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씨전 다른 언어 버전은 아래 블로그에 있습니다.
한자 원문: https://classzangi.tistory.com/311
춘추좌씨전 한글 텍스트 파일입니다.
춘추좌씨전 한글 텍스트 입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은공(隱公)
━━━━━━━━━━━━━━━━━━━━━━━━━━━━━━━━━━━━━━
1.1. 은공 원년 (b.c. 722)
혜공(惠公)의 원비(본부인)는 맹자(孟子)였는데, 맹자가 죽자 계실(이어 얻은 부인)로 성자(聲子)를 맞아들여 은공(隱公)을 낳았다. 송(宋)나라 무공(武公)이 중자(仲子)를 낳았는데, 중자가 태어날 때 손바닥에 '노나라의 부인이 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중자가 우리 노나라로 시집와 환공(桓公)을 낳았고, 얼마 후 혜공이 서거했다. 이 때문에 은공이 즉위하여 환공을 받들고 대리청정을 한 것이다.
[경(經)]
원년 봄, 왕력 정월이다.
3월, 은공이 급(及) 땅과 축(邾)나라의 의부(儀父)와 멸(蔑) 땅에서 맹약했다.
여름 5월, 정(鄭)나라 백작(정 장공)이 공숙단(段)을 언(鄢) 땅에서 이겼다.
가을 7월, 천왕(주나라 평왕)이 재훤(宰咺)을 보내 혜공과 중자의 수의와 부의를 보내왔다.
9월, 송나라 사람들과 숙(宿) 땅에서 맹약했다.
겨울 12월, 제백(祭伯)이 노나라에 왔다.
공자 익사(益師)가 죽었다.
[전(傳)]
원년 봄, 주나라 왕력 정월에 은공의 즉위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대리청정(섭정)을 했기 때문이다.
3월에 은공이 축나라의 의부와 멸 땅에서 맹약했는데, 축나라 군주의 이름은 크(克)였다. 아직 주나라 왕실의 정식 작명을 받지 못했으므로 작위를 기록하지 않고 '의부'라 불렀으니, 이는 그를 귀하게 여겨준 것이다. 은공은 섭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축나라와 화친을 맺고자 하여 멸 땅에서의 맹약을 맺었다.
여름 4월, 비백(費伯)이 군대를 이끌고 랑(郎) 땅에 성을 쌓았으나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은공의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개 옛날에 정나라 무공(武公)이 신(申)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니 무강(武姜)이라 했다. 그녀가 장공(莊公)과 공숙단(段)을 낳았다. 장공은 난산(잠을 자다가 아이가 나오는 것처럼 거꾸로 나오는 것)으로 태어나 강씨를 깜짝 놀라게 했으므로 이름을 '오생(寤生)'이라 지었고, 이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 반면 공숙단을 사랑하여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무공에게 굳이 청했으나 무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공이 즉위하자 강씨는 단을 위해 제(制) 땅을 달라고 청했다. 장공이 말하기를 "제 땅은 험준한 요새여서 괵숙(虢叔)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다른 읍이라면 무엇이든 명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경(京) 땅을 청하니 그곳에 단을 살게 하고 그를 '경성대숙(京城大叔)'이라 불렀다.
제중(祭仲)이 말하기를 "도성의 성곽이 백 자(雉)를 넘는 것은 국가의 해악입니다. 선왕의 제도에 따르면 큰 읍은 국도의 3분의 1을 넘지 못하고, 중간은 5분의 1, 작은 곳은 9분의 1입니다. 지금 경 땅은 법도에 넘치니 제도가 아닙니다. 임금께서 감당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니, 장공이 "강씨가 원하는데 어찌 해를 피하겠소?" 했다. 제중이 답하기를 "강씨가 어찌 만족할 리 있겠습니까! 일찌감치 대책을 세워 그 세력이 넝쿨처럼 뻗어 나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넝쿨이 우거지면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잡초도 오히려 제거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임금의 총애를 받는 아우임에야 더하겠습니까!" 하니, 장공이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스스로 파멸할 것이니, 그대는 잠시 기다려 보시오" 했다.
얼마 후 대숙(공숙단)이 서쪽 변방과 북쪽 변방에 명하여 자신과 정나라 조정을 동시에 섬기도록(양다리를 걸치도록) 했다. 공자 여(呂)가 말하기를 "국가는 두 주인을 감당할 수 없으니 임금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 만약 나라를 대숙에게 주려 하신다면 제가 그를 섬기겠고, 주지 않으시려거든 곧 그를 제거하여 백성들의 마음에 딴뜻이 생기지 않게 하십시오" 했다. 장공이 "그럴 것 없다. 스스로 화를 부를 것이다" 했다.
대숙이 또 양다리를 걸치게 했던 변방의 고을들을 거두어 자기 읍으로 삼으니 름연(廩延)에까지 이르렀다. 자봉(공자 여)이 "이제 되었습니다. 영토가 넓어지면 무리를 얻게 됩니다" 하니, 장공이 "불의하여 군주와 친하지 못하고 백성과 화목하지 못하니, 영토가 넓어질수록 붕괴할 뿐이다" 했다.
대숙이 성을 보수하고 무리를 모으며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보병과 전차를 갖추어 장차 정나라를 습격하려 하고, 어머니 강씨가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장공이 그 거사 기일을 듣고는 "되었다!" 하고는 자봉에게 전차 200대를 이끌고 경 땅을 치게 했다. 경 땅의 백성들이 대숙 단을 배반하니, 단은 언(鄢) 땅으로 들어갔고 장공은 언 땅에서 그를 쳤다. 5월 신축일에 대숙은 공(共)나라로 도망쳤다.
경(經)에 '정백이 언 땅에서 단을 이겼다'고 쓴 것은, 단이 아우답지 못했으므로 아우라 부르지 않은 것이고, 마치 두 나라의 군주가 싸운 것 같았기에 '이겼다[克]'고 한 것이다. 장공을 '정백'이라 칭한 것은 동생을 가르치지 못한 실책을 비꼰 것이다. 이를 정나라의 본뜻이라 부르며, '도망쳤다'고 쓰지 않은 것은 정 장공이 동생을 쫓아내기 어려워했던 속사정을 참작한 것이다.
마침내 장공은 강씨를 성영(城潁)에 안치하고 맹세하기를 "황천(지하 세계)에 이르기 전에는 서로 만나지 않으리라!" 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영고숙(潁考숙)이 영곡을 지키는 관리가 되어 이 소식을 듣고 장공에게 바칠 물건이 있다며 찾아왔다. 장공이 그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음식을 먹으면서 고기를 남겨두었다. 장공이 그 이유를 물으니 "소인에게 어머니가 계시어 소인의 음식은 다 맛보셨으나, 오직 임금님의 고깃국은 맛보지 못하셨기에 남겨서 어머니께 드리고자 합니다" 했다. 장공이 이르기를 "그대는 어머니가 계셔 드릴 수 있으나, 슬프게도 나만은 홀로 없구려!" 했다. 영고숙이 "감히 여쭙건대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니, 장공이 그 까닭을 말하고 후회하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영고숙이 대답하기를 "임금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만약 땅을 파서 샘물이 솟아나게 한 뒤, 굴(터널)을 만들어 서로 만나신다면 그 누가 맹세를 어겼다 하겠습니까?" 하니 장공이 그 말을 따랐다.
장공이 굴속으로 들어가며 시를 지어 읊기를 "큰 굴 속이라 그 즐거움이 융융하구나!" 했고, 강씨가 굴 밖으로 나오며 시를 지어 읊기를 "큰 굴 밖이라 그 즐거움이 화락하구나!" 하니, 마침내 처럼 모자 관계가 회복되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영고숙은 순전한 효자이다. 그 어머니를 사랑한 마음이 장공에게까지 미쳤구나. 《시경》에 이르기를 '효자의 효심이 다하지 않으니 영원히 너의 무리에게 하사하리라'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했다.
가을 7월, 천왕(평왕)이 재훤을 보내 혜공과 중자의 수의와 부의를 보내왔는데, 시기가 늦었고 또한 중자(子氏)가 아직 서거하지도 않았는데 보냈으므로 재훤의 이름을 기록하여 비판한 것이다. 천자는 죽은 지 7월 만에 장사를 지내니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참석하고, 제후는 5월 만에 장사 지내니 동맹한 이들이 참석하며, 대부(大夫)는 3월 만에 장사 지내니 동료들이 참석하고, 선비는 한 달을 넘겨 장사 지내니 외척들이 참석한다. 죽은 이를 기리는 물품(贈)은 시신이 남아있을 때 미쳐야 하고, 산 이를 위로하는 상가 부의(弔)는 슬픔이 가시기 전에 미쳐야 하니, 미리 흉사를 예비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8월, 기(紀)나라 사람이 이(夷)나라를 쳤으나 이나라가 노나라에 고하지 않았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메뚜기 떼(蜚)가 나타났으나 재앙이 되지 않았으므로 역시 기록하지 않았다.
혜공의 말년에 노나라는 황(黃) 땅에서 송나라 군대를 패배시킨 적이 있었다. 은공이 즉위하자 송나라와 화친을 구하여 9월에 송나라 사람들과 숙 땅에서 맹약했으니, 이로써 비로소 교류가 통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경신일에 혜공을 다시 장사 지냈는데(改葬), 은공이 몸소 임하지 않았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혜공이 서거했을 때 송나라와의 전쟁이 있었고 태자가 어려서 장례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장사를 지낸 것이다. 위(衛)나라 후작이 장례에 참석하러 왔으나 은공을 만나지 못했으므로 역시 기록하지 않았다.
정나라 공숙단의 난 때, 그의 아들 공손활(公孫滑)이 위나라로 도망치자 위나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정나라를 쳐서 름연을 빼앗았다. 이에 정나라 사람들은 주나라 왕실의 군대와 괵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남쪽 변방을 쳤으며, 축나라에 군대를 청했다. 축나라 군주가 공자 예(豫)에게 사사로이 청탁하자 예가 가기를 청했으나 은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가 마침내 멋대로 가서 축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과 익(翼) 땅에서 맹약했으니, 은공의 명령이 아니었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남문을 새로 지은 것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역시 은공의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2월, 제백이 온 것은 주왕의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부(衆父)가 죽었을 때 은공이 소렴(小斂, 시신에 옷을 입히는 예)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죽은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다.
━━━━━━━━━━━━━━━━━━━━━━━━━━━━━━━━━━━━━━
1.2. 은공 2년 (b.c. 721)
[경(經)]
2년 봄, 은공이 잠(潛) 땅에서 융(戎, 오랑캐) 부족과 회동했다.
여름 5월, 거(莒)나라 사람이 향(向) 땅에 쳐들어왔다.
무해(無駭)가 군대를 이끌고 극(極) 땅에 쳐들어왔다.
가을 8월 경창일에 은공이 당(唐) 땅에서 융 부족과 맹약했다.
9월, 기(紀)나라의 열유(裂繻)가 와서 신부를 맞이해 갔다.
겨울 10월, 백희(伯姬)가 기나라로 시집갔다.
기나라 자백(子帛)과 거나라 자(子)가 밀(密) 땅에서 맹약했다.
12월 을묘일에 부인 자씨(子氏)가 서거했다.
정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쳤다.
[전(傳)]
2년 봄, 은공이 잠 땅에서 융 부족과 회동한 것은 혜공 때의 우호를 닦기 위함이었다. 융 부족이 맹약을 청했으나 은공이 사양했다.
거나라 군주가 향 땅에서 아내를 맞이했는데, 향강(向姜)이 거나라에서 편안히 지내지 못하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여름에 거나라 사람이 향 땅에 쳐들어간 것은 강씨를 강제로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사공(司空) 무해가 극 땅에 쳐들어가니 비흠부(費庈父)가 그를 도와 이겼다.
융 부족이 다시 맹약을 청하여 가을에 당 땅에서 맹약했으니, 다시 융 부족과의 우호를 돈독히 한 것이다.
9월, 기나라의 열유가 와서 신부를 맞이해 간 것은 대부가 군주를 위해 장가를 들어준 것이다.
겨울, 기나라 자백과 거나라 군주가 밀 땅에서 맹약한 것은 노나라의 주선 때문이었다.
정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친 것은 공손활이 일으킨 난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
1.3. 은공 3년 (b.c. 720)
[경(經)]
3년 봄, 왕력 2월 기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3월 경술일에 천왕(주나라 평왕)이 붕어했다.
여름 4월 신묘일에 군씨(君氏)가 죽었다.
가을, 무씨(武氏)의 아들이 와서 상가 부의금을 요구했다.
8월 경진일에 송나라 공작 화(和, 송 목공)가 죽었다.
겨울 12월, 제(齊)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석문(石門)에서 맹약했다.
계미일에 송나라 목공을 장사 지냈다.
[전(傳)]
3년 봄, 왕력 3월 임천일에 주나라 평왕(平王)이 붕어했으나, 노나라 조정에 부고가 전해지기를 경술일로 전해졌기 때문에 사관이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여름, 군씨가 죽으니 그녀는 성자(聲子)이다. 제후들에게 부고를 내지 않았고 부인들의 침소에서 곡을 반대로 하지 않았으며 시어머니의 사당에 합사하지 못했으므로 '붕(薨)'이라 하지 않고 '부인'이라 칭하지 않았으며 장례도 기록하지 않았다. 성씨를 기록하지 않고 단지 은공 때문에 '군씨'라고만 부른 것이다.
정나라 무공과 장공은 주나라 평왕의 경사(卿士, 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왕이 괵공(虢公)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려 하자 정 장공이 왕을 원망했다. 왕이 이르기를 "그런 적이 없다"라고 변명하여 마침내 주나라 왕실과 정나라가 서로 인질을 교환하게 되니, 주나라의 왕자 호(狐)가 정나라에 인질로 가고 정나라의 공자 홀(忽)이 주나라 왕실에 인질로 왔다. 평왕이 붕어하자 주나라 조정 사람들은 장차 괵공에게 정권을 주려 했다. 이에 4월에 정나라의 제족(祭足)이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 온(溫) 땅의 보리를 베어 갔고, 가을에는 또 성주(成周)의 벼를 베어 가니 주나라 왕실과 정나라가 서로 원수가 되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신의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인질을 바꾸어도 이익이 없다. 명백히 용서하고 행동하며 예로써 요약한다면 비록 인질이 없은들 그 누가 이간질하겠는가? 진실로 명백한 신의가 있다면 간(澗), 계(谿), 조(沼), 지(沚)에서 자라는 미미한 풀과 물풀이라도, 그리고 광(筐), 거(筥), 기(錡), 부(釜) 같은 소박한 그릇과 흐르는 빗물이라도 귀신에게 바칠 수 있고 왕공에게 드릴 수 있는 법이다. 하물며 군주가 두 나라의 신의를 맺고 예로써 행함에랴! 또 어찌 인질을 쓰겠는가? 《시경》 국풍의 '채번(采繁)', '채평(采蘋)'과 대아의 '행위(行葦)', '형작(泂酌)'은 모두 충성과 신의를 밝힌 시이다"라고 했다.
무씨의 아들이 와서 부의금을 요구한 것은 왕의 장례를 아직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나라 목공(穆公)이 병이 들자 대사마 공부(孔父)를 불러 상공(殤公, 선공의 아들 여이)을 탁고(託孤)하며 말하기를 "선군(선공)께서 자기 아들 여이(與夷)를 버려두고 과인을 세우셨으니 과인은 감히 잊지 못하겠소. 만약 대부의 덕택으로 머리를 보존하고 죽어 지하에서 선군께서 여이의 안부를 물으신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소? 청컨대 그대는 그를 받들어 사직의 주인으로 삼으시오. 과인은 죽어도 후회가 없겠소" 했다. 공부가 대답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공자 빙(馮, 목공의 아들)을 받들기를 원합니다" 하니, 목공이 말하기를 "안 되오. 선군께서는 과인을 어질다 여겨 사직을 맡기셨는데, 만약 내가 덕을 버리고 양보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군의 결정을 폐하는 것이오. 어찌 어질다 하겠소? 선군의 훌륭한 덕을 빛내는 일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소? 그대는 선군의 공을 폐하지 말라" 하고는, 아들 공자 빙을 정나라로 나가 살게 했다. 8월 경진일에 송 목공이 죽고 상공이 즉위했다. 군자가 말하기를 "송 선공은 사람을 알아볼 줄 알았다고 할 만하다. 목공을 세우니 그 아들이 나라를 누리게 되었고, 의로써 명했구나. 《시경》 상송에 이르기를 '은나라가 명을 받음이 다 마땅하니 온갖 복을 메었도다'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했다.
겨울,齐나라와 정나라가 석문에서 맹약한 것은 루(盧) 땅에서의 맹약을 다진 것이다. 경술일에 정 백작의 수레가 제(濟) 땅에서 뒤집어졌다.
위(衛)나라 장공(莊公)이 제나라 동궁(태자) 득신(得臣)의 누이인 장강(莊姜)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미인이었으나 자식이 없어 위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석인(碩人)'이라는 시를 지었다. 또 진(陳)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니 여규(厲媯)라 했고 효백(孝伯)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여규의 여동생 대규(戴媯)가 환공(桓公)을 낳자 장강이 자기 아들로 삼았다. 공자 주우(州吁)는 총애받는 첩의 아들이었는데, 장공의 귀여움을 받아 군사 부리기를 좋아했으나 장공이 금하지 않으니 장강이 그를 미워했다.
석석(石碏)이 간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쳐 사악한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만, 사치, 음탕, 방탕은 사악함이 비롯되는 원인입니다. 이 네 가지가 오는 것은 총애와 녹봉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장차 주우를 후계자로 세우시려거든 자리를 확정 지으시고, 만약 아직 아니라면 이는 화를 불러들이는 계단이 됩니다. 총애를 받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교만하면서도 아랫사람에게 양보할 줄 알며, 양보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원망하면서도 참을 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또한 천한 이가 귀한 이를 방해하고, 어린이가 어른을 능멸하며, 먼 친척이 가까운 친척을 이간질하고, 새로운 이가 옛사람을 이간질하며, 작은 자가 큰 자에게 더하고, 음란함이 의로움을 깨뜨리는 것을 일컬어 '여섯 가지 거스름(六逆)'이라 합니다. 임금은 의롭고 신하는 행하며,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는 것을 일컬어 '여섯 가지 따름(六順)'이라 합니다. 따름을 버리고 거스름을 본받는 것은 화를 재촉하는 길입니다. 백성의 임금 된 자는 장차 화를 제거하기에 힘써야 하거늘, 도리어 화를 재촉하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했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석석의 아들 석후(厚)가 주우와 함께 놀아나므로 석석이 금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환공이 즉위하자 석석은 벼슬에서 물러나 늙었다.
━━━━━━━━━━━━━━━━━━━━━━━━━━━━━━━━━━━━━━
1.4. 은공 4년 (b.c. 719)
[경(經)]
4년 봄, 왕력 2월에 거나라 사람이 기(杞)나라를 쳐서 무루(牟婁)를 빼앗았다.
무신일에 위나라 주우가 그 군주 완(完, 위 환공)을 시해했다.
여름, 은공이 송나라 공작과 청(清) 땅에서 비공식 회동(遇)을 가졌다.
송나라 공작, 진나라 후작, 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쳤다.
가을, 휘(翬, 공자 예)가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 공작, 진나라 후작, 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과 만나 정나라를 쳤다.
9월, 위나라 사람들이 주우를 복(濮) 땅에서 죽였다.
겨울 12월, 위나라 사람들이 진(晉, 위 선공)을 세웠다.
[전(傳)]
4년 봄, 위나라 주우가 환공을 시해하고 즉위했다. 은공이 송나라 공작과 회동한 것은 숙 땅에서의 맹약을 다지기 위함이었는데, 기일이 되기 전에 위나라에서 난리가 났음을 고해왔다.
여름, 은공이 송나라 공작과 청 땅에서 만났다.
