求)하면 곧 왕생을 얻는다. 항상 불(佛)을 보기 때문에 끝내 퇴(退)가 없다. 만약 저 불(佛)의 진여법신(眞如法身)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修習)하면 필경코 왕생을 얻어 정정(正定)에 머물기 때문이다.
제3 수행자의 불퇴방편(不退方便)을 시(示)한다.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초학자(初學者)가 퇴타(退墮)를 두려워함을 밝히고 뒤에 불퇴전(不退轉)의 방편을 시(示)한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불(佛)에 뛰어난 방편이 있음을 밝히고, 둘은 수다라(脩多羅)의 설을 별출(別出)하며, '만약 저 불의 법신을 관한다' 이하는 제3 경(經)에서 설한 의취(意趣)를 해석한다.
만약 법신(法身)을 관하면 필경코 왕생한다는 것은 십해(十解) 이상의 보살이 소분(少分)으로 진여법신을 보기 때문에 필경코 왕생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위에서 신성취발심 중에 '소분으로 법신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것은 상사견(相似見)에 의거한다. 또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이 저 불(佛)의 진여법신을 증견(證見)하기 때문에 '필경코 왕생한다'고 한다.
'정정(正定)에 머문다'는 것을 통론(通論)하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견도(見道) 이상이 비로소 정정(正定)이라 이름하니 무루도(無漏道)를 정정으로 삼기 때문이다. 둘은 십해(十解) 이상이 정정이라 이름하니 불퇴위(不退位)에 머묾을 정정으로 삼기 때문이다. 셋은 구품(九品)의 왕생(往生)이 모두 정정이라 이름하니 뛰어난 연(緣)의 힘에 의거하여 불퇴를 얻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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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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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권수분(勸修分) 중에서 문장 중에 여섯 가지가 있다.
이미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하였으니 다음으로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설한다. 이와 같은 마하연(摩訶衍)의 모든 불비장(佛秘藏)을 내가 이미 총설하였다.
제1 전설(前說)을 총결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의 심심경계(甚深境界)에서 정신(正信)을 생기게 하고 비방(誹謗)을 원리하여 대승도(大乘道)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론(論)을 지니고 사량(思量)하여 수습하면 구경(究竟)코 능히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들은 뒤에 겁약(怯弱)을 생기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결정코 불종(佛種)을 이어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을 것이다.
제2 이익을 들어 수행을 권한다[擧益勸修]. 문장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수행을 바르게 권하고, '구경(究竟)' 이하는 그 뛰어난 이익을 시(示)한다. 이 중의 두 구절에서 처음은 얻는 과(果)의 뛰어남을 시(示)하고, 뒤는 능히 수행하는 사람의 뛰어남을 밝힌다.
가령 어떤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할 수 있다 하여도, 어떤 사람이 일식경(一食頃) 동안 이 법을 바르게 사유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을 지나서 비유할 수 없다. 다시, 만약 사람이 이 론(論)을 수지(受持)하여 관찰하고 수행하여 일일일야(一日一夜) 동안이라도 지니면 그 모든 공덕이 무량무변하여 설할 수 없다. 가령 시방(十方)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각각 무량무변아승기겁(無量無邊阿僧祇劫) 동안 그 공덕을 찬탄하여도 또한 다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법성(法性)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변제(邊際)가 없다.
제3 신수복승(信受福勝). 문장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일식경(一食頃) 동안 바르게 사유하는 복이 뛰어남을 밝히고 뒤에 일일일야(一日一夜) 동안 수행하는 공덕이 무변(無邊)함을 드러낸다.
어떤 중생이 이 론(論) 중에서 훼방(毁謗)하고 믿지 않으면 얻는 죄보(罪報)가 무량겁(無量劫)을 경하여 대고뇌(大苦惱)를 받는다. 이 때문에 중생은 다만 마땅히 앙신(仰信)해야 하지 비방해서는 안 된다. 심히 스스로를 해치고 또 타인을 해쳐 일체 삼보(三寶)의 종(種)을 단절한다. 일체 여래가 모두 이 법에 의거하여 열반을 얻기 때문이고, 일체 보살이 이로 인해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제4 훼방죄중(毁謗罪重). 문장 중에 네 가지가 있다. 먼저 훼방의 죄중(罪重)을 밝힌다. '이 때문에' 이하는 제2 권면한다. '심히' 이하는 제3 죄중(罪重)의 의(意)를 해석한다. '일체 여래' 이하는 제4 삼보(三寶)의 종(種)을 단절한다는 의(意)를 전석(轉釋)한다.
마땅히 알라, 과거의 보살은 이미 이 법에 의거하여 정신(淨信)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은 지금 이 법에 의거하여 정신을 이루고 있으며, 미래의 보살은 마땅히 이 법에 의거하여 정신을 이루어야 한다.
제5 인증(引證).
이 때문에 중생은 마땅히 부지런히 수학(修學)해야 한다.
제6 결권(結勸).
일부(一部)의 론(論)에 삼분(三分) 중에서 론(論)의 종(宗)을 바르게 변(辨)함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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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게(廻向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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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처님의 심심광대(甚深廣大)한 의(義)를[諸佛甚深廣大義]
내가 지금 수분(隨分)으로 총지(總持)하여 설하였으니[我今隨分總持說]
이 공덕을 법성(法性)과 같이 회향하여[廻此功德如法性]
일체 중생계를 보편이익(普利)하게 하노라.[普利一切衆生界]
말후(末後)의 일게(一偈)는 제3 총결(總結)이다. 그 중에서 상반(上半)은 앞의 오분(五分)을 결(結)하고, 아래의 두 구절은 육도(六道)에 회향(廻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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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6권 끝
【저본 및 출전】
저본(底本):해인사(海印寺) 소장 목판본(木板本)
갑본(甲本):속장경(續藏經) 제1편 71투 4책
출전:동국대학교 한국불교전서
번역:원효 대사 저(著), 현대 한국어 역(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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