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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론 卷上
신라국 사문 원효 술(新羅國沙門 元曉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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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序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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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을 간략히 네 문(門)으로 나누어 분별한다. 첫째는 대의(大意)를 서술하고, 둘째는 경의 종지(宗旨)를 변별하며, 셋째는 제목을 해석하고, 넷째는 문구(文句)의 의미를 소석(消釋)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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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 大意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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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문 대의(大意)를 서술하자면, 무릇 일심(一心)의 근원은 유(有)와 무(無)를 여의고 홀로 청정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眞)과 속(俗)을 융합하여 담연(湛然)하다. 담연히 둘을 융합하되 하나가 아니요, 홀로 청정하여 변(邊)을 여의되 중간(中)이 아니다.
중(中)이 아니면서 변(邊)을 여의기에, 있지 아니한 법은 곧바로 없음에 머물지 않고, 없지 아니한 모습은 곧바로 있음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기에, 진(眞)이 아닌 사(事)는 애초에 속(俗)이 되지 않고, 속(俗)이 아닌 리(理)는 애초에 진(眞)이 되지 않는다.
둘을 융합하되 하나가 아니기에, 진과 속의 성품이 세워지지 않는 것이 없고 염(染)과 정(淨)의 모습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변(邊)을 여의되 중(中)이 아니기에, 유와 무의 법이 짓지 않는 것이 없고 시비(是非)의 의리가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에 파(破)하지 않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세우지 않되 세우지 않음이 없다. 가히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요, 그렇지 않은 큰 그러함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경의 대의이다.
그렇지 않은 큰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설하는 말이 묘하게 환중(環中)에 계합하고;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로 말미암아, 전하는 종지가 방외(方外)에 초출한다. 파하지 않음이 없기에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않음이 없기에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이름한다. 일체 의미의 종지가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또한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도 이름한다. 다만 한 목(目)을 들어 그 머리에 제목으로 삼은 것이니, 이런 까닭에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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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 經宗 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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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문 경종(經宗)을 변별하자면, 이 경의 종요(宗要)에는 열음[開]과 합함[合]이 있다. 합하여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요(要)이고, 열어 말하면 십중법문(十重法門)이 종(宗)이다.
관행(觀行)이라 함에서, 관(觀)은 횡으로 논하여 경지(境智)에 통하고, 행(行)은 종으로 바라보아 인과(因果)에 걸쳐 있다. 과(果)는 오법원만(五法圓滿)이요, 인(因)은 육행구족(六行具足)이다. 지(智)는 곧 본각(本覺)·시각(始覺) 양각(兩覺)이고, 경(境)은 곧 진(眞)·속(俗)이 쌍으로 민멸(泯滅)함이다.
쌍으로 민멸하되 멸하지 않고, 양각이되 무생(無生)이다. 무생의 행이 명회무상(冥會無相)하고, 무상의 법이 순성본리(順成本利)한다. 리(利)가 이미 본(本)이니, 리이되 얻음이 없는 까닭에 실제(實際)를 동하지 않는다. 제(際)가 이미 실제이되 성(性)을 여의는 까닭에 진제(眞際) 또한 공(空)이다. 제불여래(諸佛如來)가 여기에 장(藏)하고, 일체보살이 그 속에서 수입(隨入)한다. 이와 같은 것을 여래장(如來藏)에 든다고 이름한다. 이것이 여섯 품(品)의 대의이다.
이 관문(觀門)에서, 초신해(初信解)로부터 등각(等覺)에 이르기까지 육행(六行)을 세운다. 육행이 원만할 때 구식(九識)이 전현(轉顯)하여, 무구식(無垢識)을 드러내어 정법계(淨法界)가 되고 나머지 팔식을 전환하여 사지(四智)를 이룬다. 오법(五法)이 이미 원만하면 삼신(三身)이 이에 갖추어진다. 이와 같이 인과가 경지(境智)를 여의지 않는다. 경지가 둘이 아니니 오직 일미(一味)요, 이와 같은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이 경의 종지이다.
이런 까닭에 대승법상(大乘法相)을 섭하지 않는 것이 없고, 무량의종(無量義宗)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름이 헛되지 않음이 이것을 이름이로다.
하나의 관(觀)으로 합론하는 것을 대략 서술하였거니와, 열어 십문(十門)을 설함으로써 종(宗)을 삼는 것을 말하면, 일문(一門)으로부터 차차 십문(十門)까지 늘어난다.
일문(一門)이란 무엇인가? 일심(一心) 가운데서 일념(一念)이 동(動)하여, 일실(一實)에 순응하고 일행(一行)을 닦으며, 일승(一乘)에 들어가고 일도(一道)에 머물며, 일각(一覺)을 쓰고 일미(一味)를 각(覺)한다.
이문(二門)이란 무엇인가? 이안(二岸)에 머물지 않아 이중(二衆)을 버리고, 이아(二我)에 집착하지 않아 이변(二邊)을 여의며, 이공(二空)에 통달하여 이승(二乘)에 떨어지지 않고, 이제(二諦)를 함께 융합하여 이입(二入)에 어기지 않는다.
삼문(三門)이란 삼불(三佛)에 귀의하여 삼계(三戒)를 받고, 삼대제(三大諦)에 순응하여 삼해탈(三解脫)을 얻으며, 삼지(三地)에 등각하고 삼신(三身)에 묘각하며, 삼공취(三空聚)에 들어가고 삼유심(三有心)을 멸한다.
사문(四門)이란 사정근(四正勤)을 닦고, 사신족(四神足)에 들어가며, 사대연력(四大緣力)으로 사의(四儀)가 항상 이롭고, 사선(四禪)을 초출하며, 사방(四謗)을 원리한다. 사홍지(四弘地) 가운데 사지(四智)가 흘러나온다.
오문(五門)이란 오음(五陰)에서 나서 오십악(五十惡)을 갖추므로, 오근(五根)을 심고 오력(五力)을 기르며, 오공해(五空海)를 건너고 오등위(五等位)를 거쳐, 오정법(五淨法)을 얻고 오도(五道)의 중생을 제도한다.
육·칠·팔·구 등의 문(門)이란 어떠한가? 육도(六度)를 구족히 닦아 육입(六入)을 영원히 제하고, 칠각분(七覺分)을 행하여 칠의과(七義科)를 멸하며, 팔식의 바다가 맑아지고 구식의 흐름이 청정해진다. 처음 십신(十信)으로부터 십지(十地)에 이르기까지 백행(百行)이 구비되고 만덕(萬德)이 원만해진다.
이와 같은 제문(諸門)이 이 경의 종지이니, 모두 경문(經文) 속에 있어 문처(文處)에 이르면 마땅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 뒤의 구문(九門)이 모두 일문(一門)에 들어가고, 일문 가운데 구문이 있으니 하나의 관(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열어도 하나가 더하지 않고 합해도 열이 줄지 않는다. 더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종요(宗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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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 題名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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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문 제목을 해석하자면, 이 경의 제목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섭대승경(攝大乘經), 둘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 셋째는 무량의종(無量義宗)이다. 앞뒤 두 이름은 다음 문(門)에서 마땅히 해석한다. 지금은 우선 중간의 하나, 즉 수제(首題)에 있는 이름을 먼저 해석한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금강(金剛)을 해석하고 뒤에 삼매(三昧)를 해석한다.
━━━ 금강(金剛) 해석 ━━━
금강(金剛)이란 비유에 기탁한 명칭이니, 견실(堅實)함이 체(體)이고 뚫어 파괴함이 용(用)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실제(實際)가 체(體)이고 파천(破穿)이 능(能)이다.
실제(實際)가 체(體)인 것은 리(理)를 증득하여 근원을 궁구하기 때문이다. 아래 문에서 「법의 진실(眞實)을 증득하는 정(定)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파천(破穿)이 능(能)인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모든 의심을 타파하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정(定)을 꿰뚫는 것이다.
모든 의심을 타파한다는 것은 설법을 일으켜 의혹을 끊기 때문이다. 아래 문에서 「결정적으로 의회(疑悔)를 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모든 정(定)을 꿰뚫는다는 것은, 이 정이 모든 나머지 삼매(三昧)로 하여금 모두 쓸모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보주(寶珠)를 꿰뚫어야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대품경(大品經)에서 「어떠한 것이 금강삼매라 이름하는가? 이 삼매에 머물면 능히 모든 삼매를 타파한다」고 하였다. 그 론(論)의 주석에서 「금강삼매란 마치 금강이 물건을 함몰시키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이 삼매도 이와 같아서 제법(諸法) 가운데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삼매로 하여금 모두 쓸모 있게 한다」고 하였다.
안(案)하건대, 경에서 「제삼매를 파(破)한다」고 한 것은 파(破)라는 말이 천(穿)을 뜻하니, 론(論) 가운데 천입(穿入)으로써 경의 파(破)를 해석한 까닭에, 제삼매에 통달하면 모두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아서, 저 삼매로 하여금 자기 집착을 여의게 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무애(無礙)하여 자재를 얻는다.
【간별(簡別) — 정(定)과 혜(慧)의 차이】
문: 금강반야(金剛般若)와 금강삼매(金剛三昧)가 모두 금강이라 이름하니,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저것은 혜(慧)요 이것은 정(定)이니, 이것이 차별이다. 또한 금강반야는 인과(因果)에 통하고, 금강삼매는 위(位)가 과지(果地)에 있다. 또한 반야금강은 체견(體堅)·용리(用利)·형상관협(形狀寬狹)의 세 가지 뜻을 모두 갖추었고, 삼매금강은 다만 견리(堅利)만을 취한다. 이와 같이 차별이 있다.
【간별(簡別) — 세 가지 삼매의 구별】
이밖에도 다른 정(定)과 구별하니,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 둘째는 금강륜삼매(金剛輪三昧), 셋째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이다.
대품경(大品經)에서 「어떠한 것이 금강륜삼매인가? 이 삼매에 머물면 능히 제삼매분(諸三昧分)을 지닌다. 어떠한 것이 여금강삼매인가? 이 삼매에 머물면 능히 제법(諸法)을 관통하되 통달함을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론(論)의 해석에 따르면,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는 능히 일체 번뇌결사(煩惱結使)를 남김없이 타파하니, 비유하자면 석제환인(釋提桓因)이 금강을 손에 쥐고 아수라 군대를 타파하는 것과 같으며, 곧 학인(學人) 최후의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세 가지 보리를 얻으니 성문(聲聞)·벽지불(辟支佛)·불무상보리(佛無上菩提)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는 능히 일체 제법을 타파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진금강(眞金剛)이 능히 모든 산을 타파하여 남김없이 다 없애는 것과 같다. 금강륜(金剛輪)은 능히 일체 제불법을 타파하되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다.
이 세 금강의 차이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비유의 차이, 둘째 법의 차이[前은 번뇌를 파하고 後는 제법을 파함], 셋째 위(位)의 차이[前은 학위(學位), 後는 무학위(無學位)], 넷째 이름의 차이[前은 여금강삼매·금강유정(金剛喩定), 後는 직접 금강삼매], 다섯째 교(敎)의 차이이다.
━━━ 삼매(三昧) 해석 ━━━
고사(古師)는 「삼매(三昧)를 저 [범어로] 정사(正思)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이 설을 서술하는 것은 문의(文義)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정(定)에 있을 때 소연경(所緣境)에 대해 자세하고 바르게 사찰(思察)하기에 정사(正思)라 이름한다. 유가론(瑜伽論)에서 「삼마지(三摩地)란 소연(所緣)에 대해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고 한 것과 같다.
문: 정(定)은 마땅히 고요해야 하고, 고요히 일경(一境)에 머문다. 어찌하여 자세하고 바르게 사찰한다고 하는가? 사찰의 용(用)은 마땅히 심사(尋伺)이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정(定)을 사찰이라 하는가?
답: 만약 일경(一境)을 지키는 것이 곧 정(定)이라면, 혼침(惛沈)하여 경계에 머무는 것도 곧 정이 되어야 한다. 만약 정사(正思察)이 심사(尋伺)라면, 사혜(邪慧)의 추구도 마땅히 심사가 아닐 것이다. 마땅히 알라, 사찰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만약 사정(邪正)을 통틀어 의언분별(意言分別)로써 사찰이라 이름하면, 이것이 곧 심사이니 바로 분별이다. 만약 오직 자세하고 바르게 명료하게 경계를 연(緣)하는 것만을 정사찰(正思察)이라 이름하면, 이것은 바로 정의 용(用)이지 심사가 아니다. 정(定)이 분별과 무분별에 통하기 때문에, 자세하고 바름[審正]으로써 저 심사와 간별한다.
지금 이 금강삼매를 정사찰(正思察)이라 이름하는 것은, 바름도 바르지 않음도 없고, 생각도 생각 아님도 없다. 다만 분별하는 사념(邪念)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요, 또한 허공처럼 생각 없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정사(正思)라 호칭하는 것이다.
━━━ 정(定)의 여덟 가지 이름 ━━━
정의 이름은 같지 않으니, 대략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삼마희다(三摩呬多)이니, 등인(等引)이라 한역한다. 혼침(惛沈)과 도거(掉擧)의 편향을 원리하기에 등(等)이라 이름하고, 신통(神通) 등의 모든 공덕을 발기하기에 인(引)이라 이름한다. 또한 이 등인(等引)은 무회(無悔)·환희(歡喜)·안락(安樂)이 인도하는 바이기에 등인이라 이름한다. 이로 말미암아 욕계정(欲界定)과 다르다.
둘째 삼마지(三摩地)이니, 등지(等持)라 한역한다. 등(等)의 뜻은 앞과 같고, 능히 심(心)을 제어하여 치달아 흩어지지 않게 하기에 등지(等持)라 이름한다. 또한 정혜(定慧)가 평등하여 서로 여의지 않게 하기에 등지라 이름한다.
셋째 삼마발제(三摩鉢提)이니, 등지(等至)라 한역한다. 등지(等持) 가운데서 능히 수승한 위(位)에 이르기에 등지(等至)라 이름한다.
넷째 타연나(馱演那)이니, 정려(靜慮)라 한역한다. 고요히 사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산려(散慮)를 능히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나(禪那) 혹은 지아나(持阿那)라고도 하니, 방언(方言)의 차이이나 모두 정려(靜慮)를 이른다.
다섯째 사마타(奢摩他)이니, 지(止)라 한역한다. 심(心)을 경계에 머물게 하기에 지(止)라 이름한다.
여섯째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심(心)으로 하여금 경(境)의 성(性)에 오로지 하나가 되게 하기에 심일경성이라 이름한다. 예전에는 일심(一心)이라 하였는데, 약칭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정(定)이니, 소연(所緣)을 자세히 정하기에 정(定)이라 이름한다.
여덟째 정사(正思)이니,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 정(定)의 넓고 좁음 [通局] ━━━
넓고 좁음을 밝히자면, 대략 네 가지 예로 나눈다.
첫째, 정(定)과 등지(等持)의 두 이름이 가장 넓으니, 유루(有漏)·무루(無漏)에 통하고, 삼계에도 통하며, 욕계의 산란한 마음에도 통한다. 육위심소(六位心所) 가운데 별경(別境) 다섯 중에 삼마지가 있어 또한 정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둘째, 심일경성(心一境性)과 삼매(三昧)의 이름은 다음으로 넓으니, 욕계에는 통하나 일향 산란한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반주삼매(般舟三昧)나 욕계에 매인 구종심주(九種心住)의 경우 심일경성이 욕계의 방편심(方便心)에도 통하기 때문이다.
셋째, 삼마희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의 이름은 좁으니, 전혀 욕계심(欲界心)에 통하지 않는다. 오직 경안(輕安)이 함윤(含潤)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넷째,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는 가장 좁다. 정지(定地) 내에서도 간별이 있기 때문이다. 사마타(奢摩他)는 네 가지 혜행(慧行) 중의 심일경성(心一境性)에 통하지 않고, 삼마발제(三摩跋提)는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 삼삼마지(三三摩地)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3문 제목 해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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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 消文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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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문 문구(文句)를 소석(消釋)하자면, 경문(經文)은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서분(序分), 둘째는 제2품 이하 여섯 품의 나머지 문이니 정설분(正說分)이요, 셋째는 입총지품(入摠持品)에서 「이때 여래가 대중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하 두 쪽가량의 문이니 유통분(流通分)이다.
서분(序分) 안에 두 종류의 서(序)가 있으니, 통서(通序)와 별서(別序)이다. 통서 가운데 곧 여섯 가지 일이 있으니, 앞의 셋은 친히 받아 전함[親承之傳]을 밝히고, 뒤의 셋은 대사(大師)의 설(說)을 증명한다. 앞의 셋은 여시(如是)·아문(我聞)·일시(一時)요, 뒤의 셋은 교주(教主)·주처(住處)·도중(徒衆)이다. 도중 안에서 네 종류의 대중을 서술하니, 성문중(聲聞衆)·보살중(菩薩衆)·장자중(長者衆)·잡류중(雜類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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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서(別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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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經)에서 말한다: 「그때 세존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여러 대중을 위해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이 일미진실(一味眞實)·무상무생(無相無生)·결정실제(決定實際)·본각이행(本覺利行)이었다. 만약 이 경을 들으면 나아가 일사구게(一四句偈)를 수지하더라도, 이 사람은 곧 불지(佛智)의 지(地)에 들어가 능히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대지식(大知識)이 될 것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별서(別序)이니, 곧 네 부분이 있다. 첫째 위의분(威儀分), 둘째 설경분(說經分), 셋째 입정분(入定分), 넷째 중송분(重頌分)이다.
위의분은 경의 「이때 세존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설경분은 경의 「여러 대중을 위해 대승경을 설하시니」 등에서 알 수 있다.
이 경문(經文)의 문세(文勢)는 법화경의 서(序)와 유사하다. 저 「이때 세존께서 사중(四衆)에게 둘러싸여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이 무량의(無量義)였다」는 것처럼, 저 론에서는 이 경명(經名)을 법화경의 이명(異目)으로 판단한다. 저 론의 뜻은 앞에서 설하였기에 서분이라 이름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경문의 문세를 살펴보면 모두 경가(經家)의 서사(序辭)이니, 이를 기준으로 보면 마땅히 별경(別經)이 앞에서 광설(廣說)되었을 것이다. 설하고 나서 입정하고, 정으로부터 일어난 뒤에 금강삼매경을 설하였을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고 나서 결가부좌하시고 곧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셨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입정분이다. 경을 설하기에 앞서 먼저 입정하는 까닭은, 오직 고요히 적정(寂靜)한 자만이 법에 대해 능히 깨닫고 능히 설할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현성(賢聖)의 묵연(默然)을 드러내기 위해서니, 현성이 설법함은 때에 따라 쓰되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陁)라는 이름의 비구(比丘)가 한 분 계셨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호궤(合掌胡跪)하고 이 뜻을 선포하고자 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중송분이다. 앞에서 설한 일미의 경과 뒤에서 설하는 경의 대의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간략한 게송으로 앞의 광경(廣經)을 송하고, 이로써 뒤의 약경(略說經)을 발기하였다.
아가타(阿伽陁)란 무거(無去), 혹은 멸거(滅去)라 한역한다. 이것은 약(藥) 이름이니, 능히 모든 병을 다 없애므로 무거(無去)라 이름한다. 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능히 중생의 온갖 번뇌의 병을 치료하므로, 약 이름으로 그 목(目)을 삼은 것이다.
八行頌 가운데 두 부분이 있으니, 앞의 칠송(七頌)은 설경(說經)을 송하고 뒤의 일송(一頌)은 입정(入定)을 송한다. 앞 중에 또한 두 가지이니, 삼송(三頌)은 총명(摠明)하고 사송(四頌)은 별현(別顯)한다.
경에서 말한다: 「대자(大慈)가 원만하신 세존이시여, 지혜가 걸림 없이 통하여, 중생을 널리 제도하기 위해 일제(一諦)의 의미를 설하셨네. 모두 일미도(一味道)로써 끝내 소승으로는 설하지 않으시니, 설하는 의미의 맛이 있는 곳은 모두 다 불실(不實)을 여의었네. 제불의 지지(智地)에 들어가니 결정코 진실제(眞實際)라, 듣는 자들은 모두 출세(出世)하여 해탈하지 못함이 없으리.」
론(論)에서 말한다: 총명삼송(摠明三頌)에 곧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이구(二句)는 능설(能說)의 덕을 찬탄하고, 둘째 일송(一頌)은 능전(能詮)의 가르침을 찬탄하며, 셋째 일송은 소전(所詮)의 의미를 찬탄하고, 넷째 이구는 교(敎)의 승리(勝利)를 찬탄한다. 둘째 중 일제의(一諦義)라 함은 이른바 일심(一心)이다. 일심법(一心法)에 의거하여 두 종류의 문(門)이 있으니, 두 문이 의거하는 것은 오직 일실(一實)이기에 일제(一諦)라 이름한다. 일미도(一味道)란 오직 일승(一乘)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무량한 보살들이 모두 중생을 제도하여, 중생을 위해 광심(廣深)으로 물어 법이 적멸(寂滅)의 모습임을 알고, 결정처(決定處)에 들어갔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 사송(四頌)이 별탄문답(別歎問荅)이다. 이 오구(五句)는 문(問)이 광심(廣深)함을 찬탄하여, 적멸을 알고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여래의 지방편(智方便)으로 마땅히 실(實)에 들어감을 설하시니, 순응하면 모두 일승이라 잡다한 맛이 없네. 마치 하나의 비가 적셔 여러 풀이 모두 무성하되 그 성품에 따라 각기 다른 것처럼, 일미의 법이 적셔 일체에 두루 충만하니, 저 하나의 비가 적셔 모두 보리의 싹을 자라게 하는 것과 같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부처님 답(荅)의 승리를 찬탄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법(法)·유(喩)·합(合)으로, 차례대로 사구(四句)·이구(二句)·오구(五句)임을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한다: 「금강미(金剛味)에 들어가 법진실(法眞實)을 증정(證定)하니, 결정코 의회(疑悔)를 끊고 일법(一法)의 인(印)이 이루어지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송 입정(入定)이다. 상반(上半)은 앞의 입정을 바로 송하고, 하반(下半)은 후기(後起)하여 설법함을 역송(逆頌)한다. 후에 설하는 교(敎)에 두 가지 수승한 능(能)이 있으니, 첫째는 의회(疑悔)를 결단함이니 금강이 능히 타파하는 것과 같고, 둘째는 일승(一乘)을 인성(印成)함이니 금강이 파괴되지 않는 것과 같다. 하반의 이구(二句)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서분(序分)의 문이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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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분(正說分) — 무상법품(無相法品) 第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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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正說) 가운데 크게 둘로 나뉘니, 앞의 여섯 품은 관행(觀行)을 별현(別顯)하고 총지품(摠持品) 하나는 의정(疑情)을 총히 없앤다. 별현 가운데 여섯으로 나뉘니,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은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은 무생행(無生行)을 드러내며, 셋째 본각이품(本覺利品)은 본(本)에 의거해 물(物)을 이롭게 하고, 넷째 입실제품(入實際品)은 허(虛)로부터 실(實)에 들어가며,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은 일체행이 진성공(眞性空)으로부터 나옴을 변별하고,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은 무량한 문(門)이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감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여섯 문의 관행이 두루 다한다. 그러한 까닭은, 무릇 모든 망상이 무시(無始)로부터 유전(流轉)하는 것은 오직 취상분별(取相分別)의 환(患) 때문이다. 이제 반류귀원(反流歸源)하고자 하면 먼저 모든 상(相)을 파척(破遣)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무상법(無相法)을 관함을 밝힌다. 모든 상을 버렸더라도 관심(觀心)이 존재하면, 관심이 오히려 생(生)하여 본각(本覺)에 회합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생심(生心)을 민멸(泯滅)한다. 이에 제2품에서 무생행(無生行)을 드러낸다. 행이 이미 무생하면 본각에 회합하고, 이에 의거하여 물(物)을 교화하여 본리(本利)를 얻게 하므로 제3품에서 본각이문(本覺利門)을 밝힌다. 본각에 의거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이 곧 능히 허(虛)로부터 실(實)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제4품에서 입실제(入實際)를 밝힌다. 내행(內行)은 곧 무상무생이요, 외화(外化)는 곧 본리(本利)로 실(實)에 들어가니, 이와 같이 이리(二利)로 만행(萬行)을 갖추어 진성(眞性)에서 함께 나와 모두 진공(眞空)에 순응한다. 이런 까닭에 제5품에서 진성공(眞性空)을 밝힌다. 이 진성에 의거하여 만행이 이에 갖추어져 여래장의 일미(一味)의 근원에 들어간다. 이런 까닭에 제6품에서 여래장(如來藏)을 드러낸다. 이미 심원(心源)에 귀환하면 곧 하는 바가 없다. 하는 바가 없기에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여섯 문을 설하여 대승을 섭한다.
품명(品名)을 먼저 해석하자면, 무상(無相)이란 무상관(無相觀)을 이르니 제상(諸相)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법(法)이란 소관(所觀)의 법을 이르니 일심법(一心法)이기 때문이다. 무상관은 앞의 여섯 부분 가운데 제1분의 뜻이요, 소관법은 뒤의 여섯 문 가운데 제1문의 법이다. 지금 이 초품이 이 두 가지 뜻을 드러내기에 무상법품(無相法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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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법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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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經)에서 말한다: 「그때 세존께서 삼매로부터 일어나 이 말씀을 설하셨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 한 품의 문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처음은 출정분(出定分), 다음은 기설분(起說分), 나중은 득익분(得益分)이다. 초분과 말분은 경가(經家)의 서(序)이고, 제2분이 바로 불언(佛言)이다.
초분(初分) 가운데 세 가지 성취를 드러낸다. 첫째 설법시성취(說法時成就), 즉 경의 「이때[爾時]」이다. 둘째 설법주성취(說法主成就), 즉 경의 「세존[尊者]」이다. 다섯 가지에 통달하여 세상의 존경을 받으며, 심심법(甚深法)에 대해 의(義)와 같이 설하기 때문이다. 셋째 자재성취(自在成就), 즉 경의 「삼매로부터 일어나 이 말씀을 설하셨다」이다. 여래가 정(定)에 드심에 능히 놀라 깨울 자가 없고, 정에 머물고 나옴에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 略標分 ━━━
경에서 말한다: 「제불(諸佛)의 지지(智地)로써 실법상(實法相)의 결정성(決定性)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정발언설(正發言說)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장행(長行), 둘째는 중송(重頌)이다. 초장행(初長行) 가운데 또한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 약표분(略標分), 둘째 광설분(廣說分)이다. 약표분 가운데 두 가지 뜻을 표방하니, 처음은 무상관(無相觀)을 표방하고, 뒤는 소관법(所觀法)을 표방한다.
무상관 가운데 두 구(句)가 있으니, 먼저는 여래께서 스스로 무상관에 드심을 표방하고, 뒤는 다른 이로 하여금 무상관에 들게 함을 표방한다.
자입(自入)이란, 경의 「제불의 지지로써 실법상의 결정성에 들어갔기 때문이다」에서와 같다. 제불지지(諸佛智地)란 앞에서 든 금강삼매와 상응하는 지혜를 이르니, 일체 공덕의 법을 주지(住持)하기 때문이다. 입실법상(入實法相)이란 이 불지(佛智)가 일체의 상(相)을 타파하여 제법의 실상(實相)에 통달함을 이른다. 결정성(決定性)이란 이 실법상이 불(佛)이 만든 것이 아니니, 불(佛)이 계시든 안 계시든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방편(方便)과 신통(神通)이 모두 무상리(無相利)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 두 번째 구(句)는 다른 이로 하여금 들어가게 한다. 방편이란 팔상방편(八相方便)이니, 도솔천에서 퇴위(退位)하는 것으로부터 입열반(入涅槃)에 이르기까지이다. 신통이란 육신통(六神通)이니, 삼륜(三輪)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모두 무상리(無相利)라 함은, 이와 같은 팔육(八六)의 방편신통이 모두 자신이 실상에 들어감으로부터 일어나, 능히 다른 이로 하여금 무상리(無相利)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일각료의(一覺了義)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제이승(諸二乘)의 지견(知見)이 아니요, 오직 불(佛)과 보살만이 능히 알 수 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소관법(所觀法)을 표방하는 것이니, 또한 두 구가 있다. 첫째는 소관법(所觀法)의 깊음을 직접 표방하고, 둘째는 다른 이를 위해 이 깊은 법을 설함이다. 일각료의(一覺了義)란 일심본각여래장(一心本覺如來藏)의 의미이니, 이것을 넘어서면 영원히 더 이상 깊은 법이 없기 때문이다. 난해(難解)란 뜻이 심심(甚深)하여 제이승의 지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입(難入)이란 체(體)가 심심하여 오직 불보살만이 능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文)은 초문(初門)에서 표방한 불지(佛智)가 들어간 실법상이 바로 일심본각여래장법(一心本覺如來藏法)임을 밝히려 한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적멸(寂滅)이라 함은 일심(一心)이라 이름하고, 일심이란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지금 이 문에서 실법상(實法相)이라 함은 적멸의 뜻이요, 일각료의(一覺了義)란 곧 일심여래장의 뜻이다.
경에서 말한다: 「제도할 수 있는 중생에게 모두 일미(一味)를 설하신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은 다른 이를 위해 모두 깊은 법을 설함을 밝힌다. 가도중생(可度衆生)이란 여래께서 교화하시는 일체 중생이 모두 일심의 유전(流轉)이기 때문이다. 개설일미(皆說一味)란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 교법이 모두 일각(一覺)의 미(味)에 들어가게 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이 본래 일각이되, 다만 무명으로 말미암아 꿈을 따라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一味)의 설로부터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심원(心源)으로 돌아갈 때 모두 얻는 바가 없다. 이런 까닭에 일미(一味)라 하니 곧 일승(一乘)이다. 초략표문(初略標文)이 마쳤다.
━━━ 廣說分 ━━━
경에서 말한다: 「그때 해탈보살(解脫菩薩)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호궤(合掌胡跪)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광설(廣說)이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청(請)하고 뒤에 설한다. 청(請)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인의(人儀)를 서술하고 뒤에 발언(發言)을 밝힌다. 서(序)에 두 구(句)가 있으니, 첫째 때에 의거하여 인(人)을 드러냄이다. 해탈보살(解脫菩薩)이란 제중생(諸衆生)으로 하여금 동일한 해탈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능문(能問)의 인(人)에 기탁하여 소설(所說)의 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둘째 예의(禮儀)를 서술함이다.
경에서 말한다: 「세존이시여, 만약 부처님 멸후에 정법(正法)이 세상을 떠나고 상법(像法)이 세상에 머물 때, 말겁(末劫) 가운데 오탁(五濁)의 중생이 많은 악업(惡業)이 있어 삼계를 윤회하며 나올 때가 없습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발언하여 청함이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위해 줄 시절을 들고, 뒤에 저들을 위해 선설(宣說)해 주기를 청한다. 상법주세(像法住世) 말겁중(末劫中)이란, 앞서 광설(廣說)한 경은 정법(正法)의 시절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고, 이 경은 상법(像法)의 시절을 교화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원하오니 부처님께서 자비로이, 후세 중생을 위하여 일미결정진실(一味決定眞實)을 선설하셔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동일한 해탈을 얻게 하소서.」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바로 선설을 청함이다. 일미(一味)를 선설하기를 청함이란 일각료의(一覺了義)의 맛을 설해 주기를 청함이다. 결정진실(決定眞實)이란 입실법상(入實法相)의 관(觀)을 설해 주기를 청함이다. 저 상법말세(像法末世)의 중생 등으로 하여금 일미(一味)의 구경해탈(究竟解脫)을 동일하게 얻게 함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가 능히 나에게 출세(出世)의 인(因)을 물어,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출세의 과(果)를 얻게 하려 하니, 이것은 일대사(一大事)요 불가사의이다. 대자(大慈)이기 때문이요 대비(大悲)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설하지 않으면 곧 간탐(慳貪)에 떨어질 것이니, 그대들은 일심으로 자세히 들으라. 그대를 위해 선설하리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여래께서 설하심이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問)을 찬탄하고 설을 허락함이요, 둘째는 청(請)에 대응하여 선설함이다. 찬탄하는 가운데 출세의 인(因)이란 입실상관(入實相觀)이기 때문이다. 출세의 과(果)란 일미해탈(一味解脫)이기 때문이다. 일대사(一大事)란 무상동의(無上同義)이기 때문이다. 불가사의란 이언절려(離言絕慮)이기 때문이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제불세존(諸佛世尊)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였다. 론에서 「일대사란 네 가지 뜻에 의거한다. 첫째 무상의(無上義), 둘째 동의(同義), 셋째 부지의(不知義), 넷째 영증불퇴전지(令證不退轉地)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지금 이 문에서 일대사의 네 가지 뜻도 마찬가지이다. 첫째 무상의(無上義)이니, 앞 문에서 「제불지지입실법상(諸佛智地入實法相)」이라 한 것과 같다. 둘째 동의(同義)이니, 경에서 「일각료의난해난입(一覺了義難解難入)」이라 한 것과 같다. 셋째 부지의(不知義)이니, 「비제이승소지견(非諸二乘所知見)」이기 때문이다. 넷째 영증의(令證義)이니, 「가도중생개설일미(可度衆生皆說一味)」이기 때문이다.
━━━ 무상관(無相觀) ━━━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만약 중생을 교화하되 교화에 생(生)이 없고, 생하지 않아 교화도 없으니 그 교화가 크도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로부터 바로 선설한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무상관(無相觀)을 밝혀 무상리(無相利)를 널리 밝히고, 뒤에 일각심(一覺心)을 드러내어 앞의 일각의(一覺義)를 널리 밝힌다. 무상관 가운데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관행의 상(相)을 직설하고, 둘째는 왕복하여 제의난(諸疑難)을 결정한다. 첫째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방편관(方便觀)이고 뒤가 정관(正觀)이다.
방편관 가운데 네 구(句)가 있으니, 처음 일구(一句)는 능화(能化)를 거론하고, 뒤 일구는 교화의 크기를 찬탄하며, 중간 이구(二句)가 바로 관상(觀相)을 밝힌다.