송 상공이 즉위했을 때 공자 빙이 정나라로 망명하자 정나라 사람들이 그를 복위시키려 했다. 위나라 주우가 즉위함에 미쳐, 장차 정나라에 대한 선군의 원수를 갚고 제후들에게 총애를 구해 자기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려고 송나라에 고하기를 "임금께서 만약 정나라를 쳐서 임금의 우환(공자 빙)을 제거하려 하신다면, 임금께서 맹주가 되시고 우리나라는 군사를 보태며 진나라와 채나라가 따르게 할 것이니 이것이 위나라의 소원입니다" 하니, 송나라 사람이 이를 허락했다. 이때 진나라와 채나라는 마침 위나라와 화목했으므로 송나라 공작, 진나라 후작, 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쳐서 그 동문을 포위했다가 5일 만에 돌아갔다.
은공이 중중(衆仲)에게 묻기를 "위나라 주우가 목적을 이루겠소?"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덕으로써 백성을 화합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난리 장동으로 화합하게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난리로 다스리는 것은 마치 실을 다스리려다 엉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우는 군사력만 믿고 잔인하며, 군사를 믿으니 무리가 없고 잔인하니 친한 이가 없습니다. 무리가 배반하고 친한 이가 떠나니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무릇 병사(군사)는 불과 같아서, 거두지 않으면 장차 스스로를 불태울 것입니다. 주우는 그 군주를 시해하고 그 백성을 사납게 부리니, 이로써 좋은 덕을 힘쓰지 않고 난리로 성공하고자 하니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했다.
가을, 제후들이 다시 정나라를 치니 송나라 공작이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다. 은공이 거절하자 우부(羽父, 공자 예의 자)가 군대를 이끌고 가겠다고 청했으나 은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청하고 떠났으므로 경(經)에 '휘가 군대를 이끌고 갔다'고 쓴 것은 그의 행동을 미워한 것이다. 제후의 군대는 정나라의 보병을 패배시키고 그 벼를 베어 가지고 돌아갔다.
주우가 능히 그 백성을 화합하게 하지 못하자, 석후가 그 아버지 석석에게 군주의 자리를 안정시킬 방법을 물었다. 석석이 "주왕을 알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어떻게 알현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 석석이 "진(陳)나라 환공이 마침 주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고, 진나라와 위나라가 마침 화목하니, 만약 진나라 조정에 가서 청탁을 사주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석후가 주우를 따라 진나라로 가니, 석석이 사람을 보내 진나라에 고하기를 "위나라는 편협하고 작으며 노신은 늙어 망령 들었으니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진실로 우리 군주를 시해한 자들이니 감히 즉시 도모하시기를 청합니다" 했다. 진나라 사람이 그들을 붙잡고 위나라가 직접 와서 처결해 달라고 청했다. 9월, 위나라 사람들이 우재(右宰) 추(醜)를 보내 주우를 복 땅에서 처형했고, 석석은 자기 가신인 노양견(獳羊肩)을 보내 석후를 진나라에서 처형했다.
군자가 말하기를 "석석은 순전한 신하이다. 주우를 미워함에 자기 아들 석후까지 함께 처단했으니, 대의를 위해 친족을 멸함(大義滅親)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공자 진(晉)을 형(邢)나라에서 맞이해 오니 겨울 12월에 선공(宣公)이 즉위했다. 경에 '위나라 사람이 진을 세웠다'고 쓴 것은 대중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
1.5. 은공 5년 (b.c. 718)
[경(經)]
5년 봄, 은공이 당(棠) 땅에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구경했다.
여름 4월, 위나라 환공을 장사 지냈다.
가을, 위나라 군대가 성(郕)나라에 들어갔다.
9월, 중자(仲子)의 사당을 낙성하고 비로소 육우(六羽, 6인무)의 춤을 올렸다.
축나라 사람과 정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쳤다.
명(螟, 마디충) 해충이 끓었다.
겨울 12월 신사일에 공자 구(彄, 장희백)가 죽었다.
송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치고 장갈(長葛)을 포위했다.
[전(傳)]
5년 봄, 은공이 장차 당 땅으로 가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려 하자, 장희백(臧僖伯)이 간하여 말하기를 "무릇 제물이 제사라는 큰일을 치르기에 부족하고 그 재목이 기용(제사 도구)을 갖추기에 부족하다면 군주는 거동하지 않는 법입니다. 군주는 백성을 법도와 제도 안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군사 일을 훈련하여 법도를 측정하는 것을 '궤(軌)'라 하고, 재목을 취하여 기물의 채색을 빛내는 것을 '물(物)'이라 합니다. 법도에 맞지 않고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을 '정치를 어지럽힌다(亂政)'고 하니, 어지러운 정치가 자주 행해지면 파멸하는 까닭이 됩니다. 그러므로 봄 사냥(蒐), 여름 사냥(苗), 가을 사냥(翬), 겨울 사냥(狩)은 모두 농사번기(농한기)를 틈타 군사 일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3년마다 군대를 조련하고, 조정에 들어와 군대를 정돈하며, 돌아와 잔치를 베풀어 군대의 수효를 헤아리고 깃발의 문채를 밝히며 귀천을 밝히고 등급을 구별하며 연장자와 연소자의 순서를 따르고 위엄 있는 의식을 익히는 것입니다. 새와 짐승의 고기가 제사 제단에 오르지 못하고, 가죽, 이빨, 뼈, 뿔, 털, 깃털이 제사 기물에 쓰이지 못한다면 군주는 활을 쏘지 않는 것이 고대의 제도입니다. 저 산림과 천택의 산물, 기물의 자재, 종복들의 일, 관청의 직무 같은 것은 군주가 직접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했다. 은공이 말하기를 "나는 장차 영토를 순시하려는 것이오" 하고는 마침내 가서 물고기를 잡아 나열해 두고 구경했다. 희백은 병을 핑계 대고 따르지 않았다. 경에 '은공이 당 땅에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쓴 것은 예가 아니며 또한 지경이 멀었음을 말한 것이다.
곡옥(曲沃)의 장백(莊伯)이 정나라 사람, 형(邢)나라 사람과 함께 주나라 왕실의 익(翼) 땅을 치니, 왕이 윤씨(尹氏)와 무씨(武氏)를 보내 그들을 돕게 하매 익후(翼侯)가 수(隨)나라로 도망쳤다.
여름, 위나라 환공을 장사 지냈으니, 위나라의 난리 때문에 장례가 늦어진 것이다.
4월, 정나라 사람이 위나라의 목장(牧) 땅을 침범한 것은 동문의 싸움에 대한 보복이었다. 위나라 사람이 연(燕)나라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치니, 정나라의 제족, 원번(原繁), 설가(洩駕)가 삼군(三軍)으로 그 전방에 진을 치고, 만백(曼伯)과 자원(子元)으로 하여금 군대를 매복시켜 그 후방에 진을 치게 했다. 연나라 사람들은 정나라의 삼군만을 두려워하고 제(制) 땅의 군대가 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6월에 정나라의 두 공자가 제 땅의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 군대를 북제(北制)에서 패배시켰다. 군자가 말하기를 "뜻밖의 일을 대비하지 않으면 군대를 이끌 수 없다"고 했다.
곡옥이 왕을 배반하자, 가을에 왕이 괵공(虢公)에게 명하여 곡옥을 치게 하고 애후(哀侯)를 익 땅에 세웠다.
위나라의 난리 때 성(郕)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침범했었으므로 위나라 군대가 성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9월, 중자의 사당을 완성하고 장차 만무(萬舞)를 추려 하여 은공이 중중에게 깃털의 수효를 물었다. 대답하기를 "천자는 8열(八佾), 제후는 6열, 대부는 4열, 선비는 2열을 씁니다. 무릇 춤이란 팔음(八音)을 조절하고 팔풍(八風)을 행하는 것이므로 8 이하로부터 내려갑니다" 하니 은공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비로소 '육우'를 바쳤으니 처음으로 6열의 춤을 쓴 것이다.
송나라 사람이 축(邾)나라의 밭을 빼앗자 축나라 사람이 정나라에 고하기를 "임금께서 송나라에 대한 원한을 푸시도록 우리 고을이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했다. 정나라 사람이 주나라 왕실의 군대를 만나 함께 송나라를 쳐서 그 외성(郛)으로 들어가니 동문의 싸움에 대한 보복이었다. 송나라 사람이 사람을 보내 위급함을 고해오자 은공이 그들이 외성까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장차 구원하려 하여 사자에게 묻기를 "군대가 어디까지 미쳤소?" 하니, 대답하기를 "아직 도성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했다. 은공이 노하여 마침내 그만두고 거절하며 사자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과인에게 명하여 사직의 재난을 함께 근심하자 하셨거늘, 이제 사자에게 물으니 군대가 아직 도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니 과인이 감히 알 바가 아니오" 했다.
겨울 12월 신사일에 장희백이 죽었다. 은공이 말하기를 "숙부께서 과인에게 원망이 있으셨으나 과인은 감히 잊지 못하겠소" 하고는 장례를 한 등급 더해 주었다.
송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치고 장갈을 포위한 것은 외성에 처들어온 싸움에 대한 보복이었다.
━━━━━━━━━━━━━━━━━━━━━━━━━━━━━━━━━━━━━━
1.6. 은공 6년 (b.c. 717)
[경(經)]
6년 봄, 정나라 사람이 와서 평화 조약을 갱신(渝平)했다.
여름 5월 신유일에 은공이 제나라 후작과 만나 애(艾) 땅에서 맹약했다.
가을 7월이다.
겨울, 송나라 사람이 장갈(長葛)을 차지했다.
[전(傳)]
6년 봄, 정나라 사람이 와서 평화 조약을 갱신한 것은 다시 화친을 맺은 것이다.
익 땅의 아홉 종족과 다섯 관장, 그리고 경부(頃父)의 아들 가부(嘉父)가 진(晉)나라 후작을 수나라에서 맞이하여 악(鄂) 땅에 들여놓으니,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악후(鄂侯)'라 불렀다.
여름, 애 땅에서 맹약한 것은 비로소 제나라와 화평하게 된 것이다.
5월 경신일에 정 백작이 진(陳)나라를 침범하여 대대적으로 노획했다. 지난 해에 정 백작이 진나라에 화친을 청했으나 진나라 후작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부(五父)가 간하기를 "인자한 이와 친하고 이웃과 선하게 지내는 것은 국가의 보배입니다. 임금께서는 정나라를 허락하십시오" 했으나 진후가 말하기를 "송나라와 위나라가 진실로 우리를 어렵게 하는데 정나라 따위가 무엇을 하겠는가?" 하며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군자가 말하기를 "선은 잃어서는 안 되고 악은 길러서는 안 되니, 진 환공을 두고 한 말이구나. 악을 기르고 고치지 않으면 화가 스스로에게 미치리니, 비록 구원하고자 한들 능하겠는가? 《상서》에 이르기를 '악을 기르기는 마치 불이 벌판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가까이 갈 수 없으나 그래도 불을 꺼 버릴 수는 있다' 했고, 주임(周任)이 말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악을 보기를 농부가 부지런히 잡초를 제거하는 것처럼 해야 하니, 베어버리고 뿌리 뽑아 그 근본을 끊어서 다시 자라지 못하게 해야 선한 자가 믿음을 얻는다' 했다"고 했다.
가을, 송나라 사람이 장갈을 차지했다.
겨울, 경시(주나라 도성)에서 기근을 고해오니, 은공이 그를 위해 송, 위, 제, 정나라에 쌀을 사 줄 것을 청했으니 예에 맞다.
정 백작이 주나라 왕실로 가니, 비로소 주 환왕(桓王)을 조현(朝見)한 것인데 왕이 예로써 대우하지 않았다. 주공(周公)이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했을 때 진나라와 정나라에 의지했습니다. 정나라를 선대하여 오는 자들을 권면해도 오히려 이르지 못할까 두렵거늘, 하물며 예로 대우하지 않으시면 정나라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
1.7. 은공 7년 (b.c. 716)
[경(經)]
7년 봄, 왕력 3월에 숙희(叔姬)가 기(紀)나라로 시집갔다.
등(滕)나라 후작이 죽었다.
여름, 중구(中丘)에 성을 쌓았다.
제나라 후작이 그 아우 년(年)을 보내 빙문(聘問)하게 했다.
가을, 은공이 축나라를 쳤다.
겨울, 천왕이 범백(凡伯)을 보내 빙문하게 했는데, 융 부족이 초구(楚丘)에서 범백을 치고 사로잡아 돌아갔다.
[전(傳)]
7년 봄, 등나라 후작이 죽었으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직 동맹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릇 제후가 동맹을 맺으면 이에 이름을 칭하므로 서거하면 이름으로써 부고를 내고 종상을 고하며 후계자를 일컬으니, 이로써 화호(和好)를 잇고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을 일컬어 '예경(禮經)'이라 한다.
여름, 중구에 성을 쌓은 것을 기록한 것은 철이 아닌 때(농번기)에 쌓았기 때문이다.
제나라 후작이 이중년(夷仲年)을 보내 빙문하게 한 것은 애 땅에서의 맹약을 결속하기 위함이었다.
가을, 송나라와 정나라가 화평을 맺으니 7월 경신일에 숙 땅에서 맹약했다. 은공이 축나라를 친 것은 송나라를 위해 토벌해 준 것이다.
이보다 앞서 융 부족이 주나라 왕실에 조공을 바치며 공경들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범백이 그들을 손님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겨울에 왕이 범백을 보내 노나라에 빙문하게 했는데 돌아가는 길에 융 부족이 초구에서 그를 치고 사로잡아 돌아간 것이다.
진(陳)나라와 정나라가 화평을 맺으니, 12월에 진나라 오부가 정나라에 가 맹약에 임했다. 임신일에 정 백작과 맹약하며 삽혈(歃血, 피를 마심)을 함에 마치 잊은 듯이 흐리멍덩하니, 설백(洩伯)이 말하기를 "오부는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맹약에 의지하지 못하겠구나" 했다. 정나라의 양좌(良佐)가 진나라에 가 맹약에 임하여 신사일에 진나라 후작과 맹약했는데 역시 진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았다.
정나라 공자 홀이 왕실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진나라 후작이 딸을 아내로 주기를 청하니 정 백작이 허락하여 마침내 혼인이 성사되었다.
━━━━━━━━━━━━━━━━━━━━━━━━━━━━━━━━━━━━━━
1.8. 은공 8년 (b.c. 715)
[경(經)]
8년 봄, 송나라 공작과 위나라 후작이 수(垂) 땅에서 비공식 회동을 가졌다.
3월, 정나라 백작이 완(宛)을 보내 팽(祊) 땅을 돌려주었고(歸), 경인일에 우리가 팽 땅으로 들어갔다.
여름 6월 기해일에 채(蔡)나라 후작 고부(考父)가 죽었고, 신해일에 숙(宿)나라 남작이 죽었다.
가을 7월 경오일에 송나라 공작, 제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이 와옥(瓦屋)에서 맹약했다.
8월, 채나라 선공(宣公)을 장사 지냈다.
9월 신묘일에 은공이 거나라 사람과 부래(浮來) 땅에서 맹약했다.
명(螟) 해충이 끓었다.
겨울 12월에 무해(無駭)가 죽었다.
[전(傳)]
8년 봄, 제나라 후작이 장차 송나라와 위나라를 화해시키려 하여 회동할 기 기한이 있었는데, 송나라 공작이 예물을 가지고 위나라에 청하여 먼저 만나기를 구하니 위나라 후작이 허락했다. 그러므로 견구(犬丘)에서 만난 것이다.
정나라 백작이 태산(泰山)에 제사 지내는 직분을 풀고 주공(周公)에게 제사 지내고자 하여 태산의 팽 땅을 노나라의 허(許) 땅과 바꾸기를 청했다. 3월에 정 백작이 완을 보내 팽 땅을 돌려주었으니 이는 태산에 제사 지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여름, 괵공 기부(忌父)가 비로소 주나라 왕실의 경사가 되었다.
4월 갑진일에 정나라 공자 홀이 진(陳)나라로 가 신부 규씨(媯氏)를 맞이했다. 신해일에 규씨를 데리고 돌아와 갑인일에 정나라에 들어왔는데, 진나라의 침자(鍼子)가 딸을 송별함에 먼저 동침을 시키고 나중에 사당에 뵙게 하니 침자가 말하기를 "이는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상을 속이는 것이니 예가 아니다. 어찌 자식을 기를 수 있겠는가" 했다.
제나라 사람이 마침내 송나라와 위나라를 정나라와 화해시키니, 가을에 온(溫) 땅에서 모여 와옥에서 맹약하여 동문의 싸움에 대한 원한을 풀었으니 예에 맞다.
8월 병술일에 정 백작이 제나라 사람과 함께 주왕을 조현했으니 예에 맞다.
은공이 거나라 사람과 부래 땅에서 맹약한 것은 기나라와의 우호를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겨울, 제나라 후작이 사람을 보내 세 나라(송, 위, 정)가 화친했음을 고해오니, 은공이 중중을 시켜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세 나라의 도모함을 풀어 그 백성을 모으시니 임금의 은혜입니다. 과인이 명을 들었으니 감히 임금의 밝은 덕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했다.
무해가 죽자 우부가 시호와 씨족(族)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은공이 중중에게 씨족에 대해 물으니 중중이 대답하기를 "천자는 덕을 세우고 태어난 바에 따라 성(姓)을 하사하며, 토지를 나누어 주어 씨(氏)를 명합니다. 제후는 자(字)로써 시호를 삼고 그로써 씨족을 삼으며, 관직에 대대로 공이 있으면 관직으로 씨족을 삼고 읍(邑) 또한 그와 같습니다" 하니 은공이 그의 자를 따라 '전씨(展氏)'라 명했다.
━━━━━━━━━━━━━━━━━━━━━━━━━━━━━━━━━━━━━━
1.9. 은공 9년 (b.c. 714)
[경(經)]
9년 봄, 천자가 남계(南季)를 보내 빙문하게 했다.
3월 계유일에 큰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쳤으며, 경진일에 큰 눈이 내리니 떨다가 죽었다.
여름, 랑(郎) 땅에 성를 쌓았다.
가을 7월이다.
겨울, 은공이 제나라 후작과 방(防) 땅에서 회동했다.
[전(傳)]
9년 봄, 왕력 3월 계유일에 장대비가 내리고 천둥이 쳤으니 장차 비가 시작됨을 기록한 것이다. 경진일에 큰 눈이 내린 것도 이와 같으니 철을 잃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무릇 비가 3일 이상 계속되는 것을 '림(霖)'이라 하고, 평지에 한 자 이상 쌓이는 것을 '대설(大雪)'이라 한다.
여름, 랑 땅에 성을 쌓은 것을 기록한 것은 철이 아닌 때 쌓았기 때문이다.
송나라 공작이 주왕에게 조공하지 않자, 정 백작이 왕의 좌경사로서 왕의 명령을 받들어 토벌하고자 송나라를 쳤다. 송나라는 외성에 쳐들어온 싸움 때문에 은공에게 원한이 있어 노나라에 군사 명령을 고하지 않으니 은공이 노하여 송나라 사신을 끊었다.
가을, 정나라 사람이 왕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송나라를 칠 것을 고했다.
겨울, 은공이 제나라 후작과 방 땅에서 회동한 것은 송나라를 칠 것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
북융(北戎)이 정나라를 침범하자 정 백작이 이를 막았으나 융나라 군대를 근심하며 말하기를 "저들은 보병(徒)이고 우리는 전차(車)이니 우리를 엄습하여 밟고 지나갈까 두렵다" 했다. 공자 돌(突)이 말하기를 "용맹하지만 군기가 없는 자들로 하여금 적을 시험 삼아 공격했다가 속히 도망치게 하시고, 임금께서는 세 곳에 복병을 두어 기다리십시오. 융 부족은 경솔하여 정돈되지 못하고 탐욕스러워 친함이 없으며, 이기면 서로 양보하지 않고 패하면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앞선 자들이 포획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나아가기를 힘쓸 것이니, 나아가다 복병을 만나면 반드시 속히 달아날 것입니다. 뒤에 있는 자들이 구원하지 않으면 곧 이어지지 못할 것이니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융나라 사람의 전방 부대가 복병을 만나 달아나자 축담(祝聃)이 그들을 쫓아 융나라 군대의 허리를 끊고 앞뒤에서 공격하여 모두 죽이니 융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11월 갑인일에 정나라 군대가 융나라 군대를 대패시켰다.