무생어화(無生於化)란 처음 관을 닦을 때 모든 유상(有相)을 타파하여 환화상(幻化相)에서 그 생심(生心)을 없애기 때문이다. 불생무화(不生無化)란 이미 화상(化相)을 타파하고, 다음에 공상(空相)을 버리어, 무화공(無化空)에서도 또한 생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화하기에 그 교화가 크도다. 문: 이 방편관은 어느 위(位)에 있는가? 답: 앙신(仰信)하여 닦으면 십신(十信)에 있고, 상사관(相似觀)은 삼십심(三十心)에 있다. 순수한 닦음으로는 사선근(四善根)에 있으니, 장차 초지(初地)에 들어가는 근방편(近方便)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아(心我)를 여의게 한다. 일체 심아(心我)가 본래 공적(空寂)하다. 만약 공심(空心)을 얻으면 마음이 환화(幻化)하지 않는다. 환화가 없으니 곧 무생(無生)을 얻고, 무생의 마음이 무화(無化)에 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은 정관(正觀)의 무이(無二)한 모습을 밝힘이니, 소취(所取)와 능취(能取) 둘을 여의기 때문이다.
소취(所取)를 여읨이란 일체 인법상(人法相)을 여위기 때문이다. 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견리(遣離)요 둘째 민리(泯離)이다. 견리(遣離)란 먼저의 소취상(所取相)을 지금 멸제함이다. 민리(泯離)란 먼저의 소취상이 본래 공함이다. 심아(心我)란 인(人)을 아(我)라 이름하고 법(法)을 심(心)이라 이름하니, 심(心)이 제법의 의지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제인법(諸人法)이 본래 공함을 통달할 때, 먼저의 소취상이 이때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이리(二離)가 동시에 성취된다.
능취(能取)를 어떻게 여의는가? 이르되 일체 능취분별을 여의는 것이니, 이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본리(本離)요 둘째 시리(始離)이다. 본리(本離)란 심아(心我)가 본래 공함을 통달할 때 바로 본각공적(本覺空寂)의 마음을 얻으니, 이 공적심이 본래 능취를 여의고, 능취를 여읜 까닭에 본래 환화(幻化)하지 않는다. 시리(始離)란 이 본각공적심을 얻을 때 능취분별이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시리(始離)가 능취는 시각(始覺)의 뜻이요, 본리(本離)의 공심은 본각(本覺)의 뜻이다. 뜻이 비록 두 가지이나 혼연히 일각(一覺)을 이룬다. 능소(能所)를 동일하게 여의고 신구(新舊)를 여의기 때문이다. 론에서 「시각(始覺)으로써 곧 본각(本覺)과 같다. 마땅히 알라, 이 각은 영원히 생멸·시종(始終) 등의 상을 여읜다. 초지(初地)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다만 분(分)·만(滿)의 다름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 往復決疑 第一問荅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의 마음이 성품이 본래 공적한데, 공적한 마음의 체(體)에는 색상(色相)이 없으니, 어떻게 수습(修習)하여 본래의 공심(空心)을 얻겠습니까? 원하오니 부처님께서 자비로이 저를 위해 선설하소서.」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왕복결의(往復決疑)이니, 네 번의 문답으로 차례로 의혹을 결한다. 제1문에서 문의(問意)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중생의 심성이 본래 공적한데 오히려 동념(動念)하여 무시(無始)로부터 유전하니, 어찌 수행하여 본심(本心)을 얻겠는가? 둘째, 공적한 심체에 색상이 없는데, 중생이 본래 항상 유상(有相)을 취하니, 어찌 없음을 습득하여 공심을 얻겠는가?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일체 심상(心相)은 본래 근본이 없고[本來無本], 근본의 처소도 없어[本無本處] 공적하고 무생이다. 만약 마음이 무생하면 곧 공적에 든다. 공적한 심지(心地)에서 곧 심공(心空)을 얻는다. 선남자여, 무상(無相)의 마음에는 심(心)도 없고 아(我)도 없으니, 일체 법상(法相)도 또한 이와 같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 답(荅)에 두 가지가 있으니, 정답(正荅)과 결답(決荅)이다. 일체 심상(心相)이란 일체 팔식(八識)이 동념하는 마음과 심소(心所)가 상응하는 행상(行相)의 차별이다. 행(行)이든 상(相)이든 모두 사상(四相)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무본(本來無本)·본무본처(本無本處)란, 일체 심상의 종자(種子)가 근본인데, 이 근본인 종자를 구하면 영원히 얻을 수 없다. 그 까닭은, 현재에 있다면 과(果)와 함께하여 본말(本末)의 차이가 없으니 마치 소의 두 뿔과 같고, 이미 과거라면 작인(作因)이 없어 체성(體性)이 없으니 마치 토끼의 뿔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도리가 본래부터 법이(法爾)하다. 이런 까닭에 본래무본(本來無本)이라 한다.
또한 생멸심(生滅心)이 생하려면 반드시 본처(本處)에 의거해야 하는데, 본처가 이미 없으니 곧 생할 수 없다. 이미 본종(本種)도 없고 본처도 없으니, 마땅히 알라, 심상은 본래 무생이다. 이런 까닭에 공적무생(空寂無生)이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생(生)을 얻지 못할 때, 그 능관심(能觀心)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다. 이때 곧 본래 공적에 들어가니, 들어간 바 공적이 곧 일심(一心)이다. 일체의 의지처를 지(地)라 이름하기에 곧 공적에 들어간다고 한다. 공적한 심지(心地)에서 제중생(諸衆生)이 본래 유전하여 항상 유상을 취하지만, 이 문(門)에 의거해 추구하여 관찰하면 곧 능히 본래의 공심을 얻는다. 이런 까닭에 곧 심공을 얻는다고 한다.
무상의 마음에는 심(心)도 없고 아(我)도 없다는 것이 결답(決荅)이다. 무상지심(無相之心)이란 일심의 체를 드는 것이요, 무심무아(無心無我)란 앞에서 말한 바를 결(結)하는 것이다. 공적무생무상심(空寂無生無相心) 가운데서 심아상(心我相)을 여읜다. 일체법상역여시(一切法相亦如是)란 공적함을 거듭 결하는 것이니, 이 심아(心我) 이상(二相)만을 여읠 뿐 아니라, 그 나머지 일체 유위무위에서 유상무상(有上無上)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을 심중에서 여리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 往復決疑 第二問荅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일체 중생에게 만약 아(我)가 있거나 만약 심(心)이 있다면, 어떤 법으로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이 속박을 벗어나게 하겠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문답이다. 앞의 일문답은 유상문(有相門)을 타파함을 총명(摠明)하였다. 지금 이 문답은 이박(二縛)을 여위는 문을 별현(別顯)한다. 두 가지 병을 별거(別擧)하여 그 약을 묻는다. 유아(有我)는 인집(人執)의 병이요, 유심(有心)은 법집(法執)의 병이다. 사박(斯縛)이란 인집은 추중박(麤重縛)이요 법집은 상박(相縛)이다. 통해서 말하면 이집(二執)이 모두 추중상박(麤重相縛)이 있다. 또한 이 이집(二執)에는 모두 두 가지 속박이 있으니, 상응박(相應縛)과 능연박(能緣縛)이다.
답(荅)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인집(人執)을 다스리고 뒤에 법집(法執)을 다스린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약 아(我)가 있는 자는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관하게 하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총치(摠治)이다. 십이지(十二支)를 관하는 것에 대략 두 문이 있다. 첫째, 무작연생(無作緣生)을 관하여 작자집(作者執)을 치료한다. 둘째, 무상연생(無常緣生)을 관하여 상주집(常住執)을 치료한다. 아(我)를 고집하는 근본이 이 두 가지이니, 근본이 이미 제거되면 모든 말단이 따라 멸한다.
경에서 말한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은 근본이 인과(因果)로부터 오고, 인과가 일어나는 것은 심행(心行)에서 흥기(興起)한다.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아니한데 하물며 몸이 있음이랴? 만약 아(我)가 있는 자는 유견(有見)을 멸하게 하고, 만약 아(我)가 없는 자는 무견(無見)을 멸하게 하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별치(別治)이다. 별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황치(況治)요 둘째 축치(逐治)이다. 인과(因果)가 일어나는 것은 심행이 근본이니, 심이 능히 인(因)을 짓고 심이 과(果)를 받기 때문이다.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은데 하물며 몸이 있음이랴? 위에서 설한 관찰의 도리에서 심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심이 만든 색신(色身)이 있다 하겠는가? 몸과 마음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아(我)가 있겠는가?
경에서 말한다: 「만약 심(心)이 생하는 자는 멸성(滅性)을 멸하게 하고, 만약 심이 멸하는 자는 생성(生性)을 멸하게 하라. 이 견성(見性)을 멸하면 곧 실제(實際)에 든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존심견(存心見)을 다스림이다. 이승인(二乘人) 등이 법집으로 심(心)을 고집하여, 생멸무상(生滅無常)한 마음이 있다고 계탁하기에, 생멸을 타파하여 존심견을 없앤다. 이 견성(見性)을 멸하면 곧 실제(實際)에 들어간다는 것은, 멸성(滅性)의 견(見)을 타파하면 반드시 생(生)을 취하지 않고, 생성(生性)의 견을 타파하면 반드시 멸(滅)을 취하지 않으니, 생멸을 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본래의 생(生)은 불멸(不滅)이요, 불멸이면 불생(不生)이며, 불멸불생이면 불생불멸이다. 일체 법상도 또한 이와 같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거듭 해석함이다. 어찌하여 심이 생한다고 보는 자에게 멸성(滅性)을 멸하게 하고, 심이 멸한다고 보는 자에게 생성(生性)을 멸하게 하는가? 이런 까닭에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본생(本生)이 불멸(不滅)이란, 앞의 생심(生心)을 구하면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얻을 수 없는데 어떤 법이 멸하겠는가? 이와 같이 앞의 심의 멸성(滅性)을 고집하지 않으면, 곧 지금 심의 생(生)을 취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불멸불생(不滅不生)이라 한다.
━━━ 往復決疑 第三問荅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중생이 법이 생하는 것을 볼 때 어떤 견(見)을 멸하게 합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문답이다. 앞의 문답은 멸해야 할 견(見)의 병을 밝히고, 지금 이 문답은 능히 멸하는 견(見)의 약(藥)을 드러낸다. 또한 앞에서는 생멸(生滅) 두 변(邊)의 견을 타파하고, 지금은 유무(有無) 두 변의 견을 타파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만약 중생이 법이 생하는 것을 볼 때 무견(無見)을 멸하게 하고, 법이 멸하는 것을 볼 때 유견(有見)을 멸하게 하라. 만약 이 견을 멸하면 법의 진무(眞無)를 얻어 결정성(決定性)에 들어가고 결정코 무생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법이 생하는 것을 볼 때란, 바로 속법(俗法)의 인연생(因緣生)을 관할 때이다. 이때 능히 공(空)을 취하는 견을 여읜다. 이런 까닭에 무견(無見)을 멸하게 한다고 한다. 법이 멸하는 것을 볼 때란, 바로 속법이 본래 멸하는 것을 관할 때이다. 이때 능히 유(有)를 취하는 견을 여읜다. 이런 까닭에 유견(有見)을 멸하게 한다고 한다.
이 뜻은 바로 관행(觀行)하는 자가 법이 생할 때를 관할 때 오직 무견(無見)만 여의고 생을 고집하지 않으며, 적멸을 관할 때 오직 유견(有見)만 여의고 멸을 취하지 않음을 밝힌다. 이런 까닭에 능히 두 변을 여의되 중(中)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래 게송에서 「인연소생의(因緣所生義), 시의멸비생(是義滅非生). 멸제생멸의(滅諸生滅義), 시의생비멸(是義生非滅)」이라 하였다.
━━━ 往復決疑 第四問荅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무생(無生)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무생입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4문답이다. 앞에서는 진관(眞觀)이 이변(二邊)을 여위는 상을 밝히고, 지금은 망해(妄解)가 생주(生住)를 여의지 못함을 드러낸다. 이미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고 망령되이 생각하는 병을 타파하기 위해 병을 들어 물었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에 머문다면 곧 이것이 생이다. 무슨 까닭인가? 무주무생(無住無生)이 이에 무생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약답(略荅)과 중상(重詳)이다. 이것이 약답이니 두 구(句)가 있다. 상구(上句)는 순히 이것이 생임을 밝힌다. 무생의 경계에 머물면 곧 분별의 심이 생하기 때문이다. 하구(下句)는 반(反)으로 무생을 해석한다. 만약 심이 무생의 경계에 머묾이 없어 모든 분별을 여읜다면 이것이 무생인(無生忍)이다.
경에서 말한다: 「보살이여, 만약 무생을 생하여 생으로써 생을 멸하면, 생과 멸이 함께 멸한다. 본래의 생이 불생하면 심이 항상 공적하고, 공적하여 머묾이 없어, 심에 머묾이 없음이 이에 무생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중상(重詳)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이것이 생임을 상세히 밝히고, 뒤에 무생을 상세히 밝힌다. 진무생인(眞無生忍)은 이와 같지 않으니, 밖으로는 소취(所取)의 멸을 고집하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能取)의 생을 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생멸이 함께 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함께 멸함은 도로 없어짐이 아니다. 본래의 생을 추구해도 그 생을 얻지 못한다. 이미 생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도로 멸하겠는가? 이때 본래 공적을 증회(證會)한다. 이와 같이 공적하여 능소(能所)가 평등하니, 능히 머무는 심이 없어 공경(空境)에 머무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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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覺義 廣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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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問荅 (有學·無學)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심에 머묾이 없다면 무슨 수학(修學)이 있어 유학(有學)이 되며 무학(無學)이 됩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일각의(一覺義)를 널리 밝힌다. 그 가운데 팔문답이 있다. 앞의 이문답은 바로 일각여래장의(一覺如來藏義)를 널리 밝히고, 뒤의 육문답은 논(論)으로 인해 논이 생기어 제의난(諸疑難)을 없앤다. 지금 이 초문(初問)은 심무주(心無住)를 묻는다. 만약 유학이면 곧 무주가 아니요, 만약 무학이면 곧 관행이 아니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무생지심(無生之心)은 심에 출입(出入)이 없으니, 본래 여래장(如來藏)의 성(性)이 적부동(寂不動)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 가운데 먼저 도리를 드러내고 뒤에 바로 문의(問意)에 대응한다. 도리를 드러내는 것은, 무주를 얻을 때 무생지심이 심이 항상 적멸하여 출관(出觀)이 없고, 본래 무기(無起)에 통달하여 또한 처음 들어감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심에 출입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관심은 이미 출입이 없으니 곧 본각여래장심(本覺如來藏心)이다. 이것이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음을 밝힌다.
경에서 말한다: 「또한 유학도 아니요 무학도 아니니, 학불학(學不學)이 없는 것이 이에 곧 무학이요, 유학이 없지 않음이 이것이 소학(所學)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바로 문의에 대응함이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차(遮)하고 뒤에 허(許)한다. 이미 처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까닭에 유학이 아니요, 또한 끝에 나오는 것도 없는 까닭에 무학이 아니다. 이것이 구차(俱遮)이다. 학불학이 없는 것이 이에 곧 무학이란, 별소학(別所學)이 없음으로 곧 능학(能學)이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무학임을 허락한다. 유학이 없지 않음이 이것이 소학이란, 비록 유주의 관이 아니나 무무주의 행도 아니니, 이런 까닭에 유학임을 허락한다. 이것이 구허자재답(俱許自在荅)이다.
━━━ 第二問荅 (如來藏性寂不動)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여래장성(如來藏性)이 적부동(寂不動)입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문답이다. 앞에서 시각이 본각여래장성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다. 지금 바로 여래장성이 은장(隱藏)하여 부동함을 드러낸다. 이 가운데 여래장의(如來藏義)를 간략히 밝힌다. 여래장문에는 둘과 셋이 있다.
셋이라 함은,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중생계 가운데 세 가지 법을 시현하니 모두 진실하여 다르지 않다. 어떤 것이 삼법인가? 첫째는 여래장본제상응체(如來藏本際相應體)와 청정법이요, 둘째는 여래장본제불상응체(如來藏本際不相應體)와 번뇌전부청정법(煩惱纏不淸淨法)이요, 셋째는 여래장미래제평등항유법(如來藏未來際平等恒有法)이다」고 한 것과 같다.
안(案)하건대, 이것이 세 가지 여래장문을 드러냄이다. 무엇이 셋인가? 첫째 능섭여래장(能攝如來藏)이니, 자성에 머물 때 능히 과지(果地)의 여래공덕을 섭하기 때문이다. 둘째 소섭여래장(所攝如來藏)이니, 번뇌전부청정법 일체가 모두 여래지(如來智) 안에 있어 모두 여래의 섭지(攝持)이기 때문이다. 셋째 은복여래장(隱覆如來藏)이니, 법신여래가 번뇌에 뒤덮이어 여래가 스스로 숨은 것을 여래장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이란 생멸(生滅)하는 여지상(慮知相)이 리(理)를 은폐하여 드러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여래장성(如來藏性)이 적부동(寂不動)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생멸여지상(生滅慮知相)이란 곧 공여래장(空如來藏)이다. 다만 이 문(文) 가운데서는 능은(能隱)의 뜻을 드러내되 이를 여래장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은리불현(隱理不顯)이 여래장이란, 이것이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니 소은(所隱)의 뜻에 약하여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성적부동(性寂不動)이란, 이 장성(藏性)이 비록 은폐되어도 바뀌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 성(性)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종류의(種類義)가 성(性)이다. 병(甁)·의(衣) 등 일체 색법이 사대(四大)의 종류를 벗어나지 않아 모두 사대를 성(性)으로 삼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이 일계(一界)를 벗어나지 않아 모두 일계(一界)를 종류로 삼는다. 섭대승론에서는 체류의(體類義)라 하고, 불성론에서는 자성의(自性義)라 한다.
둘째 인의(因義)가 성(性)이다. 나무 속에 화성(火性)이 있어 불의 인(因)이 되는 것처럼, 성인(聖人)의 모든 무루법이 이를 인으로 삼아 이루어진다. 두 론에서 모두 인의(因義)라 이름한다.
셋째 생의(生義)가 성(性)이다. 진금(眞金)을 제련하여 장엄구(莊嚴具)를 생하면 장엄구의 생이 금을 성(性)으로 삼는 것처럼, 이 법계(法界)도 과지(果地)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능히 생한다. 섭대승에서도 생의(生義)라 하고, 불성론에서는 지득의(至得義)라 한다.
넷째 불개의(不改義)가 성(性)이다. 마치 금강보성(金剛寶性)이 일겁(一劫)을 머물러도 증감이 없는 것처럼, 이 법계도 삼세에 평등히 머물러 세간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출세에서도 다하지 않는다. 두 론에서 진실의(眞實義)라 이름하니, 진실의(眞實義)는 곧 불괴의(不壞義)이다.
다섯째 밀장의(密藏義)가 성(性)이다. 황석(黃石) 속에 진금성(眞金性)이 있어 광석을 부수지 않으면 이로움이 없으나, 수련하면 곧 보배의 용(用)이 있는 것처럼 여래장성도 이와 같다. 불성론에서 비밀의(秘密義), 섭대승론에서 장의(藏義)라 한다. 지금 이 문에서 성(性)이라 함이 이 다섯 가지 뜻을 함축한다. 적(寂)은 밀장의(密藏義)요, 부동(不動)은 불개의(不改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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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論生論 六問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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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問荅 (生滅慮知相)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생멸여지상(生滅慮知相)입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로부터 여섯 문답이 있으니, 논으로 인해 논이 생기어 제의난을 결한다. 이 일문답은 능은(能隱)하는 여지(慮知)의 상을 밝힌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리(理)에는 가부(可不)가 없다. 만약 가부가 있으면 곧 모든 념(念)이 생기어 천사만려(千思萬慮)가 이것이 생멸상(生滅相)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 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약답(略荅)하고 뒤에 광연(廣演)한다. 약답의 두 구(句) 가운데, 먼저 미하는 바를 드는 것이다. 미하는 바의 리(理)는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하기에 「리에는 가부가 없다」고 하였다. 불(不)이란 비(非)이다. 리(理)는 사구(四句)를 끊고 모든 시비를 여의니, 분별심의 행처(行處)가 아니다. 다음에 능히 미혹하는 것을 드러낸다. 만약 가부가 있으면 곧 모든 념이 생긴다는 것은, 무명이 평등을 불각(不覺)함이 있어 곧 가부의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염심(染心)이 구족히 일어난다. 천사만려(千思萬慮)가 생멸상이란, 육종염심이 비록 추(麤)·세(細)가 있어도 모두 평등에 어기니 생멸상이기 때문이다.
기신론(起信論)에 따르면, 분별생멸상(分別生滅相)에 대략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추(麤)이니 심과 상응하기 때문이요, 둘은 세(細)이니 심과 불상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추 가운데 추(麤)는 범부의 경계요, 추 가운데 세(細)와 세 가운데 추는 보살의 경계요, 세 가운데 세는 불(佛)의 경계이다. 이 두 종류의 생멸은 무명훈습(無明熏習)에 의거하여 있다.
안(案)하건대, 이 가운데 추이면서 심과 상응한다는 것은 세 가지 상응염(相應染)을 이르고, 세이면서 심과 불상응한다는 것은 세 가지 불상응염(不相應染)을 이른다. 추 가운데 추는 집상응염(執相應染)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모두 육식(六識)에 있으므로 범부의 경계이다. 추 가운데 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제7식에 있다. 세 가운데 추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다. 세 가운데 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이 셋은 모두 제8식위(第八識位)에 있다. 지금 이 경에서 천사(千思)란 일체 불상응염의 세분별(細分別)을 총섭하고, 만려(萬慮)란 일체 상응염심의 추분별(麤分別)을 총섭한다.
경에서 말한다: 「보살이여, 본성상(本性相)을 관하면 리(理)가 스스로 만족하니, 천사만려는 도리에 보탬이 없어 허되이 동란(動亂)하여 본심왕(本心王)을 잃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광연(廣演)이니,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생멸상에 대응하여 리만족(理滿足)을 드러낸다. 둘째 리만족에 대응하여 염(染)의 결실(闕失)을 밝힌다. 셋째 리에 순하여 염을 멸하고, 동(動)을 버려 적(寂)으로 나아가는 이익을 변별한다.
본각여래장리(本覺如來藏理)가 무량성공덕(無量性功德)을 구족하기에 리자만족(理自滿足)이라 한다. 기신론에서 「진여자체상(眞如自體相)이란 본래부터 성(性)이 스스로 일체 공덕을 만족하니,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광명의(大智慧光明義), 변조법계의(遍照法界義), 진실식지의(眞實識知義), 자성청정심의(自性淸淨心義), 상락아정의(常樂我淨義), 청량불변자재의(淸涼不變自在義) 등을 갖추고, 항사(恒沙)를 넘는 불리불단불이불사의불법(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이 있어, 만족하여 부족함이 없기에 여래장이라 이름하고 또한 여래법신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생멸동념(生滅動念)의 허물을 밝히자면, 마음에 동(動)이 있으면 진식지(眞識知)가 아니어서 자성이 없고 상락아정이 아니기에 동(動)이라 하고, 마음에 기견(起見)이 있으면 불견(不見)의 상이 있기에 란(亂)이라 한다. 본심왕(本心王)을 잃는다는 것은, 무량공덕이 곧 일심이요, 일심이 주가 되기에 심왕(心王)이라 이름한다. 생멸동란이 이 심왕에 어기어 귀환할 수 없기에 잃는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만약 사려(思慮)가 없으면 곧 생멸이 없다. 여실(如實)하게 모든 식(識)이 일어나지 않아 안적(安寂)하여 유주(流注)가 생하지 않으면 오법정(五法淨)을 얻는다. 이것이 대승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리에 순하여 염을 멸하고 동을 버려 적으로 나아감이다. 만약 사려가 없다면 초지(初地)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점차 일심평등법계(一心平等法界)에 순응하여 영원히 일체 사려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류주(流注)가 생하지 않기에 법계(法界)가 원히 드러나고, 제식이 안적하기에 사지(四智)가 원만히 이루어진다. 이런 까닭에 오법정(五法淨)을 얻는다. 운재(運載)의 공이 이보다 넘는 것이 없기에 대승이라 한다.
경에서 말한다: 「보살이여, 오법정(五法淨)에 들어가면 심에 곧 망(妄)이 없다. 만약 망이 없으면 곧 여래자각성지(如來自覺聖智)의 지(地)에 든다. 지지(智地)에 든 자는 일체가 본래 불생(不生)함을 잘 알고, 본래 불생임을 알면 곧 망상(妄想)이 없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중현(重顯)이니 세 구(句)가 있다. 첫째 오법정에 들어가면 심에 곧 망이 없다는 것은, 심원(心源)으로 돌아갈 때 곧 망념의 불각(不覺)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망이 없으면 곧 여래자각성지의 지(地)에 든다는 것은, 불각이 다할 때 곧 시각원지(始覺圓智)의 지에 들기 때문이다. 셋째 지지(智地)에 든 자는 일체가 본래 불생임을 알고, 본래 불생임을 알면 곧 망상이 없다는 것은, 시각이 원만할 때 불각의 사상동념(四相動念)이 본래 불생임을 알아 곧 본래 망상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기신론에서 「일체 중생은 각(覺)이라 이름하지 않으니, 본래부터 념념이 상속하여 일찍이 념을 여읜 적이 없기 때문에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설한다. 만약 무념을 얻으면 곧 심상(心相)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알게 되고, 무념 등이기 때문에 실로 시각의 다름이 없다.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립(自立)이 없으니,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일각(一覺)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 第二問荅 (無止息)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망상이 없는 자는 마땅히 지식(止息)이 없을 것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문답으로 무지식(無止息)을 밝힌다. 문의(問意)는, 본래 망상이 없으면 곧 지(止)할 바가 없고, 지할 바가 없으니 능지(能止)도 없으며, 능지가 없으니 마땅히 시각(始覺)이 없을 것이라는 어려운 질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망(妄)이 본래 불생이니 멸할 망이 없고, 심이 무심(無心)임을 알아 지할 심이 없으며, 분(分)도 없고 별(別)도 없어 현식(現識)이 불생하니 지할 생(生)이 없다. 이것이 곧 무지(無止)이되 또한 무지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무생의 망심을 지(止)하기 때문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답의(答意)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무지(無止)를 허락하고 뒤에 무지를 차(遮)한다. 허락함은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요, 차함은 시각이 오직 본각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 第三問荅 (無生觀)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지(止)하되 지(止)가 없다면 지가 곧 생이니, 어찌하여 무생이라 하겠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문답으로 무생관(無生觀)을 드러낸다. 힐난의 뜻은, 만약 능히 지(止)하는 각(覺)이 있으면 곧 능지(能止)의 관(觀)이 생기니, 비록 불각(不覺)의 일어남을 없앤다 해도 시각(始覺)의 생(生)이 여전히 남는다. 어찌하여 능히 무생관을 증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마땅히 이 생을 지하되, 지하고 나면 지가 없고, 또한 무지(無止)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무주(無住)에도 머물지 않으니, 어찌하여 이것이 생이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답의(答意)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주고 뒤에 빼앗는다. 줌은 방편관에서 생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시절에 비록 식생(識生)을 지하나, 식을 취하지 않으면서 능지심이 무(無)를 취하여 생하니, 이 지(止)할 때 이것이 생임을 허락한다. 이 일념을 지나면 곧 무(無)를 취하지 않으니, 취하는 마음이 생하지 않는다. 이때 능소(能所)가 영절(永絕)하여 평등평등하니, 어찌 이때 생을 얻겠는가?
━━━ 第四問荅 (遣增減見)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생지심(無生之心)에 어떤 취사(取捨)가 있으며 어떤 법상(法相)에 머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지심은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불심(不心)에 머물고 불법(不法)에 머무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문답으로 증감견(增減見)을 없앤다. 어떤 학자들이 입관지심이 무상지리(無相之理)를 취하고 제상사(諸相事)를 버린다고 생각하기에, 이 증익견을 없애기 위해 불취불사(不取不捨)라 한다. 또는 입관지에 머물 바 법도 전혀 없고 능주심도 없어, 마치 필경무위(畢竟無爲)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 손감견을 없애기 위해 불심에 머물고 불법에 머문다고 한다. 비록 유주(有住)가 아니나 무주(無住)도 아니니, 무주가 아닌 까닭에 머문다고 말할 수 있다.
━━━ 第五問荅 (重遣疑情)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불심(不心)에 머물고 불법(不法)에 머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심을 생(生)하지 않음이 이것이 불심(不心)에 머묾이요, 법을 생하지 않음이 이것이 불법(不法)에 머묾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5문답으로 의정(疑情)을 거듭 없앤다. 이미 머문다고 말했다면 곧 마땅히 심이요 법이어야 한다. 만약 심법이 아니라면 곧 마땅히 불주(不住)라고 해야 한다는 의혹이다. 불언(佛言)의 뜻은, 능증(能證)의 관심(觀心)을 고집하지 않고 소증(所證)의 이법(理法)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生)은 고집하는 것과 같다. 이미 항상 심법을 고집하지 않으니, 간혹 념을 잃어 고집함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불심에 머묾이요 불법에 머묾이라 한다. 주(住)는 항상함과 같다. 항상 퇴실(退失)하지 않기에 머문다고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심법(心法)을 생하지 않으면 곧 의지(依止)가 없고, 제행(諸行)에 머물지 않으면 심이 항상 공적하다. 이상(異相)이 없음이 마치 저 허공과 같아, 동(動)도 없고 주(住)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저도 없고 이도 없다. 공심안(空心眼)을 얻고 법공신(法空身)을 얻는다. 오음(五陰)과 육입(六入)이 모두 다 공적하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중현(重顯)이니,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제상(諸相)을 원리하여 삼세에 두루함을 드러내고, 뒤에 법계에 수순하여 육도(六度)를 구수(具修)함을 드러낸다. 초 가운데 세 구가 있으니 법(法)·유(喩)·합(合)이다. 허공의 비유는 불주제행(不住諸行)을 비유하고, 무동무주(無動無住)는 즉 무기무작(無起無作)에 비유하며, 무피무차(無彼無此)는 무유이상(無有異相)에 비유한다. 합(合) 가운데 공심안(空心眼)을 얻음이란 불생(不生)의 능관심으로 말미암아 관하지 않음이 없음을 얻기 때문이다. 법공신(法空身)을 얻음이란 불생의 소관법으로 말미암아 평등법신(平等法身)을 얻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공법(空法)을 닦는 자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고, 계상(戒相)에 머물지 않으며, 청정하여 념이 없고, 섭(攝)도 없고 방(放)도 없으며, 성품이 금강과 같고, 삼보(三寶)를 파괴하지 않으니, 공심이 부동하여 육바라밀을 갖춘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육도를 구수함을 드러냄이다. 삼계에 의지하지 않기에 시도(施度)를 갖추고, 계상에 머물지 않기에 계도(戒度)를 갖추며, 청정무념이기에 인도(忍度)를 갖추고, 무섭무방(無攝無放)이기에 정진을 갖추며, 성품이 금강과 같기에 선정을 갖추고, 삼보를 파괴하지 않기에 반야를 갖춘다. 오직 일공심으로 별도의 동작이 없이 육도를 갖추기 때문에 공심불동구육바라밀(空心不動具六波羅密)이라 한다.
━━━ 第六問荅 (出世六度) ━━━
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육바라밀(六波羅密)은 모두 유상(有相)입니다. 유상의 법이 능히 출세(出世)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설한 육바라밀은 무상무위(無相無爲)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6문답으로 출세육도(出世六度)의 뜻을 거듭 드러낸다. 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약표(略標)와 광석(廣釋)이다. 이것이 약표이다. 무상(無相)이란 시(施)·수(受) 등 삼륜상(三輪相)을 여읜 까닭이요, 무위(無爲)란 생(生)·주(住) 등 삼유위(三有爲)를 여읜 까닭이다.
경에서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잘 이욕(離欲)에 들어가 심이 항상 청정하고, 실어(實語)와 방편(方便)으로 본리(本利)로써 사람을 이롭게 한다. 이것이 단바라밀(檀波羅密)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진여에 전의(轉依)함을 이욕(離欲)이라 이름하니, 삼유(三有)의 욕을 여위어 드러난 까닭이다. 잘 들어간다는 것은 관심(觀心)의 체(體)를 해득하기 때문이요, 심이 항상하다는 것은 다시 출입이 없기 때문이며, 청정하다는 것은 삼륜의 때를 여읜 까닭이다. 이것이 곧 앞에서 말한 삼계에 의지하지 않음이다. 일체 중생이 오직 하나의 본각이니, 중생으로 하여금 동일하게 일각으로 귀환하게 하기 때문에 본리이인(本利利人)이라 한다. 이것이 출세단바라밀(出世檀波羅密)이다.
경에서 말한다: 「지념(至念)이 견고하고, 심이 항상 무주(無住)하며, 청정하여 염(染)이 없고,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尸)바라밀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중생을 애민(愍念)하기를 외아들처럼 여기기에 지념견고(至念堅固)라 하고, 항상 세간에 있되 열반에 머물지 않기에 심이 항상 무주(無住)라 하니, 이것이 이승(二乘)의 잘못을 막는다. 관심(觀心)이 명철하여 모든 루(漏)에 섞이지 않기에 청정무염이라 하고, 육도(六道)에 두루 섭입하되 모두 공적함을 통달하기에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범성(凡聖)의 악을 막는 것이니, 곧 앞에서 말한 계상에 머물지 않음이다. 이것이 출세시바라밀이다.
경에서 말한다: 「공(空)을 닦아 결(結)을 끊고 제유(諸有)에 의지하지 않으며, 삼업(三業)을 적정(寂靜)하게 하여 신심(身心)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전제(羼提)바라밀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윗 두 구(句)는 공리(空理)를 편안히 하여 유결(有結)을 여의고, 아랫 두 구는 삼업(三業)을 고요히 하여 신심(身心)을 민멸(泯滅)한다.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뜻이니, 곧 앞에서 말한 청정무념(淸淨無念)이다.
경에서 말한다: 「명수(名數)를 원리하고 공유견(空有見)을 끊어, 음공(陰空)에 깊이 들어간다. 이것이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윗 두 구는 추(麤)·정(精)의 뜻을 여읨이고, 공(空)에 들어간다는 것은 진취(進取)의 뜻이니, 곧 앞에서 말한 무섭무방(無攝無放)이다. 이것이 출세(出世)의 정진도(精進度)이다.
경에서 말한다: 「공적(空寂)을 구족히 여의어 제공(諸空)에 머물지 않으며, 심이 처함에 있음이 없어 대공(大空)에 있다. 이것이 선(禪)바라밀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구리공적(具離空寂)이란 응화(應化)로 수생(受生)하여 삼유(三有)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불주제공(不住諸空)이란 오공(五空)에 머물지 않아 항상 시방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심처무(心處無)란 비록 몸은 삼유에 섭입하나 심은 항상 리무(理無)에 처하기 때문이다. 재대공(在大空)이란 비록 항상 시방을 교화하나 심은 대공(大空)에 있기 때문이다. 몸은 비록 기작(起作)하나 심은 적부동(寂不動)하니, 곧 앞에서 말한 성등금강(性等金剛)이다.
경에서 말한다: 「심에 심상(心相)이 없고, 허공을 취하지 않으며, 제행(諸行)이 불생하고, 적멸(寂滅)을 증(證)하지 않으며, 심에 출입이 없고 성품이 항상 평등하며, 제법실제(諸法實際)가 모두 결정성이고, 제지(諸地)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반야(般若)바라밀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심에 심상이 없다는 것은 자내(自內)의 관심상(觀心相)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요, 허공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허(心虛)의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증도혜(證道慧)이다. 제행이 불생한다는 것은 일체 행이 본래 불생임을 통달하기 때문이요, 적멸을 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외화(外化)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교도혜(敎道慧)이다. 이 두 도(道)가 항상 서로 여의지 않으며, 동이면서 항상 적(寂)하고 적이면서 항상 동하기에 출입이 없다. 이것이 출세반야바라밀이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이 육바라밀은 모두 본리(本利)를 얻어 결정성(決定性)에 들어가, 초연히 출세하며 무애해탈(無礙解脫)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총명(摠明)이다. 모두 본리(本利)를 얻어 결정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육도를 처음 닦을 때 모두 본각과 같으며 본각이 현성(顯成)하여 본리행(本利行)이 되기 때문이다. 여래장성(如來藏性)의 본적정(本寂靜)에 들어가 무시무종무개전(無始無終無改轉)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육도가 본리를 얻었기에 망념유전(妄念流轉)의 상을 원리한다. 이런 까닭에 초연출세(超然出世)라 한다. 법성에 들어가 법계에 두루하여 무상무위무박무탈(無相無爲無縛無脫)이기에 무애해탈(無礙解脫)이라 한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해탈법상은 모두 무상행(無相行)이요, 또한 해탈도 없고 불해탈도 없다. 이것이 해탈이라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해탈의 상은 무상무행(無相無行)이요, 무동무란(無動無亂)하여 적정열반(寂靜涅槃)이되, 또한 열반상을 취하지 않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해탈이 곧 열반임을 밝힌다. 초 가운데 개설일미(皆無相行)란, 육도의 행이 모두 본각과 같으며, 본각의 상이 이상이성(離相離性)을 여의기 때문이다. 행(行)·상(相)이 함께 끊어졌으니, 무슨 박(縛)을 여읨이 있으며 무슨 불해탈의 박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해탈도 없고 불해탈도 없다. 여기서 「열반상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반에서도 적정성을 여의기 때문이다.
문: 해탈의 의미는 많으니, 쌍도(雙道) 가운데 해탈, 삼점(三點) 가운데 해탈, 오분법신(五分法身) 가운데 해탈, 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 가운데 해탈이 있다. 이 제문(諸門) 가운데 어느 문에 해당하는가?
답: 삼사(三事) 가운데 해탈이다. 해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육도의 행의 삼사(三事)의 덕을 드러내고자 한다. 剋실(剋實)로 말하면, 초지(初地)에서 이미 얻어 묘각위(妙覺位)에 이르기까지 구경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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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頌分 · 得益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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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크게 기뻐하여 일찍이 없던 것을 얻어, 그 뜻을 선포하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중송(重頌)이다. 정송(正頌) 가운데 칠행송(七行頌)이 있으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육(六)은 별송(別頌)이고 뒤의 일(一)은 총송(摠頌)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각원만(大覺圓滿)의 세존이시여, 중생을 위해 법을 펴 연설하시네. 모두 일승(一乘)을 설하시어 이승(二乘)의 도가 없으며, 일미(一味)의 무상리(無相利)는 마치 대허공과 같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성품에 따라 각기 달라 모두 본처(本處)를 얻으리.」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광석문(廣釋文)을 송(頌)하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오구(五句)는 무상관(無相觀)을 광히 송하고, 뒤의 이송반(二頌半)은 일각의(一覺義)를 광히 송한다. 광무상(廣無相) 가운데 정광중현(正廣重顯)하니, 지금 초이구(初二句)가 정광문(正廣文)을 송하는 것이다. 전정광(前正廣) 가운데 또한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방편관이고 뒤가 정관을 밝힘이다. 지금 이 송(頌) 가운데서는 정관문(正觀文)을 송한다. 저 문에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아(心我)를 여의게 한다」 내지 「원리능소(遠離能所)」를 광히 설한 것이다. 지금 이 이구는 바로 이 문을 송한다. 일법(一法)이란 유무변(有無邊)을 여읜 일중도관(一中道觀)이니, 이로써 능히 심아집(心我執)을 여읜다. 중현문(重顯文) 가운데 사문답(四問荅)이 있다. 지금 이 이구는 앞의 이번(二番) 문답을 송한다. 소언 동이행(同異行)이란, 저 초번 답 가운데 「일체 심상이 본래 근본이 없다」 등의 문이니 곧 이것이 동행(同行)의 총상관(摠相觀)이기 때문이요, 제이번 답 가운데 「유아자는 십이인연을 관하게 하라」 등의 문이니 곧 이것이 이행(異行)의 별상관(別相觀)이기 때문이다. 이 동이행이 들어가는 바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두 본리를 얻는다」고 한다. 또한 이 송에서 「이상견(二相見)을 멸하고 절(絕)한다」는 것은 뒤의 이번 문답을 송한다. 저 제3답에서 「법이 생하는 것을 볼 때 무견을 멸하게 하고, 법이 멸하는 것을 볼 때 유견을 멸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를 송하여 「이견을 멸한다」고 하였다. 제4답에서 「생멸이 함께 멸하여 본래의 생이 불생하고, 심이 항상 공적하여 공적에 머묾이 없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를 송하여 「이상을 절(絕)한다」고 하였다.
경에서 말한다: 「저 심아(心我)를 여읨과 같이 일법(一法)이 이루는 바요, 모든 동이행(同異行)이 모두 본리(本利)를 얻어, 이상견(二相見)을 멸하고 절(絕)하도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광설(廣說)의 문을 송하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오구(五句)는 광무상관(廣無相觀)을 송하고, 뒤의 이송반(二頌半)은 광일각의(廣一覺義)를 송한다. 일법(一法)이란 유무변(有無邊)을 여읜 일중도관(一中道觀)이니, 이로써 능히 심아집(心我執)을 여읜다.
경에서 말한다: 「적정(寂靜)의 열반도 또한 머물러 취증(取證)하지 않으며, 결정처(決定處)에 들어가 무상무유행(無相無有行)이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의 이송반(二頌半)이 광일각(廣一覺)을 송한다. 중현문(重顯文) 가운데 육문답이 있으니, 이 가운데 앞의 일송은 제6답을 송하고, 다음의 일송반은 제5답을 송한다. 앞의 사문답은 생략하여 송하지 않는다.
경에서 말한다: 「공심적멸지(空心寂滅地)에서 적멸심이 무생(無生)하니, 저 금강성(金剛性)과 같아 삼보(三寶)를 파괴하지 않으며, 육바라밀을 갖추어 일체 중생을 제도하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5답을 송한다. 저 문에서 「불생심법(不生心法)이면 곧 의지(依止)가 없고, 제행(諸行)에 머물지 않으면 심이 항상 공적(空寂)하다. 이상(異相)이 없기가 마치 금강(金剛)과 같아 삼보(三寶)를 파괴하지 않으며, 공심이 부동하여 육바라밀을 갖춘다」고 하였다. 지금 이 송(頌) 가운데서 차례로 송하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초연히 삼계(三界)를 초출하여 모두 소승으로 하지 않으니, 일미(一味)의 법인(法印)이 일승(一乘)이 이루는 바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 일송은 앞의 일품 대의를 총송(摠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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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益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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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이 이 뜻을 설함을 듣고 마음에 크게 기뻐하여, 심아(心我)를 여의고 공무상(空無相)에 들어가, 확광광탕(恢廓曠蕩)하여 모두 결정코 결단(決斷)하고 누(漏)를 다하였다.」
론(論)에서 말한다: 일품 안에 삼분(三分)이 있는데, 앞의 이분은 이미 마쳤다. 이것이 대문(大文) 제3 시중득익(時衆得益)이다. 심아를 여읜다는 것은 이공진여(二空眞如)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결단진루(斷結盡漏)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이혹(二惑)을 끊기 때문이다. 초지(初地) 견도(見道)에 들어감을 드러내고자 하니, 바로 견혹(見惑)을 끊고 겸하여 수혹을 끊는다.
금강삼매경론 卷中
신라국 사문 원효 술(新羅國沙門 元曉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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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生行品 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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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論)에서 말한다: 보살이 관행(觀行)을 성취할 때, 자신의 관심(觀心)이 리(理)에 순응하여 수행함을 알아, 유생심(有生心)도 아니고 무생심(無生心)도 아니며, 또한 유행(有行)도 아니고 무행(無行)도 아니다. 다만 증익변(增益邊)을 여의기 위해 임시로 무생(無生)이라 설한다. 유생에서 생심을 내지 않고, 무생에서도 생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손감변(損減邊)을 여의기 위해 또한 임시로 행(行)이라 설한다. 비록 유행지행(有行之行)이 아니나, 무무행지행(無無行之行)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무생행품(無生行品)이라 이름을 세운다.
경(經)에서 말한다: 「그때 심왕보살(心王菩薩)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삼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사의임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으고 합장하여 게송으로 여쭈었다.」
론(論)에서 말한다: 별현관행(別顯觀行)의 여섯 부분 가운데, 제1 제경상(諸境相)을 버려 무상관(無相觀)을 드러내는 것이 이미 마쳤다. 이하가 제2 생심(生心)을 민멸하여 무생행(無生行)을 밝힘이다. 문(文)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정설(正說), 둘째 찬설(讚說), 셋째 문설득익(聞說得益)이다. 초정설(初正說) 가운데 네 부분이 있다. 첫째 왕복문답(往復問荅), 둘째 반징문답(反詰問荅), 셋째 보살영해(菩薩領解), 넷째 여래술성(如來述成)이다.
심왕보살(心王菩薩)이란 체(體)를 따라 이름을 세운 것이다. 심왕의 뜻에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팔식(八識)의 심이 모든 심수(心數)를 통어하기에 심왕이라 이름한다. 둘째, 일심(一心)의 법이 뭇 덕을 총어하기에 심왕이라 이름한다. 지금 이 보살이 무생행에 들어가 일심왕을 증득하였기에, 증득한 바를 따라 이름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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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往復問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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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여래께서 설하신 뜻은 출세(出世)하여 무상(無相)이니, 모든 중생이 다 유루(有漏)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結)을 끊고 심아(心我)를 공(空)하니 이것이 곧 무유생(無有生)이거늘, 어찌하여 무유생에 무생인(無生忍)이 있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 이송(二頌)이 문사(問辭)이다. 초송(初頌)은 앞에서 설한 것을 영수하고, 후송(後頌)은 바로 발문(發問)한다. 이미 무유생(無有生)이라면 마땅히 인심(忍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이르셨다: 선남자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은 법이 본래 무생이니, 제행(諸行)이 무생이어서 무생행이 아니요, 무생인을 얻는다면 곧 허망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답이다. 무생법인이란 법이 본래 무생임을 통달하는 것이니, 이러면 정혜(定慧)의 제행도 또한 무유생이어서, 무생에 능히 인(忍)하는 행이 없다. 이런 까닭에 무생행이 아니라고 한다. 그 가운데 능히 인하는 행을 얻음이 있으면, 곧 진인(眞忍)의 무주무행에 어기니 곧 허망이라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생인을 얻으면 곧 허망이라면, 무득무인(無得無忍)이 마땅히 허망이 아닐 것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난(難)이다. 만약 유득유인(有得有忍)이 허망이라면, 무득무인이 허망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저 망(妄)을 반전시킨 까닭에, 대승을 배우면서 무소득(無所得)인 자들이 이와 같이 계탁하여 스스로 허망이 아니라고 여긴다. 저 망을 드러내기 위해 이와 같이 난문(難問)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무득무인이란 이것이 곧 유득이다. 유득유주(有得有住)면 이것이 곧 유생이다. 얻음에 생이 있어 소득의 법이 있으니, 아울러 허망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거부(拒)이다. 만약 저 뜻에서 무득무인이라고 하면, 비록 유득유인의 유(有)를 얻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 무득무인의 무(無)를 얻는다. 이미 무(無)를 얻는다면 곧 심이 무(無)에 머문다. 심이 이미 유주(有住)하면 곧 이것이 유생이다. 이런 까닭에 아울러 허망이라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무인무생심(無忍無生心)이어서 허망이 아닙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5 청(請)이다. 추궁해도 길이 막혀 뜻이 도달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우러러 여쭈며 인도해 주기를 청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인무생심(無忍無生心)이란 심에 형단(形段)이 없으니, 마치 화성(火性)이 비록 나무 속에 있더라도 그 있는 곳이 없어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이요 다만 글자이지 성(性)은 얻을 수 없다. 그 리(理)를 전달하기 위해 임시로 이름이라 설하지만, 이름도 얻을 수 없다. 심상(心相)도 이와 같아, 심이 있는 곳을 보지 못하면 심이 이와 같음을 알게 되어 곧 무생심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6 석(釋)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먼저 무득도리(無得道理)를 열고, 다음에 무생도리(無生道理)를 보이며, 셋째 비(非)를 들고, 넷째 시(是)를 밝힌다.
초 가운데 법(法)·유(喩)·합(合)의 세 가지가 있다. 심에 형단이 없다는 것은 심이 얻을 바가 없음을 드러낸다. 형(形)은 체(體)를 말하고 단(段)은 분(分)을 말한다. 모든 연(緣) 가운데서 심의 체와 분을 구해도 즉(卽)이든 리(離)든 모두 얻을 바가 없다. 이런 까닭에 형단이 없다고 한다.
비유 가운데, 화성(火性)이 비록 나무 속에 있더라도 그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은 인심(忍心)에 비유한다. 비록 리(理) 속에 처해 있더라도 있는 곳이 없으니, 이 나무 속의 극미(極微) 가운데 화성이 있는 바가 도무지 없다. 이와 같이 리 가운데 항사(恒沙)의 법문이 있어도 그 가운데 심(心)을 구하면 영원히 있는 바가 없다. 이와 같은 화성(火性)이 없는 곳의 도리는, 불(佛)이 계시든 안 계시든 법성이 항상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결정성이라 한다. 화성이라는 이름 아래의 뜻은 얻을 수 없으니, 이 화성이 비록 얻을 수 없으나 그 나무 속에 화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리(理)를 전달하기 위해 화성이라는 이름을 설한다. 이 이름을 분석하면 다만 여러 글자가 있을 뿐이고, 여러 글자를 전전히 구해도 모두 얻을 바가 없다. 인심(忍心)의 명상(名相)도 마땅히 이와 같다.
합(合) 가운데 심상(心相)도 이와 같아, 인(忍)을 얻은 보살이 심이 이와 같음을 알면 어찌 그 가운데 능히 심생(心生)을 취할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곧 무생심(無生心)이라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이 심성상(心性相)이 또한 아마륵과(阿摩勒菓)와 같아서, 본래 자생(自生)이 아니요, 타생(他生)이 아니요, 공생(共生)이 아니요, 인생(因生)이 아니니 무생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이 대사(代謝)하기 때문이다. 연기(緣起)는 생(生)이 아니요, 연사(緣謝)는 멸(滅)이 아니며, 은현(隱顯)이 무상(無相)이요, 근리(根理)가 적멸이며, 무유처(無有處)에 있어 머무는 바를 보지 못하니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무생리(無生理)를 밝힘이다. 비유 가운데 사불(四不)과 팔불(八不)이 있다. 사불(四不)이란, 연을 기다리기에 자생이 아니요, 자종(自種)이기에 타생이 아니며, 무작(無作)이기에 공생이 아니요, 유용(有用)이기에 무인생(無因生)이 아니다.
대품경(大品經)의 게송에 「제행이 모두 찰나이니, 머묾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용(用)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연기(緣起)는 생이 아니요 연사(緣謝)는 멸이 아니라는 것은, 이와 같이 추구하면 은현(隱顯)이 모두 없다. 은(隱)이란 종자가 흙 속에 있기 때문이요, 현(顯)이란 아름과 줄기가 땅 위로 나기 때문이다. 근리적멸(根理寂滅)이란 그 나무의 뿌리와 나무의 결을 추구하여 생과의 인(因)을 구해도 필경 일어남이 없기에 적멸이라 한다.
경에서 말한다: 「이 결정성은 또한 불일불이(不一不異)요, 불단불상(不斷不常)이요, 불입불출(不入不出)이요, 불생불멸이다. 모든 사방(四謗)을 여의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무생심성(無生心性)도 또한 이와 같다. 어찌하여 생불생(生不生)과 유인무인(有忍無忍)을 설하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다음의 팔불(八不)을 밝힌다. 과(果)와 종(種)은 불일(不一)이니 그 상(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불이(不異)이니 종을 여의면 과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종과(種果)는 불단(不斷)이니 과가 종을 이어 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불상(不常)이니 과가 생하면 종이 멸하기 때문이다. 종이 과에 들어가지 않으니 과시(果時)에 종이 없기 때문이다. 과가 종에서 나오지 않으니 종시(種時)에 과가 없기 때문이다. 불입불출이기에 불생이요, 불상불단이기에 불멸이다. 불멸이기에 무(無)라 설할 수 없고, 불생이기에 유(有)라 설할 수 없다. 이변(二邊)을 원리하기에 또한 역유역무(亦有亦無)라 설할 수 없다. 일중(一中)에 해당하지 않기에 비유비무(非有非無)라 설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모든 사방을 여의어 언어도단이라 한다. 아마륵과가 이와 같이 언어를 끊으니, 법인지심(法忍之心)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경에서 말한다: 「만약 심(心)이 있다고 설하여, 유득유주(有得有住)하거나 능히 보는 자가 있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 반야(般若)에서는 이것이 장야(長夜)가 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비(非)를 듦이다. 무생인심(無生忍心)에 심체(心體)를 얻을 수 있고 무생에 머문다거나 능히 무생리(無生理)를 보는 자가 있다고 설하면, 심성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망집이어서 능히 보리와 반야를 장애한다.
경에서 말한다: 「심성을 요별(了別)하는 자는 심성(心性)이 여(如)함을 알고, 이 성(性)도 또한 여하니 이것이 무생행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시(是)를 드러냄이다. 자심(自心)으로써 자심(自心)의 성(性)을 요달한다. 심성이 여(如)함을 안다는 것은 자관심(自觀心)의 체성(體性)이 평등함을 알기 때문이요, 이 성도 또한 여하다는 것은 이 능지(能知)의 용(用), 용성(用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심(觀心)의 체용(體用)이 평등하여 무생무멸무시무종(無生無滅無始無終)이다. 이런 까닭에 이것이 무생행이라 한다.
위에서 사불(四不)의 무생은 무생의 리(理)를 드러내어 리(理)가 범성(凡聖)에 통한다. 지금 지여(知如)의 무생을 밝히는 것은 무생행(無生行)을 밝히니, 행(行)은 별도로 성(聖)에 있다. 성(聖)에 있는 행이 리(理)와 일미(一味)이고, 두루 통하는 리(理)가 지(智)와 평등하다. 평등일미이기에 성인도 다르게 할 수 없고, 통(通)과 별(別)이 있기에 성인도 같게 할 수 없다. 동(同)이면서 이(異)요, 이(異)이면서 동(同)이니, 이와 무이(無二)함이요 설과 불설(不說)이 무이무별(無二無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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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詰問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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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심이 만약 본래 여(如)하여 행(行)에 무생이면, 제행이 무생이요, 생행(生行)이 불생이며, 불생하여 행이 없으니, 곧 무생행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반징문답(反詰問荅)이다. 그 가운데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행(行)을 들어 리(理)를 힐난하고, 둘째 증(證)이 있음을 반힐하며, 셋째 증 없음을 받들어 답하고, 넷째 득(得)이 있음을 반힐하며, 다섯째 득 없음을 받들어 답하고, 여섯째 증득 없음을 서술하며, 일곱째 의혹을 다시 진술하고, 여덟째 그 의혹을 결한다. 이것이 곧 제1 행을 들어 리를 힐난함이다.
제행무생(諸行無生)이란 리의 무생을 들음이니, 제중생의 오음(五陰) 제행이 본래 무생임을 이른다. 생행불생(生行不生)이란 리의 무생이 행의 무생과 다름을 밝히니, 생기(生起)하는 행이 곧 공하여 불생함을 이르되 리를 증득하여 심이 멸하여 불생함은 아니다. 불생무행(不生無行)이란 리가 불생하는 것이 행의 무생과 유사함을 드러내니, 불생문(不生門)에도 또한 심행이 없다. 만약 이렇다면 일체 범부도 무생인을 증득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는 힐난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무생으로써 무생행을 증득하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반힐유증(反詰有證)이다. 그대가 입관무생인(入觀無生忍)할 때 제행무생(諸行無生)의 리(理)에 의거하여 무생행을 얻겠는가? 이렇게 반힐하는 까닭은, 저가 리무생(理無生)으로써 행무생(行無生)과 별이하게 하면서 리무생이 또한 행무생이라고 힐난하기 때문이다. 이제 힐난하기를 그대가 입관할 때 리(理)와 행이 별이하여 능소(能所)가 있겠는가 한다.
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무슨 까닭인가? 무생행의 성상(性相)이 공적하여, 견(見)도 없고 문(聞)도 없으며, 득(得)도 없고 실(失)도 없으며, 언(言)도 없고 설(說)도 없으며, 지(知)도 없고 상(相)도 없으며, 취(取)도 없고 사(捨)도 없으니, 어찌하여 취증(取證)하겠습니까? 만약 취증하는 자가 있다면 곧 쟁론(諍論)이 됩니다. 무쟁무론(無諍無論)이어야 이에 무생행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무증(無證)을 받들어 답함이다. 그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초 중에 무생행의 성(性)이 공적하다는 것은 총표(摠標)이다. 아래 십무(十無)로써 이 총구(摠句)를 해석한다. 무견무문(無見無聞)이란, 심성이 희이(希夷)하여 이(夷)하기에 색(色)이 끊어져 상(像)이 표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희하기에 성(聲)이 끊어져 교(敎)가 전달하는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은 육무(六無)가 상공적(相空寂)을 해석한다. 무생행 가운데 이와 같이 공적한데 어찌 그 가운데 취증(取證)이 있겠는가?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반힐유득(反詰有得)이다. 문: 보살이 아뇩보리를 아직 얻지 못하였는데 여래께서는 어찌하여 얻었는가라고 물으셨는가? 해: 비록 구경보리를 아직 얻지 못하였어도 이미 초지보리(初地菩提)를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법화론(法華論)에 따르면 「팔생(八生) 내지 일생(一生)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것은 초지보리를 증득함을 이른다. 이를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약하여 보리라 이름하고, 능히 증견(證見)하기에 보리를 얻었다고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없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보리성(菩提性) 가운데 득도 없고 실도 없으며, 각(覺)도 없고 지(知)도 없으며, 분별상(分別相)이 없습니다. 무분별(無分別) 가운데 곧 청정성이요, 성에 간잡(閒雜)이 없으며, 언설이 없고, 비유비무(非有非無)요, 비지비부지(非知非不知)입니다. 제가법행(諸可法行)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행(法行)이 처소(處所)를 보지 못하니 결정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유득불득(有得不得)이 없으니,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5 무득(無得)을 받들어 답함이다. 보리성(菩提性)이란 진여성(眞如性)이니, 허통(虛通)하여 무애한 성이 어둠을 여의었기에 보리라 이름한다. 그 가운데 본래 진성(眞性)도 고집할 수 없고, 또한 본래 망상도 없앨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득도 없고 실도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본각이 사구(思搆)의 각(覺)을 원리하고, 또한 율이(率爾)한 지(知)도 없앤다. 이런 까닭에 각도 없고 지도 없다. 이미 분별의 견(見)도 없고 행처(行處)의 상(相)도 여읬기에 무분별상(無分別相)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혹(惑)이 탁(濁)하는 바가 아니니 본성이 염(染)을 여의었으므로 청정성이라 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일체 심행(心行)은 무상(無相)을 넘지 않고 체는 적(寂)하여 무생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6 여래술성(如來述成)이다. 일체심행(一切心行)이란 모든 출세무분별지상응심행(出世無分別智相應心行)이니, 제상(諸相)을 취하지 않고 무상(無相)에 증회(證會)하기 때문이다. 무생(無生)이란 무생행이니, 능증능득(能證能得)이 없음을 서술한다. 적멸(寂滅)이란 적멸의 리이니, 소증소득(所證所得)이 없음을 서술한다.
경에서 말한다: 「모든 식(識)도 또한 이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눈[眼]과 안촉(眼觸)이 모두 공적하고, 식도 공적하여 동(動)도 없고 부동(不動)도 없는 상이다. 내(內)에 삼수(三受)가 없고 삼수가 적멸하니, 이(耳)·비(鼻)·설(舌)·신(身)·심(心)·의(意)·의식(意識) 및 말나(末那)·아리야(阿梨耶)도 또한 이와 같다. 모두 또한 불생의 적멸심과 무생심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적멸의(寂滅義)를 서술함이니, 모든 세간 팔식의 공적을 이른다. 안촉(眼觸)은 곧 변행(遍行) 가운데 촉(觸)이니, 삼화(三和)에 의거하여 생하며 삼화합을 밝히고자 특별히 든 것이다. 삼수(三受)가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니, 심수(心數) 가운데 촉(觸)과 수(受)가 서로 가깝고 큰 수승한 능(能)이 있기에 이 둘을 들어 나머지 법을 통히 버린다. 심의의식(心意意識)이란 제6식이니, 미래를 심(心)이라 이름하고, 과거를 의(意)라 이름하며, 현재를 의식이라 이름한다. 말나(末那)·리야(梨耶) 제7·제8도 모두 안식과 같기 때문에 또한 불생이다.
경에서 말한다: 「만약 적멸심을 생한다면, 만약 무생심을 생한다면, 이것이 유생행이지 무생행이 아니다. 내(內)에 삼수(三受)·삼행(三行)·삼계(三戒)가 생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비(非)를 듦이다. 유소득(有所得)의 대승 학자가 팔식을 공하게 하지 않아 그 적멸에 어긴다. 이런 까닭에 적멸심을 생한다고 한다. 출세심의 무생을 알지 못하여 심생(心生)하여 무상리(無相理)를 증한다고 여긴다. 이런 까닭에 무생심을 생한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세간 유전의 행이어서 출세무생인행(出世無生忍行)에 어긴다. 삼행(三行)이란 신·구·의 업이 선불선에 통함이요, 삼계(三戒)란 신·구·의로 오직 그 선만을 취함이다. 이와 같이 유전하여 해탈을 얻지 못한다.
경에서 말한다: 「만약 적멸의 생심이 불생하면, 심이 항상 적멸하여 공(功)도 없고 용(用)도 없으며, 적멸상을 증하지 않고 또한 무증(無證)에도 머물지 않으며, 가처(可處)에서 무주(無住)한다. 총지무상(摠持無相)이요, 삼수(三受) 등 셋이 없어 모두 다 적멸하며, 청정무주(淸淨無住)이요, 삼매에 들지 않고 좌선에 머물지 않으니 무생무행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시(是)를 드러냄이다. 적멸의 생심이 불생한다는 것은 앞의 적멸심을 생한다는 구(句)를 반(反)한다. 심이 항상 적멸하여 공도 없고 용도 없다는 것은 앞의 무생심을 생한다는 구를 반한다. 총지무상(摠持無相)이란 뭇 덕을 총히 드러내는 것이니, 무생심이 제행의 덕을 지녀 일미(一味)로 동일하되 차별상이 없기 때문이다. 삼매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간의 입정심을 없애기 때문이요, 좌선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세간의 주선정(住禪靜)을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면 생기의 심도 없고 분별의 행도 없다. 이런 까닭에 무생무행이라 한다.
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말하였다: 선(禪)은 능히 동(動)을 섭(攝)하여 모든 환란(幻亂)을 정(定)하는데, 어찌하여 선(禪)하지 않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7 의혹을 진술함이다. 무릇 선정(禪定)이란 능히 도거동념(掉動之念)을 섭하여 산란한 심을 정하는데, 어찌하여 출세무생행심(出世無生行心)이 또한 선정에 들고 머물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선(禪)이 곧 동(動)이요, 부동(不動)이 불선(不禪)이니,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 선성(禪性)이 무생이어서 생선상(生禪相)을 여읜다. 선성이 무주이어서 주선동(住禪動)을 여읜다. 선성에 동이 없음을 알면, 고요함이 곧 무생을 얻는다. 무생반야(無生般若)도 또한 의주(依住)하지 않고 심도 또한 부동하니, 이 지혜 때문에 무생반야바라밀을 얻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8 의혹을 결함이다. 선이 곧 동이란 세간선을 이르니, 비록 산란이 아니나 경계상(境界相)을 취하여 취상심생(取相心生)하여 생기(生起)동하기 때문이다. 능히 이와 같은 생동지선(生動之禪)을 여읠 수 있어야 이에 능히 이정(理定)에 들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것이 무생선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정(理定)의 성이 무생동이기에 선성무생이라 한다. 비단 무생일 뿐 아니라 또한 무주적(無住寂)이다. 이런 까닭에 선성무주라 한다. 위의 제구(諸句)는 이정상(理定相)을 밝히고, 선성무생의 지혜는 이지상(理智相)을 드러내니, 오직 일체(一體)에 의거하여 뜻을 둘로 나눈 것이다. 선성에 동이 없음을 안다는 것은 선성이 무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고요함이 곧 무생을 얻는다는 것은 이무생(理無生)을 얻기 때문이다. 무생반야란 행의 무생을 얻기 때문이다. 이 지혜로 말미암아 능히 피안(彼岸)에 이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이상 팔분이 합하여 제2 반징문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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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菩薩領解 · 如來述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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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생반야는 일체처(一切處)에서 무주(無住)하고, 일체처에서 무리(無離)하며, 심에 주처(住處)가 없고 처에 주심(住心)이 없으며, 무주무심(無住無心)이요 심에 생주(生住)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주심(住心)이 곧 무생주(無生住)입니다. 세존이시여, 심에 무생행은 불가사의이며, 불사의(不思議) 가운데 가부가설(可不可說)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영해(領解)이다. 일체처란 일체 진(眞)·속(俗)·동(動)·적(寂) 등의 처이다. 무주란 이 일체에서 소득이 없기 때문이요, 무리(無離)란 이 일체에서 소부득(所不得)이 없기 때문이다. 심에 주처가 없다는 것은 소주처(所住處)가 없기 때문이요, 처에 주심이 없다는 것은 능주심(能住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심이 곧 무생주라는 것은, 무주(無住)·무주(無住)이되 곧 주(住)이기 때문이다. 심에 무생행은 불가사의란 이언절려(離言絕慮)이기 때문이다. 불사의 가운데 가불가설(可不可說)이란, 이언(離言)이기에 불가설이요, 이이언(離離言)이기에 또한 가설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술성(述成)이다. 앞의 영해가 도리에 계합하기에 거듭 여시여시(如是如是)라 한다. 장행 정설이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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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說偈頌 · 得益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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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심왕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미증유(未曾有)를 탄하며 게송으로 말하였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게송으로 찬설함이다.
경에서 말한다: 「만족(滿足)하신 대지(大智)의 세존이시여, 무생법(無生法)을 널리 설하시니, 일찍이 들은 바 없는 것을, 설하지 않으신 것을 지금 설하셨습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 삼송(三頌)은 별도로 문을 송한 것이 아니고 다만 총탄(摠歎)이다. 그 가운데 법(法)·유(喩)·합(合)·결(結)의 네 가지가 있다. 이것이 제1 법설(法說)이다. 미설이금설(未說而今說)을 찬탄함은, 비록 앞에서 광설하였으나 지금 이 경은 말이 간략하고 뜻이 풍부하며 글이 간결하고 리가 상세하여 이와 같은 묘함이 전에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마치 청정한 감로(甘露)가 때때로 한 번 나오니, 만나기도 어렵고 사의하기도 어려우며 듣기도 또한 어렵도다. 무상(無上)의 양복전(良福田)이요 최상의 수승한 묘약이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지금 선설하셨습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시중득익(時衆得益)이니, 지전범부(地前凡夫)가 이 품의 설함을 듣고 능히 초지(初地) 무생인(無生忍)을 얻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 가운데서 이 설함을 듣고 모두 무생무생반야(無生無生般若)를 얻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시중득익(時衆得益)이니, 지전범부(地前凡夫)가 이 품의 설함을 듣고 능히 초지(初地) 무생인(無生忍)을 얻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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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覺利品 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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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論)에서 말한다: 일체 유정(有情)이 무시(無始)이래 무명장야(無明長夜)에 들어 망상대몽(妄想大夢)을 짓는다. 보살이 관(觀)을 닦아 무생(無生)을 획득할 때, 중생이 본래 적정하여 바로 이것이 본각(本覺)이요, 일여(一如)의 자리에 눕는다는 것을 통달한다. 이 본리(本利)로써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 이 품에서 이 도리를 드러내기에 본각이품(本覺利品)이라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부처님의 설하신 바, 일미진실불가사의(一味眞實不可思議)를 듣고, 멀리 가까이에서 와서 여래의 자리에 친근히 하며, 오로지 마음을 모아 자세히 들으면서 청백처(淸白處)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부동하였다.」
론(論)에서 말한다: 별명관행(別明觀行) 여섯 부분 가운데, 이하가 제3 본각이(本覺利)를 밝힘이다. 무생행에 의거하여 능히 본각에 회합하여야 비로소 능히 널리 교화하고 일체를 요익(饒益)한다. 문(文)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본각이익을 널리 밝히고, 둘째 게송으로 찬탄하며, 셋째 시중득익(時衆得益)이다.