━━━━━━━━━━━━━━━━━━━━━━━━━━━━━━━━━━━━━━
1.10. 은공 10년 (b.c. 713)
[경(經)]
10년 봄, 왕력 2월에 은공이 제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과 중구(中丘)에서 회동했다.
여름, 휘(翬)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과 만나 송나라를 쳤다.
6월 임술일에 은공이 송나라 군대를 견(菅) 땅에서 패배시켰고, 신미일에 고(郜) 땅을 차지했으며, 신사일에 방(防) 땅을 차지했다.
가을, 송나라 사람과 위나라 사람이 정나라에 들어왔고, 송나라 사람, 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이 대(戴)나라를 치니 정 백작이 쳐서 이를 차지했다.
겨울 10월 임오일에 제나라 사람과 정나라 사람이 성(郕)나라에 들어갔다.
[전(傳)]
10년 봄, 왕력 정월에 은공이 제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과 중구에서 회동했고, 계축일에 등(鄧) 땅에서 맹약한 것은 군대의 기한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여름 5월, 우부가 먼저 제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을 만나 송나라를 쳤다.
6월 무신일에 은공이 제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과 노타(老桃)에서 회동했고, 임술일에 은공이 송나라 군대를 견 땅에서 패배시켰다. 경오일에 정나라 군대가 고 땅에 들어가 신미일에 우리 노나라에 돌려주었고, 경진일에 정나라 군대가 방 땅에 들어가 신사일에 우리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군자가 이르기를 "정 장공은 이에 있어서 과연 바르다고 할 만하다. 왕의 명령으로써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하되 그 땅을 탐내지 않고 왕이 내린 작위를 위로했으니 바름의 본체이다" 했다.
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 성나라 사람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가을 7월 경인일에 정나라 군대가 교(郊) 땅에 들어갔으나 오히려 교 땅에 머물고 있을 때, 송나라 사람과 위나라 사람이 정나라에 쳐들어왔고 채나라 사람이 그를 따라 대나라를 쳤다. 8월 임술일에 정 백작이 대나라를 포위하여 계해일에 그를 이기고 세 나라의 군대를 사로잡았다. 송나라와 위나라는 이미 정나라에 들어갔다가 대나라를 치기 위해 채나라 사람을 불러들였는데, 채나라 사람이 노했으므로 화합하지 못하여 패한 것이다.
9월 무인일에 정 백작이 송나라에 들어갔다.
겨울, 제나라 사람과 정나라 사람이 성나라에 들어간 것은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
1.11. 은공 11년 (b.c. 712)
[경(經)]
11년 봄, 등(滕)나라 후작과 설(薛)나라 후작이 와서 조공했다.
여름, 은공이 정나라 백작과 시래(時來)에서 회동했다.
가을 7월 임오일에 은공 및 제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이 허(許)나라에 들어갔다.
겨울 11월 임진일에 은공이 훙(薨, 서거)했다.
[전(傳)]
11년 봄, 등나라 후작과 설나라 후작이 와서 조공하며 상좌의 자리를 다투었다. 설후가 말하기를 "우리 제후국이 먼저 봉해졌다" 하고, 등후가 말하기를 "나는 주나라 왕실의 복정(卜正, 점을 치는 관직)을 지냈고 설나라는 서성(庶姓, 타성 부족)이니 내가 그 뒤에 설 수 없다" 했다. 은공이 우부를 보내 설후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임금과 등나라 군주가 과인에게 욕을 보이고 계십니다. 주나라 속담에 이르기를 '산에 나무가 있으면 목수가 그것을 측정하고, 손님에게 예가 있으면 주인이 그것을 택한다'고 했습니다. 주나라의 종맹(宗盟, 동성 연합)에서 이성은 뒤에 서는 법이니, 과인이 만약 설나라에 조공한다면 감히 여러 임씨(任氏, 설나라 성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께서 만약 과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등나라 군주를 먼저 서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설후가 이를 허락하여 마침내 등후를 먼저 서게 했다.
여름, 은공이 정나라 백작과 래(郲) 땅에서 회동한 것은 허나라를 칠 것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 정 백작이 장차 허나라를 치려 하여 5월 갑진일에 대궁(大宮)에서 병기를 나누어 주는데, 공손알(公孫閼, 자도)이 영고숙과 전차를 다투었다. 영고숙이 전차의 끌채(賈)를 끼고 달리자 자도가 활을 뽑아 들고 쫓아 대규(大逵) 거리에 이르렀으나 미치지 못하니 자도가 노했다.
가을 7월, 은공이 제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과 함께 허나라를 쳤다. 경진일에 허나라 도성에 육박하자 영고숙이 정 백작의 깃발인 모호(蝥弧)를 잡고 먼저 성에 오르니, 자도가 아래에서 그를 겨누어 쏘아 떨어뜨려 죽게 했다. 하숙영(瑕叔盈)이 또 모호를 잡고 성에 올라 깃발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외치기를 "우리 군주께서 성에 오르셨다!" 하니 정나라 군대가 모두 성에 올랐다. 임오일에 마침내 허나라에 들어가니 허 공공(許莊公)이 위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 후작이 허나라 땅을 은공에게 양보하자, 은공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허나라가 공손치 못하다 여겨 과인이 임금을 따라 토벌한 것입니다. 허나라가 이미 그 죄를 자복했으니 비록 임금의 명령이 있으실지라도 과인은 감히 관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정나라 사람에게 주었다. 정 백작은 허나라 대부 백리(百里)로 하여금 허숙(許叔,庄公의 아우)을 받들어 허나라의 동쪽 편방에 살게 하며 이르기를 "하늘이 허나라에 재앙을 내려 귀신이 실로 허나라 군주를 가련히 여기지 않으시고 과인의 손을 빌리셨소. 과인은 오직 한두 명의 부형조차 능히 화합하게 하지 못하거늘 어찌 감히 허나라를 차지하여 내 공으로 삼겠소! 과인에게 아우(공숙단)가 있으나 화협하지 못하여 사방으로 입에 풀칠하며 떠돌게 만들었거늘, 하물며 어찌 오랫동안 허나라를 차지할 수 있겠소? 그대는 허숙을 받들어 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무마하시오. 내가 공손획(公孫獲)으로 하여금 그대를 돕게 하겠소. 만약 과인이 죽어 지하에 묻히고 하늘이 예로써 허나라의 재앙을 후회하여 차라리 이 허공(許公)이 다시 그 사직을 받들게 하신다면 오직 우리 정나라가 청탁을 함에 옛날의 혼인 관계처럼 능히 낮추어 서로 따를 것이요, 다른 씨족이 번성하여 이곳에 육박해 살면서 우리 정나라와 이 땅을 다투게 하지 마시오. 내 자손들이 멸망을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니 하물며 어찌 허나라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겠소? 과인이 그대를 이곳에 처하게 한 것은 오직 허나라를 위함뿐만 아니라 또한 애오라지 내 변방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오" 했다. 이에 공손획을 허나라의 서쪽 편방에 처하게 하며 이르기를 "무릇 너의 기용과 재물 보화를 허나라에 두지 말라. 내가 죽거든 즉시 떠나라. 우리 선군께서 이곳에 새로 읍을 세우셨으나 왕실이 이미 비루해졌고 주나라의 자손들이 날로 그 차례를 잃고 있다. 무릇 허나라는 대악(大岳)의 후손이다. 하늘이 이미 주나라의 덕을 싫어하셨거늘 내가 어찌 허나라와 다투겠는가" 했다.
군자가 이르기를 "정 장공은 이에 있어서 예가 있다고 할 만하다. 예는 국가를 경영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며 백성을 차례 지우고 후손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허나라가 법도가 없어 그를 치고, 복종하매 버려두었으며, 덕을 헤아려 처하게 하고 힘을 헤아려 행했으며, 시세를 보아 움직여 후인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으니 가히 예를 안다고 할 만하다" 했다.
정 백작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돼지를 내게 하고 대오마다 개와 닭을 내게 하여 영고숙을 쏜 자를 저주하게 했다. 군자가 이르기를 "정 장공은 정사(政)와 형벌(刑)을 잃었다. 정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고 형벌은 사악함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미 덕 정사도 없고 위엄 있는 형벌도 없으니 이로써 사악함에 이르렀거늘, 사악한 자를 저주하니 장차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했다.
왕이 정나라에서 오(鄔), 유(劉), 위(蒍), 우(邘)의 밭을 빼앗고, 정나라 사람에게 소분생(蘇忿生)의 밭인 온(溫), 원(原), 치(絺), 번(樊), 습성(隰郕), 찬모(欑茅), 향(向), 맹(盟), 주(州), 형(陘), 퇴(隤), 회(懷)를 주었다. 군자가 이로써 환왕(桓王)이 정나라를 잃은 것을 알았으니, 용서하고 행하는 것은 덕의 법칙이요 예의 경도이다.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남에게 주니 사람이 따르지 않음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정나라와 식(息)나라 사이에 불화의 말이 있어 식후(息侯)가 정나라를 쳤다. 정 백작이 국경에서 싸우니 식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돌아갔다. 군자가 이로써 식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니, 덕을 헤아리지 못하고 힘을 측정하지 못하며 친족과 친하지 못하고 사리분별을 징계하지 못하며 죄가 있음을 살피지 못하여 다섯 가지 그릇됨(五不韙)을 범하고 남을 쳤으니, 그 군대를 잃음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겨울 10월, 정 백작이 괵나라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쳤다. 임戌일에 송나라 군대를 대패시켰으니 정나라에 들어온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송나라가 노나라에 승패를 고하지 않았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무릇 제후는 명령을 고해오면 기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는다. 군대의 출정에서 잘되고 못된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 비록 나라를 멸함에 이르렀을지라도 패한 자가 패배를 고하지 않고 이긴 자가 승리를 고하지 않으면 사책에 기록하지 않는다.
우부가 환공(桓公)을 죽이기를 청하며 장차 대재(大宰, 총리) 자리를 구하려 하니, 은공이 말하기를 "그가 어리기 때문이었소. 내가 장차 자리를 양위하려 하오. 토구(菟裘) 땅에 집을 짓게 했으니 나는 장차 그곳에서 늙을 것이오" 했다. 우부가 두려워하여 도리어 환공에게 은공을 참소하며 그를 시해하기를 청했다. 은공이 공자 시절에 정나라 사람과 여양(狐壤)에서 싸우다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데, 정나라 사람들이 그를 윤씨(尹氏)에게 가두었다. 윤씨에게 뇌물을 주고 그가 모시는 주신인 종무(鍾巫)에게 기도하여 마침내 윤씨와 함께 돌아와 그 주신을 노나라에 세웠었다. 11월에 은공이 종무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사포(社圃)에서 재계하고 위씨(寪氏)의 집에 묵었다. 임진일에 우부가 자객을 시켜 위씨의 집에서 은공을 시해하고 환공을 세운 뒤 위씨에게 죄를 돌려 토벌하니 죽은 자가 있었다. 은공의 장례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온전한 상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환공(桓公)
━━━━━━━━━━━━━━━━━━━━━━━━━━━━━━━━━━━━━━
1.1. 환공 원년 (기원전 711년)
[경(經)]
원년 봄, 왕력 정월에 노나라 환공이 즉위하였다.
3월, 환공이 수(垂) 땅에서 정나라 백작(정 장공)을 만났는데, 정 백작이 벽옥을 주고 허(許) 땅의 제사 밭을 빌려 가기를 청했다.
여름 4월 정미일에 환공이 정나라 백작과 월(越) 땅에서 동맹을 맺었다.
가을, 큰 홍수가 났다.
겨울 10월이다.
[전(傳)]
원년 봄, 환공이 즉위하여 정나라와 우호를 닦으니, 정나라 사람이 주공(周公)의 제사를 다시 받들기를 청하며 마침내 팽(祊) 땅의 제사 밭을 교환하자고 하므로 환공이 이를 허락했다. 3월에 정 백작이 벽옥을 바치고 허 땅의 제사 밭을 빌린 것은, 주공의 제사를 지내던 팽 땅의 밭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여름 4월 정미일, 환공이 정 백작과 월 땅에서 동맹을 맺은 것은 팽 땅의 밭 교환을 매듭짓기 위함이었다. 맹약하여 이르기를, "맹약을 깨뜨리는 자는 나라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가을에 큰 홍수가 났다. 무릇 평지에 물이 넘쳐나는 것을 '대수(大水)'라 한다.
겨울, 정 백작이 동맹에 보답하는 인사를 왔다.
송나라의 화부독(華父督)이 길에서 공부(孔父)의 아내를 보고는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며 배웅하며 말하기를, "아름답고도 요염하구나"라고 했다.
━━━━━━━━━━━━━━━━━━━━━━━━━━━━━━━━━━━━━━
1.2. 환공 2년 (기원전 710년)
[경(經)]
2년 봄, 왕력 정월 무신일에 송나라의 화부독이 그 군주인 여이(與夷, 송 상공)를 시해하고, 그 대부인 공부를 죽였다.
등나라 자작이 배알하러 왔다.
3월, 환공이 제나라 후작, 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과 직(稷) 땅에서 만나 송나라의 난을 수습했다.
여름 4월, 송나라에서 고(郜)나라의 대정(큰 솥)을 취하여, 무신일에 대묘(태묘)에 들여놓았다.
가을 7월, 기(杞)나라 후작이 배알하러 왔다.
채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등(鄧) 땅에서 만났다.
9월, 기나라에 쳐들어갔다.
환공이 융족(戎族)과 당(唐) 땅에서 동맹을 맺었고, 겨울에 환공이 당 땅으로부터 돌아왔다.
[전(傳)]
2년 봄, 송나라의 화부독이 공부의 집을 공격하여 공부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다. 송 상공이 노하자 화부독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상공을 시해했다. 군자는 화부독에 대해 "그 군주를 안중에 두지 않는 마음이 있은 뒤에 악행을 저질렀다"고 보았으므로, [춘추]에 먼저 '그 군주를 시해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직 땅에서 만난 것은 송나라의 난을 수습하기 위함이었으나 실제로는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며, 화씨(화부독)를 재상으로 세워주었다. 송 상공이 즉위한 지 10년 동안 11번이나 전쟁을 치르니 백성들이 명을 견디지 못했다. 공부가는司馬(사마)였고 화부독은 太宰(태재)였는데, 화부독은 백성들이 명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을 틈타 먼저 선전하기를 "사마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소문을 퍼뜨린 뒤, 공부를 죽이고 상공을 시해한 것이다. 그리고 정나라에서 장공(莊公)을 불러다 세워 정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고나라의 대정을 환공에게 뇌물로 주었다. 제나라, 진나라, 정나라가 모두 뇌물을 받았으므로 마침내 송나라 군주를 보좌하게 해 준 것이다.
여름 4월, 송나라에서 고나라의 대정을 취하여 무신일에 대묘에 들여놓으니 이는 예(禮)가 아니었다. 장애백(臧哀伯)이 간하여 말하기를, "백관을 다스리는 군주는 장차 덕을 밝히고 어긋남을 막아 백관을 굽어살펴야 하며, 혹시라도 이를 잃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덕을 밝혀 자손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청묘(淸廟)는 띳집으로 짓고, 군주의 수레인 대로는 부들자리를 깔며, 제사 대갱에는 간을 맞추지 않고, 제사 곡식은 정미하지 않으니, 이는 검소함을 밝히는 것입니다. 곤룡포, 면류관, 폐슬, 옥대, 의상, 행전, 석방, 형, 담, 횡, 선 등은 법도를 밝히는 것입니다. 조솔, 피, 봉, 패, 여, 유, 영 등은 그 수의 등급을 밝히는 것입니다. 화, 룡, 보, 불의 문양은 그 문채를 밝히는 것입니다. 오색을 형상에 맞추는 것은 그 물품의 등급을 밝히는 것입니다. 창, 란, 화, 령의 방울은 그 소리를 밝히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은 그 밝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무릇 덕이란 검소하면서도 법도가 있고, 오르내림에 수의 등급이 있으며, 문물로써 기록하고 소리와 밝음으로써 드러내어 백관을 굽어살피니, 백관이 이에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기율을 감히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덕을 멸하고 어긋난 짓을 세우며 그 뇌물로 받은 기물을 대묘에 두어 백관에게 밝히 보이시니, 백관이 이를 본받는다면 또 누구를 벌하시겠습니까? 국가의 망함은 관리가 사악해지기 때문입니다. 관리가 덕을 잃는 것은 총애와 뇌물이 밝히 드러나기 때문인데, 고나라의 솥을 묘당에 두었으니 이보다 더 심하게 드러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왕이 상나라를 이기고 구정(九鼎)을 낙읍으로 옮겼을 때도 의로운 선비들은 혹 그것을 비판했는데, 하물며 어긋나고 어지러운 난리 속에서 얻은 뇌물 기물을 대묘에 밝히 두려 하시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환공은 듣지 않았다. 주나라의 내사(內史)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장손달(장애백)은 노나라에서 후손이 번창하겠구나! 군주가 어긋나도 덕으로써 간하기를 잊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가을 7월, 기나라 후작이 대묘에 배알하러 왔으나 공경하지 않았다. 기후가 돌아가자 노나라는 그를 칠 것을 모의했다.
채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등 땅에서 만난 것은 비로소 초(楚)나라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9월, 기나라에 쳐들어간 것은 불경함을 토벌한 것이다.
환공이 융족과 당 땅에서 동맹을 맺은 것은 옛 우호를 닦은 것이다.
겨울, 환공이 당 땅에서 돌아와 묘당에 고했다. 무릇 군주가 행차할 때는 종묘에 고하고, 돌아와서는 주연을 베풀어 잔을 들고 공훈을 책에 기록하니 이것이 예이다. 단독으로 서로 만날 때 갈 때와 올 때 모두 땅의 이름을 일컫는 것은 일을 양보했기 때문이요, 세 나라 이상이 모일 때 갈 때는 땅 이름을 일컫고 올 때는 만남('會')을 일컫는 것은 일이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진(晉)나라 목후(穆侯)의 부인 강씨가 조(條) 땅의 전역 때 태자를 낳으니 이름을 구(仇, 원수)라 지었고, 그 아우는 천무(千畝)의 전투 때 태어나니 이름을 성사(成師)라 지었다. 사복(師服)이 말하기를, "기이하도다, 군주께서 아들들의 이름을 지으심이여! 무릇 이름으로써 의(義)를 제정하고, 의로써 예(禮)가 나오며, 예로써 정치를 체형화하고, 정치로써 백성을 바르게 하니, 이 때문에 정치가 이루어지고 백성이 순종하는 법인데, 이를 바꾸면 난이 일어납니다. 아름다운 짝을 비(妃)라 하고 원망스러운 짝을 구(仇)라 하는 것이 고대의 명칭입니다. 이제 군주께서 태자의 이름을 구라 하시고 아우를 성사라 하셨으니 이미 난의 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형이 쇠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주나라 혜왕 24년에 진나라에 비로소 난이 시작되었으니, 그리하여 곡옥(曲沃)에 환숙(桓叔, 성사)을 봉하고 정후의 손자인 란빈(欒賓)이 그를 보좌하게 했다. 사복이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국가를 세울 때는 근본(본가)은 크게 하고 말단(분가)은 작게 해야 견고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천자는 제후국을 세우고, 제후는 경의 가문을 세우며, 경은 측실을 두고, 대부는 부종을 두며, 사는 예속된 자제들을 두고, 서인과 공장, 장사는 각각 친소의 구분이 있어 모두 등급과 차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이 그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이 윗자리를 넘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일개 甸侯(전후)이면서 곡옥에 나라를 세워 근본이 이미 약해졌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혜왕 30년에 진나라의 반보(潘父)가 소후(昭侯)를 시해하고 환숙을 세우려 했으나 이루지 못해 진나라 사람들이 효후(孝侯)를 세웠다. 혜왕 45년에 곡옥의 장백(莊伯)이 익(翼) 땅을 공격하여 효후를 시해하니 익 땅 사람들이 그 아우 악후(鄂侯)를 세웠다. 악후가 애후(哀侯)를 낳았는데, 애후가 형정(陘庭)의 밭을 침범하니 형정의 남쪽 변방 사람들이 곡옥을 부추겨 익 땅을 치게 했다.