무주보살(無住菩薩)이란, 이 사람이 비록 본각에 본래 기동(起動)이 없음을 통달하였으나 적정에 머물지 않고 항상 보화(普化)를 일으켜, 덕에 의거하여 이름을 무주(無住)라 세운다. 무주의 덕이 본리(本利)에 계합하기 때문에 이 인(人)으로 인하여 그 종(宗)을 드러낸다. 멀리에서 가까이로 온다는 것은, 앞의 품을 듣고 이미 가까운 곳으로 옮겼으니, 앞에 심법(深法)을 듣지 못할 때는 위(位)가 범우(凡愚)에 있어 불과에서 멀었으나, 지금 부처님의 설을 듣고 본각이(本覺利)를 얻어, 스스로 당래에 불과를 얻을 것이 가까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因言往復 ━━━
경에서 말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이르셨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본처(無本處)에서 왔으며 지금 무본소(無本所)에 이르렀습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인언왕복(因言往復)이다. 제2 답의 뜻은, 범위(凡位)에서 와서 성위(聖位)에 이른 것이다. 성위에 이를 때 고금을 돌이켜 살피니, 옛날 범위에 처음 발취(發趣)할 때 자기 심이 본래 기동(起動)이 없음을 스스로 믿었으나 기동의 근본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성위에 이르러 무생을 얻을 때, 자심이 본래 무생임을 증지(證知)하여 생기의 근본이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무본처에서 와서 지금 이른 바도 무본소임을 알았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본래 온 바가 아니요, 지금 또한 이른 바도 아니다. 그대가 본리(本利)를 얻으니 불가사의이니, 이것이 대보살마하살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술성(述成)이다. 내처(來處)와 지처(至處)가 이미 무본(無本)과 같으니, 무본의 처가 같으면 내지(來至)가 없다. 그 까닭은 내처가 지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따라 온 것이 없으니, 지처가 이미 내처와 같기 때문에 지금 이른 바도 없다. 이미 내지(來至)가 없으니 본래 적정하다. 이런 까닭에 그대가 본리를 얻으니 불가사의라 한다. 이미 본리를 얻어 자리(自利)·이타(利他)하기 때문에 대보살마하살이라 한다.
경에서 말한다: 「곧 대광명(大光明)을 놓아 대천계(大千界)에 두루 비추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보살이여, 지혜가 만족하여 항상 본리(本利)로써 중생을 이익 되게 하네. 사위의(四威儀)에서 항상 본리에 머물며 제중생을 인도하여 오고 가고 가도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여래께서 광명을 놓아 보살을 표찬하심이다. 대광명을 놓아 대천계에 비추는 것은 대지혜광명으로 세간의 어둠을 비추어 광명을 얻게 함을 표하기 위해서이다. 지혜가 만족하다는 것은 아는 바도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불래거거(不來去去)란 적(寂)이면서 항상 교화하기 때문이다. 불래(不來)란 인도하여 교화하는 바를 따라 출세(出世)하여 퇴환(退還)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요, 거거(去去)란 불퇴(不退)를 얻음에 따라 전전히 출리(出離)하여 선서(善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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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說本利之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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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그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리(利)의 전(轉)으로써 중생의 일체 정식(情識)을 전하여 암마라(唵摩羅)에 들어가게 합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본리(本利)의 뜻을 널리 연(演)한다. 이능화전리(以何利轉)란 능화(能化)의 전리(轉利)의 뜻을 묻는 것이다. 일체 정식(情識)이란 곧 팔식(八識)이다. 암마라(唵摩羅)란 제9식이다. 진제삼장(眞諦三藏)이 구식(九識)의 뜻을 이 문에 의거하여 제기하였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제불여래(諸佛如來)는 항상 일각(一覺)으로써 제식(諸識)을 전하여 암마라(唵摩羅)에 들어가게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중생의 본각(本覺)을, 항상 일각으로써 제중생을 각(覺)하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하며, 제정식(諸情識)이 공적무생(空寂無生)임을 각하게 한다. 무슨 까닭인가? 결정본성(決定本性)이 본래 동(動)이 없기 때문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답으로 본리의 뜻을 바로 널리 밝힘이다. 제불여래께서 항상 일각으로써 한다는 것이 능화(能化)의 본을 표방함이요, 제식을 전하여 암마라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소화(所化)의 전(轉)을 표방함이다.
일체 중생의 본각이라는 것은 앞의 능화의 본인 일각을 해석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이 동일한 본각이기에 일각이라 한다. 제불이 이를 체달하여야 능히 보화(普化)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항상 이 본각으로 다른 이를 각하게 한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한다는 것은 소화의 전입(轉入)을 해석하는 것이니, 본각이 바로 암마라식이다. 본각을 얻는 것이 입(入)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본각에 들어갈 때 제팔식이 본래 적멸함을 각하여, 각이 구경하기에 제식이 불생한다. 이런 까닭에 제식이 적멸무생이라 한다.
이 문이 본시(本始) 이각(二覺)을 구비하여 드러낸다. 일체 중생의 본각이라는 것은 본각의 뜻이요, 제정식이 적멸무생임을 각한다는 것은 시각(始覺)의 뜻이니, 이것이 시각이 곧 본각과 같음을 드러낸다.
━━━ 重演 — 始覺 演說 ━━━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하나인들 팔식이 모두 경계를 연(緣)하여 일어나는데 어찌하여 동이 없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중연(重演)이다. 그 가운데 먼저 시각(始覺)을 연(演)하고 뒤에 본각(本覺)을 연한다. 초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제식(諸識)이 공적함을 연하고, 제식이 무생임을 연한다. 앞은 시각이 소각(所覺)이요, 뒤는 능각의 시각이다. 초 가운데 여섯 번의 문답이 있다. 그 가운데 셋이 있으니, 첫째 앞의 이문답은 공적을 바로 밝히고, 둘째 제3문답은 같지 않은 상을 밝히며, 셋째 뒤의 삼문답은 다르지 않은 상을 밝힌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경계가 본래 공하고, 일체의 식이 본래 공하니, 공하여 연(緣)하는 성(性)이 없는데 어떻게 연기(緣起)하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경연(境緣)을 버려 식의 무기(無起)를 드러낸다.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일체 경계가 공하다면 어떻게 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견(見)이 곧 망(妄)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만유(萬有)는 무생무상(無生無相)이요, 본래 스스로 이름하지 않으며 모두 다 공적하다. 일체 법상도 또한 이와 같고, 일체 중생의 몸도 또한 이와 같으니, 몸도 오히려 있지 않은데 어찌하여 봄이 있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문답이니 견(見)이 망(妄)임을 밝히고, 망이기에 진공(眞空)임을 밝힌다. 견이 있는 경계가 곧 망견이요, 또한 견이 있다고 계탁함도 망이다. 총명 가운데 음계(陰界) 등의 유(有)는 본래 스스로 나를 색 등이라 이름하지 않고 다만 망심으로 말미암아 색 등이라 이름함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가 모두 공적하다. 별현 가운데 일체 법상이란 외부의 산하 등 육진(六塵) 법상이요, 일체 중생의 몸이란 내부의 색수 등 오음(五陰)의 몸이다.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일체 경계가 공하고, 일체 몸이 공하며, 일체 식이 공하다면, 각(覺)도 또한 마땅히 공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인 각자(覺者)는 훼(毁)하지도 않고 괴(壞)하지도 않는 결정성(決定性)이니, 공도 아니요 불공도 아니며, 공불공(空不空)이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번으로 각(覺)과 불각의 같지 않은 상을 밝힌다. 일체 각(覺)이란 도리를 불괴하기에 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성을 고집하지 않기에 불공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각 가운데 공불공이 없다. 제식(諸識)은 그렇지 않으니, 제법을 망취하여 진리에 어기기에 공할 수 있고 버릴 수 있다. 이와 같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류라 할 수 있겠는가? 결정성이란 진여성이 파괴할 수 없고 성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불훼(不毁)란 유상(有相)을 취하여 공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요, 불괴(不壞)란 무성(無性)을 계탁하여 진을 손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제경(諸境)도 또한 그러하니, 공상(空相)이 아니요 무공상(無空相)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저 경자(境者)는 성이 본래 결정이다. 결정성의 근(根)에는 처소가 없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각도 또한 이와 같아 처소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각에 처소가 없기에 청정하다. 청정하여 각이 없으니 물(物)에 처소가 없기에 청정하고, 청정하여 색이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 세 번의 문답이 다르지 않은 상을 밝힌다. 그 가운데 앞의 두 번은 각(覺)과 경(境)이 같은 상을 밝히고, 뒤의 일문답은 각(覺)과 식(識)이 같은 상을 드러낸다. 초번은 경이 각과 같음을 밝힌다. 후번은 각이 경과 같음을 밝히니, 각성(覺性)이 이미 공하면 공 가운데 각이 없다. 두 문(文)이 같지 않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심·안·식도 또한 이와 같아 불가사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심·안·식도 또한 이와 같아 불가사의하다. 무슨 까닭인가? 색에 처소가 없어 청정하여 이름이 없으니 내(內)에 들어가지 않는다. 안(眼)에 처소가 없어 청정하여 견이 없으니 외(外)로 나오지 않는다. 심에 처소가 없어 청정하여 위(上)가 없으니 일어날 처소가 없다. 식에 처소가 없어 청정하여 동(動)이 없으니 연(緣)할 별(別)이 없으니 성이 모두 공적하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 제3번이 식이 각과 같음을 밝힌다. 색에 처소가 없다는 것은 색성이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요, 청정하여 이름이 없다는 것은 공 가운데 색이 없기 때문이며, 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안근과 경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니 소연연(所緣緣)이 공함을 밝힌다. 안에 처소가 없어 청정하여 견이 없다는 것은 안성(眼性)이 공 가운데 안근이 없기 때문이요, 외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색경계에 능히 행하지 않기 때문이니 증상연(增上緣)이 공함을 밝힌다. 심에 처소가 없어 청정하여 위가 없다는 것은 종자가 공 가운데 종자가 없기 때문이며, 사연(四緣) 가운데 상수(上首)가 되기 때문이다. 일어날 처소가 없다는 것은 친히 식을 일으킬 처소가 없기 때문이니 인연(因緣)이 공함을 밝힌다. 식에 처소가 없어 청정하여 동이 없다는 것은 이미 삼연이 없으니 안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연할 별이 없다는 것은 색을 연하여 요별하는 식이 없기 때문이니, 등무간연(等無間緣) 및 안식이 공함을 밝힌다.
━━━ 諸識不生 (始覺圓滿) ━━━
경에서 말한다: 「성에 각(覺)이 없으니, 각이 곧 각이 된다. 선남자여, 각지무각(覺知無覺)하면 제식이 곧 들어간다. 무슨 까닭인가? 금강지지(金剛智地)에서 해탈도단단(解脫道斷斷)하여, 이미 무주지(無住地)에 들어가 출입이 없고 심처에 있음이 없으며, 결정성지(決定性地)에 그 지(地)가 청정하기가 정유리(淨瑠璃)와 같고, 성이 항상 평등하기가 저 대지와 같으며, 각묘관찰(覺妙觀察)이 혜일광(慧日光)과 같고, 이리득본(利成得本)이 대법우(大法雨)와 같다. 이 지혜에 드는 자는 이것이 불지(佛智地)에 드는 것이요, 지지(智地)에 드는 자는 제식이 불생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제식불생(諸識不生)을 밝힘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약표(略標)와 광석(廣釋)이다. 성에 각이 없다는 것은 공성(空性) 가운데 비단 식이 없을 뿐 아니라 시각(始覺)도 없다. 각지무각(覺知無覺)의 리를 알면 곧 시각의 지(智)가 된다. 이런 까닭에 각이 곧 각이 된다고 한다. 시각(始覺)이 원만할 때 팔식이 일어나지 않으니, 각을 따라 무각하여 제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제식이 곧 들어간다고 한다.
광석(廣釋) 가운데, 먼저 인만(因滿)을 밝히고 뒤에 과원(果圓)을 드러낸다. 금강지(金剛智地)란 등각위(等覺位)이니 시각의 인이 원만하고, 금강유정(金剛喩定)의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지금 각인(覺因)에 약하여 금강지라 이름한다.
과원(果圓)을 드러냄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각원만(覺圓滿)을 밝히고 뒤에 식불생(識不生)을 드러낸다. 단(斷)하고 이미 무주지에 든다는 것은, 금강해탈로 종자를 단(斷)하고 나서 곧 묘각무주지(妙覺無住地)에 들기 때문이다. 이제(二諦) 밖에 홀로 무이(無二)에 있기 때문에 무주라 한다. 무주의 심이 이제(二諦)를 쌍민(雙泯)하기에 출속입진(出俗入眞)의 다름이 없다. 이미 출입이 없어 공유(空有)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심처에 있음이 없다.
사지(四智)가 원만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일심이 어둠을 여의고 밝음을 이루어 밝고 청정하여 비추지 않는 영(影)이 없기 때문에 그 지가 청정하기가 정유리와 같다. 이것이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뜻을 드러낸다. 즉 이 일심이 이변(二邊)을 원리하여 자타(自他)가 평등하고 무이(無二)함을 통달하기 때문에 성이 항상 평등하기가 저 대지와 같다. 이것이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뜻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일심이 관찰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제법문에서 관찰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각묘관찰(覺妙觀察)이 혜일광과 같으니, 이것이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뜻을 밝힌다. 이와 같이 일심이 짓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타(利他)의 사(事)에서 짓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뜻을 밝히니, 사지(四智)가 이미 원만하면 이것이 시각(始覺)이 원만한 것이다. 이 지혜에 드는 자가 이미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팔식의 파랑이 다시 기동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지지에 드는 자는 제식이 불생이라 한다.
━━━ 重演 — 本覺 演說 ━━━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일각성력(一覺聖力) 사홍지지(四弘智地)가 곧 일체 중생의 본근각이(本根覺利)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중생이 곧 이 몸 가운데 본래 만족합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본각의(本覺義)를 연함이다. 문에서 일각성력사홍지지(一覺聖力四弘智地)란 앞에서 설한 사지(四智)의 뜻을 영수함이니, 시각이 원만하면 곧 본각과 같아 본시(本始)가 무이(無二)하기 때문에 일각(一覺)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일각이 곧 법신이요, 법신이 곧 중생의 본각이다. 이런 까닭에 곧 일체 중생의 본근각이(本根覺利)라 한다. 본래 무량성덕(無量性德)을 갖추어 중생의 심을 훈하여 두 가지 업을 짓기 때문에 본리(本利)라 이름한다. 이런 까닭에 이 몸 가운데 본래 만족한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중생이 본래 무루(無漏)이다. 모든 선리(善利)의 근본인데, 지금 욕자(欲刺)가 있어 아직 항복하지 못하였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답으로 허락함을 서술하니, 본각 가운데 무량성덕이 삼루(三漏)에 물들어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본래 무루라 한다. 이를 근본으로 삼아 모든 선리(善利)가 생기기 때문에 모든 선리의 근본이라 한다. 비록 본각이 있어도 객진(客塵)의 욕자(欲刺)에 의해 덮여 있기 때문에 지금 자본각(自本覺)을 얻지 못한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만약 중생이 아직 본리(本利)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채집(採集)이 있다면, 어떻게 항복하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집(集)하거나 독행(獨行)하거나, 분별하거나 염착하는 것을, 심신(心神)을 되돌려 공굴(空窟)에 머물게 하여 항복하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키고, 마의 속박을 해탈한다. 초연히 노지(露地)에 앉으니, 식음(識陰)이 반열반(槃涅槃)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장애를 제거하고 증입하는 문을 보임이다. 답 가운데 능복방편(能伏方便)은 불경(佛經)에 의거하여 심신(心神)을 되돌려 인법상(人法相)을 버리고 이공리(二空理)에 머물기 때문에 심신을 되돌려 공굴에 머문다고 한다. 저 혹(惑)은 무시(無始)이고 도리에 어기기 때문에 대적할 수 없으니 항복하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고 한다. 이것이 지전(地前) 이장(二障)을 복제(伏除)함을 밝힌다. 이 복도(伏道)로 말미암아 단도위(斷道位)에 들어가 점차 종자를 뽑아내어 영진(永盡)에 이른다. 영진할 때 사마(四魔)를 원리하기 때문에 마의 속박을 해탈한다고 한다. 초연히 노지에 앉는다는 것은 유루오음취락(有漏五陰聚落)을 초출하여 도량에 앉아 무상각(無上覺)을 얻기 때문이다. 식음반열반(識陰槃涅槃)이란 무상각으로써 대열반을 증득하고, 각지무각(覺知無覺)하면 제식이 모두 들어가기 때문이다.
━━━ 遣著 — 無住 遣有住之著 ━━━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심이 열반을 얻어 홀로 하나이고 반려가 없으니, 항상 열반에 머물면 마땅히 해탈일 것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집착을 없앰이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무주(無住)로써 유주(有住)의 집착을 없애고, 뒤에 무득(無得)으로써 유득(有得)의 집착을 없앤다. 독일(獨一)이란 팔식이 전(轉)할 때 하나의 각(覺)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무반(無伴)이란 인법이집(人法二執)이 이미 원리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이것이 열반의 속박이다. 무슨 까닭인가? 열반은 본각이(本覺利)요, 이(利)가 본래 열반이다. 열반각분(涅槃覺分)이 곧 본각분이다. 각성(覺性)은 열반과 다르지 않아 무이(無異)이다. 각이 본래 무생이면 열반도 무생이요, 각이 본래 무멸이면 열반도 무멸이다. 열반이 본래 그러하기에 열반을 얻을 수 없다. 열반이 무득이니 어찌하여 주(住)가 있겠는가? 선남자여, 각자(覺者)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각이 본래 무생이어서 중생의 때[垢]를 여의고, 각이 본래 무적(無寂)이어서 열반의 동(動)을 여읜다. 이와 같은 지심(地心)에 머물면 머묾이 없고 출입이 없으니, 암마라(唵摩羅)에 들어가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답으로 유주(有住)의 집착을 바로 없앤다. 무이의(無異義)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본리무이(本理無異), 둘째 각분무이(覺分無異), 셋째 일미무이(一味無異), 넷째 무이무이(無二無異)이다. 이 네 가지 무이도리로 말미암아 본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열반각(涅槃覺)을 능히 얻을 수 없음을 밝힌다. 이미 능득(能得)·소득(所得)이 없으니, 무슨 능주(能住)·소주(所住)가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어찌하여 주가 있겠는가 하니, 곧 항상 머물면 마땅하지 않은 도리를 드러낸다.
다음으로 시각에 약하여 무주를 밝힌다. 각이 본래 무생이란 생사가 본래 무생임을 각지하기에 생사의 때[垢]에 집착함을 여읜다. 각이 본래 무적(無寂)이란 열반이 본래 적정이 없음을 각지하기에 열반에 드는 동(動)을 여읜다. 심에 머묾이 없다는 것은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출입이 없다는 것은 속유(俗有)와 진공(眞空)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주이어야 해탈을 얻으니, 고로 열반에 머물면 박(縛)을 여의지 못한다.
━━━ 遣著 — 無得 遣有得之執 ━━━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암마라식(唵摩羅識)은 들어갈 처소가 있으니, 처소가 있으면 소득이 있어 이것이 득법(得法)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유득집(有得執)을 없앰이다. 앞의 입(入)이라는 말을 그대로 취하여 뜻으로 삼는다. 이른바 무구식(無垢識)에 들어갈 처소가 있다. 들어갈 때 증득하니 소득이 있다는 의혹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자면 미자(迷子)가 손에 금전(金錢)을 쥐고 있으면서 있는 줄 알지 못한다. 시방으로 다니기를 오십 년이 되었으나, 빈궁하고 곤고하여 오로지 구색(求索)하면서 몸을 기르지만 충족하지 못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일이 있음을 보고 아들에게 말하였다: 네가 금전을 쥐고 있으면서 어찌 취하여 쓰지 않느냐? 뜻대로 필요한 바를 모두 충족할 수 있다. 그 아들이 깨어나 금전을 얻고 마음에 크게 기뻐하여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 아버지가 말하였다: 미자야, 기뻐하지 마라. 얻은 금전은 이것이 네 본물(本物)이니,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어찌 기뻐하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답으로 무득(無得)의 뜻을 바로 밝힌다. 미자(迷子)란 제중생이 자심원(自心源)에 미혹한 것을 비유하니, 여래의 대비가 외아들처럼 보기 때문에 미자에 비유한다. 법화경의 궁자(窮子)는 성문에만 비유하나, 이 미자는 중생에 통하여 비유한다. 손에 금전을 쥐고 있다는 것은 모든 망식(妄識)과 오박번뇌(五縛煩惱)의 집착분별이 자정심(自淨心)을 덮어 있는 줄 알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일이 있음을 본다는 것은, 불(佛)이 심원으로 돌아가 동체대비로 제중생을 위해 자부(慈父)가 되기 때문이다. 너는 금전을 쥐고 있으면서 어찌 취하여 쓰지 않느냐는 것은 정심(淨心)이 있으니 마땅히 신해(信解)해야 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 아들이 깨어났다는 것은 대승교를 듣고 신해가 생겨 위(位)가 지전(地前)에 있기 때문이다. 금전을 얻었다는 것은 초지(初地)에 들어 정통달위(正通達位)에서 불성본각이(佛性本覺利)를 증견(證見)하기 때문이다. 소득의 금전은 이것이 네 본물이라는 것은, 그 소증(所證)의 본각의 이(利)가 본래 너의 것이지 처음 있게 된 것이 아님을 보이기 때문이다. 기뻐하지 마라는 것은 분별하여 소득이 있다고 여겨 집착과 기뻐함을 생함을 차(遮)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암마라(唵摩羅)도 또한 이와 같으니, 본래 출상(出相)이 없어 지금 입(入)이 아니다. 옛날 미혹했기에 없는 것이 아니요, 지금 각(覺)하기에 들어감이 아니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합(合)이다. 총합(摠合) 가운데, 암마라란 무구(無垢)라 한역한다. 본각이 본래 청정하여 성이 바뀌지 않으니, 저 금전의 성이 바뀌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금에 네 가지 뜻이 있어 본각 가운데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비유하니, 통합하여 사유(四喩) 가운데 금전에 합한다.
별합(別合) 가운데 본래 출상이 없다는 것은 초유(初喩) 가운데 손에 금전을 쥐고 있는 것에 합한다. 지금 비입(非入)이라는 것은 제3유(第三喩) 가운데 금전을 얻은 것에 합한다. 옛날 미혹했기에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제2유(第二喩) 가운데 네가 금전을 쥐고 있으면서 어찌 취하여 쓰지 않느냐는 것에 합한다. 지금 각하기에 들어감이 아니라는 것은 제4유(第四喩) 가운데 이것이 너의 본물이라는 것에 합하니, 지금 본물이 자심을 나오지 않음을 각하였다. 이미 본래 나오지 않았는데 어찌 들어감이 있겠는가? 들어감이 아닌 까닭에 얻음도 아니다.
━━━ 重遣疑情 三番問荅 ━━━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저 아버지는 그 아들이 미혹함을 알면서 어찌하여 오십 년을 경과하고 시방으로 유력하며 빈궁하고 곤고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말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십 년을 경과함은 일념심동(一念心動)에 비유하고, 시방으로 유력함은 원행변계(遠行遍計)에 비유하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의정(疑情)을 거듭 없앰이다. 세 번의 문답으로 차례로 의혹을 없앤다. 이 초번은 비유에 의거한 의혹을 묻고, 법에 나아가 없애는 답이다. 답의 뜻은, 오십 년을 경과함은 일념심동에 비유하고, 시방 유력은 원행변계에 비유한다. 즉 일념의 순간에 제법을 변계(遍計)하면, 즉 이 일념에 그 아버지가 고언(告言)한다. 고언할 때 즉 깨달음을 얻으니, 념이 구경할 때 무소득(無所得)을 얻는다. 금전을 각하되 얻는 바가 없는 것처럼, 아버지가 알린 것이 오래 지난 때문이 아니요, 다만 일념에 오십악(五十惡)을 갖춤을 드러내기 위해 비유 가운데 오십 년을 경과함이라 설하였다.
무명력으로 말미암아 사상(四相)을 일으키고, 사상과 무명의 화합력으로 말미암아 일심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능히 동하게 한다. 일심이 이미 동하면 이 사상을 띤다. 이런 까닭에 일념심동이라 이름한다. 기신론에서 「자성청정심이 무명풍으로 인하여 동한다」고 하였다.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일념심동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념심동에 오음(五陰)이 구생(具生)하고, 오음생(五陰生) 가운데 오십악(五十惡)을 갖춘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번으로 제2 의혹을 없앤다. 사상이 모든 생사를 섭하기 때문에 오음을 갖추고 오십악이 있다. 어찌하여 오음에 오십악을 갖추는가? 식음(識陰)에 여덟이 있으니 곧 팔식이요, 수상이음(受想二陰)은 식에 따라 각각 여덟이며, 행음(行陰)에는 아홉이 있고 여덟은 상응(相應)이며 하나는 불상응이다. 색음(色陰)은 열일곱이니 합하여 오십이 된다.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원행변계하여 시방을 유력하고 일념에 심이 생하여 오십악을 갖추니, 어찌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일념을 무생하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심신(心神)을 안좌(安坐)하게 하고, 금강지(金剛地)에 머물게 하며, 정념(靜念)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심이 항상 안태(安泰)하게 하면 곧 일념이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번으로 제3 의혹을 없앤다. 능치(能治)의 도(道)를 밝힌다. 안좌심신(安坐心神)이란 십주(十住)로부터 심을 삼공(三空)에 안하여 결정불퇴함을 안좌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금강지에 머문다는 것은 초지(初地) 이상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모든 멸괴(滅壞)를 여의기가 금강과 같기 때문이다. 정념무기(靜念無起)란 등각위(等覺位)에서 그 동념을 각하여 본래 적정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심이 항상 안태하다는 것은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 심원(心源)을 보아 기멸(起滅)이 없고 본래 동념이 없으며 무시무종(無始無終)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구경각을 얻으니 곧 생사일념(生死一念) 사상(四相)이 없다. 이런 까닭에 곧 일념이 없다고 한다.
━━━ 領解 · 述成 ━━━
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말하였다: 불가사의이도다! 각념(覺念)이 불생하여 그 심이 안태하니 곧 본각이(本覺利)입니다. 이(利)에 동(動)이 없어 항상 있되 없지 않습니다. 없지 않음이 없으니 없지 않고 각하지 않으며, 각지무각(覺知無覺)하니 본리본각(本利本覺)이요, 각자(覺者)가 청정무염(淸淨無染)입니다. 불변불역(不變不易)이요 결정성이기에 불가사의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영해(領解)요 제4 술성(述成)이다. 각념불생심안태(覺念不生心安泰)란 앞의 정념무기심상안태(靜念無起心常安泰)의 구(句)를 영수함이다. 이것이 시각의 구경처이다. 곧 본각이(本覺利)란 시각이 본각과 달리 없는 뜻을 영수함이다. 론에서 「만약 무념을 얻으면 곧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나니, 무념 등이기 때문에 실로 시각의 다름이 없다. 사상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립이 없으니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일각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시각이 각지(覺知)하여 다름이 없기 때문에 항상 있되 없지 않을 수 있다. 불변불역(不變不易)이니, 불역(不易)이란 생주가 없기 때문이요, 불변(不變)이란 이멸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으면 곧 진제(眞際)와 같고 법성(法性)과 같기 때문에 결정성이라 한다. 이미 평등하고 이언절려(離言絕慮)이기에 불가사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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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頌 · 得益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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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무주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미증유(未曾有)를 얻어 게송으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대각(大覺)의 세존께서 생무념법(生無念法)을 설하시니, 무념무생심(無念無生心)이요 심이 항상 생하여 불멸이로다. 일각본각이(一覺本覺利)가 제본각자를 이롭게 하니, 저 금전을 얻은 것처럼 얻은 바가 곧 얻음이 아니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게송으로 찬탄함이다. 설생무념법(說生無念法)이란 제중생으로 하여금 무념법을 이루게 함이니 구경각이기 때문이다. 무념무생심이란 생사념이 없어 무생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심이 항상 생하여 불멸이란 연(演) 가운데 심이 항상 안태하여 항상 있되 없지 않기 때문이니, 생(生)이란 있음을 말하고 멸(滅)이란 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일각본각이(一覺本覺利)가 제본각자를 이롭게 한다는 것은, 저 제중생이 본각이 없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모든 본각자라 한다. 아래 이구(二句)가 앞의 사유(四喩)를 송하니 알 수 있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본각이반야바라밀(本覺利般若波羅密)을 얻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문법득리(聞法得利)이다. 설한 바의 뜻에 따라 이(利)를 얻기 때문에 본각이(本覺利)를 얻는다. 시각반야(始覺般若)가 평등하여 다르지 않으니 앞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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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實際品 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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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論)에서 말한다: 실제(實際)란 허(虛)를 여읜 칭이요 구경(究竟)의 뜻이다. 환(幻)을 여의고 구경하기에 실제라 이름한다. 교(敎)에 의거하여 리(理)를 닦으니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 있기에 입(入)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실제는 무제(無際)로써 제(際)를 삼는다. 이입(二入)은 무입(無入)의 입이다. 이런 까닭에 입실제품(入實際品)이라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이에 여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제보살 등이 본리(本利)가 깊어 가도중생(可度衆生)에 들어간다.」
론(論)에서 말한다: 별명관행(別明觀行) 여섯 부분 가운데 제3 본리이물(本利利物)분이 마쳤다. 이하가 제4 허(虛)로부터 실(實)에 들어감이다. 또한 앞의 품은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밝히고, 지금 이 품은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다. 문(文)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대의(大意)를 약표(略標)하고, 둘째 도리를 광현(廣顯)하며, 셋째 신자(身子, 사리불)가 영해(領解)하고, 넷째 시중득익(時衆得益)이다.
━━━ 略標大意 — 四種方便 ━━━
경에서 말한다: 「만약 나중에 비시(非時)라면 마땅히 여설법(如說法)을 해야 하니, 시리(時利)가 함께하지 않는다. 순불순설(順不順說)하고, 비동비이상(非同非異相)이 상응하게 설하여, 제정지(諸情智)를 인도하여 살반야해(薩般若海)에 흘러 들게 하며, 가중(可衆)으로 하여금 저 허풍(虛風)을 거(挹)하지 않게 하고, 저 서인(庶人)들로 하여금 일미신공(一味神孔)에 들게 하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사종방편(四種方便)을 별개(別開)한다. 지시방편(知時方便), 식기방편(識機方便), 인입방편(引入方便), 출리방편(出離方便)이다.
지시방편(知時方便)이란 비순숙시(非純熟時)이기 때문이요, 비이오시(非易悟時)이기 때문이며, 이견(異見)이 성행하여 비시(非時)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 비시에 바로 진여설법(眞如說法)만 한다면 그 때에 맞지 않아 이익이 없다. 시리(時利)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기방편(識機方便)이란 순불순설(順不順說)하고 비동비이(非同非異)로써 설한다. 만약 바로 저 마음에 순하여 설하면 사집(邪執)을 움직이지 못하고, 오직 불순하여 설하면 정신(正信)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직접 리에 순하여 설하면 정신(正信)이 일어나지 않고, 리에 어기어 설하면 어찌 정해(正解)가 생기겠는가? 신해를 얻기 위해 순불순설하는 것이다. 비동자(非同者)란 언(言)과 같이 취하면 모두 불허하기 때문이요, 비이자(非異者)란 뜻을 얻어 말하면 허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입방편(引入方便)이란 제정(諸情)과 제지(諸智)를 이끌어 모두 도(道)를 따라 흘러 일각일체지해(一覺一切智海)에 들어가게 한다. 백천(百川)이 흘러 대해에 들어가듯이 대해는 깊고 광대하여 동일한 맛이기 때문이다.
출리방편(出離方便)이란 가도중생으로 하여금 경계풍(境界風)을 거(挹, 취납)하지 않게 하여 식랑(識浪)이 정식(靜息)하게 한다. 서(庶)란 서기(庶幾)이니 희망의 뜻이다. 신공(神孔)이란 신선의 굴이니 대열반의 불사(不死)의 집에 비유한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대열반을 희망하고 제식랑을 그쳐 유전을 출리하게 하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세간(世間)은 세(世)가 아니요, 머묾이 주처(住處)가 아니다. 오공(五空)을 출입하되 취사(取捨)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제법공상(諸法空相)의 법성(法性)은 무(無)가 아니요, 무(無)가 아니되 불무(不無)이며, 불무(不無)이되 불유(不有)이니, 결정성이 없어 유무(有無)에 머물지 않는다. 저 유무(有無)의 범성지(凡聖之智)는 능히 은(隱)을 측량하지 못한다. 제보살 등이 만약 이 이(利)를 알면 곧 보리를 얻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소입도리(所入道理)를 보임이다. 오공(五空) 가운데 출공(出空)에 들어갈 때 공성을 취하지 않는다. 비록 공을 취하지 않아도 공을 버리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취사가 없다. 법성여시(法性如是)하여 정유무(定有無)가 아니기에 달자(達者)가 이변(二邊)에 머물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결정성이 없어 유무에 머물지 않는다. 제보살이란 지전보살(地前菩薩)이다. 만약 법성이 불유불무(不有不無)임을 알면, 초발심(初發心) 때 바로 정각을 이룬다. 이런 까닭에 곧 보리를 얻는다고 절실히 말한다. 초발심 때 법성을 알 때, 이때 곧 무상보리를 얻는다. 이 뜻이 화엄경 발심공덕품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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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顯道理 — 四門分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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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 가운데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는 보살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설하신 바와 같이 오공출입(五空出入)에 취사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오공이면서 취사하지 않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도리를 광현함이다. 그 가운데 사문(四門)으로 분별한다. 첫째 실제의(實際義), 둘째 취입의(趣入義), 셋째 입의 계위(階位), 넷째 입의 방편이다. 대력보살이란 이 사람이 입실제법문을 얻어 법계에 두루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고 대자재를 얻기 때문에 대력이라 이름한다.