━━━━━━━━━━━━━━━━━━━━━━━━━━━━━━━━━━━━━━
1.3. 환공 3년 (기원전 709년)
[경(經)]
3년 봄 정월, 환공이 영(嬴) 땅에서 제나라 후작을 만났다.
여름, 제나라 후작과 위(衛)나라 후작이 포(蒲) 땅에서 모여 명령을 펴고 서약했다.
6월, 환공이 성(郕) 땅에서 기(杞)나라 후작을 만났다.
가을 7월 임진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는데 완전히 가려졌다(개기일식).
공자 휘(翬)가 제나라로 가 아내(문강)를 맞이해왔다. 9월, 제나라 후작이 환(讙) 땅까지 강씨를 배웅했고, 환공이 환 땅에서 제나라 후작을 만났으며 부인 강씨가 제나라로부터 이르렀다.
겨울, 제나라 후작이 그 아우 중년(仲年)을 보내 빙문하게 했다.
풍년이 들었다.
[전(傳)]
3년 봄, 곡옥의 무공(武公)이 익 땅을 공격하여 형정(陘庭)에 주둔했다. 한만(韓萬)이 전차의 어수를 맡고 양홍(梁弘)이 차우(右)가 되어,汾隰(분습)에서 익후(진 애후)를 추격하다가 곁말이 얽혀 멈추어 서니 밤에 그를 사로잡고 란공숙(欒共叔)까지 잡았다.
영 땅에서 만난 것은 제나라와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함이었다.
여름, 제나라 후작과 위나라 후작이 포 땅에서 모여 명령을 편 것은 동맹(피를 흘려 맹세함)을 맺지 않은 것이다.
환공이 성 땅에서 기나라 후작을 만난 것은 기나라가 화친을 청했기 때문이다.
가을, 공자 휘가 제나라에 가 아내를 맞이해 온 것에 대해 선군의 우호를 닦은 까닭에 '공자'라고 기록한 것이다. 제나라 후작이 강씨를 친히 배웅한 것은 예가 아니다. 무릇 군주의 딸이 동등한 격의 나라로 시집갈 때, 자매인 경우에는 상경(上卿)이 배웅하여 선군에 대한 예를 표하고, 공녀인 경우에는 하경(下卿)이 배웅한다. 천자에게 시집갈 때는 제후국의 모든 경들이 가고 군주는 친히 배웅하지 않으며, 작은 나라로 시집갈 때는 상대부(上大夫)가 배웅한다.
겨울, 제나라의 중년이 빙문하러 온 것은 부인의 입궁에 대해 답례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예(芮)나라 백작 만(萬)의 어머니 예강(芮姜)이 예백에게 총애를 받는 이가 많은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그를 쫓아내니, 예백이 나가 위(魏)나라에 거주했다.
━━━━━━━━━━━━━━━━━━━━━━━━━━━━━━━━━━━━━━
1.4. 환공 4년 (기원전 708년)
[경(經)]
4년 봄 정월, 환공이 랑(郎) 땅에서 사냥했다.
여름, 천왕(주 환왕)이 재관(宰) 채거백구(宰渠伯糾)를 보내 빙문하게 했다.
[전(傳)]
4년 봄 정월에 환공이 랑 땅에서 사냥한 것을 기록한 것은 철에 맞는 예였기 때문이다.
여름, 주나라의 재관 채거백구가 빙문하러 왔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가을, 진(秦)나라 군대가 예(芮)나라를 침공했다가 패배했으니, 예나라를 작게 여겼기 때문이다.
겨울, 주나라 왕의 군대와 진나라 군대가 위(魏)나라를 포위하고 예백 만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
1.5. 환공 5년 (기원전 707년)
[경(經)]
5년 봄 정월 갑술일과 기축일에 진(陳)나라 후작 포(鮑, 진 환공)가 별세했다.
여름, 제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기(紀)나라로 갔다.
천왕이 잉숙(仍叔)의 아들을 보내 빙문하게 했다.
진나라 환공을 장사 지냈다.
축구(祝丘)에 성을 쌓았다.
가을, 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 진(陳)나라 사람이 왕을 따라서 정나라를 쳤다.
기우제(대우)를 지냈다.
메뚜기 떼(충해)가 일었다.
겨울, 주(州)나라 공작이 조(曹)나라로 갔다.
[전(傳)]
5년 봄 정월 갑술일과 기축일에 진후 포가 별세했다고 두 번 부고를 보낸 것은, 당시에 진나라에 난이 일어나 문공(文公)의 아들 타(佗)가 태자 면(免)을 죽이고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환공이 위독한 와중에 난이 일어나 국인들이 분산되었으므로 부고가 두 번 이른 것이다.
여름, 제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기나라를 조하(朝賀)했는데, 이는 기나라를 기습하고자 함이었으나 기나라 사람들이 이를 눈치챘다.
주왕이 정 백작의 정권을 빼앗자 정 백작이 조회하지 않았다.
가을, 주왕이 제후국의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치니 정 백작이 이를 방어했다. 왕이 중군을 맡고 괵공(虢公) 임부(林父)가 우군을 이끌었으며 채나라와 위나라 군사가 이에 속했다. 주공(周公) 흑견(黑肩)이 좌군을 이끌었고 진(陳)나라 군사가 이에 속했다. 정나라의 자원(子元)이 좌거(왼쪽 방어선)를 맡아 채나라와 위나라 군대를 상대하고, 우거를 맡아 진나라 군대를 상대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진나라는 지금 난리가 나서 백성들에게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만약 먼저 공격하면 반드시 달아날 것이고, 왕의 군대가 이를 돌아보면 반드시 혼란해질 것입니다. 채나라와 위나라도 견디지 못하고 틀림없이 먼저 달아날 것이니, 그 후에 왕의 중군으로 밀어붙이면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장공이 이를 따랐다. 만백(曼伯)이 우거가 되고 제중족(祭仲足)이 좌거가 되었으며, 원번(原繁)과 고거미(高渠彌)가 중군으로 장공을 받들어 어려(魚麗)의 진형을 펼쳤으니, 전차를 앞에 두고 보병을 뒤에 두어 보병이 전차의 빈틈을 메우게 했다. 두 방어선에 명령하기를 "깃발이 움직이면 북을 울려라"고 했다. 공격이 시작되자 채나라, 위나라, 진나라 군사가 모두 달아나니 왕의 중군이 혼란해졌고, 정나라 군대가 합세하여 공격하니 왕의 군대가 대패했다. 촉담(祝聃)이 활을 쏘아 주왕의 어깨를 맞추었으나 왕은 군대를 잘 수습했다. 촉담이 추격할 것을 청하자 정 장공이 말하기를, "군자는 남의 위에 서려 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감히 천자를 능멸하겠는가? 진실로 스스로를 구했을 뿐이니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과분하다"라고 했다. 밤에 정 백작이 제족(제중족)을 보내 왕을 위로하고 좌우 시종들의 안부를 물었다.
잉숙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가 어렸기 때문이다.
가을에 대우(대기우제)를 지낸 것을 기록한 것은 제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릇 제사는 칩거하던 벌레가 움직일 때 교제(郊祭)를 지내고, 용성(청룡별자리)이 나타날 때 기우제를 지내며, 숙살의 기운이 시작될 때 상제(嘗祭)를 지내고, 벌레가 다시 칩거할 때 증제(烝祭)를 지내는데, 시기를 넘기면 기록한다.
겨울, 순우(淳于)의 공작(주공)이 조나라로 간 것은 자기 나라가 위태로움을 헤아려 마침내 복국하지 않으려 함이었다.
━━━━━━━━━━━━━━━━━━━━━━━━━━━━━━━━━━━━━━
1.6. 환공 6년 (기원전 706년)
[경(經)]
6년 봄 정월, 실(寔)이 왔다.
여름 4월, 환공이 성(成) 땅에서 기(紀)나라 후작을 만났다.
가을 8월 임오일에 대대적인 군사 사열(대열)을 했고, 채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의 타(陳佗)를 죽였다.
9월 정묘일에 자동(子同, 후의 노 장공)이 태어났다.
겨울, 기나라 후작이 배알하러 왔다.
[전(傳)]
6년 봄, 조나라로부터 망명해 온 것에 대해 [춘추]에 '실래(寔來)'라고 기록한 것은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楚)나라 무왕(武王)이 수(隨)나라를 침공하고 위장(薳章)을 보내 화친을 청하게 한 뒤, 하(瑕)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기다렸다. 수나라 사람이 소사(少師)를 보내 살펴보게 하니, 투백비(鬥伯比)가 초왕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한수 동쪽에서 뜻을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삼군을 정돈하고 갑옷과 무기를 갖추어 무력으로 임하니, 저들이 두려워하여 합심해 우리를 도모하므로 틈을 타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수 동쪽의 나라들 중에는 수나라가 가장 크니, 수나라가 자만하면 반드시 작은 나라들을 버릴 것이요, 작은 나라들이 이반하는 것이 초나라의 이익입니다. 소사는 교만하니 군대를 나약하게 보여 저들을 자만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웅솔차비(熊率且比)가 말하기를, "수나라에는 계량(季梁)이 처신하고 있는데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하니, 투백비가 이르기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함이니 소사는 그 군주의 총애를 얻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이 군대의 기세를 부수어 나약하게 보인 채 소사를 맞아들였다. 소사가 돌아가 초나라 군대를 추격할 것을 청하니 수나라 군주가 이를 허락하려 했으나, 계량이 말렸다. 계량이 말하기를, "하늘이 바야흐로 초나라를 도우려 하고 있으니, 초나라가 나약하게 보인 것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군주께서는 어찌 이리 서두르십니까? 제가 듣기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나라는 도(道)가 있고 큰 나라는 음란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른바 도란 백성에게 충성하고 신(神)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백성을 이롭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충성이요, 축관과 사관이 제사 올릴 때 바른 말만 고하는 것이 신의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군주는 욕심을 부리고 있으며, 축관과 사관은 거짓으로 제물을 부풀려 제사를 지내니 저는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수후가 말하기를, "내 제물은 살찌고 온전하며, 제사 곡식도 풍성히 갖추었거늘 어찌 신의가 없단 말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무릇 백성은 신의 주인입니다. 이 때문에 성왕은 먼저 백성을 풍요롭게 성취시킨 뒤에 신에게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므로 희생 제물을 바치며 고하기를 '크고 살찌고 온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백성의 힘이 두루 건재하고 가축들이 크게 번성하여 질병이 없으며 고루 갖추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 곡식을 바치며 고하기를 '깨끗한 곡식이 풍성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세 차례의 농사철에 해가 없어 백성이 화합하고 풍년이 들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술을 바치며 고하기를 ' 아름답고 맑은 술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위아래에 모두 아름다운 덕이 있어 어긋나는 마음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향기란 참소와 악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사철을 힘쓰고 오교(五教)를 닦으며 구족을 친하게 한 뒤에 정결한 제사를 지내니, 이에 백성이 화합하고 신이 복을 내리는 법이라 움직이면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제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있고 귀신은 주인을 잃었으니, 군주께서 홀로 풍성하게 제사 지낸들 무슨 복이 있겠습니까? 군주께서는 우선 정치를 닦고 형제의 나라와 친하게 지내셔야 겨우 화를 면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수후가 두려워하여 정치를 닦았고 초나라는 감히 치지 못했다.
여름에 성 땅에서 만난 것은 기나라가 제나라로 인한 난국을 의논하러 왔기 때문이다.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치자, 제나라가 정나라에 군대를 청했다. 정나라 태자 홀(忽)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구원하여, 6월에 북융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그들의 두 장수인 대량과 소량을 사로잡았으며 갑옷 입은 목 300개를 제나라에 바쳤다. 이에 제후들의 대부들이 제나라를 수수(방어)해 주었는데, 제나라 사람이 음식을 보내주면서 노나라로 하여금 그 순서를 정하게 하자 노나라가 정나라를 뒤로 처지게 했다. 정 태자 홀은 공을 세웠음에도 뒤로 밀리자 노여워했으니, 이 때문에 훗날 랑 땅의 전투가 일어나게 된다. 환공이 제나라와 혼인하기 전에 제후가 문강(文姜)을 정 태자 홀에게 장가보내려 했으나 태자 홀이 거절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태자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제각기 걸맞은 짝이 있는 법인데, 제나라는 대국이라 내 짝이 아닙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라' 했으니 내게 달렸을 뿐이지 대국이 무에 필요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군자가 이르기를 "자신을 위해 도모를 잘했다"고 평했다. 북융의 군대를 패퇴시킨 후 제후가 또 딸을 장가보내려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태자가 말하기를, "제나라에 아무 일도 없을 때도 감히 장가들지 못했거늘, 지금 군주의 명으로 제나라의 급박함을 구원해 주고는 아내를 얻어 돌아간다면 이는 전쟁을 빌미로 혼인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나를 무어라 하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정 백작을 통해 거절했다.
가을에 대열을 행한 것은 수레와 말을 점검한 것이다.
9월 정묘일에 자동이 태어나니 태자가 태어난 예로써 행했다. 대뢰(소, 양, 돼지)의 제물로 영접하고, 무사가 아기를 업고 사의 아내가 젖을 먹였으며, 환공과 문강이 종부(종가의 부인들)와 함께 이름을 지었다. 환공이 신수(申繻)에게 이름 짓는 것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름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으니, 신(信), 의(義), 상(象), 가(假), 류(類)가 그것입니다. 태어날 때의 특징으로 짓는 것을 신이라 하고, 덕성으로 짓는 것을 의라 하며, 닮은 사물로 짓는 것을 상이라 하고, 사물의 이름을 빌리는 것을 가라 하며, 아버지를 닮아 짓는 것을 류라 합니다. 나라 이름, 관직 이름, 산천 이름, 숨은 질병 이름, 축생 이름, 기물과 폐백 이름으로는 짓지 않습니다. 주나라 사람들은 휘(諱, 피해야 할 이름)로써 신을 섬기므로 이름은 결국 죽은 뒤에 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으로 지으면 나라 이름을 폐하게 되고, 관직으로 지으면 관직을 폐하게 되며, 산천으로 지으면 제사를 폐하게 되고, 축생으로 지으면 제물을 폐하게 되며, 기물과 폐백으로 지으면 예를 폐하게 됩니다. 진(晉)나라는 희후(僖侯, 이름이 사도) 때문에 사도(司徒) 관직명을 폐했고, 송나라는 무공(武公, 이름이 사공) 때문에 사공(司공) 관직명을 폐했으며, 우리 선군 헌공과 무공은 두 산의 이름을 폐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사물로는 이름을 짓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했다. 환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태어난 날이 나와 같은 날(同物)이구나" 하고는 이름을 '동(同)'이라 지었다.
겨울, 기나라 후작이 배알하러 와 주왕의 명을 빌려 제나라와 화친하기를 청했으나, 환공은 능히 할 수 없다고 고했다.
━━━━━━━━━━━━━━━━━━━━━━━━━━━━━━━━━━━━━━
1.7. 환공 7년 (기원전 705년)
[경(經)]
7년 봄 2월 기해일에 함구(咸丘)를 불태웠다.
여름, 곡(穀)나라 백작 수(綏)가 배알하러 왔다.
등(鄧)나라 후작 오리(吾離)가 배알하러 왔다.
[전(傳)]
7년 봄, 곡 백작과 등 후작이 배알하러 왔는데, 이름을 기록한 것은 그들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여름, 맹(盟) 땅과 향(向) 땅이 정나라에 화친을 청해놓고는 이내 배반했다.
가을, 정나라 사람, 제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이 맹 땅과 향 땅을 공격하니, 주왕이 맹 땅과 향 땅의 백성들을 겹(郟) 땅으로 이주시켰다.
겨울, 곡옥 백작(곡옥 무공)이 진나라 소자후(小子侯)를 유인하여 죽였다.
━━━━━━━━━━━━━━━━━━━━━━━━━━━━━━━━━━━━━━
1.8. 환공 8년 (기원전 704년)
[경(經)]
8년 봄 정월 기묘일에 증제(겨울 제사)를 지냈다.
천왕이 가부(家父)를 보내 빙문하게 했다.
여름 5월 정축일에 증제(철에 맞지 않는 제사)를 지냈다.
가을, 주(邾)나라를 쳤다.
겨울 10월, 진눈깨비가 내렸다.
제공(祭公)이 와서 마침내 기(紀)나라에서 왕후를 맞이해갔다.
[전(傳)]
8년 봄, 곡옥이 익 땅을 멸했다.
수나라의 소사가 초나라에서 총애를 받자, 투백비가 말하기를 "되었습니다. 원수에게 틈이 생겼으니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여름, 초나라 군주(초 무왕)가 제후들을 심록(沈鹿)에서 소집했는데 황(黃)나라와 수나라가 참석하지 않았다. 위장을 보내 황나라를 책망하게 하고 초 군주는 수나라를 쳤으며, 한수와 회수 사이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계량이 청하기를 "우리가 낮추어 청한 뒤에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군대를 격분시키고 적을 나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소사가 수후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속전속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초나라 군대를 놓칠 것입니다"라 하니 수후가 이에 따라 방어에 나섰다. 초나라 군대를 바라보며 계량이 말하기를, "초나라는 왼쪽(좌군)을 숭상하므로 군주께서는 반드시 우리 좌군으로 왕과 마주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우군을 공격하십시오. 저들의 우군에는 정예병이 없으니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한쪽이 패하면 대중은 흩어지게 마련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소사가 말하기를, "왕을 상대하지 않으면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는 따르지 않았다. 속기(速杞)에서 싸워 수나라 군대가 대패했고 수후는 달아났으며, 투단(鬥丹)이 수후의 융차와 차우를 노획하고 소사를 사로잡았다. 가을에 수나라가 초나라와 화친을 맺으려 하자 초 군주는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투백비가 말하기를, "하늘이 저들의 질병(소사)을 제거해 주었으니 수나라는 아직 멸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겨울, 주왕이 괵중(虢仲)에게 명하여 진 애후의 아우 민(緡)을 진나라 군주로 세우게 했다.
제공이 와서 마침내 기나라에서 왕후를 맞이해 간 것은 예에 부합한다.
━━━━━━━━━━━━━━━━━━━━━━━━━━━━━━━━━━━━━━
1.9. 환공 9년 (기원전 703년)
[경(經)]
9년 봄, 기나라의 계강(季姜)이 경사(낙읍)로 시집갔다.
여름 4월이다.
가을 7월이다.
겨울, 조(曹)나라 백작이 그 세자 사고(射姑)를 보내 배알하게 했다.
[전(傳)]
9년 봄, 기나라의 계강이 경사로 시집갔다. 무릇 제후의 딸이 갈 때 오직 왕후가 되는 경우에만 [춘추]에 기록한다.
파(巴)나라 군주가 한복(韓服)을 보내 초나라에 고하기를 등(鄧)나라와 우호를 맺고 싶다 하니, 초 군주가 도삭(道朔)으로 하여금 파나라 사신을 인도하여 등나라에 빙문하게 했다. 그러나 등나라의 남쪽 변방인 우(鄾) 땅 사람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예물을 빼앗고 도삭과 파나라 사신을 죽였다. 초 군주가 위장을 보내 등나라를 책망했으나 등나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름, 초나라는 투렴(鬥廉)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여 파나라 군대와 함께 우 땅을 포위했다. 등나라의 양생(養甥)과 담생(聃甥)이 군대를 이끌고 우 땅을 구원하러 와 세 차례나 파나라 군대를 추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투렴이 파나라 군대 속에 자신의 군대를 횡으로 진형을 친 뒤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니, 등나라 사람들이 추격하다가 파나라 군대의 등 뒤를 내주게 되어 협공을 받았다. 등나라 군대가 대패했고 우 땅 사람들은 밤에 무너져 흩어졌다.
가을, 괵중, 예백, 양백, 순후, 가백이 곡옥을 쳤다.
겨울, 조나라 태자가 배알하러 오니 상경의 예로써 빈객으로 대접했다. 조 태자에게 잔치를 베풀며 비로소 음악을 연주하는데 태자가 듣고 탄식했다. 시부(施父)가 말하기를, "조나라 태자에게 필시 근심이 있는 듯하구나. 탄식할 자리가 아니로다"라고 했다.
━━━━━━━━━━━━━━━━━━━━━━━━━━━━━━━━━━━━━━
1.10. 환공 10년 (기원전 702년)
[경(經)]
10년 봄 왕력 정월 경신일에 조나라 백작 종생(終生)이 별세했다.
여름 5월, 조나라 환공을 장사 지냈다.
가을, 환공이 도구(桃丘)에서 위나라 후작을 만나려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겨울 12월 병오일, 제나라 사람과 정나라 사람이 성(郕)나라에 쳐들어갔다.
[전(傳)]
10년 봄, 조 환공이 별세했다.
괵중이 그 대부 전부(詹父)를 왕에게 무고했는데, 전부가 조목조목 해명하고 왕의 군대를 빌려 괵나라를 쳤다.
여름, 괵공이 우(虞)나라로 달아났다.
가을, 진(秦)나라 사람들이 예백 만을 예나라에 복위시켰다.
이에 앞서 우나라의 우숙(虞叔)이 보옥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공(虞公)이 이를 요구하자 주지 않았다. 이내 후회하며 말하기를, "주나라 속담에 '평범한 사람은 죄가 없으나 보옥을 품고 있으면 그것이 죄가 된다'고 했으니, 내가 이것을 어디다 쓰겠는가? 재앙을 살 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바쳤다. 그러자 우공이 또 보검을 요구하니, 우숙이 말하기를 "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면 결국 내게 해가 미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우공을 공격하니, 이 때문에 우공이 공지(共池)로 달아났다.
겨울, 제나라, 위나라, 정나라가 와서 랑 땅에서 싸웠는데, 우리(노나라)에게 명분이 있었다. 이에 앞서 북융이 제나라를 괴롭힐 때 제후들이 구원해 주었고 정나라 공자 홀이 공을 세웠다. 제나라 사람이 제후들에게 음식을 보낼 때 노나라로 하여금 순서를 매기게 하자, 노나라는 주나라의 반차(등급 순서)를 기준으로 정나라를 뒤로 처지게 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분노하여 제나라에 군대를 청했고, 제나라 사람이 위나라 군대로 이를 도왔으므로 [춘추]에 '침벌(侵伐)'이라 쓰지 않은 것이다. 제나라와 위나라를 먼저 쓴 것은 왕실의 작위(후작, 부작) 때문이다.
━━━━━━━━━━━━━━━━━━━━━━━━━━━━━━━━━━━━━━
1.11. 환공 11년 (기원전 701년)
[경(經)]
11년 봄 정월, 제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이 악조(惡曹)에서 동맹을 맺었다.
여름 5월 계미일에 정나라 백작 오생(寤生, 정 장공)이 별세했다.
가을 7월, 정 장공을 장사 지냈다.
9월, 송나라 사람들이 정나라의 제중(祭仲)을 체납(체포)하자, 돌(突, 정 여공)이 정나라로 돌아갔고 정나라의 홀(忽, 정 소공)은 위(衛)나라로 달아났다.
유(柔)가 절(折) 땅에서 송나라 공작, 진나라 후작, 채나라 숙작과 만났다.
환공이 부종(夫鍾)에서 송나라 공작을 만났고, 겨울 12월에 환공이 감(闞) 땅에서 송나라 공작을 만났다.
[전(傳)]
11년 봄, 제나라, 위나라, 정나라, 송나라가 악조에서 동맹을 맺었다.
초나라의 굴하(屈瑕)가 이(貳)나라, 진(軫)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운(鄖)나라 사람이 포소(蒲騷)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수나라, 교(絞)나라, 주(州)나라, 료(蓼)나라와 합세하여 초나라 군대를 치려 했다. 막오(莫敖, 관직명)인 굴하가 이를 근심하자 투렴이 말하기를, "운나라 군대가 그 교외에 주둔하고 있으니 반드시 경계하지 않을 것이며, 또 날마다 네 나라의 군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군주께서는 교영(郊郢)에 주둔하여 네 나라의 군대를 방어하시고, 저는 정예병을 이끌고 밤에 운나라를 기습하겠습니다. 운나라는 기다리는 마음이 있는 데다 제 성벽만 믿고 있어 싸울 투지가 없을 것이니, 만약 운나라 군대를 깨뜨리면 네 나라는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막오가 이르기를 "왕께 군대를 더 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군대의 승리는 화합에 있는 것이지 머릿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나라가 주나라를 당해내지 못한 것은 군주께서도 들으신 바입니다. 군대를 정돈하여 나왔거늘 또 어찌 더 청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막오가 "점괘를 보아라" 하니 대답하기를, "점이란 의심을 결단하는 것인데 의심이 없거늘 어찌 점을 치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포소에서 운나라 군대를 깨뜨리고 결국 동맹을 맺고 돌아왔다.
정 소공(태자 홀)이 북융을 패퇴시켰을 때 제나라 사람이 장가보내려 하니 소공이 거절했었다. 그때 제중이 말하기를, "반드시 장가를 드셔야 합니다. 군주(정 장공)께서는 내총(안에 둔 총애)이 많으신데 공자께서는 큰 후원자가 없으시니 장차 서지 못할 것입니다. 세 공자가 모두 군주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라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여름, 정 장공이 별세했다. 이에 앞서 제(祭) 땅의 봉인(封人)인 중족(제중)이 장공에게 총애를 받아 장공이 그를 경으로 삼았다. 그가 장공을 위해 등만(鄧曼)에게 장가들게 하여 소공을 낳았으므로 제중이 그를 세운 것이다. 송나라 옹씨(雍氏)의 딸이 정 장공에게 시집와 옹길(雍姞)이라 했는데 여공(돌)을 낳았다. 옹씨 문중이 송 장공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송나라가 제중을 유인하여 체포하고는 말하기를 "돌을 세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또한 여공을 체포하여 뇌물을 요구하니, 제중이 송나라 사람과 동맹을 맺고 여공을 데리고 돌아와 그를 세웠다.
가을 9월 정해일에 소공이 위나라로 달아났고, 기해일에 여공이 즉위했다.
━━━━━━━━━━━━━━━━━━━━━━━━━━━━━━━━━━━━━━
1.12. 환공 12년 (기원전 700년)
[경(經)]
12년 봄 정월이다.
여름 6월 임인일, 환공이 곡지(曲池)에서 기(紀)나라 후작, 거(莒)나라 자작과 동맹을 맺었다.
가을 7월 정해일, 환공이 곡구(穀丘)에서 송나라 공작, 연(燕)나라 사람과 동맹을 맺었다.
8월 임진일, 진(陳)나라 후작 약(躍)이 별세했다.
환공이 허(虛) 땅에서 송나라 공작을 만났다.
겨울 11월, 환공이 귀(龜) 땅에서 송나라 공작을 만났다.
경술일, 환공이 정나라 백작과 무부(武父)에서 동맹을 맺었다.
경술일, 위(衛)나라 후작 진(晉)이 별세했다.
12월, 정나라 군대와 함께 송나라를 쳤고, 정미일에 송나라에서 싸웠다.
[전(傳)]
12년 여름, 곡지에서 동맹을 맺은 것은 기나라와 거나라를 화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환공이 송나라와 정나라를 화해시키고자 하여, 가을에 환공이 송 공작과 구독의 언덕(句瀆之丘)에서 동맹을 맺었으나 송나라가 성의를 보일지 알 수 없었으므로 또 허 땅에서 만났고, 겨울에 또 귀 땅에서 만났다. 송 공작이 화해를 거절하므로 정 백작과 무부에서 동맹을 맺고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쳐서 싸웠으니, 송나라가 신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군자가 이르기를 "진실로 신의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동맹도 유익함이 없다. 시경에 이르기를 '군주가 자주 동맹을 맺으니 난리가 이로 인해 자라난다'고 했으니 신의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초나라가 교(絞)나라를 쳐서 그 남문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막오 굴하가 말하기를, "교나라는 작고 가벼우며, 가벼우면 모책이 적습니다. 모책이 없으니 나무하는 자들을 지키지 않는 척 유인하십시오" 하고는 이를 따랐다. 교나라 사람들이 30명을 사로잡자, 이튿날 교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 초나라의 부역하는 군사들을 산속으로 쫓아갔다. 이에 초나라 사람들이 교나라의 북문을 차단하고 산 아래에 복병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그들을 대패시키고 '성하의 맹(城下之盟)'을 맺고 돌아왔다. 교나라를 치는 전역 때 초나라 군대가 팽수(彭水)를 나누어 건너자 로(羅)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치고자 하여 백가(伯嘉)를 보내 염탐하게 하며 세 차례나 돌아보며 군사 수를 헤아렸다.
━━━━━━━━━━━━━━━━━━━━━━━━━━━━━━━━━━━━━━
1.13. 환공 13년 (기원전 699년)
[경(經)]
13년 봄 2월, 환공이 기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과 만났고, 기사일에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위나라 후작, 연나라 사람과 싸워 제나라 군대, 송나라 군대, 위나라 군대, 연나라 군대가 대패했다.
3월, 위나라 선공(宣公)을 장사 지냈다.
여름, 큰 홍수가 났다.
가을 7월이다.
겨울 10월이다.
[전(傳)]
13년 봄, 초나라의 굴하가 로나라를 칠 때 투백비가 그를 전송하고 돌아오며 자신의 어수에게 말하기를, "막오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발걸음이 높고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구나"라고 했다. 마침내 초 군주를 알현하고 말하기를 "반드시 군대를 더 보내십시오" 하니 초 군주가 거절했다. 군주가 궁에 들어가 부인 등만에게 고하니, 등만이 말하기를 "대부(투백비)는 군사의 머릿수를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군주께서는 백성을 신의로 어루만지시고 백관을 덕으로 훈계하시며 막오에게는 형벌로써 위엄을 보이셔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막오는 포소의 전역에 익숙해져 제멋대로 행동할 것이니 틀림없이 로나라를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군주께서 진정어리게 다독이고 단속하지 않으신다면 그가 대비를 하겠습니까? 대부가 진정 군주께 무리를 단속하고 다독이기를 좋아하며, 백관을 불러 좋은 덕으로 권면하고, 막오를 만나 하늘이 내린 자리를 안일하게 여겨서는 안 됨을 고하라고 한 것이지, 어찌 초나라 군대가 다 나간 것을 모르고 그렇게 말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초 군주가 뢰(賴)나라 사람을 보내 추격하게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막오가 군대에 명령을 내려 전하기를 "간하는 자는 처형하겠다"고 하니 언(鄢) 땅에 이르러 대열이 어지러운 채 강을 건넜고 마침내 진영도 갖추지 않은 데다 대비조차 하지 않았다. 로나라에 이르자 로나라와 루융(盧戎)의 두 군대가 협공하여 초나라 군대를 대패시켰다. 막오는 황곡(荒谷)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장수들은 야부(冶父)에 갇혀 형벌을 기다렸다. 초 군주가 말하기를 "고(孤)의 죄로다" 하고는 모두 사면해 주었다.
송나라가 정나라에 뇌물을 과도하게 요구하니 정나라가 명을 견디지 못했다. 이 때문에 기나라, 노나라 및 제나라와 합세하여 송나라, 위나라, 연나라와 싸운 것이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우리 군대가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이다.
정나라 사람이 와서 우호를 닦기를 청했다.
━━━━━━━━━━━━━━━━━━━━━━━━━━━━━━━━━━━━━━
1.14. 환공 14년 (기원전 698년)
[경(經)]
14년 봄 정월, 환공이 조(曹) 땅에서 정나라 백작을 만났다.
얼음이 얼지 않았다.
여름 5월이다.
정나라 백작이 그 아우 어(語)를 보내 동맹을 맺게 했다.
가을 8월 임신일에 어름(御廩, 나라의 종자 보관 창고)에 불이 났고, 을해일에 상제(가을 제사)를 지냈다.
겨울 12월 정사일에 제나라 후작 록부(祿父, 제 희공)가 별세했다.
송나라 사람이 제나라 사람, 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전(傳)]
14년 봄, 조 땅에서 만나니 조나라 사람들이 음식을 보내왔는데 이는 예에 부합한다.
여름, 정나라의 자인(子人, 어)이 와서 맹약을 거듭 확인하고 조 땅에서의 모임을 되새겼다.
가을 8월 임신일에 어름에 불이 났으나 을해일에 상제를 지낸 것은 피해가 없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겨울, 송나라 사람이 제후국의 군대와 함께 정나라를 친 것은 예전 송나라와의 전투에 대한 보복이었다. 정나라의 거문(渠門)을 불태우고 대가(大逵)까지 쳐들어갔으며 동쪽 교외를 치고 우수(牛首)를 취한 뒤, 정나라 태묘(대궁)의 서까래를 취해 돌아가 송나라 루문(盧門)의 서까래로 삼았다.
━━━━━━━━━━━━━━━━━━━━━━━━━━━━━━━━━━━━━━
1.15. 환공 15년 (기원전 697년)
[경(經)]
15년 봄 2월, 천왕이 가부를 보내 수레를 요구(구차)하게 했다.
3월 을미일에 천왕(주 환왕)이 붕어했다. 여름 4월 기사일에 제나라 희공을 장사 지냈다. 5월에 정나라 백작 돌이 쫓겨나 채나라로 달아났고, 정나라 세자 홀이 다시 정나라로 돌아왔다.
허숙(許叔)이 허(許)나라로 들어갔다.
환공이 애(艾) 땅에서 제나라 후작을 만났다.
주(邾)나라 사람, 모(牟)나라 사람, 갈(葛)나라 사람이 배알하러 왔다.
가을 9월, 정나라 백작 돌이 역(櫟) 땅으로 들어갔다.
겨울 11월, 환공이 송나라 공작, 위나라 후작, 진나라 후작과 사(袲) 땅에서 만나 정나라를 쳤다.
[전(傳)]
15년 봄, 천왕이 가부를 보내 수레를 요구하게 한 것은 예가 아니다. 제후는 수레와 의복을 공물로 바치지 않으며 천자는 사사로이 재물을 요구하지 않는 법이다.
제중이 권력을 독점하자 정 여공(돌)이 이를 근심하여 그의 사위 옹규(雍糾)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하고 장차 교외에서 연회를 베풀려 했다. 옹규의 아내 옹희(雍姬)가 이를 알고 그 어머니에게 묻기를 "아버지와 남편 중 누가 더 친합니까?"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남편이 될 수 있으나 아버지는 오직 한 분뿐이니 어찌 비교하겠느냐?"라고 했다. 이에 제중에게 고하기를 "옹씨가 제 집을 두고 장차 교외에서 아버님을 대접하려 하니 제가 의아하여 고합니다"라고 했다. 제중이 옹규를 죽여 주씨의 도랑(周氏之汪)에 그 시체를 버리니, 여공이 시체를 싣고 나라를 떠나며 말하기를 "모책을 아녀자와 의논했으니 죽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다.
여름, 여공이 채나라로 달아났다.
6월 을해일에 소공(홀)이 입국했다.
허숙이 허나라로 들어갔다.
환공이 애 땅에서 제나라 후작(제 양공)을 만난 것은 허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가을, 정 여공이 역 땅 사람들을 이용하여 단백(檀伯)을 죽이고 마침내 역 땅에 거주했다.
겨울, 사 땅에서 모여 정나라를 치기로 모의한 것은 여공을 복위시키고자 함이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
1.16. 환공 16년 (기원전 696년)
[경(經)]
16년 봄 정월, 환공이 조(曹) 땅에서 송나라 공작, 채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과 만났다.
여름 4월, 환공이 송나라 공작, 위나라 후작, 진나라 후작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가을 7월, 환공이 정나라를 치고 돌아왔다.
겨울, 향(向) 땅에 성을 쌓았다.
11월, 위(衛)나라 후작 삭(朔, 위 혜공)이 제나라로 달아났다.
[전(傳)]
16년 봄 정월에 조 땅에서 모인 것은 정나라를 칠 것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
여름에 정나라를 쳤고, 가을 7월에 환공이 정나라를 치고 돌아와 음지(飲至, 군주가 돌아와 종묘에서 술을 마시는 예)의 예를 행했다.
겨울에 향 땅에 성을 쌓은 것을 기록한 것은 철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위나라 선공이 이강(夷姜)과 사통하여 급자(急子)를 낳아 우공자(右公子)에게 맡겼고, 그를 위해 제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려다 미모가 아름다우므로 선공이 가로채어 취했다. 그녀가 수(壽)와 삭(朔)을 낳으니 수자를 좌공자(左公子)에게 맡겼다. 이강이 목을 매어 죽자 선강(제나라 여인)과 공자 삭이 급자를 모함했다. 선공이 급자를 제나라로 사신 가게 하면서 도적들을 신(莘) 땅에 대기시켜 그를 죽이려 했다. 수자가 이 사실을 알리고 도망치라 권했으나 급자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을 버린다면 어디다 자식을 쓰겠습니까? 아버지가 없는 나라가 있다면 도망쳐도 되겠지요"라고 했다. 갈 때가 되어 술을 마시게 하니 수자가 급자의 깃발을 싣고 먼저 가다가 도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급자가 이르러 말하기를 "저들이 찾은 자는 나인데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소? 청컨대 나를 죽이시오" 하니 도적들이 그 역시 죽였다. 두 공자(좌, 우공자)가 이 때문에 혜공(삭)을 원망하여, 11월에 좌공자 설(洩)과 우공자 직(職)이 공자 검무(黔牟)를 세우니 혜공이 제나라로 달아났다.
━━━━━━━━━━━━━━━━━━━━━━━━━━━━━━━━━━━━━━
1.17. 환공 17년 (기원전 695년)
[경(經)]
17년 봄 정월 병진일, 환공이 제나라 후작, 기나라 후작과 황(黃) 땅에서 동맹을 맺었다.
2월 병오일, 환공이 주(邾)나라 의보(儀父)와 최(趡) 땅에서 동맹을 맺었다.
여름 5월 병오일, 제나라 군대와 해(奚) 땅에서 싸웠다.
6월 정축일, 채나라 후작 봉인(封人, 채 환후)이 별세했다.
가을 8월, 채기(蔡季)가 진(陳)나라로부터 채나라로 돌아왔다.
계사일, 채나라 환후를 장사 지냈다.
송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과 함께 주나라를 쳤다.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전(傳)]
17년 봄, 황 땅에서 동맹을 맺은 것은 제나라와 기나라를 화해시키고 또 위나라의 사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주나라의 의보와 최 땅에서 동맹을 맺은 것은 옛 멸(蔑) 땅에서의 동맹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여름에 제나라 군대와 해 땅에서 싸운 것은 국경의 일 때문이다. 당시에 제나라 사람이 노나라 국경을 침범하니 국경 관리가 와서 보고했다. 환공이 말하기를 "국경의 일은 오직 굳건히 지키고 뜻밖의 사태에 대비할 뿐이다. 우선 대비를 다하고 일이 닥치면 싸울 것이지 또 어찌 보고하러 오는가?"라고 했다.
채 환후가 별세하자 채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서 채기를 불러왔다.
가을에 채기가 진나라로부터 채나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채나라 사람들이 그를 기려 기뻐했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친 것은 송나라의 뜻에 따른 것이다.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으나 [춘추]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것은 일관(日官)이 태만했기 때문이다. 천자에게는 일관이 있고 제후에게는 일어(日御)가 있어, 일관은 경의 반열에 처하여 날짜를 고정하니 이것이 예이다. 일어가 날짜를 잃지 않고 조정에서 백관에게 전해준다.
이에 앞서 정 백작(장공)이 고거미를 경으로 삼으려 하자 소공(홀)이 그를 미워하여 굳이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소공이 즉위하자 고거미는 소공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여, 신묘일에 소공을 시해하고 공자 미(亹)를 세웠다. 군자가 이르기를 "소공은 자신이 미워해야 할 자를 제대로 알았다"고 평했다. 공자 달(達)이 말하기를 "고백(고거미)은 결국 죽임을 당하겠구나! 원망을 쌓은 것이 너무 심하도다"라고 했다.