━━━ 第一 五空名義 ━━━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오공(五空)이란 삼유시공(三有是空), 육도영시공(六道影是空), 법상시공(法相是空), 명상시공(名相是空), 심식의시공(心識義是空)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등의 공에서, 공이 공에 머물지 않고, 공이 공상(空相)이 없으니, 무상의 법에 무슨 취사가 있겠는가? 무취지(無取地)에 들어가면 곧 삼공(三空)에 든다.」
론(論)에서 말한다: 오공(五空)이 곧 삼종진여(三種眞如)를 드러낸다. 유전진여(流轉眞如), 실상진여(實相眞如),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다. 이 가운데 앞의 이공(二空)이 앞의 이진여(二眞如)에 해당하고, 뒤의 삼공(三空)이 제3 진여에 해당한다. 삼유시공(三有是空)이란, 삼유의 애(愛)로 말미암아 삼계를 유전하는데, 삼계 유전이 전후의 성이 없고 찰나에 머물지 않아 공이요 얻을 바가 없으니, 곧 이것이 유전진여문이다. 육도영시공(六道影是空)이란, 선악업으로 말미암아 육도의 과보가 본을 닮아 영(影)을 드러내는데, 영이 본을 떠남이 없으니 공이요 얻을 바가 없으니, 곧 이것이 실상진여문이다. 뒤의 삼공은 유식진여문이다.
━━━ 第二 三空 ━━━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삼공(三空)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공(三空)이란 공상역공(空相亦空), 공공역공(空空亦空), 소공역공(所空亦空)이다. 이와 같은 등의 공은 삼상(三相)에 머물지 않고, 진실(眞實)이 없지 않으며, 문언도단(文言道斷)이요 불가사의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 일문답은 이공(二空)을 밝힌다. 공상역공(空相亦空)이란 공상(空相)이 곧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드러내는 평등의 상이요, 또한 공은 곧 진(眞)을 융하여 속(俗)이 됨이다. 공공역공(空空亦空)이란 공공(空空)이 곧 속제(俗諦)의 차별이니, 또한 공하여 속을 융하여 진이 됨이다. 소공역공(所空亦空)이란 초공(初空) 가운데 공으로 드러난 속(俗)과 제이공(第二空) 가운데 공으로 드러난 진(眞), 이 둘이 무이(無二)하기 때문에 또한 공이라 한다. 이것이 일제(一諦)를 융하여 일법계(一法界)를 드러냄이니, 일법계란 이른바 일심이다.
━━━ 第三 空是眞 ━━━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진실이 없지 않으니 이것은 마땅히 유(有)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정답(正荅)이요 둘째 탄심(歎深)이다. 정답 가운데 「무에 머물지 않는다[無不住無]」는 것은, 앞서 「불무진실(不無眞實)」이라 한 구(句)에서, 무(無)라는 이름이 무(無)의 뜻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불무(不無)라는 이름도 또한 유(有)의 뜻에 해당하지 않으니, 이로써 무명지명(無名之名)이 유의지의(有義之義)에 해당하지 않음을 밝힌다. 불유지법(不有之法)이 곧 무(無)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속(俗)을 융하여 진(眞)이 되면서도 진무(眞無)의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불무지상(不無之相)이 곧 유(有)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진(眞)을 융하여 속(俗)이 되면서도 속유(俗有)의 상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속이 유무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유무로써 리(理)를 전달할 수 없다. 이것이 무의지의(無義之義)가 유명지명(有名之名)에 칭합하지 않음을 밝힌다. 보살 이하가 제2 탄심이니,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직탄(直歎)과 석탄(釋歎)이다. 무명지명불무어명(無名之名不無於名)이란, 불이 설하는 명이 유의지의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무명지명이 되지만, 무의지의에 해당하기 때문에 명에서 없지 않다고 한다. 무의지의불무어의(無義之義不無於義)란, 불이 체달하는 의가 유명지명에 칭합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지의가 되지만, 무명지명에 칭합하기 때문에 의에서 없지 않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명의도 아니요 또한 무명의도 아니니, 이런 까닭에 불가사의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無)는 무(無)에 머물지 않고, 불무(不無)이되 불유(不有)이며, 불유(不有)의 법은 곧 무(無)에 머물지 않고, 불무(不無)의 상은 곧 유(有)에 머물지 않는다. 유무(有無)로써 리(理)를 전달할 수 없다. 보살이여, 무명의상(無名義相)이 불가사의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불유(不有)의 법이 곧 무(無)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속(俗)을 융하여 진이 되면서도 진무(眞無)의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불무(不無)의 상이 곧 유(有)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진을 융하여 속이 되면서도 속유(俗有)의 상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속(眞俗)이 유무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유무로써 리를 전달할 수 없다. 무명지명(無名之名)은 유의(有義)의 의(義)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무명의 이름이지만 이름이 없지 않다. 무의지의(無義之義)는 유명(有名)의 이름에 칭합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의 뜻이지만 뜻이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유명의(有名義)도 아니요 또한 무명의도 아니니, 이런 까닭에 불가사의이다.
━━━ 第四 眞是如 ━━━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명의(名義)의 진실여상(眞實如相)이 여래여상(如來如相)입니다. 여(如)는 여(如)에 머물지 않고, 여에 여상이 없으며, 상에 여가 없기에 여래가 아님이 아닙니다. 중생심상(衆生心相)의 상도 또한 여래이니, 중생의 심은 마땅히 별경(別境)이 없어야 합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의혹에 대한 답이니, 먼저 주고[與] 뒤에 빼앗는다[奪]. 줌은 자성정(自性淨)에 의거하여 본래 염(染)이 없기 때문이다. 빼앗음은 수타염(隨他染)에 약하여 별경(別境)이 있기 때문이다. 자성정이란, 보성론(寶性論)에서 인용한 경에 「선심도 념념이 멸하여 머물지 않아 번뇌에 물들지 않고, 불선심도 념념이 멸하여 머물지 않아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가 심을 촉하지 않고 심이 번뇌를 촉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촉하지 않는 법이 능히 심을 물들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이 곧 염이면서 불염문(染而不染門)이다. 수타염이란 부인경(夫人經)에서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든 것도 또한 알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이 곧 불염이면서 염문(不染而染門)이다. 심이 본래 청정하고 리에 예(穢)가 없다는 것은 자성청정심의 본각지리(本覺之理)가 제진예(諸塵穢)의 들어오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하에서 염진(染塵)으로써 의혹을 빼앗으니, 「염진으로 말미암아 삼계라 이름한다」는 것은 주지번뇌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이다. 이 주지로 삼계의 애를 일으킨다. 삼계의 애로 말미암아 삼계의 심이 생기고, 이 망심이 허경(虛境)을 변작(變作)한다. 이런 까닭에 심으로부터 화생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시각을 밝힌다. 심이 만약 무망(無妄)하면 이관행(理觀行)에 의거하여 망심이 불생하기 때문이요, 곧 별경이 없다는 것은 망작경계(妄作境界)가 심을 따라 멸하기 때문이다. 이상 사문(四門)이 합하여 제1 실제의(實際義)를 널리 밝힘이 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중생의 심은 실로 별경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심이 본래 청정하고 리(理)에 예(穢)가 없기 때문이다. 염진(染塵)이 있기 때문에 삼계라 이름한다. 삼계의 심을 별경이라 이름하니, 이 경(境)은 허망하여 심으로부터 화생(化生)하였다. 심이 만약 무망(無妄)이면 곧 별경이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답으로 의혹을 없앤다. 줌은 자성정(自性淨)에 의거하여 본래 염이 없기 때문이다. 빼앗음은 수타염(隨他染)에 약하여 별경이 있기 때문이다. 자성정(自性淨)이란 보성론(寶性論)에서 인용한 경에 「선심(善心)도 념념이 멸하여 머물지 않아 번뇌에 물들지 않고, 불선심도 념념이 멸하여 머물지 않아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가 심을 촉하지 않고 심이 번뇌를 촉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촉하지 않는 법이 능히 심을 물들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이 곧 염이면서 불염문(染而不染門)이다. 수타염(隨他染)이란 부인경(夫人經)에서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든 것도 또한 알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이 곧 불염이면서 염문(不染而染門)이다. 상 가운데 심이 항상 공적하여 진여문(眞如門)을 드러냄이다. 이상 사문이 합하여 제1 실제의(實際義)를 널리 밝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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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顯道理 — 第二 趣入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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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심이 만약 청정하면 제경(諸境)이 불생하니, 이 심이 청정할 때 마땅히 삼계가 없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보살이여, 심이 경을 불생하고 경이 심을 불생한다. 무슨 까닭인가? 견하는 바 제경은 오직 소견심(所見心)이니, 심이 환화(幻化)하지 않으면 곧 소견이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취입의(趣入義)를 널리 밝힘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총명취입(摠明趣入), 둘째 별현취입(別顯趣入), 셋째 입의 이과(離過), 넷째 입의 이변(離邊)이다.
삼계 자성(自性)은 등각위(等覺位) 가운데 멸함이 없어지고, 삼계 습기(習氣)는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야 비로소 멸함이 없어진다. 唯심 망견(妄見)이 변하여 경계를 짓는 것이니, 심에 망이 없으면 곧 경을 짓지 않아 경계가 없기에 심을 불생한다.
경에서 말한다: 「보살이여, 내(內)에 중생이 없고, 삼성(三性)이 공적하며, 기중(己衆)이 없고 타중(他衆)도 없으며, 이입(二入)에 이르기까지 또한 심을 불생하면, 이와 같은 이(利)를 얻어 곧 삼계가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취입을 별현(別顯)한다. 내무중생(內無衆生)이란 십주위(十住位)에서 내인공(內人空)을 얻기 때문이요, 삼성공적(三性空寂)이란 십행위(十行位) 가운데 내법공(內法空)을 얻기 때문이다. 기중도 없고 타중도 없다는 것은 십회향위(十迴向位)에서 평등공(平等空)을 얻어 자타인법중(自他人法衆)을 두루 없애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사공(相似空)이니 아직 진증(眞證)을 얻지 못하였다. 이입(二入)에 이르기까지란 지전지상(地前地上)의 입의 수(數)를 통해 든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이입(二入)입니까? 심에 불생하여 심이 본래 불생인데 어찌 입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입(二入)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요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이란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되 불일불공(不一不共)임을 깊이 믿으며, 다만 객진(客塵)에 의해 장폐되었을 뿐이다. 거래하지 않고 응주각관(凝住覺觀)하여 불성(佛性)이 불유불무(不有不無)임을 자세히 관하며, 기도 없고 타도 없고 범성(凡聖)이 불이(不二)여서, 금강심지(金剛心地)에 견고히 머물되 옮기지 않고, 적정무위(寂靜無爲)하여 분별이 없다. 이것이 이입(理入)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입(理入)은 리(理)에 순하여 신해(信解)하나 아직 증행(證行)을 얻지 못하기에 이입이라 이름하니 위(位)가 지전(地前)에 있다. 행입(行入)은 리를 증득하여 무생행에 드는 수행이기에 행입이라 이름하니 위(位)가 지상(地上)에 있다. 이입(理入)의 문(文) 가운데 사구(四句)가 있다. 불일(不一)이란 중생의 상이 진성과 다르지 않으나 일(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공(不共)이란 일이기도 하고 이이기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2구는 십주입(十住入)이요, 제3구는 십행입(十行入)이요, 제4구는 십회향위(十迴向位)이니, 이입이 이미 자타평등공을 얻어 심이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불퇴한다.
경에서 말한다: 「행입(行入)이란 심이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고[心不傾倚], 영(影)이 흘러 변하지 않으며[影無流易], 있는 바 모든 처에서 정념무구(靜念無求)하여 바람이 불어도 동하지 않기가 마치 대지와 같다. 심아(心我)를 버리고 여의어 중생을 구도(救度)하되 무생무상(無生無相)이요,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지상(地上) 증입(證入)의 행을 밝힌다. 심이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리지심(如理之智)이 반연(攀緣)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이 흘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리의 경(境)이 삼제를 여의기 때문이다. 불취불사(不取不捨)란 적멸의 성을 취하지 않고 항상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이 행입(行入)이라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보살이여, 심에 출입이 없다. 출입 없는 심은 들어가되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입이라 이름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저의 힐난을 통석(通釋)함이다. 리를 증득하는 심은 생멸을 원리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이기에 심에 출입이 없다. 이미 출입이 없으면 또한 옛날 출입하던 심도 없다. 옛날 출입하는 심이 있었다가 이 불출입의 심에 들어왔기 때문에 들어가되 들어가지 않는 것이라 한다. 고로 입이라 이름한다고 하니, 이와 같이 앞의 힐난이 잘 통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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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顯道理 — 第三 入之離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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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보살이여, 이와 같이 입법(入法)하면 법상(法相)이 공(空)하지 않다. 공하지 않은 법은 법이 허되이 버려지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불무(不無)의 법이 공덕을 구족하니, 심도 아니요 영(影)도 아니어서 법이(法爾)하여 청정하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1 이과(離過)를 광석(廣釋)함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하며, 셋째 영해이고 넷째 술성이다. 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비심비영지구(非心非影之句)를 해석하고, 뒤에 법이청정지구(法爾淸淨之句)를 해석한다. 첫 번째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입법(入法)이 제심영(諸心影)을 여읨을 밝히고, 뒤에 심영이 여리(如理)에 어긋나지 않음을 밝힌다. 초 가운데 공여지법(空如之法)이란, 실제에 들어갈 때 제상을 원리함이 공(空)이요 능소(能所)가 평등함이 여(如)이다. 이와 같은 입법이 제심영을 여의니, 심영의 차별에 대략 육쌍(六雙)이 있다. 첫째 심(心) 및 심소(心所)의 쌍, 둘째 허공과 색의 쌍, 셋째 불상응행 및 제무위의 쌍, 넷째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의 쌍, 다섯째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의 쌍, 여섯째 명언(名言) 및 상의(相義)의 쌍이다. 이 육쌍을 여의기 때문에 비심영이다. 비심식법이란 팔식심을 여의기 때문이요, 비심사소유법이란 육위심소유법(六位心所有法)을 여의기 때문이며, 비공상법이란 무색상의 허공법을 여의기 때문이요, 비색상법이란 현형표(顯形表) 삼종색(三種色)을 여의기 때문이다. 비심불상응법이란 이십사 불상응행을 여의기 때문이요, 비심무위상응법이란 나머지 칠종무위법을 여의기 때문이다. 비소현영(非所現影)이란 방편관의 소현본법동분영상을 여의기 때문이요, 비소현시(非所顯示)란 영상이 나타내는 본질의 법을 여의기 때문이다. 비자성이란 색심 등의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요, 비차별이란 무상 등의 차별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비명이란 명구문(名句文)의 능전상을 여의기 때문이요, 비상의(非相義)란 명소전(名所詮)의 상당명지의(相當名之義)를 여의기 때문이다. 이 육쌍의 상을 여읨은 능소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비생지소생생(非生之所生生)이란 생상(生相)을 여의기 때문이요 체가 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법(淨法)이 유위상을 여의니 무생무멸무시무종(無生無滅無始無終)이다. 이런 까닭에 법이청정(法爾淸淨)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비심비영(非心非影)이 법이청정(法爾淸淨)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여지법(空如之法)은, 비심식법(非心識法)이요, 비심사소유법(非心使所有法)이요, 비공상법(非空相法)이요, 비색상법(非色相法)이요, 비심불상응법(非心不相應法)이요, 비심무위상응법(非心無爲相應法)이다. 소현영(所現影)이 아니요, 소현시(所顯示)가 아니며, 자성(自性)이 아니요, 차별(差別)이 아니며, 명(名)이 아니요, 상의(相義)가 아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공여지법(空如之法)이란 입실제(入實際)할 때 제상을 원리하면 공(空)이요, 능소(能所)가 평등하면 여(如)이다. 이와 같은 입법(入法)이 제심영(諸心影)을 여의니, 심영의 차별에 대략 육쌍(六雙)이 있다. 첫째 심(心) 및 심소(心所)의 쌍, 둘째 허공과 색의 쌍, 셋째 불상응행 및 제무위의 쌍, 넷째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의 쌍, 다섯째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의 쌍, 여섯째 명언(名言) 및 상의(相義)의 쌍이다. 이 육쌍을 여의기 때문에 비심영이다. 비생지소생생(非生之所生生)이란 생상(生相)을 여의기 때문이요, 체가 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법(淨法)이 유위상(有爲相)을 여의니 무생무멸무시무종(無生無滅無始無終)이다. 이런 까닭에 법이청정(法爾淸淨)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불가사의이도다! 이와 같은 법상은 합성(合成)이 아니요, 독성(獨成)이 아니며, 매이지도 않고 짝하지도 않으며, 취산(聚散)이 아니요, 생멸이 아니며, 또한 래상(來相)도 없고 거상(去相)도 없으니 불가사의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영해이다. 불합성(不合成)이란 심과 심소이니 심과 심소가 별체(別體)가 상응하기 때문이다. 불독성(不獨成)이란 자성과 차별이니 이 두 뜻이 별(別)하나 이체(二體)가 없기 때문이다. 불기(不羈)란 명과 의가 서로 객(客)이 되기 때문이다. 불반(不伴)이란 영과 질(質)이 서로 유사하여 짝이 되기 때문이다. 불취산(不聚散)이란 공(空)과 색이 아닌 까닭이니, 취집하면 색이 되고 산괴하면 공이 되기 때문이다. 불생멸이란 불상응과 무위가 아닌 까닭이니, 불상응행은 생기하고 제무위법은 멸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불가사의이다. 불사의심(不思議心)도 심이 또한 이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여(如)는 심과 다르지 않고 심은 본래 여(如)이기 때문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술성이다. 소언 심(心)이란 입증심(入證心)을 이른다. 여불이심(如不異心)이란 앞의 불가사의를 해석함이요, 심본여고(心本如故)란 뒤의 불가사의를 해석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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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顯道理 — 第四 入之離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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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중생불성(衆生佛性)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이요, 중생의 성(性)은 본래 무생멸이며, 생멸의 성(性)의 성이 본래 열반이고, 성상(性相)이 본래 여(如)하여 여(如)에 동이 없기 때문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4 소입(所入)의 이변(離邊)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불성이 일이변(一異邊)을 여읨을 밝히고, 뒤에 여여(如如)가 유무변(有無邊)을 여읨을 드러낸다. 열반경에서 「불성(佛性)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불이의(不一義)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구(句)는 인(人)이 불성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다.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상(性相)이 본래 여(如)하다는 것은 중생의 인성(人性)과 생멸법상이 본래 여(如)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
경에서 말한다: 「일체 법상이 연(緣)으로부터 일어남이 없고, 기상성(起相性)이 여(如)하여 여가 동(動)하는 바가 없다. 인연의 성상(性相)이 본래 공무(空無)하고, 연연(緣緣)이 공공(空空)하여 연기(緣起)가 없다. 일체 연법(緣法)은 혹심망견(惑心妄見)이니, 현(現)이 본래 불생이요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심여법리(心如法理)의 자체가 공무하기가 저 공왕(空王)이 본래 주처가 없는 것과 같거늘, 범부의 심이 망분별견(妄分別見)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이이변(離異邊)의 의를 광현(廣顯)한다. 일체 법상이 연으로부터 일어남이 없다는 것은, 일체 과법(果法)이 연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곧 생기가 없다. 인연의 성상이 본래 공무라는 것은 종자인연이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공왕(空王)이란 허공법이 일체 색의 의지처이기에 왕에 비유한다. 이와 같이 공왕에 본래 주처가 없거늘, 범부의 심이 망계분별하여 이곳의 허공, 저곳의 허공 등 오직 망견이라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인과의 제법도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한다: 「여여지상(如如之相)은 본래 유무가 없고, 유무의 상은 견이 오직 심식이다. 보살이여, 심지성(心之性)이 자체가 없지 않고 자체가 불유(不有)이며 불유불무이다. 보살이여, 불무부상(不無不相)은 비언설지(非言說地)이다. 무슨 까닭인가? 진여의 법은 허광무상(虛曠無相)이요 이(二)의 미치는 바가 아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여여법(如如法)이 유무변을 여읨을 밝힘이다. 심지성이 자체가 없지 않다는 것은 무자체(無自體)의 변을 여읨이요, 자체가 불유(不有)라는 것은 유자체(有自體)의 변을 여읨이다. 일심법이 불유불무(不有不無)하듯이 여여지리(如如之理)도 동일하게 설한다. 비언설지(非言說地)란 심언(心言)이 이르는 곳이 삼상(三相)을 넘지 않으나 이 불유불무의 여여가 삼상을 원리하기 때문이다. 비이소급(非二所及)이란 심사(尋伺) 두 법이 행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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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顯道理 — 第三 入之階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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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허공경계(虛空境界)는 내외(內外)가 측량할 수 없으니, 육행지사(六行之士)라야 이에 알 수 있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입(入)의 계위(階位)이다. 허공경계란 여여지법(如如之法)이 허광무상(虛曠無相)하기 때문에 허공이라 이름한다. 내외불측이란 내도(內道) 가운데 이십팔성(二十八聖)과 외도 가운데 구십오종(九十五種), 이들 범성이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행지사란 보살의 이입(二入) 계위를 드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육행입니까? 원하건대 설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 십신행(十信行), 둘째 십주행(十住行), 셋째 십행행(十行行), 넷째 십회향행(十迴向行), 다섯째 십지행(十地行), 여섯째 등각행(等覺行)이니, 이와 같이 행하는 자라야 이에 알 수 있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계위를 별현함이다. 다만 행위(行位)만 드러내고 과위(果位)는 빼니, 묘각지(妙覺地)를 취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 육행 가운데 앞의 사위(四位)가 이입(理入)의 계차(階次)요, 뒤의 이위(二位)가 행입(行入)의 차별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실제각이(實際覺利)에 출입이 없습니다. 어떤 법심(法心)이어야 실제(實際)에 들어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은 법에 제(際)가 없다. 무제지심(無際之心)이 곧 실제에 들어가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입심(入心)을 핵명(覈明)함이다. 실제의 법에 제(際)가 없다는 것은 소입(所入)의 법이 법이(法爾)로 무제(無際)이다. 종으로 전후제(前後際)가 없어 무시무종이기 때문이요, 횡으로 차피제(此彼際)가 없어 무중무변(無中無邊)이기 때문이다. 이 사의(四義)를 갖추기 때문에 무제라 한다. 능입지심도 사의를 갖추기 때문에 실제에 들어가지 않는 바가 없다. 마땅히 알라, 실제는 능소변(能所邊)을 여의었다. 심도 이와 같아 능소제(能所際)를 여의면 곧 그 입이 없어야 능히 입을 얻는다. 이것이 불가사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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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顯道理 — 第四 入之方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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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무제심지(無際心智)는 그 지(智)가 애(涯)가 없고, 애가 없는 심은 심이 자재를 얻어 자재의 지혜가 실제에 들어가게 합니다. 저 범부의 연심중생(軟心衆生)은 그 심이 다첨(多喘)하니, 어떤 법으로 어거하여 견심을 얻어 실제에 들게 합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소치(所治)의 장상(障相)을 내고, 뒤에 능치(能治)의 방편을 보인다. 초 가운데 심첨(心喘)이란 심이 놀라 불안하여 출입식(出入息)이 급박하고 빠른 것이니, 육식(六識)의 도동(掉動)이 그치지 않음에 비유한다. 내외사(內外使)란 말나(末那)의 사사(四使)가 내로 자아를 연(緣)하기 때문이요, 의식(意識)의 육사(六使)가 외로 제경(諸境)을 연하기 때문이다. 수사유주(隨使流注)란 분(忿)·한(恨) 등 소수번뇌(小隨煩惱)와 혼(惛)·도(掉) 등 대수번뇌(大隨煩惱) 및 무참무괴(無慚無愧)의 중수번뇌(中隨煩惱)가 사(使) 등을 따라 흘러 현식(現識)에 주집(注集)하기 때문이다. 적력성해(滴瀝成海)란 본사(本使)와 수혹(隨惑)의 일체 현행이 모두 본식(本識)을 훈하여 심광(深廣)하게 적집하기 때문이다. 천풍고랑(天風鼓浪)이란 업력으로 감응하는 육진(六塵)의 경계가 임운(任運)으로 현행하기 때문에 천풍이라 이름하고, 수면해(隨眠海)를 고동(鼓動)하여 칠식랑(七識浪)을 일으키기 때문에 고랑이라 한다. 대룡경해(大龍驚駭)란 무명주지(無明住地)가 그 힘이 가장 크고 본식 수면해의 바닥에 있기 때문에 대룡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무명이 적정에 어기어 항상 추동지심(麤動之心)을 증장하기 때문에 경해라 한다. 이런 여러 연(緣)으로 말미암아 심이 다첨(多喘)하게 되니, 이것이 소치 장상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하가 능치의 방편을 보임이다. 존삼(存三)은 천풍을 능히 막는 방편이요, 수일(守一)은 대룡을 능히 복하는 방편이며, 여래선(如來禪)에 든다는 것이 다첨을 바로 치료하는 방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저 심첨(心喘)이란 내외사(內外使)가 수사유주(隨使流注)하여 적력성해(滴瀝成海)하고, 천풍고랑(天風鼓浪)하며 대룡경해(大龍驚駭)하여 경해지심으로 다첨하는 것이다. 보살이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존삼수일(存三守一)하여 여래선(如來禪)에 들게 하라. 선정으로 말미암아 심이 곧 무첨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답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소치(所治)의 장상(障相)을 내고, 뒤에 능치(能治)의 방편을 보인다. 내외사(內外使)란 말나(末那)의 사사(四使)가 내로 자아를 연하기 때문이요, 의식의 육사(六使)가 외로 제경을 연하기 때문이다. 천풍고랑(天風鼓浪)이란 업력으로 감응하는 육진(六塵)의 경계가 임운(任運)으로 현행하기 때문에 천풍이라 이름하고, 수면해(隨眠海)를 고동하여 칠식랑(七識浪)을 일으키기 때문에 고랑이라 한다. 대룡경해(大龍驚駭)란 무명주지(無明住地)가 그 힘이 가장 크고 본식(本識) 수면해(隨眠海)의 바닥에 있기 때문에 대룡이라 이름한다. 존삼(存三)은 천풍을 능히 막는 방편이요, 수일(守一)은 대룡을 능히 복하는 방편이며, 여래선(如來禪)에 든다는 것이 다첨(多喘)을 바로 치료하는 방편이다.
━━━ 廣顯方便 三番問荅 ━━━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존삼수일(存三守一)하여 여래선(如來禪)에 드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존삼이란 삼해탈(三解脫)을 존(存)함이요, 수일이란 일심여(一心如)를 수(守)함이다. 여래선에 드는 것이란 여심(如心)을 이관(理觀)하여 여시지(如是地)에 들어가면 곧 실제에 드는 것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방편을 광현(廣顯)한다. 세 번의 문답이 있으니, 이 초번에서 수(數)를 들어 총표(摠標)한다. 수일심여(守一心如)란 일심법 가운데 두 종류의 문이 있으니, 지금 먼저 심진여문(心眞如門)을 수(守)하는 것이다. 무명대룡세(無明大龍勢)를 복하기 위해서이니, 무명이 바로 일심여(一心如)에 미혹하기 때문이다. 이 수(守)란 입(入)할 때 고요히 일여(一如)의 경(境)을 수호하고, 출(出)할 때 일미(一味)의 심을 잃지 않음이다. 이런 까닭에 수일(守一)이라 한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삼해탈법(三解脫法)은 어떤 사(事)이며, 이관삼매(理觀三昧)는 어떤 법으로부터 들어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해탈(三解脫)이란 허공해탈(虛空解脫)·금강해탈(金剛解脫)·반야해탈(般若解脫)이다. 이관심이란 심이 여(如)와 같이 리(理)가 정(淨)하여 가부심(可不心)이 없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존용(存用)하며 어찌하여 관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심사(心事)가 불이(不二)함이 존용이라 이름이요, 내행외행(內行外行) 출입불이(出入不二)하여 일상(一相)에 머물지 않고, 심에 득실이 없으며, 일불일지(一不一地)의 정심(淨心)이 흘러 들어감이 이것이 관합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초답 가운데 삼해탈이란 삼혜(三慧)가 팔해탈(八解脫)을 섭하기 때문에 해탈이라 이름한다. 초해탈은 내유색상외관색(內有色相外觀色) 등이니, 이 공이 들어가기 쉬워 문혜(聞慧)가 얻는 바이기 때문에 허공해탈이라 한다. 제2해탈은 내무색상외관색(內無色相外觀色) 등이니, 이 공이 이해하기 어려워 사혜(思慧)가 관하기 때문에 내외제법을 추구하여 파괴하기가 금강이 제색법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금강해탈이라 한다. 뒤의 육해탈은 모두 수혜(修慧)이니 상이계(上二界) 일체법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에 수혜이다. 모두 정(定)으로부터 발하기 때문에 총히 반야해탈이라 이름한다.
후답 가운데 심사불이(心事不二)는 존삼(存三)의 용(用)의 수승한 능(能)이라 이름한다. 만약 삼해탈을 익숙히 닦으면 관을 나와 사(事)에 섭입하여도 관의 기세가 여전히 존재하여 아타(我他)의 상을 취하지 않고 호악(好惡)의 경(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천풍에 고동(鼓動)되지 않아 출입(出入)이 함께 잊혀지고 심사(心事)가 불이(不二)하다. 내행(內行)이란 입관적조행(入觀寂照行)이요, 외행(外行)이란 출관화물행(出觀化物行)이다. 출입하되 중도를 잃지 않기 때문에 불이라 한다. 불주일상(不住一相)이란 이제관(二諦觀)이기 때문이요, 심무득실(心無得失)이란 평등관이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의 방편관으로 말미암아 초지(初地) 법류수(法流水)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불일지정심유입(一不一地淨心流入)이라 한다. 저 경에서 「삼관이란, 가명으로부터 공에 드는 이제관(二諦觀), 공으로부터 가명에 드는 평등관이니, 이 두 관이 방편도이다. 이 이공관(二空觀)으로 인하여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에 들어가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여 심심이 적멸하여 초지법류수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일불일지(一不一地)란 초지(初地)의 이명(異名)이니, 십지가 곧 초지이기 때문에 일(一)이요, 초지가 곧 십지이기 때문에 불일(不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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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便勝利 四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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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이상(二相)에 있지 않으니, 비록 출가하지 않더라도 재가에 머물지 않으며, 비록 법복(法服)이 없더라도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구족히 받지 않고 포살(布薩)에 들지 않으며, 능히 자심으로 무위자자(無爲自恣)하여 성과(聖果)를 얻고 이승(二乘)에 머물지 않아 보살도에 들며 뒤에 마땅히 지(地)를 만족하여 불보리를 이룰 것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방편승리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득과승리(得果勝利), 둘째 득공승리(得供勝利), 셋째 무환승리(無患勝利), 넷째 무주승리(無住勝利)이다. 득과승리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이변(二邊)을 벗어남이요, 둘째 자재(自在)이며, 셋째 입도(入道)이고, 넷째 득과(得果)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불가사의이도다! 이와 같은 사람은 출가가 아니요 불출가도 아닙니다. 무슨 까닭인가? 열반택(涅槃宅)에 들어가고, 여래의(如來衣)를 입으며, 보리좌(菩提座)에 앉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사문(沙門)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공양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열반택에 들어가 심이 삼계를 일으키고, 여래의를 입어 법공처(法空處)에 들어가며, 보리좌에 앉아 정각일지(正覺一地)에 오른다. 이와 같은 사람은 심이 이아(二我)를 초월하였는데 하물며 사문이 어찌 공양하지 않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득공승리이다. 세 가지 복전이 있다. 열반택에 들어가 심이 삼계를 일으킨다는 것은 삼해탈(三解脫)의 존삼(存三)의 용(用)이니, 삼계가 공적한 것이 열반택이다. 삼해탈관이 삼계공(三界空)에 들어가되 취증하지 않고 다시 속심(俗心)을 일으켜 삼계를 보화하기 때문에 심이 삼계를 일으킨다고 한다. 여래의를 입어 법공처에 든다는 것은 수일심여(守一心如)의 관이니, 인욕의(忍辱衣)를 입어 피로하지 않고 법공(法空)으로 돌아가 일심여(一心如)를 수(守)하기 때문이다. 보리좌에 앉아 정각일지에 오른다는 것은 여래선의 이관(理觀)의 심이니, 법공에 앉아 방편을 더 닦아 초지의 정각진관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위에서 모두 이공(二空)을 관하여 인아법아(人我法我)의 이집을 복멸하기 때문에 심이 이아를 초월하였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저 일지(一地)와 공해(空海)는 이승인(二乘人)이 보지 못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저 이승인은 삼매에 맛들어 집착하여 삼매신(三昧身)을 얻으니, 저 공해일지에 대해 마치 주병(酒病)을 얻어 혼취불성(惛醉不醒)함과 같아 수겁(數劫)에 이르도록 오히려 깨닫지 못한다. 술기운이 사라진 뒤 비로소 깨달아 이 행을 닦고 뒤에 불신(佛身)을 얻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승(二乘)이 보지 못하는 까닭은 낙착정(樂着靜定)하여 적(寂)을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이다. 삼매신을 얻는다는 것은 낙향처럼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가 열반에 들어 회신멸지(灰身滅智)하기 때문이다. 수다원인(須陁洹人)은 팔만겁 주하고, 나아가 나한(羅漢)은 이만겁 주하며, 벽지불(辟支佛)은 일천겁 주하여 열반에 머물되 깨닫지 못한다. 술기운이 소멸한 뒤 비로소 깨달아 회심입대(迴心入大)하여 앞의 세 가지 관행을 닦는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저와 같은 사람은 사일천제(捨闡提)로부터 곧 육행(六行)에 들어가, 행지(行地)의 처에서 일념정심(一念淨心)이 결정명백하다. 금강지력(金剛智力) 아비발치(阿鞞跋致)로 중생을 도탈하되 자비가 다함이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보살종성(菩薩種性)의 사람은 사일천제(捨闡提) 불신(不信)의 장(障)으로부터 곧 육행의 초 십신에 들어가, 수행지의 처에서 곧 일념정심(一念淨心)을 발하는데 이것이 십주의 초발심이다. 결정명백이란 십행위(十行位)에서 뭇 행이 명정(明淨)하기 때문이다. 금강지력이란 십회향의 견고한 지력이기 때문이다. 아비발치(阿鞞跋致)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진증무퇴(眞證無退)이기 때문이다. 자비무진이란 곧 앞의 위에서 이타행을 하기 때문이다.
━━━ 第三 無患勝利 ━━━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은 계(戒)를 수지하지 않아야 하고 저 사문을 공경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설계자(爲說戒者)는 불선만(不善慢)이기 때문이요, 해파랑(海波浪)이기 때문이다. 저 심지(心地)는 팔식해(八識海)가 澄하고, 구식(九識)이 유정(流淨)하여 풍이 능히 동하지 못하며, 파랑이 일어나지 않아 계성(戒性)이 공(空)과 같다. 수지자(持者)는 미도(迷倒)이다. 저와 같은 사람은 칠육(七六)이 불생하고, 제집멸정(諸集滅定)하여 삼불(三佛)을 여의지 않고 보리를 발하며, 삼무상(三無相) 가운데 심에 순하여 현입(玄入)하고, 삼보를 깊이 공경하여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다. 저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보살이여, 저 인자는 세간의 동부동법(動不動法)에 머물지 않아 삼공취(三空聚)에 들어가 삼유심(三有心)을 멸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팔식해(八識海)가 澄하다는 것은 분별지(分別智)로 본각지(本覺地)에 증입하기 때문이다. 구식이 유정하다는 것은 본각이 바로 제9식이기 때문이다. 칠육불생(七六不生)이란 말나(末那)의 사혹(四惑)이 현행하지 않기 때문이요, 견혹(見惑) 종자가 이미 단멸하기 때문이다. 삼불을 여의지 않고 보리를 발한다는 것은, 여래장불(如來藏佛)은 제중생이니 저에 의거하여 발심하여 경만(輕慢)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무상 가운데 순심현입이란 행입(行入)할 때 무명의 뿌리를 뽑으니, 앞에서 말한 삼해탈 가운데 일심법에 순하여 깊이 들기 때문이다. 동법(動法)이란 욕계 인천(人天)의 부귀락의 과(果)이요, 부동법(不動法)이란 색무색계의 적정한 과이다.
━━━ 第四 無住勝利 ━━━
경에서 말한다: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저 인자는 과만족덕불(果滿足德佛)·여래장불(如來藏佛)·형상불(形像佛), 이와 같은 불소(佛所)에서 보리심을 발하고, 삼취계(三聚戒)에 들어가 그 상에 머물지 않고 삼유심(三有心)을 멸하며, 적지(寂地)에 머물지 않고 가중(可衆)을 버리지 않는다. 불조지(不調地)에 들어가니 불가사의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무주승리이다. 과만족덕불이란 시각(始覺)이 구경하여 만덕이 원만하기 때문이요, 여래장불이란 일체 중생이 본래 본각이기 때문이며, 형상불이란 금동니목(金銅泥木)이 능히 존상(尊像)을 표하기 때문이다. 삼취계에 들어가 그 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앞의 계성등공(戒性等空)의 구를 영수하는 것이다. 비록 삼공취에 들어가 삼유심을 멸하나 적지에 머물지 않는다. 불조지(不調地)란 다첨(多喘) 중생이 머무는 처를 보화하는 것이다. 유혹(留惑)이란 속히 다하지 않음이니, 대승 보살이 불퇴업(不繫業)에 의거하여 저기서 수생(受生)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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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子領解 · 時衆得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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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그때 사리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반야(般若)의 바다를 구족하여 열반성(涅槃城)에 머물지 않으니, 마치 저 묘련화(妙蓮華)가 고원(高原)에서 나지 않는 것과 같도다. 제불이 무량겁에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世)를 제도한 뒤에야 얻으니, 마치 진흙 속에서 나는 꽃과 같도다. 저 육행지(六行地)의 보살이 닦는 바와 같으니, 저 삼공취(三空聚)가 보리의 바른 길이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신자(身子) 영해이다. 소승 중생으로 하여금 대심(大心)을 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구족반야해(具足般若海)란 삼해탈이 삼혜를 갖추기 때문이요, 열반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삼유심을 멸하고 적지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원비소출(高原非所出)이란 저 이승이 번뇌의 진흙을 여의고 팔만겁 등 동안 발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승처럼 이이(二二) 생 가운데 속히 다 끊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저는 지금 머물되 머물지 않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온 바에 되돌아 다시 오니, 구족한 뒤에 나오겠습니다. 다시 제중생으로 하여금 저와 같이 하나이고 둘이 없어, 앞에 온 자와 뒤에 올 자를 모두 정각에 오르게 하겠습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자신의 발심을 진술함이다. 지금 머물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부처님의 설을 듣고 이미 대심을 발하여 곧 적지에 머물지 않는 심에 머물기 때문이다. 온 바에 되돌아 다시 온다는 것은, 무시유전(無始流轉)의 오던 처를 내가 먼저 여의었다가, 지금 다시 삼계에 들어와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이다. 언전래자(前來者)란 과거에 선근이 이미 성숙한 자요, 언후래자(後來者)란 미래세에 비로소 성숙할 자이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셨다: 불가사의이다! 그대는 마땅히 뒤에 보살도를 이루어 무량 중생이 생사의 바다를 초월하게 할 것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대분(大分) 제4 시중득익이다. 대중이란 대승 대중이요, 보리에 깨달았다는 것은 일지(一地) 보리심에 깨달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제소중(諸小衆)이란 성문중이니, 삼종진여문(三種眞如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이 모두 보리에 깨달았고, 제소중(諸小衆) 등은 오공해(五空海)에 들어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대분(大分) 제4 시중득익이다. 대중이란 대승 대중이요, 보리에 깨달았다는 것은 일지(一地) 보리심에 깨달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제소중이란 성문중이니, 삼종진여문(三種眞如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론 卷下
신라국 사문 원효 술(新羅國沙門 元曉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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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性空品 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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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論)에서 말한다: 진여지법(眞如之法)이 제공덕을 갖추어 제행덕(諸行德)과 함께 본성(本性)이 되기 때문에 진성(眞性)이라 한다. 이와 같은 진성은 제명상(諸名相)을 끊는다. 이런 까닭에 진성공(眞性空)이라 한다. 또한 이 진성은 이상(離相)·이성(離性)이다. 이상(離相)이란 망상(妄相)을 여읨이요, 이성(離性)이란 진성(眞性)을 여읨이다. 망상을 여의기 때문에 망상이 공(空)이요, 진성을 여의기 때문에 진성도 또한 공이다. 이런 까닭에 진성공이라 한다. 지금 이 품에서 이 두 가지 뜻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 뜻에 의거하여 품명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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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說 — 利根衆生用 六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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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관행(別明觀行) 여섯 부분 가운데 제4 허(虛)로부터 실(實)에 들어감이 마쳤다. 이하가 제5 제성행(諸聖行)이 진성공(眞性空)으로부터 나옴을 밝힌다. 이 품 가운데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근(利根)인을 위해 문이 많고 광설(廣說)하며, 둘째 둔근(鈍根)인을 위해 문이 적고 약섭(略攝)한다. 전광설(前廣說) 가운데 여섯 부분이 있으니, 첫째 삼취계(三聚戒)가 진성으로부터 이루어짐을 밝히고, 둘째 도품행(道品行)이 진성으로부터 섬을 밝히며, 셋째 여래의 교(敎)가 마땅히 여리(如理)에 칭합하여 설함을 밝히고, 넷째 보살위(菩薩位)가 본리(本利)로부터 나옴을 밝히며, 다섯째 대반야(大般若)가 제인연을 끊음을 밝히고, 여섯째 대선정(大禪定)이 제명수(諸名數)를 초월함을 밝힌다.
━━━ 第一 三聚戒從眞性成 ━━━
경(經)에서 말한다: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도를 닦으면서 명상(名相)이 없어 삼계(三戒)가 무의(無儀)합니다. 어떻게 섭수(攝受)하여 중생에게 설합니까? 원하오니 부처님께서 자비로이 저를 위해 선설하소서.」
론(論)에서 말한다: 이 품에서 삼계(三戒)를 묻는 것은 이 신자(身子, 사리불)가 이미 대(大)에 처음 들어가 초발수행(初發修行)에 계(戒)가 근본이기 때문에 삼학(三學)의 초행(初行)을 묻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선불선법(善不善法)이 심으로부터 화생(化生)하고, 일체 경계가 의언분별(意言分別)이니, 한 곳에 제어하면 중연(衆緣)이 단멸(斷滅)한다.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일본불기(一本不起)하고 삼용무시(三用無施)하며 여리(如理)에 머물면 육도문(六道門)이 막히고, 사연여순(四緣如順)하면 삼계(三戒)가 구족하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약답(略荅)이다. 일본불기(一本不起)란 삼계(三戒)의 본(本)이 일본각(一本覺)이니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불기라 한다. 삼용무시(三用無施)란 이미 본각에 의거하여 삼계용(三戒用)을 이루되, 용이 위의(威儀)의 시작(施作)의 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시작이 없기 때문에 일본(一本)에 순히 머물며, 이런 까닭에 여리(如理)에 머문다고 한다. 이미 여리에 머물면 유인(有因)을 소제한다. 이런 까닭에 육도문(六道門)이 막힌다고 한다. 일여리(一如理)에 사연력(四緣力)을 갖추니, 능히 일여에 순응하면 곧 삼계(三戒)를 갖춘다.
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사연여순(四緣如順)하여 삼계(三戒)가 구족합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중청(重請)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연이란, 첫째 작택멸력(作擇滅力)으로 연(緣)을 취하여 섭률의계(攝律儀戒)를 섭하고, 둘째 본리정근력(本利淨根力)으로 소집기연(所集起緣)이 섭선법계(攝善法戒)를 섭하며, 셋째 본혜대비력(本慧大悲力)으로 연이 섭중생계(攝衆生戒)를 섭하고, 넷째 일각통지력(一覺通智力)으로 연이 여(如)에 순응하여 머문다. 이것이 사연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사대연력(四大緣力)은 사상(事相)에 머물지 않고 공용(功用)이 없지 않으며, 일처(一處)를 여의면 곧 구할 수 없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일사(一事)가 육행(六行)을 총섭(通攝)하니, 이것이 불보리살반야해(佛菩提薩般若海)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광설이다. 사연이란 일심본각이(一心本覺利) 가운데 사력용(四力用)을 갖추어 삼계(三戒)의 연이 된다. 첫째 멸의지연(滅依止緣), 둘째 생의지연(生依止緣), 셋째 섭의지연(攝依止緣), 넷째 이의지연(離依止緣)이다. 사연의 체가 법계에 두루하고 용이 만행을 섭하기 때문에 대력이라 한다. 비록 대력이 있어도 일미(一味)로 동일하여 명상차별사용(名相差別事用)을 여의기 때문에 사상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이 본각이 속법(俗法) 가운데서 이와 같은 뜻이 없기 때문에 일처를 여의면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시종(十信)으로부터 등각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육위(六位)의 모든 행이 모두 일각(一覺)의 섭성(攝成)이다. 이런 까닭에 일사(一事)가 육행을 통섭한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사상(事相)에 머물지 않고 공용(功用)이 없지 않으니, 이 법은 진공(眞空)이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이어서 이아(二我)를 초월한 대반열반이요, 그 심이 繫박(繫)되지 않으니 이것이 대력관(大力觀)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5 영해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순(順)하는 바인 일여(一如)를 영수하니, 곧 이것이 법신으로 사덕(四德)을 구족하여 인법상을 초월한 대열반이다. 뒤에 능히 여(如)에 순하는 심을 영수하니, 여를 따라 이박(離繫)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는 대자재력이다.
━━━ 第二 道品行從眞性立 ━━━
경에서 말한다: 「이 관각(觀覺) 가운데 마땅히 삼십칠도품법(三十七道品法)을 갖추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삼십칠도품법을 갖춘다. 무슨 까닭인가?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七覺)·팔정도(八正道) 등은 다명(多名)이되 일의(一義)이니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명수(名數)이기 때문에 다만 이름이요 다만 글자이어서 법은 얻을 수 없다. 불득지법(不得之法)이 일의무문(一義無文)이요, 무문지상(無文之相)이 진실공성(眞實空性)이며, 공성지의(空性之義)가 여실여여(如實如如)이고, 여여지리(如如之理)가 일체법을 갖춘다. 선남자여, 여리(如理)에 머무는 자는 삼고해(三苦海)를 넘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도품행이 진성으로부터 섬을 밝힌다. 다명일의(多名一義)란 삼십칠품이 목(目)하는 의(義)가 오직 일관각(一觀覺)이요 이법(二法)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사구(四句)로 분별한다. 첫째, 삼십칠을 섭하여 십법(十法)으로 삼는다. 십법의 체는 계·사·수·념·정·혜·신·근·안·사이다. 둘째, 십법을 섭하여 사종(四種)으로 삼는다. 제1 계는 색법이요, 제2 사·수는 변행심소이며, 제3 념·정·혜는 별경심소이고, 제4 신 등은 사선심소이다. 셋째, 사법(四法)을 섭하여 일의(一義)로 삼는다. 비록 법이 없지 않으나 가득(可得)의 법을 얻지 못하니 평등일미이다. 넷째, 일의(一義)가 삼십칠을 갖춤을 밝힌다. 능소(能所)가 평등한 일미의 뜻으로 신(身) 등이 공(空)함을 관하니 사념처이고, 제해태(諸懈怠)를 여읨이니 사정근이며, 산려(散慮)가 적멸함이니 여의족이다.
━━━ 第三 如來教當如理說 ━━━
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일체 만법(萬法)이 모두 문언(文言)이요, 문언의 상은 곧 의(義)가 아니며, 여실(如實)의 의는 언설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설법하십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답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불설(佛說)의 이유를 밝히고, 뒤에 문(文)과 의(義)의 차이를 드러낸다. 초 가운데 「그대들 중생이 생설(在生說)이기 때문에」란, 그대는 신자(身子, 사리불)를 이르고, 중생은 일체 범부이다. 무위(無爲)를 설하면 곧 법체(法體)에 있고, 유위(有爲)를 설하면 곧 법상(法相)을 생한다. 이와 같이 중생 안에 있는[在生] 설이어서 실의(實義)를 설할 수 없다. 나는 저와 다르게 설하니, 이런 까닭에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설 언교(言敎)의 이유이다. 다음으로 문과 의가 동일하지 않은 상을 드러내는 가운데, 먼저 이장(二章)을 표방하고 뒤에 이장을 해석한다. 의어비문(義語非文)이란, 언어가 실의에 당하기 때문이요, 직공문(直空文)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어비의(文語非義)란, 언어가 공문(空文)에 그치기 때문이요, 실의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모두 다 공무(空無)이다」란, 다만 공문이 있을 뿐 실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어(文語)를 해석함이다. 의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실(如實)의 의를 전달하여 말함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망어(妄語)이다」란, 비록 상(想)을 어기지는 않으나 의에 어기기 때문이다. 여의(如義) 이하는 앞의 장을 해석한다. 실공불공(實空不空)이란 진여실상도 또한 공이되 그 실상의 리를 없애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 공실불실(空實不實)이란 진공의 리가 실이되 그 진공의 리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불실이라 한다. 이어이상중간불중(離於二相中間不中)이란, 이 두 가지가 유무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상을 여읜다고 하고, 이상의 사이에서 비이(非二)의 중(中)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불중이라 한다. 여여여설(如如如說)이란 의어를 해석하는 것이니, 위의 여(如)는 계당(契當)이요 아래 두 여(如)는 의리(義理)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그대들 중생이 생설(在生說)이기 때문에 불가설(不可說)을 설한다. 이런 까닭에 설하는 것이다. 내가 설하는 것은 의어(義語)이지 문(文)이 아니요, 중생이 설하는 것은 문어(文語)이지 의(義)가 아니다. 비의어(非義語)는 모두 공무(空無)이다. 공무(空無)의 말은 의에 대해 말함이 없으니, 의를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망어(妄語)이다. 여의어(如義語)란 실공불공(實空不空)이요, 공실불실(空實不實)이며, 이어(離於) 이상(二相)하여 중간불중(中閒不中)이다. 불중지법(不中之法)이 삼상(三相)을 여의어 처소를 보지 못한다. 여여여설(如如如說)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답이다. 먼저 비문(非文)을 해석하고 뒤에 의어(義語)를 해석한다. 실공불공(實空不空)이란 진여실상도 또한 공이되 그 실상의 리(理)를 없애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 비록 유실이 아니나 무실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실불실(空實不實)이란 진공의 리가 실이되 그 진공의 리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불실이라 한다. 비록 무공이 아니나 유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어이상(離於二相) 중간불중(中閒不中)이란 공의 언어가 공상(空相)을 여의고 불실의 언어가 실상(實相)을 여의기 때문에 이상(二相)을 여읜다고 한다. 그러나 공실(空實) 이상(二相)의 사이에서 비이(非二)의 중(中)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불중이라 한다. 이미 이변도 아니고 또한 중에 떨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삼상을 여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뜻에 묘하게 계합하기 때문에 여의어(如義語)인 것이다. 여여여설(如如如說)이란 의어(義語)를 해석하는 것이니, 위의 여(如)는 계당(契當)이요 아래 두 여(如)는 의리(義理)이다.
━━━ 第四 菩薩位從本利出 — 五等位 ━━━
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일체 중생이 일천제(一闡提)로부터, 천제지심이 어떤 위(位)에 머물어야 여래의 여래실상(如來實相)에 이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제심으로부터 여래에 이르기까지 여래실상에 머묾은 오등위(五等位)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총표(摠標)이다. 오등위(五等位)란 등(等)은 계(階)를 말한다. 천제심으로부터란 아직 무상보리심을 발하지 않은 이전이 모두 천제이니, 대승결정신(大乘決定信)이 없기 때문이다. 오등위를 건립하는 까닭은 퇴불퇴(退不退)의 위(位)가 차별하기 때문이요, 증불증(證不證)의 위가 차별하기 때문이며, 등미등(等未等)의 위가 차별하기 때문이요, 인만(因滿)의 위가 차별하기 때문이며, 과원(果圓)의 위가 차별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첫째 신위(信位)이니, 이 몸 가운데 진여종자(眞如種子)가 망(妄)에 의해 가려진 것을 믿어, 망심을 사리(捨離)하고 정심(淨心)을 청백(淸白)하게 하며, 제경계(諸境界)의 의언분별(意言分別)을 안다.」
론(論)에서 말한다: 초 가운데 신이 있고 해(解)가 있다. 이 몸 가운데 진여종자를 믿는다는 것은 주자성불성진여(住自性佛性眞如)를 믿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제일의공(第一義空) 종자이다. 자성정심이 본래 법이(法爾)하기 때문에 진여라 이름하고, 삼신과(三身果)를 위해 정인(正因)이 되기 때문에 종자라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둘째 사위(思位)이니, 사(思)란 제경계(諸境界)를 관하는 것은 오직 의언(意言)이요, 의언분별(意言分別)이 의(意)에 따라 현현(顯現)하며, 소견(所見)의 경계는 내 본식(本識)이 아니니, 이 본식이 법도 아니요 의도 아니며, 소취(所取)도 아니요 능취(能取)도 아님을 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사위(思位)이다. 소취진(所取塵)이 이미 없으니 능취(能取)가 성립하지 않는다. 능취의 의(義)는 반드시 소취를 기다리니, 이미 소대(所待)가 없으면 곧 능대(能待)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상심사(無相尋思) 및 여실지(如實智)를 통현(通顯)함이다. 십해(十解) 이상으로부터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기까지 이 심사여실지관(尋思如實智觀)을 닦는다.
경에서 말한다: 「셋째 수위(修位)이니, 수(修)란 항상 능기(能起)를 일으키고 기수동시(起修同時)하며, 먼저 지(智)로써 인도하고 제장난(諸障難)을 배제하여 개전(蓋纏)을 출리(出離)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수위(修位)이다. 정체지(正體智)의 지관(止觀)이 쌍운(雙運)하여 다시 출입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일어난다고 한다. 지(智)로 인도한다는 것은 가행지(加行智)를 이르니, 의언분별이 명언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장난을 배제한다는 것은 추중(麤重)을 손복(損伏)하기 때문이요, 개전을 출리한다는 것은 현전(現纏)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넷째 행위(行位)이니, 행(行)이란 제행지(諸行地)를 여의고 심에 취사(取捨)가 없으며, 극히 청정하고 근이 날카로우며, 부동(不動)의 심이 여(如)하여 결정실성(決定實性)이요, 대반열반이요 오직 성공대(性空大)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등각위(等覺位)이다. 제행지를 여읜다는 것은 십지를 행과(行過)하기 때문이요, 심에 취사가 없다는 것은 해(解)가 불과 같기 때문이다. 극정근리(極淨根利)란 본각심이 드러나 원인(圓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불동심여결정실성이란 이 위에서 금강삼매에 들기 때문이요, 대반열반유성공대(大般涅槃唯性空大)란 적멸무위(寂滅無爲) 일상무상(一相無相)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다섯째 사위(捨位)이니, 사(捨)란 성공(性空)에 머물지 않아 정지(正智)가 유역(流易)하고, 대비여상(大悲如相)의 상이 여(如)에 머물지 않으며,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이되 허심불증(虛心不證)하여 심에 변제(邊際)가 없고, 처소를 보지 못하니 이것이 여래에 이름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불지(佛地)이다. 성공에 머물지 않아 정지가 유역(流易)한다는 것은 열반에 머물지 않아 지(智)가 멸하지 않고 양지(量智)가 계속 흘러 근(根)에 따라 변역(變易)하여 불사(佛事)를 짓기 때문이다. 대비여상의 상이 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연대비(無緣大悲)가 인법(人法)의 차별상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여상이라 하고, 항상 육도에 섭입하여 일찍이 정식하지 않기 때문에 상이 여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비단 유실이 아니요 무실도 아니기 때문에 언어도단이다. 이와 같은 극과는 타공(他共)이 아니니, 오직 여(如)를 탄 자가 이르는 바이기 때문에 이것이 여래에 이른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오위(五位)는 일각(一覺)이 본리(本利)로부터 들어가니, 만약 중생을 교화한다면 그 본처(本處)를 따른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총명(摠明)이다. 오위(五位)의 제행이 본각을 여의지 않으니, 모두 본리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행이 이루어질 때 전(前)으로부터 후(後)에 들어가기 때문에 입이라 이름한다. 입은 자리(自利)요, 화(化)는 이타(利他)이다.
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 본처를 따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무본(無本)이요 처어무처(處於無處)이며, 공제(空際)에서 실(實)에 들어가 보리를 발하여 성도(聖道)를 만족하여 이룬다.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마치 손으로 저 허공을 쥐는 것과 같으니 얻지 못하되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법 가운데 사구(四句)가 있다. 불득(不得)이란 허공에 쥘 형(形)이 없기 때문이요, 비불득(非不得)이란 쥔 안에 허공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본리(本利)도 이와 같이 본래 무본처성(無本處性)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무본지본(無本之本)이 없지 않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 第五 大般若絕諸因緣 ━━━
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사(事)에 앞서 본리를 취합니다. 이 념이 적멸이요, 적멸이 이것이 여(如)이며, 제덕(諸德)을 총지(摠持)하고 만법을 그라(該羅)하며, 원융불이(圓融不二)이니 불가사의입니다. 마땅히 알라, 이 법이 곧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密)이요, 이것이 대신주(大神呪)이며, 이것이 대명주(大明呪)이고, 이것이 무상명주(無上明呪)이며, 이것이 무등등주(無等等呪)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5 대반야가 원융무이(圓融無二)임을 밝힌다. 이 가운데 비록 무량공덕을 갖추어도 그 체가 오직 본각과 시각이 평등무이이기 때문에 곧 이것이 마하반야라 한다. 이와 같은 반야가 근원을 궁구하고 성(性)을 다하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별(別)로 말하면 두 종류의 도(到)가 있으니, 등각위에서 만행(萬行)의 피안에 이르기 때문이요, 묘각(妙覺) 시에 만덕(萬德)의 피안에 이르기 때문이다. 등각위에 대략 두 가지 도가 있으니, 첫째 대신력(大神力)으로 삼마(三魔)의 원수를 항복시키는 것이니 대신주이고, 둘째 대명조(大明照)로 사안(四眼)의 경(境)을 두루 살피는 것이니 대명주이다. 묘각위에 또한 두 가지 도가 있으니, 첫째 사지(四智)를 갖추고 오안(五眼)이 원만하여 법계에 비춤이 다하여 더 이상 더할 수 없으니 무상명주이고, 둘째 삼신(三身)이 드러내는 무상보리에 더욱 등(等)할 것이 없고 제불에 차별이 없으니 무등등주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진여공성(眞如空性)이요, 성공지화(性空智火)가 제결(諸結)을 소멸하며, 평등평등(平等平等)이요, 등각삼지(等覺三地)이다. 묘각삼신(妙覺三身)이 구식(九識) 가운데 교연명정(皎然明淨)하여 제영(諸影)이 없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여래술성이다. 등각삼지(等覺三地)란 어떤 것이 등각삼지인가? 첫째 백겁위(百劫位), 둘째 천겁위(千劫位), 셋째 만겁위(萬劫位)이다. 진여공성이란 곧 제1 동일합상(同一合相)이니, 일체 유무제법(有無諸法)이 이제법(二諦法)으로 동융일제(同融一諦)함을 이른다. 성공지화가 제결을 소멸한다는 것은 곧 제2 삼마(三魔)를 초도함이니, 번뇌마를 멸한다. 음마(陰魔)가 계박되지 않아 이마(二魔)를 멸한다. 천마(天魔)가 자복(自伏)하니, 다만 불사의변역사마(不思議變易死魔)만 있다. 평등평등이란 곧 제3 항상 중도를 행하여 이변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 거듭 평등이라 하여 항행(恒行)을 드러낸다.
묘각이하는 원과(圓果)에 도달함을 밝힌다. 삼신(三身)이란 첫째 법신, 둘째 응신, 셋째 화신이다. 구식 가운데 교연명정하여 제영이 없다는 것은, 전등각위(前等覺位)에는 오히려 생멸이 있어 심원을 다하지 못하여 팔식에 있다. 지금 묘각에 이르러 생멸을 영리하고 본각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제9식 가운데 명정이다. 또한 전인위(前因位)에 앙연(仰緣)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심에 영상이 현하나, 지금 심원으로 돌아가 저 본질을 체달하기 때문에 제영이 일체 상이 다하니, 이런 까닭에 제영이 없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이 법은 비인비연(非因非緣)이니 지(智)가 스스로 용(用)하기 때문이다. 비동비정(非動非靜)이니 용성(用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의(義)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니 공상(空相)이 공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만약 중생을 교화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이 뜻을 관입(觀入)하게 한다면, 이 뜻에 드는 자는 이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총성원융불이(摠成圓融不二)이다. 일법불이문(一法不二門)에 즉하면 인과불이(因果不二)요 심경무별(心境無別)이다. 인과불이(因果不二)이기 때문에 비인(非因)이요, 심경무별(心境無別)이기 때문에 비연(非緣)이다. 이 불이의 문에 즉하면 먼저 동(動)이 있지 않고 뒤에 적(寂)이 있지 않다. 적동(寂動)의 용이 용성(用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공이 무(無)이니 동정(動靜)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이런 까닭에 비유비무(非有非無)라 하니 공상(空相)도 또한 공하기 때문이다.
━━━ 第六 大禪定超諸名數 ━━━
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여래의 의관(義觀)은 제류(諸流)에 머물지 않으니 마땅히 사선(四禪)을 여의어 유정(有頂)을 초월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명수(名數)는 사선도 이와 같다. 만약 여래를 보는 자는 여래심이 자재하여, 항상 멸진처(滅盡處)에 있고,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으며, 내외가 평등하기 때문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광석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상(相)에 대응하여 이상(離相)을 밝히고, 둘째 동(動)에 대응하여 이동(離動)을 드러내며, 셋째 결의(結義)이고 넷째 결명(結名)이다. 이상(離相)을 밝히는 가운데 먼저 제선(諸禪)의 취상(取相)을 든다. 제선관자(諸禪觀者)란 세간 팔선(八禪)을 이름한다. 상(想)이란 고집(古執)을 여의지 못하여 무시망상(無始妄想)으로 제상(諸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하에서 이상(離相)을 드러낸다. 시여비복피(是如非復彼)란, 여래관(如來觀)에 들어가 능소(能所)가 평등함을 여(如)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여로써 여실(如實)을 관한다는 것은 평등지(平等智)가 여실을 통달하기 때문이다. 관여상(觀如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능관의 지와 소관의 여의 차별상을 보지 못하고 평등일미이기 때문이다. 이미 능소를 망(忘)하여 견상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제상이 이미 적멸하며, 적멸이 무이(無異)이기 때문에 곧 이것이 여의(如義)이다. 이동(離動)을 드러내는 가운데, 세간선은 취상심(取相心)이 일어나니 곧 이것이 동념이다. 동념은 정(靜)이 아니기 때문에 진선이 아니다. 비염(非染)이란 능염(能染)의 동념이 아니기 때문이요, 비소염(非所染)이란 동에 물든 것이 아닌 본래 적정이기 때문이다. 비법(非法)이란 능연심법(能緣心法)이 아니기 때문이요, 비영(非影)이란 소현영상(所現影像)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동(離動)한다. 이상이동이기 때문에 이에 선명(禪名)을 얻으니, 선은 정려(靜慮)의 칭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써 이 품 안의 이분(二分) 가운데 이근자를 위한 다문광설(多文廣說)의 육분(六分)의 문이 마쳤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저 제선관(諸禪觀)은 모두 고상정(故想定)이요, 이여(是如)는 다시 저(彼)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여(如)로써 여실(如實)을 관하면 관여상(觀如相)을 보지 못하고, 제상이 이미 적멸하니 적멸이 곧 여의(如義)이다. 저 상선정(想禪定)은 동(動)이요 이것이 선(禪)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선성(禪性)이 제동(諸動)을 여의고, 비염(非染)이요 비소염(非所染)이며, 비법(非法)이요 비영(非影)이며, 제분별(諸分別)을 여읜 본의의(本義義)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관정(觀定)이 이에 선(禪)이라 이름하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광석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이상(離相), 둘째 이동(離動), 셋째 결의(結義), 넷째 결명(結名)이다. 이상(離相)을 밝히는 가운데 먼저 상선(想禪)을 든다. 상(想)이란 고집(古執)을 여의지 않아 무시망상(無始妄想)으로 제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여(如)로써 여실을 관한다는 것은 평등지(平等智)가 여실(如實)을 통달하기 때문이다. 관여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능관의 지와 소관의 여의 차별상을 보지 못하고 평등일미이기 때문이다. 이미 능소를 망(忘)하여 견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제상이 이미 적멸하며, 적멸이 무이이기 때문에 곧 이것이 여의(如義)이다. 이동을 드러내는 가운데 세간선은 상심(取相心)이 일어나니 곧 이것이 동념이다. 동념은 정(靜)이 아니기 때문에 진선이 아니다. 비염(非染)이란 능염(能染)의 동념이 아니기 때문이요, 비소염(非所染)이란 동에 물든 것이 아닌 본래 적정이기 때문이다. 비법이란 능연심법(能緣心法)이 아니기 때문이요, 비영이란 소현영상(所現影像)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동(離動)하기 때문이다. 이상이동이기 때문에 이에 선명(禪名)을 얻으니, 선은 정려(靜慮)의 칭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 품 안의 이분(二分) 가운데 이근자(利根者)를 위한 다문광설(多文廣說)의 육분(六分)의 문이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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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略攝 — 鈍根衆生用 一四句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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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불가사의이도다! 여래께서 항상 여실(如實)로써 중생을 교화하십니다. 이와 같은 실의(實義)는 다문광의(多文廣義)이어서 이근중생이라야 닦을 수 있으니, 둔근중생(鈍根衆生)은 조리(措意)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방편으로 저 둔근이 이 제(諦)에 들어가게 합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둔근인을 위한 소문약섭(少文略攝)이다. 이근과 둔근의 광략에 두 종류의 문이 있다. 만약 탐해(探解)를 논하면 이근은 약(略)하고 둔근은 광(廣)하니, 이근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기 때문이요, 둔근은 열을 들어야 열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언해(言解)를 나란히 하면 이근은 광하고 둔근은 약하니, 이근은 많이 듣고 많이 해득하기 때문이요, 둔근은 적게 외워 총지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문의 뜻은 이 후문에 약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둔근으로 하여금 일사구게(一四句偈)를 수지(受持)하게 하면 곧 실제(實諦)에 들어가니, 일체불법(一切佛法)이 일게(一偈) 가운데 섭해 있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답이다. 여래의 변재가 무애자재하기 때문에 일게로써 제불법을 섭하고, 불법의 요(要)가 이 사구에 있다. 둔근으로 하여금 일게를 항상 념사유(念思惟)하게 하면 이에 일체불법을 두루 알게 된다. 이것이 여래의 선교방편이다.
경에서 말한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因緣所生義 是義滅非生
인연으로 생한 의(義)는, 이 의는 멸이요 생이 아니니,
滅諸生滅義 是義生非滅
모든 생멸의 의를 멸하면, 이 의는 생이요 멸이 아니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설이다. 이 사구의 뜻에 별(別)과 총(總)이 있다. 별(別)로 말하면 이문(二門)의 뜻을 밝히고, 총으로 말하면 곧 일심법(一心法)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일심이문(一心二門) 안에 일체 불법이 섭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앞의 이구(二句)는 속(俗)을 융하여 진(眞)이 되니 평등의(平等義)를 드러낸다. 인연소생의(因緣所生義)란 일체 세제(世諦)의 제법을 드는 것이요, 시의멸(是義滅)이란 속을 융하여 진이 되니, 이른바 소생의(所生義)가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다. 비생(非生)이란 그 생의가 멸의 연유임을 드러낸다. 생의로 말미암아 곧 비생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생의가 곧 적멸이다.