━━━━━━━━━━━━━━━━━━━━━━━━━━━━━━━━━━━━━━
1.18. 환공 18년 (기원전 694년)
[경(經)]
18년 봄 왕력 정월, 환공이 락(濼) 땅에서 제나라 후작을 만났다.
환공이 부인 강씨와 함께 마침내 제나라로 갔다.
여름 4월 병자일에 환공이 제나라에서 훙서하셨고, 정유일에 환공의 상여가 제나라로부터 이르렀다.
가을 7월이다.
겨울 12월 기축일에 우리 군주 환공을 장사 지냈다.
[전(傳)]
18년 봄, 환공이 장차 행차하려 할 때 마침내 강씨와 함께 제나라로 가려 하니, 신수가 말하기를 "여자는 친정(가)이 있고 남자는 처실(실)이 있어 서로를 더럽히지 않아야 예를 안다고 하는 법입니다. 이를 바꾸면 반드시 망합니다"라고 했다. 환공이 락 땅에서 제나라 후작(제 양공)을 만난 뒤 마침내 문강과 함께 제나라로 들어가니, 제후가 문강과 사통했다. 환공이 이를 꾸짖자 문강이 제후에게 고했다.
여름 4월 병자일에 환공에게 잔치를 베풀고 공자 팽생(彭生)으로 하여금 환공을 전차에 태워 모시게 했는데, 환공이 수레 안에서 훙서했다. 노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고하기를 "우리 군주가 군주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편히 처하지 못하고 와서 옛 우호를 닦았습니다. 예가 이루어졌거늘 돌아오지 못하시니 그 허물을 돌릴 곳이 없어 제후들에게 악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팽생을 죽여 그 허물을 씻어 주십시오" 하니 제나라 사람이 팽생을 죽였다.
가을, 제나라 후작이 수지(首止)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정나라의 공자 미가 와서 만났고 고거미가 그를 보좌했다. 7월 무술일에 제나라 사람이 공자 미를 죽이고 고거미를 거열형(轘)에 처했다. 제중이 진나라에서 정자(鄭子, 영)를 맞아다 세웠다. 이 행차 때 제중은 제나라의 기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중은 지혜로써 화를 면했다" 하니, 제중이 이르기를 "진실로 그러하다"고 했다.
주나라의 주공(周公 흑견)이 장왕(莊王)을 시해하고 왕자 극(克)을 세우고자 했는데, 신백(辛伯)이 왕에게 고하여 마침내 왕과 함께 주공 흑견을 죽이니 왕자 극은 연(燕)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앞서 왕자 극(자의)이 환왕(桓王)의 총애를 받았는데 환왕이 주공에게 그를 탁고했었다. 신백이 간하기를 "왕비를 나란히 두고, 적자를 동등하게 보며, 조정을 둘로 나누고, 도읍을 맞먹게 하는 것은 모두 난리의 근본입니다" 하였으나 주공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화가 미친 것이다.
━━━━━━━━━━━━━━━━━━━━━━━━━━━━━━━━━━━━━━
1.1. 장공 원년 (기원전 693년)
[경(經)]
원년 봄, 왕력 정월이다.
3월, 부인(문강)이 제나라로 달아났다.
여름, 단백이 왕姬(주나라 왕실의 공주)를 배웅했다.
가을, 외지에 왕희의 관저를 지었다.
겨울 10월 을해일에 진후 림이 훙서했다.
천자가 영숙을 보내 환공에게 명을 내렸다.
왕희가 제나라로 시집갔다.
제나라 군대가 기나라의 병, 자, 오 땅의 주민을 이주시켰다.
[전(傳)]
원년 봄, (장공의)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 문강이 노나라를 떠나 밖으로 돌았기 때문이다.
3월, 부인이 제나라로 달아난 것에 대해 '강씨(姜氏)'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친족 관계를 끊어 어머니로 대우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예(禮)에 부합한다.
가을, 외지에 왕희의 관저를 지은 것은 노나라가 제나라의 청혼을 주선하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사적인 공간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으니, 이 또한 예에 부합한다.
━━━━━━━━━━━━━━━━━━━━━━━━━━━━━━━━━━━━━━
1.2. 장공 2년 (기원전 692년)
[경(經)]
2년 봄, 왕력 2월에 진 장공을 장사 지냈다.
여름, 공자 경보가 군대를 이끌고 어구(於餘丘)를 벌했다.
가을 7월, 제나라로 시집간 왕희가 졸했다.
겨울 12월, 부인 강씨가 제후(제 양공)와 작(禚) 땅에서 만났다.
을유일에 송공 풍이 훙서했다.
[전(傳)]
겨울, 부인 강씨가 제후와 작 땅에서 만난 것을 기록한 것은 그들의 간통(姦通)을 폭로한 것이다.
━━━━━━━━━━━━━━━━━━━━━━━━━━━━━━━━━━━━━━
1.3. 장공 3년 (기원전 691년)
[경(經)]
3년 봄, 왕력 정월에 닉이 제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위나라를 벌했다.
여름 4월, 송 장공을 장사 지냈다.
5월, 주나라 환왕을 장사 지냈다.
가을, 기나라의 기계가 휴(酅) 땅을 바치며 제나라에 항복했다.
겨울, 장공이 활(滑) 땅에 주둔했다.
[전(傳)]
3년 봄, 대부 닉이 제나라 군대와 만나 위나라를 벌한 것을 경에서 (벼슬을 떼고 이름만 적어) 미워한 것은 예법을 범했기 때문이다.
여름 5월, 주 환왕을 장사 지낸 것은 (붕어한 지 7년 만에 장사를 지냈으므로) 늦어진 것을 비판한 것이다.
가을, 기계가 휴 땅을 가지고 제나라로 들어갔으니, 기나라가 이로부터 분열되기 시작했다.
겨울, 장공이 활 땅에 주둔한 것은 장차 정백(정 여공)을 만나 기나라를 구원할 방도를 도모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정백이 국내의 난리를 핑계로 거절했다. 무릇 군대가 한 밤을 묵는 것을 '사(舍)'라 하고, 두 밤을 묵는 것을 '신(信)'이라 하며, 두 밤을 넘겨 묵는 것을 '차(次)'라고 한다.
━━━━━━━━━━━━━━━━━━━━━━━━━━━━━━━━━━━━━━
1.4. 장공 4년 (기원전 690년)
[경(經)]
4년 봄, 왕력 2월에 부인 강씨가 축구(祝丘)에서 제후를 대접했다.
3월, 기나라 백희(노나라 공주)가 졸했다.
여름, 제후, 진후, 정백이 수(垂) 땅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기후(기나라 임금)가 제나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나라를 영원히 떠났다.
6월 을축일에 제후가 기나라 백희를 장사 지내주었다.
가을 7월.
겨울, 장공이 제나라 사람들과 함께 작 땅에서 사냥했다.
[전(傳)]
4년 봄,楚(초)나라 무왕이 '형시(荊尸)'라는 새로운 진법을 정비하고 군대를 열맞추어 수(隨)나라를 벌하려 했다. 출발하려 할 때 부인 등만(鄧曼)에게 들어가 고하기를, "내 마음이 몹시 흔들리고 가라앉지 않소" 하니, 등만이 탄식하며 말했다. "왕의 복록이 다한 모양입니다. 가득 차면 흔들리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니, 선왕들께서 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적인 일을 목전에 두고 대명을 내리려 할 때 왕의 마음을 뒤흔드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군대에 차질이 없고 왕께서 행군 중에 훙서하신다면 이는 나라의 복입니다." 왕이 마침내 출정했으나 만목(樠木) 나무 아래에서 급사했다. 영윤 투기(鬥祁)와 모오 배중(屈重)은 길을 닦고 자수(溠水)에 다리를 놓으며 수나라 접경에 군영을 차렸다. 수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모오는 왕의 명령을 사칭하여 수후와 맹약을 맺고 한뇌(漢汭)에서 회맹할 것을 청한 뒤 군대를 돌렸다. 한수를 건넌 후에야 비로소 왕의 상을 발표했다.
기후는 제나라에 굴복할 수 없어 나라를 아우 기계에게 넘겨주고, 여름에 기후가 영원히 그 나라를 떠났으니 이는 제나라가 일으킨 재난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
1.5. 장공 5년 (기원전 689년)
[경(經)]
5년 봄, 왕력 정월이다.
여름, 부인 강씨가 제나라 군대가 주둔한 곳으로 갔다.
가을, 의(郳)나라의 리래가 와서 조현했다.
겨울, 장공이 제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채나라 사람과 회합하여 위나라를 벌했다.
[전(傳)]
5년 가을, 의나라 리래가 와서 조현했을 때 그의 이름만 기록한 것은 아직 주나라 천자로부터 작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위나라를 벌한 것은 망명 중인 위 혜공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함이었다.
━━━━━━━━━━━━━━━━━━━━━━━━━━━━━━━━━━━
1.6. 장공 6년 (기원전 688년)
[경(經)]
6년 봄, 왕력 정월에 천자의 사신 자돌(子突)이 위나라를 구원했다.
여름 6월, 위후 삭(혜공)이 위나라로 다시 들어갔다.
가을, 장공이 위나라를 벌하는 일로부터 돌아왔다.
멸구(멸구 떼)가 생겼다.
겨울, 제나라 사람이 와서 위나라에서 잡은 포로를 돌려주었다.
[전(傳)]
6년 봄, 천자의 신하가 위나라를 구원하려 했다.
여름, 위 혜공이 복위하여 공자 검모를 주나라 왕실로 망명하게 하고, 녕궤를 진(秦)나라로 쫓아냈으며, 좌공자 설과 우공자 직을 죽이고 즉위했다. 군자가 이르기를, "두 공자가 검모를 옹립한 것은 앞뒤를 헤아리지 못한 불도(不度)의 처사였다. 자리를 굳건히 지키려는 자는 반드시 근본과 말단을 헤아린 뒤에 합당함을 세워야 한다. 그 근본을 알지 못하면 도모하지 말고, 근본이 튼튼하지 못함을 알면 억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 시경에 '근본과 가지가 백 세를 이어지리라' 한 것이 이를 말한다"라고 했다.
겨울, 제나라 사람이 와서 위나라의 보물을 돌려준 것은 문강(장공의 어머니)이 청했기 때문이다.
초 문왕이 신(申)나라를 벌하러 가는 길에 등(鄧)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등 기후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생질(누이의 아들)이다"라며 머무르게 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등나라의 대부 추생, 담생, 양생이 초 문왕을 죽일 것을 청했으나 등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말하기를 "등나라를 멸망시킬 자는 반드시 이 사람입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훗날 임금께서 후회하셔도 소용없을 터인데, 어찌 도모하지 않으십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라고 했다. 등후가 "사람들이 내 제물의 남은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신의를 잃을 것이다)"라고 하자, 신하들이 답하기를 "만약 세 신하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면 사직의 제사마저 끊길 터인데 임금께서 어디서 남은 음식을 찾으시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듬해 초나라가 등나라를 벌했고, 장공 16년에 초나라가 다시 등나라를 벌하여 마침내 멸망시켰다.
━━━━━━━━━━━━━━━━━━━━━━━━━━━━━━━━━━━━━━
1.7. 장공 7년 (기원전 687년)
[경(經)]
7년 봄, 부인 강씨가 제후와 방(防) 땅에서 만났다.
여름 4월 신묘일 밤, 붙박이별들이 보이지 않더니 한밤중에 별이 비처럼 떨어졌다.
가을, 큰 홍수가 났다.
보리와 벼의 싹이 없어졌다.
겨울, 부인 강씨가 제후와 곡(穀) 땅에서 만났다.
[전(傳)]
7년 봄, 문강이 제후와 방 땅에서 만난 것은 제나라가 원해서 정한 일이다.
여름, 붙박이별들이 보이지 않은 것은 밤이 대낮처럼 밝았기 때문이며, 별이 비처럼 떨어진 것은 비와 함께 섞여 내렸기 때문이다.
가을, 보리와 벼의 싹이 없어진 것은 (이른 시기라) 좋은 곡식(기장 등 대작)에는 해가 가지 않았다.
━━━━━━━━━━━━━━━━━━━━━━━━━━━━━━━━━━━━━━
1.8. 장공 8년 (기원전 686년)
[경(經)]
8년 봄, 왕력 정월에 노나라 군대가 랑(郎) 땅에 머물며 진나라 사람과 채나라 사람을 기다렸다.
갑오일에 군대를 훈련했다.
여름, 노나라 군대와 제나라 군대가 성(郕)나라를 포위하자, 성나라가 제나라 군대에게 항복했다.
가을, 군대가 돌아왔다.
겨울 11월 계미일에 제나라의 공손무지가 그 군주 제 양공(诸儿)을 시해했다.
[전(傳)]
8년 봄, 종묘에서 군대를 훈련했으니 이는 예에 맞다. 여름에 노나라 군대와 제나라 군대가 성나라를 포위했는데 성나라가 제나라에만 항복하자, 중경보(경패)가 제나라 군대를 치자고 청했다. 장공이 말하기를 "안 된다. 우리에게 참으로 덕이 없었던 것인데 제나라 군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는 나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서(夏書)에 이르기를 '고요가 덕을 널리 심으니 덕이 이에 복종해왔다'고 했으니, 우선 덕을 닦으며 때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했다. 가을에 군대가 돌아오니, 군자들은 이로써 노 장공을 훌륭하게 여겼다.
제 양공이 연칭과 관지보를 보내 규구(葵丘)를 수비하게 하며, "참외가 익을 때 갔으니, 내년 참외가 익을 때 교대해주겠다"고 기한을 정했다. 그러나 수비 기한이 지나도 제 양공의 교대 명령이 오지 않았다. 대체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자, 두 사람이 반란을 모의했다. 제 희공의 동복아우 이중년에게 공손무지가 태어났는데, 희공의 총애를 받아 의복과 예우의 등급이 적자와 같았으나 양공이 즉위한 뒤 이를 깎아내렸다. 연칭과 관지보 두 사람이 이 원한을 틈타 반란을 도모한 것이다. 연칭의 사촌 여동생이 양공의 후궁에 있었으나 총애를 받지 못하자, 그녀를 시켜 양공을 감시하게 하며 "거사가 성공하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겨울 12월, 제 양공이 고분(姑棼)에서 노닐다가 마침내 패구(貝丘)에서 사냥을 하는데 큰 멧돼지를 보았다. 시종들이 "공자 팽생(과거 양공의 명으로 노 환공을 살해하고 토사구팽당한 인물)입니다!"라고 외치자, 양공이 노하여 "팽생이 감히 고개를 내미느냐!" 하며 활을 쏘았다. 그러자 멧돼지가 사람처럼 서서 울부짖었다. 양공이 두려워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어버렸다. 행궁으로 돌아와 시종인 도인 비(費)를 문책하며 신발을 찾으라 했으나 찾지 못하자 채찍으로 쳐서 피가 흐르게 했다. 비가 문을 뛰쳐나가다가 마침 문 앞에 당도한 도적(반란군)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비를 사로잡아 묶었다. 비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저 임금을 돕겠소?" 하며 옷을 벗어 매 맞은 등을 보여주니 도적들이 그를 믿었다. 비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청한 뒤, 안으로 들어가 양공을 숨겨놓고 다시 나와 싸우다가 문 안에서 죽었다. 석지분여도 계단 아래에서 싸우다 죽었다. 반란군이 마침내 침소로 침입해 침상 위의 맹양을 죽이고는 "임금이 아니다, 닮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 문짝 아래로 숨겨진 양공의 발이 보이자 마침내 그를 시해하고 공손무지를 옹립했다.
당초 양공의 다스림에 상도가 없자 포숙아가 이르기를 "임금이 백성을 경멸하니 머잖아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라며 공자 소백(훗날 제 환공)을 받들고 거(莒)나라로 망명했다. 과연 난이 일어나자, 관이오(관중)와 소홀은 공자 규를 받들고 노나라로 망명해왔다. 한편, 새로 옹립된 공손무지는 옹름(雍廩)이라는 인물을 학대했다.
━━━━━━━━━━━━━━━━━━━━━━━━━━━━━━━━━━━━━━
1.9. 장공 9년 (기원전 685년)
[경(經)]
9년 봄, 제나라 사람이 공손무지를 죽였다.
장공이 제나라 대부들과 계(蔇) 땅에서 맹약했다.
여름, 장공이 제나라를 벌하여 공자 규를 복위시키려 했으나, 제나라 공자 소백이 먼저 제나라로 들어갔다.
가을 7월 정유일에 제 양공을 장사 지냈다.
8월 경신일에 제나라 군대와 건시(乾時)에서 싸웠으나 우리 군대가 대패했다.
9월, 제나라 사람이 공자 규를 사로잡아 죽였다.
겨울, 수수(洙水)를 깊게 팠다.
[전(傳)]
9년 봄, 옹름이 공손무지를 죽였다.
장공이 제나라 대부들과 계 땅에서 맹약한 것은 당시 제나라에 임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 장공이 제나라를 쳐서 공자 규를 들여보내려 했으나, 제 환공(소백)이 거나라로부터 먼저 정국에 진입했다.
가을, 노나라 군대가 제나라 군대와 건시에서 싸우다가 우리 군대가 대패했으니, 장공은 자신이 타던 전차마저 잃어버리고 민간 수레로 갈아타고 도망쳐 돌아왔다.
진자(秦子)와 양자(梁子)가 장공의 깃발을 꽂은 전차를 몰고 다른 길로 유인하여 제나라 군대의 추격을 막아내다가 둘 다 사로잡혔다. 제나라의 포숙이 군대를 이끌고 노나라 국경에 와서 전하기를 "공자 규는 우리 군주의 형제이니 차마 손대지 못하겠으니 노나라에서 처단해주시고, 관중과 소홀은 원수이니 넘겨받아 속 시원히 죽이겠소"라고 했다. 이에 노나라가 공자 규를 생두(生竇)에서 죽이니 소홀은 자결하여 뒤를 따랐고, 관중은 체포되어 죄수가 되기를 청했다. 포숙이 그를 넘겨받아 정부(堂阜) 땅에 이르자 포박을 풀어주고 제나라로 돌아와 환공에게 고하기를 "관이오는 고혜(고해)보다 뛰어난 인물이니 그를 재상으로 삼으십시오" 하니, 환공이 그 말을 따랐다.
━━━━━━━━━━━━━━━━━━━━━━━━━━━━━━━━━━━━━━
1.10. 장공 10년 (기원전 684년)
[경(經)]
10년 봄, 왕력 정월에 장공이 장작(長勺)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2월, 장공이 송나라를 침공했다.
3월, 송나라 사람이 숙(宿)나라를 이주시켰다.
여름 6월, 제나라 군대와 송나라 군대가 랑(郎) 땅에 머물자, 장공이 승구(乘丘)에서 송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가을 9월, 형(초)나라가 신(莘) 땅에서 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채후 헌무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 제나라 군대가 담(譚)나라를 멸망시키자 담나라 자작이 거나라로 달아났다.