아래 이구는 진을 융하여 속이 되니 차별문(差別門)을 드러낸다. 멸제생멸의(滅諸生滅義)란 진제적멸(眞諦寂滅)의 법을 드는 것이요, 시의생(是義生)이란 진을 융하여 속이 되니, 이른바 적멸법이 연으로부터 생기하기 때문이다. 비멸(非滅)이란 그 적멸이 생의 연유임을 드러낸다. 적멸로 말미암아 비적멸이기 때문이다.
합하여 말하면, 생이 곧 적멸이되 멸을 지키지 않는다. 멸이 곧 생이되 생에 머물지 않으니, 생멸이 불이(不二)요 동적(動寂)이 무별(無別)이다. 이것이 일심지법(一心之法)이라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이 이 게송을 듣고 다 크게 환희하여, 모두 멸생(滅生)을 얻고, 멸생반야(滅生般若)와 성공지해(性空智海)를 얻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5 문설득익(聞說得益)이다. 멸(滅)이란 위의 이구에서 생의(生義)가 멸하는 것을 얻기 때문이요, 다음의 생이란 아래 이구에서 멸의(滅義)가 생하는 것을 얻기 때문이다. 멸생반야란 별문(別門)에 의거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요, 성공지해(性空智海)란 총으로 관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으니, 자성공지(自性空智)가 깊고 넓어 변제가 없다. 이것이 총문(摠門)에 의거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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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來藏品 第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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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論)에서 말한다: 진속무이(眞俗無二)한 일실(一實)의 법을 제불이 귀의하는 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다. 지금 이 품에서 무량법 및 일체행이 모두 여래장 가운데 귀입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힌다. 이런 까닭에 소입(所入)에 의거하여 품명을 세운다.
━━━ 第一 諸法入一實義 ━━━
경에서 말한다: 「그때 범행장자(梵行長者)가 본제(本際)로부터 일어나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생의(生義)는 불멸(不滅)이요, 멸의(滅義)는 불생(不生)입니다. 이와 같은 여의(如義)가 곧 불보리(佛菩提)이요, 보리지성(菩提之性)이 곧 무분별이며,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분별이 다함이 없고, 무궁지상(無窮之相)은 오직 분별이 멸하며, 이와 같은 의상(義相)은 불가사의이고, 불사의 가운데 이에 무분별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별명관행(別明觀行) 여섯 부분 가운데 일체행이 진성공으로부터 나옴이 마쳤다. 이하가 제6 무량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밝힌다. 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제법제행이 동일하게 일처에 들어감을 밝히고, 둘째 입행입지(入行入智)의 인과차별을 드러낸다. 초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제법이 일실의(一實義)에 들어감을 밝히고, 뒤에 제행이 일불도(一佛道)에 들어감을 밝힌다.
이 가운데 문자(問者)는 범행자라 이름하니, 이 사람이 형은 비록 속의(俗儀)이나 심은 일미에 머물러, 이 일미로 일체 미(味)를 섭하며, 비록 제미(諸味)의 더러운 속진(俗塵)을 섭입하여도 일미의 범정행(梵淨行)을 잃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 뜻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발문(發問)하게 한다. 본제로부터 일어남이란 부처님의 설을 듣고 곧 본제(本際)에 들어갔다가 지금 발문하여 그로부터 일어남이다. 생의불멸(生義不滅)이란 아래 반의 「시의생비멸(是義生非滅)」을 영수함이요, 멸의불생(滅義不生)이란 윗 반의 「시의멸비생(是義滅非生)」을 영수함이다.
경에서 말한다: 「세존이시여, 일체 법수(法數)가 무량무변하고, 무변법상(無邊法相)의 일실의성(一實義性)은 오직 일성(一性)에 머무니 그 사(事)가 어떻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의혹을 바로 묻는 것이다. 소승의 가르침에 팔만법온(八萬法蘊)이 있고 일온(一蘊)의 분량이 십백(十百)의 수이다. 지금 대승교는 팔만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법수무량무변이라 한다. 무변한 교법의 소전의상(所詮義相)에 다시 이취(異趣)가 없어 오직 일실의(一實義)이다. 교법이 중다하되 오직 일성에 머무니 심히 알기 어렵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불가사의이도다! 내가 제법을 설하는 것은 미혹한 자를 위하기 때문이요, 방편도(方便道)이기 때문이며, 일체 법상이 일실의지(一實義智)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자면 한 시장에 사대문(四大門)을 여니, 이 사문 가운데 모두 한 시장으로 귀환하는 것과 같아서, 저 중서(衆庶)가 뜻대로 들어간다. 종종 법미(法味)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답이다. 일시(一市)란 일실의(一實義)에 비유하고, 사문(四門)을 여는 것은 사종교(四種教)에 비유하니 삼승교와 일승교이다. 이 사문 가운데 모두 한 시장으로 귀환하는 것은 사교에 의한 자가 모두 일실(一實)로 귀환하기 때문이다. 합 가운데 종종법이란 사문에 합하고, 미(味)란 귀취(歸趣)하는 미가 일시에 합한다.
경에서 말한다: 「범행장자가 말하였다: 법이 만약 이와 같다면, 저는 일미에 머물면 마땅히 일체 제미를 섭해야 합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영해이다. 섭제미(攝諸味)란 제교(諸敎)의 미(味)를 섭하여 일실(一實)로 귀환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일미실의(一味實義)의 미가 마치 한 대해(大海)와 같아 일체 중류(衆流)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장자여, 일체 법미(法味)는 저 중류와 같으니, 명수(名數)는 비록 다르나 그 물은 다르지 않다. 만약 대해에 머물면 곧 중류를 괄(括)하니, 일미에 머물면 곧 제미를 섭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술성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총술(摠述)과 별성(別成)이다. 별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유(喩)·합(合)이다. 합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저 중류(衆流)에 합하여 먼저 법으로 합하고 뒤에 곧 유(喩)를 첩(牒)하며, 둘째 중류를 괄(括)함에 합하여 먼저 유를 들고 뒤에 법으로 합한다.
━━━ 第二 諸行入一佛道 ━━━
경에서 말한다: 「범행장자가 말하였다: 제법이 일미인데 어찌하여 삼승도(三乘道)는 그 지혜가 다릅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로 일체 행이 일불도(一佛道)에 들어감을 밝힌다. 먼저 묻고 뒤에 답하니, 이것이 이(異)함을 묻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비유하자면 강(江)·하(河)·회(淮)·해(海)는 대소(大小)가 다르기 때문이요, 심천(深淺)이 다르기 때문이며, 명문(名文)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이 강 가운데 있으면 강수(江水)라 이름하고, 물이 회 가운데 있으면 회수라 이름하며, 물이 하 가운데 있으면 하수라 이름한다. 모두 해 가운데 있으면 오직 해수(海水)라 이름한다. 법도 이와 같아 모두 진여 가운데 있으면 오직 불도라 이름하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강·하·회는 삼승행에 비유하고, 해는 불도에 비유한다. 삼승이 모두 십지에 들어가 법공진여(法空眞如)이면 오직 불도라 이름하고 삼승의 이름이 없어진다. 마땅히 알라, 삼승 차별행이 모두 지전방편도 가운데 있어 진여정관(眞如正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삼승이 마침내 별귀(別歸)가 없으니, 제교법(諸教法)이 동일하게 일미에 들어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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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行入智因果差別 — 第二大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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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 入行差別 ━━━
경에서 말한다: 「장자여, 일불도에 머물면 곧 삼행(三行)에 통달한다. 범행장자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삼행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 수사취행(隨事取行), 둘째 수식취행(隨識取行), 셋째 수여취행(隨如取行)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대분 제2 입행입지인과차별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입행차별(入行差別), 둘째 입지차별(入智差別), 셋째 입인사용(入因事用), 넷째 입과상주(入果常住)이다. 수사취행(隨事取行)이란 사제(四諦)·십이연기에 의거하여 인과사(因果事)를 따라 도품행(道品行)을 취하기 때문이다. 수식취행(隨識取行)이란 제중생이 오직 일심이 짓는 것임을 유식리(唯識理)를 따라 사섭행(四攝行)을 취하기 때문이다. 수여취행(隨如取行)이란 일체법이 모두 평등함을 따라 육도행(六度行)을 취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장자여, 이와 같은 삼행이 중문(衆門)을 총섭하여 일체 법문이 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 행에 드는 자는 공상(空相)을 불생한다. 이와 같이 드는 자를 여래에 든다고 할 것이다. 여래에 드는 자는 입입불입(入入不入)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총석이다. 삼행 가운데 수사행은 소승과 공문(共門)이요, 수식행은 독대승문(獨大乘門)이며, 이 둘은 차별문이고 제3은 평등문이다. 또한 도품행은 불주생사문(不住生死門)이요, 사섭행은 불주열반문(不住涅槃門)이며, 수여도행(隨如度行)은 평등무이문(平等無二門)이기 때문에 일체 법문이 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입입불입(入入不入)이란 입하는 입심(入心)이 불입(不入)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능입(能入)·소입(所入)이 평등무별(平等無別)이기 때문에 불입이라 한다.
━━━ 第二 入智差別 ━━━
경에서 말한다: 「범행장자가 말하였다: 불가사의이도다! 여래장에 드는 것이 마치 싹이 열매를 이루는 것과 같아 들어갈 처소가 없으니, 본근각이(本根覺利)의 이(利)가 이루어져 본(本)을 얻고, 본실제(本實際)를 얻으니 그 지혜가 얼마입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입지차별(入智差別)이다.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문(問)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앞의 설을 영수하고 뒤에 의혹을 묻는다. 묘(苗)가 열매를 이루는 것과 같다는 것은, 곡묘(穀苗)가 이삭을 이루어 열매가 될 때 능히 들어갈 자가 없고 들어갈 처소도 없는 것과 같다.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라. 묘는 본리(本利)에 비유하고 실(實)은 득본(得本)에 비유하니, 들어갈 때 평등하여 들어갈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혜가 다함이 없다. 간략히 말하면 그 지혜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첫째 정지(定智)이니 이른바 수여(隨如)이고, 둘째 부정지(不定智)이니 이른바 방편최파(方便摧破)이며, 셋째 열반지(涅槃智)이니 이른바 제전각(除電覺)이고, 넷째 구경지(究竟智)이니 이른바 입실구족도(入實具足道)이다. 장자여, 이와 같은 사대사(四大事)의 용은 과거 제불이 설한 것이니, 이것이 대교량(大橋梁)이요 이것이 대진제(大津濟)이니, 만약 중생을 교화하면 마땅히 이 지혜를 써야 하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답이다. 정지(定智)란 평등성지(平等性智)이니 오직 정관(正觀)에 있어 방편을 짓지 않기 때문에 정지라 이름한다. 부정지(不定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이니 제6식에서 방편으로 진취하기 때문에 부정이라 이름한다. 방편도에서 명·사(名·事) 등의 상(相)을 추구하여 최파하기 때문에 최파라 한다. 열반지(涅槃智)란 성소작지(成所作智)이니 팔상을 현하여 불사를 짓고, 최후상을 들어 열반지라 이름한다. 오식(五識)을 멸제하여 이 지를 얻으니, 오식이 전기(乍起)·전멸하기가 전광과 같기 때문에 제전각(除電覺)이라 이름한다. 구경지(究竟智)란 대원경지(大圓鏡智)이니 오직 구경위에서 이 지를 얻기 때문이다. 대교량이란 이 사지(四智)로써 삼승인을 실어 일승의 피안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대진제란 이 사지로써 육도에 두루 섭입하여 출세도를 보이고 애하(愛河)를 건너게 하기 때문이다.
━━━ 第三 入因事用 ━━━
경에서 말한다: 「장자여, 이 대용(大用)을 쓰면서 다시 세 가지 대사(大事)가 있다. 첫째 삼삼매(三三昧) 가운데 내외(內外)가 서로 빼앗지 않고, 둘째 대의과(大義科)에서 도를 따라 택멸(擇滅)하며, 셋째 여혜정(如慧定)에서 비로써 함께 이롭게 한다. 이와 같은 삼사(三事)가 보리를 성취하니,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곧 사지해(四智海)에 흘러 들지 못하고 제대마(諸大魔)가 그 편(便)을 얻게 된다. 장자여, 그대들 대중은 성불에 이르기까지 항상 마땅히 수습(修習)하여 잠시도 잃지 않도록 하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입인사용(入因事用)이다. 삼사(三事)란 사지(四智)를 이루는 일이 셋이니, 이것이 지전사위(地前四位) 가운데 있다. 이 삼사를 행하는 것은 초정(初定), 다음 혜(慧), 제3 정혜(定慧)가 함께 행하되 대비(大悲)가 체이다.
초정(初定)은 삼삼매이니, 내식(內識)과 외경(外境)이 함께 현발(現發)하여 위순상(違順相)을 취하여 선근을 빼앗는 것을 지금 모두 공함을 통달하여 빼앗기지 않게 한다. 대의과(大義科)에서 도를 따라 택멸(擇滅)한다는 것은 사대(四大) 및 삼법문에서 리에 따라 간택하여 제상을 최파하고 본식(本識)의 희론종자(戲論種子)를 복멸(伏滅)한다. 여혜정(如慧定)으로써 비가 함께 이롭게 한다는 것은, 만약 대비를 여의고 바로 정혜만 닦으면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져 보살도를 장애하고, 오직 비(悲)만 일으키고 정혜를 닦지 않으면 범부의 환에 떨어져 보살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삼사를 닦아 이변을 원리하고 보살도를 닦아 무상각을 이룬다.
경에서 말한다: 「범행장자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삼삼매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삼매란 이른바 공삼매(空三昧)·무작삼매(無作三昧)·무상삼매(無相三昧)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중현(重顯)이다. 이 삼(三)의 차별에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체(體)·용(用)·상(相)이니, 법체(法體)가 공하기 때문에 공삼매를 세우고, 작용이 없기 때문에 무작삼매이며, 상태(相狀)가 없기 때문에 무상삼매이다. 둘째 심(心)·인(因)·과(果)이니, 심행이 공하기 때문에 공삼매이고, 제인(諸因)이 없는 까닭에 무작삼매이며, 제과(諸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상삼매이다. 셋째 식(識)·견(見)·상(相)이니, 제식의 자체가 공하기 때문에 공삼매이고, 견분(見分)을 버리기 때문에 무작삼매이며, 상분(相分)을 버리기 때문에 무상삼매이다.
경에서 말한다: 「범행장자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대의과(大義科)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大)는 사대(四大)를 이르고, 의(義)는 음계입(陰界入) 등을 이르며, 과(科)는 본식(本識)을 이른다. 이것이 대의과(大義科)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문을 드러냄이다. 사대(四大)를 별립하는 까닭은 초수(初修)에서 먼저 추경(麤境)을 선택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사대를 관하면 모두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간택한 뒤 다음에 미세한 것을 관하니 의(義)는 음계입이다. 이와 같은 간택관찰(簡擇觀察)의 힘 때문에 곧 본식 안의 무시희론명언종자(無始戲論名言種子)를 손복할 수 있다. 처음에 손복하여 내지 단멸에 이른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수도택멸(隨道擇滅)이라 하였다.
경에서 말한다: 「범행장자가 말하였다: 불가사의이도다! 이와 같은 지사(智事)는 자리이인(自利利人)하여 삼계지(三界地)를 넘고, 열반에 머물지 않아 보살도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은 법상은 이것이 생멸법이니 분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만약 분별을 여의면 법은 마땅히 불멸이어야 합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영해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자리(自利)요, 제3은 이인(利人)이다. 삼계지를 넘는다는 것은 앞의 정혜(定慧)가 범부와 다르기 때문이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제3 대비가 이승과 다르기 때문이다.
━━━ 第四 入果常住 ━━━
경에서 말한다: 「그때 여래께서 이 뜻을 선포하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法從分別生 還從分別滅
법은 분별로부터 생하고, 또한 분별로부터 멸하니,
滅諸分別法 是法非生滅
모든 분별의 법을 멸하면 이 법은 생멸이 아니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게송으로 중송함이다. 만약 망분별(妄分別)이 심해(心海)를 동하기 때문에, 생하든 멸하든 일체 제상이 모두 분별이 짓는 것이다. 만약 본각에 즉하여 본래 정(靜)의 문에 제분별을 여의기 때문에 이 법이 생멸이 아니다. 이른바 본래부터 분별을 멸하여 생멸의 인이 없기 때문에 비생멸이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범행장자가 이 게를 듣고 마음에 크게 기뻐하여 그 뜻을 선포하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諸法本寂滅 寂滅亦無生
제법은 본래 적멸이요 적멸도 또한 무생이니,
是諸生滅法 是法非無生
이 생멸법은 이 법이 무생이 아니니라.
彼卽不共此 爲有斷常故
저는 곧 이와 공(共)하지 않으니 단(斷)·상(常)이 있기 때문이며,
此卽離於二 亦不在一住
이것은 곧 이(二)를 여의되 또한 일(一)에 머물지도 않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장자(長者)의 광송(廣頌)이니 팔행게(八行偈)가 있다. 이것이 제1 앞의 게를 바로 연함이다. 제법본적멸이란 음계(陰界) 등의 법이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요, 적멸역무생이란 비단 제법이 본래 적멸일 뿐 아니라 적멸의 리도 또한 무생이기 때문이다. 저는 곧 이와 공하지 않으니 단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만약 저 적멸무생지법과 이 생멸법이 함께 있다면, 이 법의 생멸은 곧 단변(斷邊)이 있고 저 법의 상적(常寂)은 곧 상변(常邊)이 있어, 이승의 허물과 같아 중도에 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일게(一偈)의 뜻은 단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이것은 곧 이(二)를 여의되 동정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일에 머물지도 않는다.
경에서 말한다: 「만약 법이 하나가 있다고 설하면 이 상이 모윤(毛輪)과 같고, 아지랑이·물에 미도(迷倒)하기가 모든 허망함을 위하는 것과 같다. 만약 법에서 없음을 보면 이 법이 허공과 같아, 맹인이 해가 없다는 것과 같이 도치되어 법을 귀모(龜毛)와 같다고 설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제사해(諸邪解)를 파함이다. 첫째는 부처님이 설한 동정무이(動靜無二)를 듣고 곧 일(一)이라 여겨 일실일심(一實一心)이라 함으로써 이제(二諦) 도리를 비방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이 설한 공유이문(空有二門)을 듣고 이법(二法)이 있고 일실이 없다고 계탁함으로써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비방하는 것이다. 이 이사해(二邪解)는 약을 먹어 병이 되니 심히 치료하기 어렵다.
경에서 말한다: 「저는 지금 불설(佛說)을 듣고 법이 이견(二見)이 아님을 알며, 또한 중(中)에도 의지하여 머물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무주(無住)로부터 취합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자신의 바른 취지를 천명함이다. 법이 이견이 아님을 안다는 것은 중도법이 유무의 견해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니, 제2 무일(無日)의 도치를 여읜다. 또한 중에도 의지하여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변을 여의어도 중도일실(中道一實)에 머물지 않으니, 제1 윤수(輪水)의 망을 여읜다. 이런 까닭에 불교의 무주(無住)의 전(詮)을 따라 소전(所詮)의 무주의 취지를 영해하기 때문에 무주로부터 취한다고 한다.
경에서 말한다: 「여래의 설법은 모두 무주로부터이니, 저는 무주처로부터 이 처에서 여래께 예(禮)합니다. 여래상을 경례하노니 등공불동지(等空不動智)라, 처소에 집착하지 않으니 무주신(無住身)을 경례합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능설자(能說者)에게 예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일송으로 능설자에게 예하고, 둘째 이구로 능설지(能說智)에 예하며, 셋째 이구로 능설신(能說身)에 예한다. 등공(等空)이란 여래지가 무량무변하여 허공계와 같이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요, 불동(不動)이란 일체 무변삼세의 세유(世有)가 유전하여도 지용(智用)이 이(移)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착(不著)이란 법신이 이변을 여의기 때문이요, 무처소(無處所)란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저는 일체처에서 항상 제여래를 봅니다. 오직 원하오니 제여래께서 저를 위해 상법(常法)을 설해 주소서.」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5 듣지 못한 바를 묻는 것이다. 저는 제변을 여의고 무주지(無住智)를 얻었기 때문에 일일미진(一一微塵) 가운데 항상 시방 무량 제불을 보며, 시방세계 제미진 가운데 무처에서 무량제불을 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일체처에서 항상 제여래를 본다고 한다. 이와 같은 힘이 있어 상법(常法)을 들을 만하기 때문에 원하여 상법의 설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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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果常住 — 如來說 · 長者演 · 大衆得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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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그때 여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제선남자여, 그대들은 자세히 들으라. 그대들을 위해 상법(常法)을 설하리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4 입과상주(入果常住)이다. 그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여래께서 설하시고, 둘째 장자(長者)가 연설하며, 셋째 대중이 이익을 얻는다. 초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허설(許說)과 정설(正說)이다. 이것이 곧 허설이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상법(常法)은 상법이 아니요[常法非常法], 설도 아니요 글자도 아니며[非說亦非字], 제(諦)도 아니요 해탈도 아니며[非諦非解脫], 무도 아니요 경계도 아니어서[非無非境界] 모든 망단제(妄斷際)를 여의니, 이 법은 무상(無常)이 아니요[是法非無常] 모든 상단견(常斷見)을 여읜다. 견식(見識)이 상(常)임을 요달하면[了見識爲常], 이 식(識)이 항상 적멸이요[是識常寂滅], 적멸도 또한 적멸이니라[寂滅亦寂滅].」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정설이다. 상법(常法)은 상법이 아니라는 것은 이른바 불(佛)이 의거하는 법신의 체가 생멸상을 여의기 때문에 상법이라 하나, 상주성을 여의기 때문에 상법이 아니다. 설도 아니요 글자도 아니라는 것은 능전명언(能詮名言)을 끊기 때문이요, 제(諦)도 아니요 해탈도 아니라는 것은 소전실의(所詮實義)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법은 무상이 아니요 모든 단견을 여읜다. 그러나 이 법이기 때문에 모든 상견을 여읜다.
견식이 상임을 요달한다는 것은 저 상법을 구경요견(究竟了見)할 때 제식이 상이 된다. 이 식이 항상 적멸이라는 것은 제식이 본래 무생무멸이어서 무생멸이기 때문에 성상적멸(性常寂滅)이다. 지금 요견할 때 영히 이와 같이 적멸한 식을 멸하기 때문에 적멸도 또한 적멸이라 한다. 저 적멸식은 무상법이기 때문이다. 저를 멸해야 이에 상(常)을 얻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법이 적멸함을 아는 자는 적멸심(寂滅心)이 없어 심이 항상 적멸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심이 항상 진관(眞觀)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상인(常因)을 보임이다. 법이 적멸함을 아는 자란 초지 이상에서 일체법이 본래 적멸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무기(無起)임을 알기 때문에 심을 멸하지 않는다. 불멸심은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심이 항상 진관이란, 능증(能證)의 심이 항상 머물러 소증리(所證理)를 따라 생멸상을 여의되 항상 진조관(眞照觀)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제명색(諸名色)이 오직 이것이 치심(癡心)임을 알고, 치심이 분별하며, 제법을 분별하되 다시 이와 다른 사(事)가 명색으로부터 나오지 않음을 알며, 법이 이와 같음을 알아 문어(文語)를 따르지 않으며, 심심(心心)이 의(義)에서 아(我)를 분별하지 않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로 방편관(方便觀)을 밝힘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유식심사(唯識尋思)를 밝히고, 뒤에 여실지(如實智)를 드러낸다. 초 가운데 「다시 이와 다른 사(事)가 명색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명(名)은 사온(四蘊)을 이르고 색(色)은 색온(色蘊)이니, 제불상응(諸不相應)은 모두 가건립(假建立)이어서 이 명색을 여의면 다시 별체(別體)가 없기 때문이다. 제유위(諸有爲)의 사(事)는 모두 명색에 섭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제법이 오직 심이 짓는 것이니, 심을 여의면 경(境)이 없고 경을 여의면 심이 없다. 이와 같음을 유식심사라 이름한다. 화엄경에서 「심이 화가와 같아 종종 오음을 그리니, 일체 세간 가운데 법이 없어 짓지 않는 것이 없다. 심과 같이 불(佛)도 그러하고 불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심·불·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 심사(尋思)를 밝혔고 다음으로 여실지(如實智)를 드러낸다. 법이 이와 같음을 알아 문어(文語)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이 명심사(名尋思)가 이끄는 여실지이기 때문이요, 심심(心心)이 의(義)에서 아(我)를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이 의심사(義尋思)가 이끄는 여실지이기 때문이다. 인법(人法) 이아(二我)가 모두 의가 없으니, 이런 까닭에 그 가운데 분별하지 않는다.
경에서 말한다: 「아(我)가 가명(假名)임을 알면 곧 적멸을 얻고, 만약 적멸을 얻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총결이다. 앞의 둘은 방편을 결하여 진관을 얻는다. 또한 진관을 결하여 보리과를 얻는다.
━━━ 長者廣演 八行偈 ━━━
경에서 말한다: 「그때 범행장자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名相分別事 及法名爲三 眞如正妙智 及彼成於五.
我今知是法 斷常之所繫 入於生滅道 是斷非是常.
如來說空法 遠離於斷常.」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장자연설이다. 팔행게 가운데 세 가지 뜻이 있다. 처음 이송반(二頌半)은 불교의 뜻을 판정하고, 다음 오송(五頌)은 이변(二邊)의 집착을 파하며, 최후 이구는 무이관(無二觀)이다. 초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전이송은 이변(二邊)의 교(敎)에 떨어짐을 밝히고, 후이구는 이변을 여읜 교(敎)를 드러낸다.
명상(名相)이란 명구자(名句字)이니, 모두 명(名)을 표할 수 있어 합하여 명상이라 한다. 분별사(分別事)란 제유루(諸有漏) 심심법사(心心法事)이다. 법이란 앞의 둘을 제외한 법상이니, 명구(名句)의 소전(所詮)이요 분별의 소연(所緣)이다. 이것이 셋이니 일류(一類)로 잡염상(雜染相)을 밝힌다. 진여(眞如)란 정지(正智)의 경(境)이요, 정묘지(正妙智)란 본후이지(本後二智)이다. 이 둘 및 저 세 가지가 합하여 오사(五事)가 되니, 삼승교문(三乘敎門)의 법상을 드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법이 단상(斷常)에 얽힌 것임을 안다는 것은, 저 사종법(四種法)은 사상(四相)을 띠어 단변소착(斷邊所着)의 경(境)을 여의지 못하고, 진여법은 상주성이어서 상변소취(常邊所取)의 경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공법(空法)이 단상(斷常)을 원리한다는 것은 일승교로 삼공법(三空法)을 설하여 단상 이변의 과실을 원리함이다.
경에서 말한다: 「因緣無不生 不生故不滅 因緣執爲有 如採空中華. 猶取石女子 畢竟不可得.」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이변집착을 파함이다. 먼저 사송(四頌)이 유변집(有邊執)을 파하고, 뒤의 일송이 공변착(空邊着)을 탈(奪)한다. 인연집착을 파하는 가운데, 종자인연이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생과가 없고 멸도 없다. 그러나 삼승언교(三乘言教)의 학자가 실유인연종자(實有因緣種子)를 정집(定執)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공화(空華)를 채취하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석녀의 아이를 취하려는 것과 같아 영원히 얻을 수 없다.
경에서 말한다: 「離諸因緣取 亦不從他滅 及於己義大 依如故得實.」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나머지 삼연(三緣)을 파함이다. 의여고득실(依如故得實)이란 내가 능히 제유집(諸有執)을 파하는 것은 여리(如理)에 의거하여 파하기 때문에 실의(實義)를 얻는다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다: 「是故眞如法 常自在如如 一切諸萬法 不如識所化. 離識法卽空 故從空處說.」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진공법(眞空法)을 보임이다. 식소화(識所化)란 식이 계탁하는 바이니, 저 소계상(所計相)이 리에는 있는 바가 없고 다만 정유(情有)이기 때문에 소화라 이름한다. 식을 여읜 법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으니, 이런 까닭에 나는 공처(空處)로부터 여(如)를 설한다.
경에서 말한다: 「滅諸生滅法 而住於涅槃 大悲之所奪 涅槃滅不住.」
론(論)에서 말한다: 윗 문에서 이미 범부의 유집(有執)을 파하였다. 이 게는 또한 이승의 주공(住空)을 탈(奪)한다. 이승인이 신지(身智)의 생멸법을 멸하고 열반에 든다. 제불의 동체대비로 말미암아 저 열반을 빼앗아 다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마음이 일어날 때 열반이 곧 멸한다. 대상주(大商主)가 화성(化城)을 멸하는 것과 같다.
경에서 말한다: 「轉所取能取 入於如來藏.」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무이관(無二觀)을 보임이다. 이미 범성(凡聖) 이변의 집착을 파하였기 때문에 지금 저 범성 이중(二衆)을 전하여 능소(能所)가 평등한 관에 들게 한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대중이 이 뜻을 듣고 모두 정명(正命)을 얻어 여래에 들어가니, 여래장해(如來藏海)이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대중득익이다. 정명(正命)을 얻는다는 것은 유무변(有無邊)을 여의고 중도를 얻어 정혜명(正慧命)이기 때문이다. 여래에 든다는 것은 이미 여래지(如來智)의 분(分)에 들었기 때문이다. 여래장해에 든다는 것은 본각(本覺)의 깊고 넓은 뜻에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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摠持品 第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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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論)에서 말한다: 이 가운데 전(前) 제품(諸品) 가운데의 의혹을 결하고, 요의(要義)를 총지(摠持)하여 잊지 않기 때문에 소위(所爲)로부터 이름하여 총지라 한다. 또한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이미 문의타라니(文義陁羅尼)를 얻었기 때문에, 제품의 모든 문의 및 대중이 의혹을 일으키는 처를 총지하여 기억하여 차례로 발문하고 제의혹을 잘 결하기 때문에 능문(能問)으로부터 총지라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이르러 합장호궤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대중의 심에 의사(疑事)가 있어 아직 결(決)하지 못했음을 관합니다. 지금 여래께서 의혹을 제거하고자 하시니, 저는 지금 대중을 위해 의혹에 따라 묻겠습니다. 원하오니 부처님께서 자비로이 들어 허락하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여, 그대가 능히 이와 같이 중생을 구도하니 이것이 대비민(大悲愍)으로 불가사의이다. 그대는 마땅히 광문(廣問)하라. 그대를 위해 선설하리라.」
론(論)에서 말한다: 정설(正說) 안의 대분 두 가지가 있으니 별명관행이 마쳤다. 이하가 제2 총결제의(摠決諸疑)이다. 문에 네 가지가 있으니, 초청(初請), 다음 허(許), 세 번째 결(決), 네 번째 영(領)이다. 이 문답이 청 및 허이다. 이 능청(能請)인이 지장이라 이름하는 것은, 이 사람이 이미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얻어 일체 중생의 선근을 생장하기를 대지(大地)가 제초목을 생하는 것과 같다. 타라니로써 제공덕을 지녀 일체에 혜시하되 다함이 없음이 대보장(大寶藏)의 진보(珍寶)가 다함이 없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지장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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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決諸疑 — 別決六疑 (後向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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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 決如來藏品疑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일체 제법이 어찌하여 연(緣)으로 생하지 않습니까? 그때 여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若法緣所生 離緣可無法
만약 법이 연(緣)이 생하는 바라면, 연을 여의면 법이 없을 것이니,
云何法性無 而緣可生法
어찌하여 법성이 없는데 연이 법을 생할 수 있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제의를 바로 결함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육품육의(六品六疑)를 뒤에서 앞으로 차례로 결하고, 둘째 일품삼의(一品三疑)를 순차로 없앤다. 지금 이 문답은 여래장품 가운데 일어난 의혹을 결한다. 여래의 일송이 이 의혹을 바로 결하니, 윗 반은 저의 본집(本執)을 정하고 아랫 반은 저에 의거하여 그 연생(緣生)을 파한다. 이 뜻은 바로 연이 법을 생하지 않음을 세우니, 법이 없음에 望하기 때문이니 마치 토끼 뿔에 望함과 같다. 이 비량(比量)으로 말미암아 저 의혹이 결된다.
━━━ 第二 決眞性空品疑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법이 만약 무생이라면 어찌하여 설법하면 법이 심으로부터 생합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是心所生法 是法能所取 如醉眼空華 是法然非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진성공품 가운데 일어난 의혹을 결한다. 이 의혹에 두 가지가 있으니, 직유(直遣)와 중결(重決)이다. 이것이 직유이다. 지금 그대가 계탁하는 심소생법(心所生法)은 바로 망심(妄心)의 능취(能取)·소취(所取)이다. 마치 취주안(醉酒眼)이 보는 공화(空華)와 같다. 이 법도 또한 그러하니 저 소설법(所說法)이 아닌 것처럼, 그대가 계탁하는 것과 같이 생하는 것이 아니다.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법이 만약 이와 같다면 법이 곧 무대(無待)입니다. 무대지법(無待之法)은 법이 마땅히 자성(自成)이어야 합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法本無有無 自他亦復爾 不始亦不終 成敗卽不住.」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중결이다. 나의 소설법은 명언을 끊기 때문에 본래 유무(有無)·자타(自他)·시종(始終)이 없고, 성(成)이든 패(敗)든 머물 수 없다. 어찌하여 자연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이 법에 성패(成敗)가 없으니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힐난이 이루어지지 않고, 난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의혹이 결된다.
━━━ 第三 決入實際品疑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일체 제법상이 곧 본래 열반이요, 열반 및 공상(空相)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是) 등의 법이 없으면 이 법은 마땅히 여(如)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법이 없으면 이 법이 이것이 여(如)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입실제품 가운데 일어난 의혹을 결한다. 문에 네 가지가 있다. 제1 문의(問意)는, 만약 공의(空義)로써 일체 제법상이 곧 본래 청정열반이요, 다시 열반 및 그 공상을 융하면 곧 열반과 공의 차별이 없다. 이 일미법이 마땅히 여(如)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2 답 가운데 여와 같이 허락한다.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불가사의이도다! 이와 같은 여상(如相)은 공불공(共不共)이 아니요, 의취(意取)·업취(業取)가 곧 모두 공적이며, 공적심법(空寂心法)이 구불구취(俱不俱取)도 또한 마땅히 적멸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3 영해이다. 비공비불공(非共非不共)이란, 비공(非共)은 이여(二如)가 없기 때문이요, 비불공(非不共)은 쌍견(雙遣)이 있기 때문이다. 의취(意取)란 이른바 열반을 연하는 적멸심(寂滅心)의 소취이기 때문이요, 업취(業取)란 곧 이것이 생사의 제번뇌업의 소취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모두 공하여 공적무이(空寂無二)이다. 공적심법(空寂心法)이 구불구취도 또한 마땅히 적멸이라는 것은 일심법도 또한 일(一)을 지키지 않음을 밝힌다.
경에서 말한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一切空寂法 是法寂不空 彼心不空時 是得心不有.」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여래술성이다. 일체공적법(一切空寂法)이란 생사·열반의 일체 공적법이다. 이 법은 적(寂)이되 공하지 않다는 것은 무이(無二)의 심법이 도무(都無)한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무법이 아니나 유(有)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심이 불공(不空)임을 알 때, 이때 심이 불유(不有)임을 안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구불구취가 모두 적멸해야 한다는 것이 도리에 어기지 않는다.
━━━ 第四 決本覺利品疑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이 법은 삼제(三諦)가 아니요, 색·공·심도 또한 멸합니다. 이 법이 본래 멸할 때 이 법은 마땅히 멸이어야 합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法本無自性 由彼之所生 不於如是處 而有彼如是.」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본각이품 가운데 일어난 의혹을 결한다. 색심지법(色心之法)이 본래 자성이 없다는 것이요, 저 본각심이 생한 바이기 때문에 소생(所生)의 색심은 차별상이다. 저 본각심은 이상이성(離相離性)이다. 이와 같은 차별의 처에서 저 이상(離相)의 일각(一覺)이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 이 색심 차별상을 공할 때 이상(離相)의 일각(一覺)을 함께 없앨 수 없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 앞의 설이 허담이 아니다.
━━━ 第五 決無生行品疑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일체 제법이 무생무멸인데 어찌하여 하나가 아닙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法住處無在 相數空故無 名說二與法 是卽能所取.」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무생행품 가운데 일어난 의혹을 결한다. 법의 주(住) 및 소주처(所住處)가 모두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색심 등의 상(相)과 일이(一異) 등의 수(數)가 모두 공(空)하기 때문에 없다. 상수가 이미 없는데 어찌 일(一)이 있겠는가? 또한 색이 없기 때문에 곧 심상이 없으니, 이미 이(異)가 아닌데 어찌하여 일(一)이라 하여 이(二)의 명설(名說)이 있겠는가? 일이(一二) 등의 수(數)는 망심(妄心)의 소취이지 저 실의(實義)가 이와 같은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 第六 決無相法品疑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일체 제법상이 이안(二岸)에 머물지 않고, 또한 중류(中流)에도 머물지 않으며, 심식(心識)도 이와 같습니다. 어찌하여 제경계(諸境界)가 식으로부터 생합니까? 만약 식이 능히 생이 있다면 이 식도 또한 생으로부터이니, 어찌하여 무생식(無生識)이 능히 소생(所生)이 있는 것을 생하겠습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所生能生二 是二能所緣 俱本名自無 取有空華幻.
識生於未時 境不是時生 於境生未時 是時識亦滅.
彼卽本俱無 亦不有無有 無生識亦無 云何境從有.」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무상법품 가운데 일어난 의혹을 결한다. 삼송(三頌)의 문은 두 가지로 나뉜다. 초 일송은 그 도리를 보이고 뒤의 이송은 상생집(相生執)을 파한다. 초 중에, 이것이 이능소연(二能所緣)이란 그대가 계탁하는 식은 능생이요 경(境)은 소생이니, 바로 이것이 망취(妄取)인 능연·소연이다. 모두 본래 다만 이름이요 자(自)가 없다. 만약 유(有)를 취한다면 공화(空華)와 환상(幻象)을 실유(實有)로 취하는 것과 같다. 파(破) 가운데, 식이 생하는 미유시(未有時)에 소생의 경계는 이때 불생이다. 경이 생하는 미유시에 그 소생의 식은 이때 또한 멸하니, 멸이란 적멸이요 이른바 본래 없음이다. 능생이 본래 함께 없으니, 이미 능생이 없어 유(有)가 되게 하지도 않는다. 무생식도 또한 없으니, 이미 생의가 없는데 어찌 식이 있겠는가? 식이 없기 때문에 경이 유로부터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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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摠定所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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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법상이 이와 같으니 내외(內外)가 모두 공하고, 경(境)·지(智) 이중(二衆)이 본래 적멸입니다. 여래의 설하신 실상진공(實相眞空)은 이와 같은 법이 집(集)이 아닙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총정소설(摠定所說)이다. 총정육결(摠定六決)하여 병(病)이 아니요 이것이 약(藥)임을 정한다. 비집(非集)이란 생사 잡염의 환(患)을 집(集)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악취공(惡取空)이 되돌아 제환을 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여실지법(如實之法)은 무색무주(無色無住)이요, 비소집비능집(非所集非能集)이며, 비의비대(非義非大)이다. 일본과법(一本科法)이요 심공덕취(深功德聚)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여래의 정허(定許)이다. 무색(無色)이란 유착(有着)의 병을 내지 않기 때문이요, 무주(無住)란 또한 악취공(惡取空)의 환을 여의기 때문이다. 비소집(非所集)이란 고제(苦諦)가 공하기 때문이요, 비능집(非能集)이란 집제(集諦)가 공하기 때문이다. 일본과법(一本科法)이란 일본각(一本覺)으로써 이것이 근(根)이 되어 능히 제행과 제공덕을 생하기 때문이다. 이상이성(離相離性)이기 때문에 심(深)이라 이름하고 항사수(恒沙數)를 넘기 때문에 취(聚)라 이름한다.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불가사의로다! 불사의취(不思議聚)이니 칠오불생(七五不生)이요, 팔육적멸(八六寂滅)이며, 구상공무(九相空無)이고, 유공무유(有空無有)이며, 무공무유(無空無有)입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법의(法義)가 모두 공이어서, 공에 들어가 무행(無行)이되 제업(諸業)을 잃지 않으며, 무아·아소(無我我所)·능소신견(能所身見)이요, 내외결사(內外結使)가 모두 다 적정(寂靜)이며, 고(故)로 원(願)도 또한 식(息)합니다. 이와 같은 이관혜정진여(理觀慧定眞如)입니다. 세존께서 항상 설하시는 실여공법(寔如空法)이 곧 양약(良藥)입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양약임을 살핌이다. 불사의취(不思議聚)는 이상이성공덕(離相離性功德)을 총표함이다. 칠오불생(七五不生)이란 이종말식(二種末識)의 공(空)을 합하여 밝힘이니, 항행식(恒行識) 가운데 제7이 말(末)이요, 불항행식(不恒行識) 가운데 오식(五識)이 말(末)이기 때문이다. 팔육적멸(八六寂滅)이란 이종본식(二種本識)의 적(寂)을 합하여 밝힘이니, 항행식 가운데 제8이 본(本)이요, 불항행식 가운데 제6이 본이기 때문이다. 구상공무(九相空無)란 제9식의 상도 또한 성(性)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유공무유(有空無有)란 팔식(八識)의 유상지법(有相之法)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무공무유(無空無有)란 구식(九識)의 무상지성(無相之性)도 공하여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관(理觀)을 밝힌다. 공에 들어가 무행(無行)이되 제업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공삼매이니, 이관(理觀)이 공에 들어가되 능소(能所)의 행이 없으며, 비록 능소가 없어도 육도 등의 업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무상삼매(無相三昧)란 아아소(我我所) 등을 여의기 때문이다. 내외결사가 모두 적정하다는 것은, 내문(內門)의 제결(諸結)과 외문(外門)의 제사(諸使) 등 삼계 번뇌의 제상이 공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무상삼매이다. 고원(故願)도 또한 식(息)한다는 것은 무원삼매이니, 삼계법이 모두 적정하기 때문에 원구(願求)의 심이 자연히 영식(永息)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공이기 때문이다. 공성(空性)이 무생하여 심이 항상 무생이고, 공성이 무멸하여 심이 항상 무멸이며, 공성이 무주하여 심도 또한 무주이고, 공성이 무위하여 심도 또한 무위이다. 공은 출입이 없고 제득실(諸得失)을 여의며, 음계입(陰界入) 등이 모두 다 또한 없다. 심여불착(心如不着)도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이여, 내가 제공(諸空)을 설하는 것은 제유(諸有)를 파하기 때문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여래정허(如來定許)이다. 공성이 무생하여 심이 항상 무생이란 공에 드는 심이 공과 같이 무생이기 때문이다. 생멸이 바로 무상(無常)의 뜻이기 때문에 저 두 이름을 뒤집어 상(常)이라 이름한다. 심여불착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은 능관의 심도 공리와 같아 출입·득실의 상을 취하지 않고 음계입 등의 법에 집착하지 않음이다. 내가 제공을 설하는 것은 제유를 파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공리(空理)가 무이(無二)하나 오·삼 등의 제공을 설하는 것은 제인이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파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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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來藏品 三疑 順次遣 — 第二大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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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疑 梵行長者頌의 판단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유(有)가 실이 아님을 아는 것은 양염수(陽焰水)와 같고, 실(實)이 없지 않음을 아는 것은 화성왕(火性王)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관하는 자는 이 사람이 지(智)입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일품삼의(一品三疑)를 순차로 없앰이다. 세 가지 의혹 가운데, 제1 의혹은 저 범행장자가 송(頌)에서 유일(有一)이면 윤수미도(輪水迷倒)라 하고, 법무(法無)이면 맹인이 일(日)이 없다는 것과 같이 도치된다고 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장자의 판단이 망견인가 진지인가 하는 의혹이 생겼다. 이 의혹을 없애기 위해 저 사(事)를 들어 묻는다. 실이 없지 않음을 아는 것은 화성왕(火性王)과 같다 함은, 나무 속에 화성이 있어 분석하여 구해도 화상(火相)을 얻지 못하나 실로 나무 속의 화성이 없지 않아 뚫어 구하면 반드시 불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일심도 이와 같아 제상을 분석해도 심성을 얻지 못하나 실로 제법 가운데 심이 없지 않아 도를 닦아 구하면 일심이 드러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이 진관(眞觀)이다. 일적멸(一寂滅)을 관하되 상(相)과 불상(不相)이 등(等)하여 공으로써 취한다. 공을 닦기 때문에 불견불(不失見佛)이요, 불(佛)을 보기 때문에 삼류(三流)에 순하지 않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여래결의(如來決疑)이다. 일심법(一心法)의 적멸의(寂滅義)를 관한다는 것이요, 유상속(有相俗)과 무상진(無相眞)이 등(等)하여 고집하지 않고 일(一)로 융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空)을 닦음이 바로 불심에 순하기 때문에 항상 불신(佛身)을 보아 일찍이 잃지 않는다. 삼류(三流)란 삼계 번뇌를 총섭하니 욕류(欲流)·유류(有流)·무명류(無明流)이다.
경에서 말한다: 「대승 가운데 삼해탈도(三解脫道)에서 일체무성(一體無性)이니 그 무성이기 때문에, 공공(空空)이기 때문이요, 무상무상(無相無相)이기 때문이며, 무작무작(無作無作)이기 때문이고, 무구무구(無求無求)이기 때문이며, 무원(無願)이니 이 업이기 때문이요, 정심이니 심이 정하기 때문이며, 견불이니 불을 보기 때문이요, 마땅히 정토에 생할 것이다. 보살이여, 이 심법(深法)에서 삼화근수(三化勤修)하여 혜정원성(慧定圓成)하면 곧 삼계를 초월하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광연이다. 삼해탈도승리(三解脫道勝利)를 밝힌다. 일체무성(一體無性)이란 소승삼해탈문의 별체유성(別體有性)에 대응하여 대승보살 관행의 일체(一體)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관심이 무성을 증할 때 뜻에 따라 임시로 삼해탈을 세운다. 이 업(業)이기 때문에 정심이라 함은 일체 체상용(體相用)을 망(忘)하기 때문에 능히 관(觀)을 나와 속(俗)을 섭입하는 심을 정하게 하여 제염착을 여읜다. 염착심을 여읜 능히 보신불(報身佛)을 보고, 보신불을 보기 때문에 정토에 생한다. 삼화근수(三化勤修)란 공법(空法)에서 삼공(三空)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첫째 공상역공(空相亦空)이 일화수(一化修)요, 둘째 공공역공(空空亦空)이 이화수이며, 셋째 소공역공(所空亦空)이 삼화수이다.
━━━ 第二疑 常住寂滅法의 趣入方便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여래의 설하신 무생무멸(無生無滅)이 곧 이것이 무상(無常)입니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이미 멸하면 적멸이 상(常)이 됩니다. 상(常)이기 때문에 부단(不斷)이며, 이 불단의 법이 제삼계를 여의어, 동부동법(動不動法)의 유위법에서 마치 불구덩이를 피하듯이, 어떤 법에 의거하여 스스로 호책(呵責)하여 저 일문(一門)에 들어가겠습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여래장품(如來藏品)의 제2 의혹을 없앤다. 저 문에서 「견식위상(見識爲常)이요, 이 식이 항상 적멸이며, 적멸도 또한 적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상주(常住)하는 적멸법은 비록 흠모하고 즐길 수 있으나 매우 미묘하고 심오하다. 중생의 심이 추천(麤淺)하여 조복하기 어려우니, 어찌 심을 조복하여 저 문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이 생겨 이와 같이 묻는다. 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는 과(果)가 멀다는 것을 들고, 뒤에는 입인(入因)의 방편을 묻는다. 초 가운데 「무생무멸이 곧 이것이 무상(無常)이다」란, 곧 앞의 「시식상적멸(是識常寂滅)」을 영수함이니, 본래 적멸하기 때문에 무생무멸이요, 본래 상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이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이미 멸하면 적멸이 상(常)이 된다」는 것은, 곧 앞의 「적멸역적멸(寂滅亦寂滅)」을 영수하고 또한 「견식위상」을 영수하는 것이다. 유위법(有爲法) 이하가 제2로 바로 입인의 방편을 묻는다. 저 문에 들어가는 방편은 앞에서 설한 바 있으나 방편·정관을 간략히 설하였기 때문에 다시 광설을 청한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삼대사(三大事)에서 그 심을 호책(呵責)하고, 삼대제(三大諦)에서 그 행에 들어가라. 삼사란 첫째 인(因), 둘째 과(果), 셋째 식(識)이다. 이와 같은 삼사는 본래 공무(空無)이니 나의 진아(眞我)가 아니다. 어찌하여 이에서 애염관(愛染觀)을 내겠는가? 이 삼사가 계(繫)에 의해 표류하여 고해(苦海)에 표류한다. 이와 같은 사(事)로써 항상 스스로 호책하라. 삼제란 첫째 보리지도(菩提之道)가 이것이 평등제(平等諦)이요 불등제(不等諦)가 아니다. 둘째 대각정지득제(大覺正智得諦)이요 사지득제(邪智得諦)가 아니다. 셋째 혜정무이행입제(慧定無異行入諦)이요 잡행입제(雜行入諦)가 아니다. 이 삼제로써 불도를 닦으면 이 사람은 이 법에서 정각을 얻지 못함이 없다. 정각지(正覺智)를 얻어 대극자(大極慈)가 흘러나오고, 자(自)·타(他)가 함께 이로워 불보리를 이루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설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호염방편(呵厭方便)을 설하고 뒤에 취입방편(趣入方便)을 보인다. 삼사(三事) 가운데 인(因)이란 오계십선(五戒十善)의 인(因)이요, 과(果)란 인천부락(人天富樂)의 과(果)이며, 식(識)이란 인과를 지니는 본식이다. 사繫에 의해 표류한다는 것은 사계(四繫)가 이정심(理定心)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삼제(三諦)를 밝힌다. 보리지도가 평등제라는 것은 불소증(佛所證) 성정보리(性淨菩提)가 통태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道)라 이름한다. 일체 유정이 모두 이 성에 같아 하나도 귀하지 않는 것이 없어 구경도이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 이것이 이승별취(二乘別趣)를 대치함이다. 대각정지득제란, 일체지(一切智) 대각의 과는 오직 평등정지(平等正智)가 증득하는 바이지 사지(邪智)가 얻는 바가 아니다. 이것이 제외도집(諸外道執)을 대치함이다. 혜정무이행입제란, 정지(正智)를 얻어 평등에 들 때 혜정(慧定)이 원융하여 별행상(別行相)이 없어야 이것이 참으로 평등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세간관행(世間觀行)에서 증하지 못하고 증했다 여기는 증상만(增上慢)을 대치함이다.
━━━ 第三疑 平等不動而有得入之義 ━━━
경에서 말한다: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이 곧 무인연(無因緣)입니다. 만약 무연법이면 인(因)이 곧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부동법(不動法)이 여래에 들어갑니까?」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여래장품의 제3 의혹을 없앤다. 이 중에 보리지도(菩提之道)가 평등지제(平等之諦)이니 곧 이것이 여래장으로서 인연력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찌하여 저 능소(能所)를 전(轉)하는 인으로써 여래장법에 들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이다. 곧 무인연(無因緣)이란 평등이기 때문에 인연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또한 평등이기 때문에 곧 여연(餘緣)이 없어 여연이 없기 때문에 인이 일어날 수 없다. 어찌하여 저 무기동법(無起動法)에서 인연을 써서 여래에 들겠는가? 만약 인력(因力)의 드는 바라면 곧 인연을 기다리는 것이니 부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그때 여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一切諸法相 性空無不動 是法於是時 不於是時起.
法無有異時 不於異時起 法無動不動 性空故寂滅.
性空寂滅時 是法是時現 離相故寂住 寂住故不緣.」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여래의 의혹을 바로 결함이다. 팔행송(八行頌) 가운데 두 부분이 있다. 전삼송(前三頌)이 약설이요 후오송(後五頌)이 광선이다. 약설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전삼송은 부동의 뜻을 밝히고 후일송은 득입의 뜻을 드러낸다.
이 법이 이 시(時)에 이 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시는 이 세(世)를 이르니 현재이다. 현재의 시는 영원히 잠시도 머묾이 없어 이미·미래를 세제(細除)하면 곧 중간이 없으니, 이 처소처럼 광음(光陰)에 중간처가 없다. 이런 까닭에 이 시에 일어남이 없다. 법에 이시(異時)가 없어 이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시란 과미(過未)를 이른다. 미래는 아직 없기 때문에 기의(起義)가 없고, 과거는 이미 없으니 또한 기의가 없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 법에 기동(起動)이 없다. 이미 생기의 동이 없으니, 또한 항상 머물러 부동함도 없다. 이런 까닭에 법에 동(動)·부동(不動)이 없으니 성공(性空)이기 때문에 적멸이다.
다음의 일송은 득입의 뜻을 밝힌다. 성공적멸시(性空寂滅時)란 성공적멸을 요견(了見)하는 시이다. 부동지법이 이때 드러난다. 드러남이 심에 드러나기 때문에 득입이라 한다. 그러나 이 드러난 법이 일체 상을 여읜다. 이상(離相)이기 때문에 적정히 머물고,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항상 연(緣)으로부터 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비록 입(入)이 있어도 이연의(離緣義)를 폐하지 않는다.
경에서 말한다: 「是諸緣起法 是法緣不生 因緣生滅無 生滅性空寂.
緣性能所緣 是緣本緣起 故法起非緣 緣無起亦爾.
因緣所生法 是法是因緣 因緣生滅相 彼卽無生滅.」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광선이다. 그 가운데 전삼송이 불동의를 광히 밝히고, 후이송이 득입의를 선포한다. 이 제과법(諸果法)의 연이 불생이라는 것을 표방한다. 인연의 생멸이 없다는 것은 제인연(諸因緣)이 생멸하여 머물지 않기 때문에 과를 생하는 공능이 없다. 생멸성공적(生滅性空寂)이란 머물지 않기 때문에 곧 생멸이 없고, 성공적이기 때문에 또한 과를 생하지 않는다. 연성능소연(緣性能所緣)이란 인연종자가 명복(冥伏)하여 성(性)이라 하고, 증상연(增上緣)의 근이 경계에 대하기 때문에 능연이라 한다. 이와 같은 종자성연(性緣) 및 능소이연(能所二緣)이 모두 본연(本緣)의 일어나는 바이다. 생멸성공(生滅性空)이기 때문에 생용이 없으니, 이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연의 무생의(無生義)가 있다. 이런 까닭에 과법(果法)이 일어남은 연이 생한 것이 아니다. 연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으니 그 과와 같다는 것이다.
다음의 일송으로 말미(末)를 좇아 얻을 수 없음을 불동(不動)으로 드러낸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 이 법이 인연이라는 것은 제과법도 또한 인연이 됨을 밝히니, 후생법(後生法)에 대하여 연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제과법이 이미 인연이 되니, 곧 전설과 같다. 생멸성공이기 때문에 인연생멸상이 저 곧 무생멸이라 한다. 이것이 앞의 약설에서는 과공(果空)만 직접 드러내고, 지금 광설에서는 인연에 나아가 설하니 제법인과(諸法因果)가 부동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곧 이것이 평등보리지도(平等菩提之道)이다. 이 법 밖에 별도로 보리를 구할 것이 아니다.
경에서 말한다: 「彼如眞實相 本不於出沒 諸法於是時 自生於出沒.
是故極淨本 本不因衆力 卽於後得處 得得於本得.」
론(論)에서 말한다: 이 이송이 득입의를 선포함이다. 후득처(後得處)란 도후처(道後處)를 이른다. 앞의 약설에서 적멸시(寂滅時)라 한 것이 곧 이 후득지처(後得之處)이다. 이미 적멸인데 어찌 처시(處時)가 있겠는가? 다만 시처(時處)를 여읨을 시처에 기탁하는 것이다. 득득어본득(得得於本得)이란 시각이 구경(究竟)하기 때문에 득이라 이름하니, 이것이 능득(能得)이기 때문이다. 시각이 구경하면 도리어 본각과 같다. 이런 까닭에 본득(本得)을 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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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解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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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한다: 「그때 지장보살이 부처님의 설을 듣고 심지(心地)가 쾌연(快然)하였다. 이때 제중(諸衆) 등에 의혹하는 자가 없었다. 중심(衆心)을 알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저는 중심의 의혹을 알아 이런 까닭에 은고(殷固)하게 물었습니다. 여래의 대자로 잘 분별하여 남김이 없으셨습니다. 이 제이중(諸二衆) 등이 모두 다 명료하게 되었으니, 저는 지금 요달한 처에서 제중생을 보화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대비처럼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일자지(一子地)에서 번뇌에 머물겠습니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4 영해이다. 이 삼송 가운데 두 부분이 있다. 전 일송반은 앞의 결의(決疑)의 이익을 결하고, 후 일송반은 뒤의 보화(普化)의 행을 천명한다. 일자지(一子地)란 초지 이상에서 이미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증하여 제중생을 외아들처럼 봄이다. 이것이 청정증상의락(淸淨增上意樂)이다. 번뇌에 머문다는 것은 보살이 비록 제법평등을 얻었어도 방편력으로 번뇌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일체 번뇌수면(煩惱隨眠)을 버리면 곧 열반에 들어 본원에 어기기 때문이다. 유가론에서 「보살이 비록 출세법을 일으켜 현전에 나타나게 할 수 있으나, 방편선교력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중에 불사(不捨)란 구경사(究竟捨)가 아니니 나한 등과 같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사이기 때문에 번뇌에 머문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계를 보화한다. 이 한 권의 경에 삼분(三分) 가운데 제2 정설(正說)이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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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通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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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 讚人流通 ━━━
경에서 말한다: 「그때 여래께서 대중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불가사의이니 항상 대비로써 중생의 고를 뽑는다. 만약 중생이 이 경법(經法)을 수지하고 이 보살의 이름을 수지하면 곧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고 일체 장난(障難)이 모두 다 제멸된다. 만약 중생이 나머지 잡념 없이 오로지 이 경을 염하고 여법히 수습하면, 이때 보살이 항상 화신을 지어 설법하고 이 사람을 옹호하여 잠시도 버리지 않아, 이 사람 등으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리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유통분(流通分)이라 이름한다. 그 가운데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찬인유통(讚人流通), 둘째 권중유통(勸衆流通), 셋째 입명유통(立名流通), 넷째 수지유통(受持流通), 다섯째 참회유통(懺悔流通), 여섯째 봉행유통(奉行流通)이다. 이것이 곧 제1 찬인유통이니 능히 유통하는 이 경의 보살이 갖는 네 가지 수승한 덕을 찬탄한다.
━━━ 第二 勸衆流通 ━━━
경에서 말한다: 「그대들 보살이 만약 중생을 교화한다면 모두 이와 같은 대승결정요의(大乘決定了義)를 수습하게 하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권중유통이다. 결정요의(決定了義)란 가장 깊고 가장 지극하여 더 이상 더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 第三 立名流通 ━━━
경에서 말한다: 「그때 아난(阿難)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의 설하신 대승복취(大乘福聚)와 결정단결(決定斷結)하는 무생각이(無生覺利)가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은 이름이 어떤 경이며, 이 경을 수지하면 얼마만한 복을 얻습니까? 원하오니 부처님께서 자비로이 저를 위해 선설하소서.」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3 입명유통이다. 이 경의 네 가지 수승한 능(能)을 드러낸다. 첫째 능히 지자(持者)로 하여금 무량복을 얻게 하고, 둘째 영단제결(永斷諸結)하게 하며, 셋째 소전(所詮)의 취지가 본각이요, 넷째 능전(能詮)의 교가 불가사의이다.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경의 이름은 불가사의하여 과거 제불의 호념(護念)하는 바이며 여래의 일체지해(一切智海)에 능히 들어갈 수 있다. 만약 중생이 이 경을 수지하면 곧 일체 경 가운데 더 이상 희구하는 바가 없다. 이 경전의 법이 중법(衆法)을 총지(摠持)하고 제경의 요(要)를 섭하니, 이 제경법의 법의 계종(繫宗)이다. 이 경의 이름은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이름하고 또한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름하며, 또한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 이름하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 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두 문을 차례로 답한다. 초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명의를 찬탄하고 뒤에 이름을 바로 세운다. 능히 여래지해에 들어간다는 것은 금강삼매의 명의이니 법을 파괴하지 않고 리를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경전법이 중법을 총지하고 제경의 요를 섭한다는 것은 섭대승경의 명의이다. 이 제경법의 법의 계종이란 무량의종의 명의이다.
━━━ 第四 受持流通 ━━━
경에서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수지하면 곧 백천 제불의 이와 같은 공덕을 수지한다고 이름하니, 비유하자면 허공이 변제(邊際)가 없는 것처럼 불가사의이다. 내가 부촉(囑累)하는 것은 오직 이 경전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이다. 네 가지 수승한 덕이 있다. 첫째 지불승덕(持佛勝德)이요, 둘째 광대승덕(廣大勝德)이요, 셋째 심심승덕(甚深勝德)이요, 넷째 무비승덕(無比勝德)이다.
경에서 말한다: 「아난이 말하였다: 어떤 심행(心行)의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수지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경을 수지하는 자는 이 사람의 심에 득실(得失)이 없고 항상 범행(梵行)을 닦는다. 만약 희론(戲論)에서 항상 정심(淨心)을 즐기고, 취락(聚落)에 들어도 심이 항상 재정(在定)하며, 만약 거가(居家)에 처해도 삼유(三有)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4 수지유통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정명수지(正明受持)이요, 둘째 왕복중현(往復重顯)이다. 초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오종심행(五種心行)이 있다. 첫째 심무득실(心無得失)이란 타인의 장단을 관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 상수범행(常修梵行)이란 내로 이상(離相)의 정행을 닦기 때문이며, 셋째 상락정심(常樂靜心)이란 동중(動中)에서도 부동하기 때문이요, 넷째 심상재정(心常在定)이란 산(散)에 들어도 불산(不散)하기 때문이며, 다섯째 불착삼유(不著三有)란 염(染)에 거해도 불염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이 사람은 현세에 오종복(五種福)이 있다. 첫째 중소존경(衆所尊敬), 둘째 신불횡요(身不橫夭), 셋째 변답사론(辯荅邪論), 넷째 낙도중생(樂度衆生), 다섯째 능입성도(能入聖道)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이 경을 수지한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이니, 앞의 오행을 따라 이 오복을 얻는다. 중소존경이란 중생의 장단을 관하지 않기 때문이요, 신불횡요란 이상(離相)의 행을 항상 닦기 때문이며, 변답사론이란 낙정심(樂靜心)이기 때문이요, 낙도중생이란 산(散)에 들어도 항상 정(定)이기 때문이며, 능입성도란 삼유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한다: 「아난이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제중생을 제도하면 공양을 받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사람은 능히 중생을 위해 대복전(大福田)이 되어 항상 대지(大智)를 행하여 권실(權實)을 함께 연설한다. 이것이 사의승(四依僧)이니 제공양에서 이에 두목수뇌(頭目髓腦)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의식(衣食)을 받지 못하겠는가? 선남자여, 이와 같은 사람은 이것이 그대의 지식이요 그대의 교량(橋梁)이니, 하물며 범부가 어찌 공양하지 않겠는가?」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왕복중현이다. 사의승(四依僧)이란 제1의는 번뇌성(煩惱性)을 갖추니 위(位)가 지전에 있고, 나머지 삼의(三依)는 위가 지상에 있다. 열반경에 광설한 바와 같다.
경에서 말한다: 「아난이 말하였다: 저 사람이 이 경을 수지한 곳에 공양하면 이 사람이 얼마만한 복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만성(滿城)의 금은을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경의 일사구게(一四句偈)를 수지한 곳에서 이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못하느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로 지경자(持經者)가 능히 많은 복을 생함을 밝힌다. 만성(滿城)의 금은을 보시하여 이 경을 수지하지 않는 자가 얻는 복이, 이 경의 일사구게(一四句偈)를 수지하는 곳에서 이 사람을 공양하여 얻는 복보다 못하다.
━━━ 第五 懺悔流通 ━━━
경에서 말한다: 「선남자여, 제중생으로 하여금 이 경을 수지하게 하면 심이 항상 재정(在定)하여 본심(本心)을 잃지 않는다. 만약 본심을 잃으면 곧 마땅히 참회(懺悔)해야 하니, 참회의 법이 이것이 청량(淸涼)이니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5 참회유통이다. 청량이란 불선(不善)의 인인 침탁(沈濁)을 멸하기 때문에 청(淸)이요, 생사과의 열뇌(熱惱)를 여의기 때문에 량(涼)이다.
경에서 말한다: 「아난이 말하였다: 선죄(先罪)를 참회함이 과거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마치 어두운 방이 밝은 등을 만나면 어둠이 곧 멸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선소유(先所有)의 제죄를 말하여 없앤다고 하여 과거에 들어간다고 설하지는 말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하가 제2 왕복중현이다. 두 번의 문답이 있다. 초번은 참회의 도리를 드러내고 후번은 참회의 행법을 드러낸다. 초번의 문의는, 선죄(先罪)를 참회한다고 이름하는데, 선죄는 과거에 들어가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선죄가 지금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에 들어간다면 어찌하여 없는 죄에 참회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답에서 그러하다고 함은 이와 같이 선죄가 과거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에서 참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선소작죄(先所作罪)가 본식(本識)을 훈(熏)하여 종자(種子)가 항상 흘러 현재에 있으니, 이 도리로 말미암아 아직 과거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참회는 능치(能治)가 생할 때 저 죄종(罪種)이 현재에 흐르지 않게 한다. 등이 생할 때 방이 어두운 것이 비로소 멸하는 것처럼, 죄종이 지금의 현재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에 비로소 과거에 들어간다고 설한다. 단결(斷結)과 이의(異義)가 있는 것은, 저는 생멸도(生滅道)에 약하기 때문에 미생자(未生者)로 하여금 현재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이것은 상속도(相續道)에 나아가기 때문에 선유자(先有者)로 하여금 현재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경에서 말한다: 「아난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참회라 이름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교(經敎)에 의거하여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면, 일입관시(一入觀時)에 제죄가 모두 멸하여 제악취(諸惡趣)를 여의고, 마땅히 정토(淨土)에 생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리라.」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2 참회행법이다. 이 경교에 의거하여 진실관에 든다는 것은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제법상을 타파함이 진실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지전상사진관(地前相似眞觀)이다. 일입관시에 제죄가 모두 멸한다는 것은 일체 죄장이 망상으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지금 제상을 타파하여 진실관에 들어가면 일체 망상경계를 돈파(頓破)한다. 이런 까닭에 제죄가 일시에 모두 멸한다.
━━━ 第六 奉行流通 ━━━
경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고 나서, 그때 아난 및 제보살·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두 크게 환희하며, 심이 결정(決定)을 얻어 불족(佛足)에 정례(頂禮)하고 환희하여 봉행하였다.」
론(論)에서 말한다: 이것이 제6 봉행유통이다. 그 가운데 사구이다. 모두 크게 환희하는 것은 법을 듣고 환희하기 때문이요, 심이 결정을 얻는다는 것은 제의혹을 여의기 때문이며, 불족에 정례한다는 것은 법을 중히 여기고 인(人)을 공경하기 때문이요, 환희봉행이란 행할 때 더욱 기쁘기 때문이다.
甚深且微金剛教 今承仰信略記述
願此善根遍法界 普利一切無遺缺
[매우 깊고 미묘한 금강의 가르침을, 이제 받들어 믿으며 간략히 기술하였으니,
원하오니 이 선근이 법계에 두루하여, 일체를 남김없이 보편적으로 이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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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본 및 번역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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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金剛三昧經論 卷下 한국어 전문가용 번역
저자: 新羅國 沙門 元曉 述 (617~686)
출전: 韓國佛教全書 第1冊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저본: ABC, K1501 v45, p.109b01-140a23
번역 원칙: 불교 전문용어 원어 유지, 논서(論書) 문체, 문답(問答) 구조 명확히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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