[전(傳)]
10년 봄, 제나라 군대가 우리를 쳐들어오자 장공이 맞서 싸우려 했다. 이때 대부 조귀가 뵙기를 청했다. 그의 고향 사람이 말하기를 "고기 먹는 자들(고위 관료)이 알아서 도모할 터인데 자네가 왜 참견하려는가?" 하니, 조귀가 답하기를 "고기 먹는 자들은 식견이 얕아서 먼 미래를 도모하지 못하네" 하고는 마침내 입궐해 장공을 뵙고 무엇을 의지해 싸우려는지 물었다. 장공이 말하기를 "입고 먹는 편안함은 내 어찌 독점하겠는가, 반드시 타인과 나누었다네" 하니, 조귀가 답하기를 "작은 은혜는 아랫사람들에게 두루 미치지 못하니 백성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장공이 말하기를 "제사에 쓰는 희생과 옥, 비단은 감히 부풀리지 않고 반드시 신의를 지켰다네" 하니, 조귀가 답하기를 "작은 신의는 아직 널리 믿음을 주지 못하니 신(神)이 복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장공이 다시 말하기를 "크고 작은 송사는 비록 다 명백히 살피지는 못할지라도 반드시 실정에 맞게 공정히 처리했다네" 하니, 조귀가 이르기를 "그것은 백성에게 충성하는 도리에 속하니 한 번 싸워볼 만합니다. 싸우실 때 저를 대동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장공이 그를 수레에 태우고 장작에서 싸우려 했다. 장공이 막 북을 쳐서 공격을 명령하려 하자 조귀가 "아직 안 됩니다"라고 했다. 제나라 군대가 세 번 북을 치고 나자 조귀가 "이제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제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장공이 추격하려 하자 조귀가 "아직 안 됩니다" 하고는, 수레에서 내려 제나라 전차의 바퀴 자국을 살피고 수레 앞 가로나무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더니 "이제 추격하셔도 됩니다" 하여 마침내 제나라 군대를 쫓아냈다. 싸움에 이긴 뒤 장공이 그 이유를 묻자 조귀가 답했다. "무릇 전쟁이란 용기(氣)에 달린 것입니다. 첫 번째 북소리에는 용기가 솟구치고(一鼓作氣), 두 번째에는 쇠퇴하며, 세 번째에는 다하게 됩니다(再而衰, 三而竭). 저들의 용기는 다했고 우리의 용기는 가득 찼으므로 이긴 것입니다. 또한 대국(제나라)은 책략을 헤아리기 어려워 혹 복병이 있을까 두려웠는데, 저들의 바퀴 자국이 어지럽고 깃발이 쓰러진 것을 보았기에 추격한 것입니다."
여름 6월, 제나라 군대와 송나라 군대가 랑 땅에 주둔하자 공자 언이 말하기를 "송나라 군대의 진형이 정돈되지 않았으니 격파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가 패하면 제나라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니 청컨대 공격하게 해주십시오" 했다. 장공이 허락하지 않자 공자 언이 우문(雩門)을 통해 몰래 빠져나가 전차에 호랑이 가죽을 씌우고 먼저 적진을 들이쳤다. 장공이 그 뒤를 따라 승구에서 송나라 군대를 대파하니 제나라 군대도 마침내 퇴각했다.
채 애후가 진(陳)나라 여인에게 장가들고, 식후(息侯) 역시 진나라의 다른 여인에게 장가들었다. 식후의 부인 식규(息媯)가 시집가는 길에 채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채후가 말하기를 "나의 처형(또는 처제)이구나"라며 머무르게 하여 만났으나 손님으로 예우하지 않았다. 식후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초 문왕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쳐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채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터이니, 그때 함께 채나라를 치십시오" 하니 초자가 그 말을 따랐다. 가을 9월, 초나라가 신 땅에서 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채 애후 헌무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제 환공이 옛날 망명길에 올랐을 때 담(譚)나라를 지나갔으나 담나라가 예우하지 않았다. 환공이 제나라에 들어가 군주가 되자 제후들이 모두 축하했으나 담나라는 또 오지 않았다. 겨울에 제나라 군대가 담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담나라가 무례했기 때문이다. 담나라 자작이 거나라로 달아난 것은 거나라와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다.
━━━━━━━━━━━━━━━━━━━━━━━━━━━━━━━━━━━━━━
1.11. 장공 11년 (기원전 683년)
[경(經)]
11년 봄, 왕력 정월이다.
여름 5월 무인일에 장공이 전(鄑) 땅에서 송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가을, 송나라에 큰 홍수가 났다.
겨울, 주나라 왕희가 제나라로 시집갔다.
[전(傳)]
11년 여름, 송나라는 앞서 승구에서 패한 일 때문에 우리를 침공했다. 장공이 이를 막아낼 때, 송나라 군대가 미처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바짝 들이쳐 전 땅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무릇 전쟁에서 적이 진형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이긴 것을 '败某师(어느 군대를 격파했다)'라 하고, 쌍방이 진형을 갖추고 싸운 것을 '战(싸웠다)'이라 하며, 적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을 '败绩(대패시켰다)'이라 하고, 승리를 거둔 것을 '克(이겼다)'이라 하며, 매복하거나 뒤집어엎어 멸한 것을 '取某师(어느 군대를 포획했다)'라 한다. 조정의 군대(천자의 군대)가 패했을 때는 '王师败绩于某(왕의 군대가 어디서 대패했다)'라고 기록한다.
가을, 송나라에 큰 홍수가 났다. 장공이 사신을 보내 위문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장대비를 내려 제사에 쓸 곡식을 상하게 하니 어찌 위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송후가 답하기를 "이 고독한 사람(과인)이 불경하여 하늘이 재앙을 내렸는데, 또 이웃 군주에게 걱정을 끼쳤으니 주신 명령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이에 노나라 대부 장문중이 이르기를 "송나라가 필시 흥성하겠구나! 우왕과 탕왕은 죄를 자신에게 돌려 나라를 크게 일으켰고, 걸왕과 주왕은 죄를 남에게 돌려 순식간에 망했다. 하물며 열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을 고독한 이라 낮추어 부른 것은 예법에 맞다. 참회하는 말이 두려워할 줄 알고 명칭이 예에 맞으니 거의 흥할 것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그것이 대부 공자 외설(훗날 송 환공)의 대답이었다 하자, 장손달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임금이 될 자격이 있으니 백성을 휼량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했다.
겨울, 제후가 공주 공희(共姬)를 맞이하러 직접 왔다.
과거 승구의 전투 때 장공이 금복고(金僕姑)라는 화살로 송나라의 맹장 남궁장만을 맞추고, 장공의 차우(車右) 도손이 그를 산채로 사로잡았었다. 이후 송나라가 청하여 남궁장만을 돌려보내 주었는데, 송 민공이 그와 야바위를 두다가 놀리며 말하기를 "당초에는 내가 그대를 공경했으나 지금은 그대가 노나라의 포로 신세였으니 더는 공경하지 않겠네" 하니 남궁장만이 이를 깊이 원망했다.
━━━━━━━━━━━━━━━━━━━━━━━━━━━━━━━━━━━━━━
1.12. 장공 12년 (기원전 682년)
[경(經)]
12년 봄, 왕력 3월에 기나라 숙희(기후의 부인)가 휴(酅) 땅으로 돌아갔다.
여름 4월.
가을 8월 갑오일에 송나라의 남궁만이 그 군주 겁(민공)과 대부 사무를 시해했다.
10월, 송나라 남궁만이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전(傳)]
12년 가을, 송나라 남궁만이 몽택(蒙澤)에서 민공을 시해하고, 문 앞에서 대부 사무를 만나자 손바닥으로 쳐서 살해했다. 또 동궁의 서쪽에서 태재 독을 만나 그 역시 죽이고는 공자 유를 임금으로 옹립했다. 이에 공자들이 소(蕭) 땅으로 달아나고, 공자 외설은 박(亳) 땅으로 달아나니 남궁우와 맹획이 군대를 이끌고 박 땅을 포위했다.
겨울 10월, 소숙 대심과 대, 무, 선, 무, 장 씨 등 옛 송나라 군주들의 후손들이 조(曹)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반란군을 쳤다. 군중에서 남궁우를 죽이고 송나라 도성에서 자유를 죽인 뒤 환공(외설)을 옹립했다. 이에 맹획은 위나라로 달아나고 남궁만은 진나라로 달아났는데, 남궁만은 수레를 직접 밀어 그의 어머니를 태우고 하루 만에 진나라에 당도했다. 송나라 사람이 위나라에 맹획을 돌려달라고 청하자 위나라 사람들이 주지 않으려 했다. 석기자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천하의 악은 다 같은 것입니다. 송나라에 죄를 짓고 우리에게 보호를 받는데, 그를 보호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한 사람을 얻고 한 나라를 잃으며, 악인을 두둔하느라 우방을 버리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위나라 사람이 그를 돌려보냈다. 또한 진나라에도 뇌물을 주고 남궁만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여인들을 시켜 남궁만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들소 가죽으로 그를 꽁꽁 싸매어 송나라로 보냈다. 송나라에 도착할 때쯤 가죽이 쪼그라들어 그의 손발이 삐져나와 있었는데, 송나라 사람들은 남궁만과 맹획을 모두 다져서 젓갈(醢)로 만들었다.
━━━━━━━━━━━━━━━━━━━━━━━━━━━━━━━━━━━━━━
1.13. 장공 13년 (기원전 681년)
[경(經)]
13년 봄, 제후, 송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채나라 사람, 주(邾)나라 사람이 북행(北杏)에서 회합했다.
여름 6월, 제나라 사람이 수(遂)나라를 멸망시켰다.
가을 7월.
겨울, 장공이 제후와 만나 가(柯) 땅에서 맹약했다.
[전(傳)]
13년 봄, 북행에서 회합한 것은 송나라의 난리를 평정하기 위함이었는데, 수나라 사람이 오지 않았다.
여름, 제나라 군대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머물러 수비하게 했다.
겨울, 가 땅에서 맹약했으니 이로써 비로소 노나라가 제나라와 화친하게 되었다.
한편 송나라 사람은 북행의 맹약을 배반했다.
━━━━━━━━━━━━━━━━━━━━━━━━━━━━━━━━━━━━━━
1.14. 장공 14년 (기원전 680년)
[경(經)]
14년 봄, 제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조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벌했다.
여름, 단백이 천자의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치는 회합에 참여했다.
가을 7월, 형(초)나라가 채나라로 쳐들어왔다.
겨울, 단백이 제후, 송공, 위후, 정백과 견(鄑) 땅에서 회합했다.
[전(傳)]
14년 봄, 제후들이 송나라를 치려 할 때 제나라가 주나라 왕실에 군사를 청했다. 여름에 천자의 신하 단백이 합류하자, 송나라와 강화를 맺고 군대를 돌렸다.
정 여공(突)이 망명지인 역(櫟) 땅에서 정나라 도성을 침공하여 대릉에 이르러 대부 부하를 사로잡았다. 부하가 말하기를 "만약 저를 놓아주시면 제가 임금님을 모시고 도성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니 여공이 그와 맹약하고 풀어주었다. 6월 갑자일에 부하가 정나라 군주 자의(子儀)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을 복위시켰다. 당초 정나라 남문 안에서 토박이 뱀과 밖에서 온 뱀이 싸우다가 토박이 뱀이 죽었는데, 그로부터 6년 만에 여공이 다시 들어온 것이다. 장공이 이 소식을 듣고 대부 신수에게 묻기를 "진실로 요괴란 것이 존재합니까?" 하니 신수가 답했다. "사람이 기피하고 꺼리는 짓을 하면 그 사악한 기운이 요괴를 부르는 법이니, 요괴란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틈(잘못)이 없으면 요괴가 스스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상도를 버릴 때 요괴가 흥하는 법이니, 요괴가 생긴 것은 여공이 들어올 징조였습니다." 여공은 정나라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부하를 번복이 잦다는 죄로 처형했다. 그리고 원번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부하가 두 마음을 품어 주나라의 상형에 따라 죄를 다스렸소. 내가 복위할 때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자들은 내가 다 수용할 것이며, 상대부의 정사는 내 백부(원번)와 도모하고자 하오. 다만 과인이 쫓겨나 나갈 때 백부는 내게 한 마디 배웅도 없었고, 들어올 때도 과인을 마중하지 않으시니 내 서운한 마음이 있소" 했다. 원번이 답하기를 "선군 환공께서 제 선조에게 종묘를 맡기셨으니, 사직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어찌 밖의 사람에게 마음을 두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두 마음을 품는 짓입니다. 진실로 사직을 주관하는 이가 있다면 국내의 백성 중 누가 그의 신하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하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은 하늘의 제도입니다. 자의께서 재위에 계신 지 14년이나 되었는데, 임금을 불러들일 모의를 한 자가 어찌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아니겠습니까? 장공의 아들이 아직도 8명이나 더 남아 있는데, 만약 그들이 모두 관작과 재물로 뇌물을 주며 반란을 부추겨 성공할 수 있다면 임금께서는 장차 어찌 감당하시겠습니까? 저는 이제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목을 매어 자결했다.
채 애후는 앞서 신 땅에서 사로잡힌 일에 원한을 품고, 식규(식후의 부인)의 미모를 칭찬하며 초 문왕을 충동질했다. 초자가 식나라로 행차하여 음식을 바치며 잔치를 베푸는 척하다가 마침내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규를 데리고 돌아가 대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다. 그러나 식규는 초나라 궁에서 결코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초자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가 대답하기를 "내 한 몸 여인으로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 못하고 살아있으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했다. 초자는 채 애후 때문에 식나라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하여 마침내 채나라를 벌했다. 가을 7월에 초나라가 채나라 도성으로 들어가니, 군자가 이르기를 "상서(商書)에 이른바 '악의 번짐은 벌판에 붙은 불과 같아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끌 수도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채 애후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했다.
겨울, 제후들이 견 땅에서 회합한 것은 송나라가 굴복했기 때문이다.
━━━━━━━━━━━━━━━━━━━━━━━━━━━━━━━━━━━━━━
1.15. 장공 15년 (기원전 679년)
[경(經)]
15년 봄, 제후, 송공, 진후, 위후, 정백이 다시 견 땅에서 회합했다.
여름, 부인 강씨가 제나라로 갔다.
가을, 송나라 사람, 제나라 사람, 주나라 사람이 의(郳)나라를 벌했다.
정나라 사람이 그 틈을 타서 송나라를 침공했다.
겨울 10월.
[전(傳)]
15년 봄, 제후들이 다시 견 땅에서 회합했으니, 제나라가 이로부터 비로소 패권(霸權)을 잡기 시작했다.
가을, 제후들이 송나라를 위해 의나라를 벌했다.
정나라 사람이 그 빈틈을 노려 송나라를 침공했다.
━━━━━━━━━━━━━━━━━━━━━━━━━━━━━━━━━━━━━━
1.16. 장공 16년 (기원전 678년)
[경(經)]
16년 봄, 왕력 정월이다.
여름, 송나라 사람, 제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벌했다.
가을, 형(초)나라가 정나라를 벌했다.
겨울 12월, 장공이 제후, 송공, 진후, 위후, 정백, 허남, 활백, 등자와 유(幽) 땅에서 동맹했다.
주자 크가 졸했다.
[전(傳)]
16년 여름, 제후들이 정나라를 벌한 것은 송나라의 요청 때문이었다.
정 여공이 역 땅으로부터 도성으로 들어간 뒤 조치가 지지부진하자 초나라에 고했다. 가을에 초나라가 정나라를 쳐서 역 땅까지 이른 것은 정나라가 처음에 무례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 여공은 옛날 옹규의 난에 가담했던 자들을 처벌하며, 9월에 공자 알을 죽이고 강저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내렸다. 공부정숙은 위나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돌아오게 하며 이르기를 "공숙(정 장공의 아우)의 후사가 정나라에서 끊어지게 할 수는 없다" 하고는 10월에 입국하게 하며 말하기를 "좋은 달이요, 가득 찬 숫자(10)에 부합한다"고 했다. 군자가 이르기를 "강저는 제 한 몸의 발조차 보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겨울, 유 땅에서 동맹을 맺은 것은 정나라가 패권 체제에 순응하여 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주나라 천자가 괵공에게 명하여 곡옥백(晉 무공)을 군대로 임명하고 진(晉)나라의 군주로 봉했다. 당초 진 무공이 이(夷)나라를 벌하여 이나라의诡诸를 사로잡았을 때 위국이 청하여 풀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보답이 없자 자국(위국)이 난을 일으켜 진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이나라를 쳐서 그 땅을 차지하자" 하고는 진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나라를 쳐서 다시 诡诸를 죽였다. 이에 주나라 주공 기부가 괵나라로 망명했으나 주 혜왕이 즉위한 뒤 그를 다시 복귀시켰다.
━━━━━━━━━━━━━━━━━━━━━━━━━━━━━━━━━━━━━━
1.17. 장공 17년 (기원전 677년)
[경(經)]
17년 봄, 제나라 사람이 정나라 대부 정점(鄭詹)을 체포했다.
여름, 제나라 군대가 수(遂)나라에서 몰살당했다.
가을, 정점이 제나라로부터 탈출해 노나라로 도망쳐 왔다.
겨울, 고라니가 많았다.
[전(傳)]
17년 봄, 제나라 사람이 정점을 체포한 것은 정나라가 제나라에 조공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 수나라의 옛 유민인 인씨, 령씨, 공루씨, 수수씨 무리가 수나라에 주둔하던 제나라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에 취하게 한 뒤 그들을 모두 쳐죽이니 제나라 주둔군이 전멸했다.
━━━━━━━━━━━━━━━━━━━━━━━━━━━━━━━━━━━━━━
1.18. 장공 18년 (기원전 676년)
[경(經)]
18년 봄, 왕력 3월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장공이 제서(濟西) 땅까지 융(戎)족을 추격했다.
가을, 역(蜮, 고동이나 사악한 벌레)이 있었다.
겨울 10월.
[전(傳)]
18년 봄, 괵공과 진후(진 무공)가 천자에게 조현하자 왕이 술을 내려 대접하고 보답의 상을 내리며, 둘 다에게 각각 옥 다섯 쌍(瑴)과 말 세 필을 하사했으니 이는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천자가 제후에게 명을 내릴 때는 명칭과 지위가 다르므로 예법의 등급도 다른 법이니, 예법의 등급을 함부로 타인에게 가짜로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괵공, 진후, 정백이 천자의 명으로 원장공을 사신으로 삼아 진(陳)나라에서 왕후를 맞이해 오니 진규(陳媯)가 도성에 안착했다. 이분이 바로 혜후(惠后)이다.
여름, 장공이 제서 땅까지 융족을 추격한 것에 대해 그들이 쳐들어왔다는 기록을 빼고 추격한 것만 적은 것은 부끄러운 일을 숨겨주기(諱) 위함이다.
가을, 역이 나타난 것은 재앙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초 초 무왕이 권(權)나라를 정복하고 투민을 그곳의 읍장(尹)으로 삼았으나 투민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포위해 죽였다. 그리고 권나라 백성들을 나처(那處)로 이주시킨 뒤 염오를 읍장으로 삼았다. 이후 문왕이 즉위하여 바(巴)나라 사람들과 함께 신나라를 벌할 때 초나라 군대가 바나라 군대를 깜짝 놀라게 가로막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바나라 사람이 초나라를 배반하고 나처를 공격해 점령한 뒤 마침내 초나라 도성문까지 밀고 들어왔다. 염오는 강물에 헤엄쳐 도망쳐 살아왔으나 초자가 그를 처형했다. 이에 염오의 가문이 난을 일으켰고, 겨울에 바나라 군사가 그 틈을 타 초나라를 침공했다.
━━━━━━━━━━━━━━━━━━━━━━━━━━━━━━━━━━━━━━
1.19. 장공 19년 (기원전 675년)
[경(經)]
19년 봄, 왕력 정월이다.
여름 4월.
가을, 공자 결이 진(陳)나라로 시집가는 여인을 견 땅까지 데려다주다가 마침내 제후, 송공과 맹약했다.
부인 강씨가 거(莒)나라로 갔다.
겨울, 제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이 우리의 서쪽 변방을 벌했다.
[전(傳)]
19년 봄, 초 문왕이 바나라 군대를 막아섰으나 진(津) 땅에서 대패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문을 지키던 육권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으며 거부하자 문왕은 군대를 돌려 황(黃)나라를 벌하여 적릉에서 황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돌아오는 길에 추(湫) 땅에 이르러 병을 얻어 여름 6월 경신일에 서거했다. 육권이 문왕을 석실에 장사 지낸 뒤 자신 또한 자결하여 황제(공동묘지)에 묻혔다. 당초 육권이 초 문왕에게 강력히 간언했으나 문왕이 듣지 않자 무기로 위협했고, 문왕이 두려워하여 간언을 따랐었다. 육권이 말하기를 "내가 군주를 무기로 위협했으니 죄가 이보다 클 수 없다" 하고는 스스로 자신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刖)을 내렸다. 초나라 사람들이 그를 대문지기(大閽)로 삼고 대백이라 불렀으며 그 후손이 대대로 직책을 맡겼다. 군자가 이르기를 "육권은 진정으로 군주를 사랑했다고 할 만하다. 간언을 하느라 스스로 형벌의 처지에 자신을 밀어 넣었으면서도, 형벌을 받으면서까지 군주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라고 했다.
당초 주 장왕(莊王)이 왕요를 총애하여 자퇴(子頹)를 낳았는데 자퇴가 큰 총애를 받았고 위국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혜왕(惠王)이 즉위한 뒤 스승 위국의 채소밭을 빼앗아 자신의 동산으로 삼았다. 또한 대부 변백의 가옥이 왕궁과 가깝다 하여 왕이 빼앗았고, 자금과 축괴, 잠부의 토지를 빼앗았으며 식사를 다스리는 선부의 관직과 녹봉마저 거두어들였다. 그리하여 위국, 변백, 석속, 잠부, 자금, 축괴 등 대부들이 난을 일으켰으니 소씨 가문이 이들을 도왔다.
가을, 다섯 대부가 자퇴를 받들고 혜왕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쳐 온(溫) 땅으로 달아났고, 소자가 자퇴를 받들고 위(衛)나라로 달아나니 위나라 군대와 연(燕)나라 군대가 주나라 왕실을 공격했다.
겨울, 반란군이 자퇴를 천자로 옹립했다.
━━━━━━━━━━━━━━━━━━━━━━━━━━━━━━━━━━━━━━
1.20. 장공 20년 (기원전 674년)
[경(經)]
20년 봄, 왕력 2월에 부인 강씨가 거나라로 갔다.
여름, 제나라에 큰 화재(대재앙)가 있었다.
가을 7월.
겨울, 제나라 사람이 융족을 벌했다.
[전(傳)]
20년 봄, 정백(정 여공)이 주나라 왕실의 난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퇴를 도운 연나라의 중부를 붙잡았다. 여름에 정백이 마침내 피난 나온 혜왕을 모시고 정나라로 돌아와 혜왕을 역 땅에 머물게 했다. 가을, 혜왕과 정백이 오(鄔) 땅을 거쳐 성주(도성)로 들어가 천자의 보물을 챙겨서 역 땅으로 돌아왔다. 겨울에 정나라에서 주 왕자 자퇴가 다섯 대부에게 잔치를 베풀며 온갖 춤과 음악을 극진히 즐겼다. 정백이 이 소식을 듣고 괵나라의 괵숙을 만나 말하기를 "과인이 듣기로 슬픔과 즐거움이 때를 잃으면 반드시 재앙이 닥친다고 했습니다. 지금 왕자 자퇴가 노래와 춤을 그치지 않으니 이는 재앙을 즐기는 짓(樂禍)입니다. 무릇 사법관이 사형을 집행할 때도 군주는 음식을 전폐하거늘 하물며 감히 재앙을 즐긴단 말입니까? 천자의 자리를 찬탈했으니 죄와 화가 이보다 클 수 없는데, 화를 눈앞에 두고 우려를 잊었으니 우환이 필시 그에게 미칠 것입니다. 어찌 왕을 도성으로 복위시키지 않겠습니까?" 하니 괵공이 "그것이 바로 나의 소원입니다"라고 했다.
━━━━━━━━━━━━━━━━━━━━━━━━━━━━━━━━━━━━━━
1.21. 장공 21년 (기원전 673년)
[경(經)]
21년 봄, 왕력 정월이다.
여름 5월 신유일에 정백 돌(여공)이 졸했다.
가을 7월 무戌일에 부인 강씨가 훙서했다.
겨울 12월, 정 여공을 장사 지냈다.
[전(傳)]
21년 봄, 정백과 괵공이 미(弭) 땅에서 서약하고, 여름에 함께 왕성을 공격했다. 정백은 혜왕을 모시고 웅문(圉門)을 통해 들어가고, 괵숙은 북문으로 들어가 왕자 자퇴와 다섯 대부를 처단했다. 정백이 궐서벽에서 혜왕에게 잔치를 베풀며 예악을 완비하니, 혜왕이 그 보답으로 정 무공이 가졌던 호뢰 이동의 땅을 내려주었다. 대부 원백이 이르기를 "정백이 악을 본받아 난을 평정했으니 그 역시 머잖아 재앙을 입을 것이다"라고 했다. 5월에 정 여공이 졸했다. 혜왕이 괵나라 땅을 순찰하자 괵공이 혜왕을 위해 방(玤) 땅에 행궁을 지어 바쳤고 왕은 보답으로 주천 땅을 내렸다. 앞서 정백이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는 왕이 왕후의 거울이 달린 띠(鞶鑑)를 선물로 주었으나, 괵공이 기물을 청하자 왕이 격이 높은 제기(爵)를 내렸으므로 정백이 이로 인해 비로소 왕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겨울, 혜왕이 괵나라로부터 도성으로 돌아왔다.
━━━━━━━━━━━━━━━━━━━━━━━━━━━━━━━━━━━━━━
1.22. 장공 22년 (기원전 672년)
[경(經)]
22년 봄, 왕력 정월에 대사면을 단행했다.
계축일에 우리 소군(小君, 노나라 국모) 문강을 장사 지냈다.
진(陳)나라 사람이 그들의 공자 내부를 죽였다.
여름 5월.
가을 7월 병신일에 제나라 고계(고해)와 방 땅에서 맹약했다.
겨울, 장공이 제나라로 가서 혼인 예물(납폐)을 보냈다.
[전(傳)]
22년 봄, 진나라 사람이 그들의 태자 내부를 죽이자, 진나라 공자 완(敬仲)과 전손이 제나라로 망명했고 전손은 다시 제나라를 거쳐 노나라로 망명해왔다. 제후가 진완을 경(卿)으로 삼으려 하자 진완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타향을 떠도는 신하가 다행히 처벌을 면하고 너그러운 정치를 만나 교훈을 익히지 못한 죄를 용서받아 짐을 부리게 된 것만도 임금의 은혜가 막중하여 얻은 바가 큽니다. 감히 높은 지위를 욕심내어 관직에 대한 비방을 부르겠습니까? 죽음으로써 사양하겠습니다. 시경에 '높고 높은 수레를 타고 나를 활로 부르는구나. 어찌 가고 싶지 않으랴만 내 친구들이 두려울 뿐이네'라고 했습니다" 하니 장관인 공정(工正)으로 삼았다. 진완이 환공에게 술을 대접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환공이 "촛불을 켜고 계속 마시자"고 했다. 진완이 사양하기를 "신은 낮에 술을 마시는 것은 점을 쳤으나 밤에 마시는 것은 점치지 않았으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군자가 이르기를 "술로써 예를 이루고 음란함으로 이어지지 않게 한 것은 의(義)로움이요, 임금을 예로 대우하여 음란함에 빠지지 않게 한 것은 인(仁)함이다"라고 했다.
당초 의씨가 진완에게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점을 쳤는데 그의 처가 점괘를 해석하며 말하기를 "길합니다. 이것은 봉황이 날아오르며 우는소리가 조화롭고 청아한 상(鳳皇于飛, 和鳴鏘鏘)입니다. 규씨(진나라 성씨)의 후손이 장차 강씨(제나라 성씨)의 나라에서 자라나, 5대째에 번창하여 정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8대째가 되면 그 비할 데 없이 거대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 리공은 채나라 여인의 소생이었으므로 채나라 사람들이 오부를 죽이고 그를 옹립했는데 그가 곧 진완의 아버지다. 진완이 어렸을 때 주나라의 태사(史)가 주역을 가지고 진후를 뵈러 오자 진후가 점을 치게 하니 관괘(觀卦)가 변하여 부괘(否卦)가 되었다. 태사가 해석하기를 "이것은 '나라의 영광을 보니 왕의 귀한 손님이 되기에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는 뜻입니다. 이 자가 진나라를 대신해 나라를 소유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이 아니라 다른 나라일 것이며, 그 자신의 대가 아니라 자손의 대에 이룰 것입니다. 빛이 멀리까지 퍼져 다른 곳에서 빛날 상입니다. 곤(坤)은 땅이요, 손(巽)은 바람이며, 건(乾)은 하늘입니다. 바람이 하늘이 되어 땅 위에 부는 형상이니 곧 산(山)입니다. 산의 재목을 가지고 하늘의 빛으로 비추며 땅 위에 머무는 상이므로 '나라의 영광을 보니 왕의 귀한 손님이 되기에 이롭다'고 한 것입니다. 조정에 백 가지 예물이 가득 차고 옥과 비단을 받들어 올리니 천지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귀한 손님이 되기에 이롭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바라보기만 하는 상(觀)이 있으므로 '그 후손의 대에 이룰 것'이라 했고, 바람이 행하여 땅 위에 드러나므로 '다른 나라일 것'이라 한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라면 반드시 강씨의 나라일 것입니다. 강씨는 대악(사악)의 후손인데, 산악은 하늘과 짝을 이룹니다. 그러나 사물은 두 가지가 동시에 거대해질 수는 없으니, 진나라가 쇠퇴할 때 이 가문이 번창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과연 진나라가 처음 망할 무렵 제나라에서 진씨(전씨)의 선조인 진환자가 비로소 거대해졌고, 진나라가 완전히 망했을 때 전성자(전항)가 제나라의 정권을 장악했다.
━━━━━━━━━━━━━━━━━━━━━━━━━━━━━━━━━━━━━━
1.23. 장공 23년 (기원전 671년)
[경(經)]
23년 봄, 장공이 제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주나라의 제숙이 사신으로 와서 예물을 바쳤다.
여름, 장공이 제나라로 가서 토지신 제사(社)를 구경하고 제나라로부터 돌아왔다.
형(초)나라 사람이 사신으로 와서 예물을 바쳤다.
장공이 제후와 곡(穀) 땅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소숙(소나라 군주)이 장공에게 조현했다.
가을, 환공(장공의 아버지)의 사당 기둥에 붉은 칠(丹)을 했다.
겨울 11월, 조백 사고가 졸했다.
12월 갑인일에 장공이 제후와 후(扈) 땅에서 만나 맹약했다.
[전(傳)]
23년 여름, 장공이 제나라로 가서 토지신 제사를 구경한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조귀가 간언하기를 "안 됩니다. 무릇 예라는 것은 백성을 정돈하는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회합으로써 상하의 법도를 훈련하고 재물의 절도를 제어하며, 조참으로써 관작의 의로움을 바로잡고 장유의 순서를 다스리며, 정벌로써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합니다. 제후에게는 천자가 있고 천자에게는 순수가 있어 이를 대대적으로 익히는 법인데, 이것이 아니면 군주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군주의 거둥은 역사에 반드시 기록되니, 기록하되 법도에 맞지 않으면 후손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했다.
진(晉) 헌공은 조부 환공과 부친 장공의 서출 자손(환장지족)의 세력이 강해져 압박해 오자 이를 근심했다. 대부 사위가 이르기를 "그들 중 가장 부유한 자인 부자(富子)를 먼저 제거하면 나머지 공자들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니 헌공이 "그대가 한 번 시도해보라"고 했다. 사위가 다른 공자들과 모의하여 부자를 참소하고 그를 제거했다.
가을, 환공 사당의 기둥에 단칠을 했다.
━━━━━━━━━━━━━━━━━━━━━━━━━━━━━━━━━━━━━━
1.24. 장공 24년 (기원전 670년)
[경(經)]
24년 봄, 왕력 3월에 환공 사당의 서까래에 조각(刻)을 했다.
조 장공을 장사 지냈다.
여름, 장공이 제나라로 가서 신부를 맞이해 왔다.
가을, 장공이 제나라로부터 도성으로 돌아왔다. 8월 정축일에 부인 강씨(애강)가 입궐했다. 무인일에 대부의 처(宗婦)들이 폐백을 들고 새 부인을 알현했다.
큰 홍수가 났다.
겨울, 융족이 조나라를 침공했다.
조나라의 기(羁)가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적(赤)이 조나라로 돌아와 복위했다.
곽공(郭公)의 나라가 망했다.
[전(傳)]
24년 봄, 사당의 서까래에 조각을 한 것은 모두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부 어손이 간언하기를 "신이 듣기로 검소함은 덕의 공통된 가치요, 사치함은 악의 가장 큰 우두머리라 했습니다. 선군께서는 검소한 덕이 있으셨는데 임금께서는 선군을 큰 악에 처하게 하시니 어찌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가을, 애강이 당도하자 장공이 종부들을 시켜 비단을 들고 알현하게 하니 이 역시 예법에 어긋난다. 어손이 이르기를 "남자의 폐백은 큰 것은 옥과 비단이요 작은 것은 새와 짐승이니 이는 물품의 분수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여자의 폐백은 개암, 밤, 대추, 육포에 불과하니 이는 공경함을 고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남녀가 똑같이 비단 폐백을 쓰니 이는 분별이 없는 짓입니다. 남녀의 분별은 나라의 큰 기틀인데 그것을 부인이 어지럽히니 어찌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진나라 사위가 또 공자들과 모의하여 유씨(游氏) 가문의 두 아들을 죽이게 한 뒤 헌공에게 고하기를 "이제 되었습니다. 2년이 지나지 않아 임금께서는 반드시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
1.25. 장공 25년 (기원전 669년)
[경(經)]
25년 봄, 진(陳)후가 여숙을 보내 사신으로 예물을 바쳐왔다.
여름 5월 계축일에 위후 삭(혜공)이 졸했다.
6월 신미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어 사직에서 북을 치고 희생양을 잡았다.
백희(노나라 공주)가 기(杞)나라로 시집갔다.
가을, 큰 홍수가 나자 사직과 성문에서 북을 치고 희생양을 잡았다.
겨울, 공자 우(계우)가 진나라로 갔다.
[전(傳)]
25년 봄, 진나라 여숙이 사신으로 온 것은 비로소 진나라와 화친을 맺기 시작한 일이다. 장공이 그를 가상히 여겼으므로 경에서 그의 이름(직책)을 깎지 않았다.
여름 6월 신미일 초하루의 일식 때 사직에서 북을 치고 희생을 쓴 것은 정상적인 예법이 아니다. 오직 정월 초하루에 사악한 기운이 아직 작동하지 않았을 때 일식이 나면 사직에 폐백을 바치고 조정에서 북을 칠 뿐이다.
가을의 큰 홍수 때 사직과 성문에서 북을 치고 희생을 쓴 것 역시 정상적인 예법이 아니다. 무릇 모든 천재지변에는 폐백만 바치고 희생을 쓰지 않으며, 해와 달의 일식과 월식이 아니면 북을 치지 않는다.
진나라 사위가 공자들을 부추겨 유씨 가문의 일족을 죄다 죽이게 한 뒤, 취(聚) 땅에 성을 쌓아 그들을 몰아넣고 머물게 했다. 겨울에 진 헌공이 취 땅을 포위하여 공자들을 모조리 쳐죽였다.
━━━━━━━━━━━━━━━━━━━━━━━━━━━━━━━━━━━━━━
1.26. 장공 26년 (기원전 668년)
[경(經)]
26년 봄, 장공이 융족을 벌했다.
여름, 장공이 융족을 벌하는 일로부터 돌아왔다.
조나라가 그 대부를 처형했다.
가을, 장공이 송나라 사람, 제나라 사람과 서(徐)나라를 벌했다.
겨울 12월 계해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전(傳)]
26년 봄, 진나라 사위가 대시공(토목 장관)이 되었다.
여름, 사위가 강(絳) 땅에 성을 쌓아 헌공의 궁궐을 깊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가을, 괵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침공했고, 겨울에 괵나라 사람이 또 진나라를 침공했다.
━━━━━━━━━━━━━━━━━━━━━━━━━━━━━━━━━━━━━━
1.27. 장공 27년 (기원전 667년)
[경(經)]
27년 봄, 장공이 기나라 백희를 타(洮) 땅에서 만났다.
여름 6월, 장공이 제후, 송공, 진후, 정백과 유(幽) 땅에서 동맹했다.
가을, 공자 우가 진나라로 가서 원중의 장례에 참석했다.
겨울, 기나라 백희가 친정에 왔다.
거(莒)나라의 경이 숙희를 맞이하러 왔다.
기백(기나라 군주)이 와서 조현했다.
장공이 제후와 성복(城濮)에서 만났다.
[전(傳)]
27년 봄, 장공이 기나라 백희를 타 땅에서 만난 것은 공적인 대사가 아니다. 천자는 도의를 펼치는 순수가 아니면 제후를 순시하지 않고, 제후는 백성의 공무가 아니면 경계를 넘지 않으며, 경(대부)은 군주의 명령이 아니면 국경을 넘지 않는 법이다.
여름, 유 땅에서 다시 동맹을 맺은 것은 진나라와 정나라가 패권 체제에 완전히 복종했기 때문이다.
가을, 공자 우가 진나라로 가서 원중의 장례에 참석한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원중은 계우(공자 우)의 오랜 사적인 친구였기 때문에 사적으로 간 것이다.
겨울, 기나라 백희가 친정에 온 것을 '来(왔다)'라고 적은 것은 부모를 뵙고 안부를 묻는 歸寧(귀녕)이기 때문이다. 무릇 제후의 딸이 친정에 안부를 물으러 올 때는 '来', 쫓겨나 돌아올 때는 '来歸'라 적고, 부인이 친정에 갈 때는 '如某(어디로 가다)', 쫓겨나 돌아갈 때는 '歸于某'라고 적는다.
진 헌공이 괵나라를 벌하려 하자 사위가 간하기를 "안 됩니다. 괵공이 교만하니 만약 우리에게 연거푸 승리를 거두면 반드시 자기 백성을 가벼이 여겨 버릴 것입니다. 백성의 따름이 없어진 뒤에 그를 치면, 그가 우리를 막으려 한들 누구와 함께하겠습니까? 무릇 예악과 자애는 전쟁을 위해 축적하는 가치입니다. 백성이 양보할 줄 알고, 화합을 즐기며, 친족을 사랑하고, 상사를 슬퍼한 뒤에야 군사로 부릴 수 있는 법인데 괵나라는 이를 축적하지 않았으니 자꾸 전쟁을 치르다가는 머잖아 굶주릴 것입니다" 했다.
주나라 천자가 소백 료를 보내 제 환공에게 명을 내리고, 위나라가 앞서 자퇴를 옹립했던 죄를 물어 위나라를 벌할 것을 청했다.
━━━━━━━━━━━━━━━━━━━━━━━━━━━━━━━━━━━━━━
1.28. 장공 28년 (기원전 666년)
[경(經)]
28년 봄, 王력 3월 갑인일에 제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벌하여 위나라 사람과 싸우니 위나라 군대가 대패했다.
여름 4월 정미일에 주자 쇄가 졸했다.
가을, 형(초)나라가 정나라를 벌하자 장공이 제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과 정나라를 구원했다.
겨울, 미(郿) 땅에 성을 쌓았다.
대흉년이 들어 보리와 벼가 전혀 없자, 장손신(장문중)이 제나라로 가서 쌀을 사 오기를(告糴) 청했다.
[전(傳)]
28년 봄, 제후가 위나라를 벌하여 싸움에서 위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천자의 명으로 죄를 헤아린 뒤 뇌물을 받고 돌아갔다.
진 헌공이 가(賈)나라 여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었고, 부친의 첩인 제강(齊姜)과 사통하여 진 문공의 부인이 되는 딸과 태자 신생을 낳았다. 또戎(융)족에서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니 대융의 호희는 중이(훗날 진 문공)를 낳고 소융의 자씨는 이오(훗날 진 혜공)를 낳았다. 이후 진나라가 여융을 벌하자 여융 남작이 딸 여희를 바쳤는데 여희가 해제를 낳고 그의 여동생이 탁자를 낳았다. 여희가 큰 총애를 받자 제 자식을 옹립하고자 궁외의 총신 양오와 동관오에게 뇌물을 주며 헌공에게 상소하게 했다. "곡옥은 임금의 종묘가 있는 곳이요, 포와 이굴은 임금의 국경이니 주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종묘가 있는 읍에 주인이 없으면 백성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경에 주인이 없으면 융족이 침략할 마음을 엽니다. 융족이 침략할 마음을 품고 백성이 정치를 업신여기면 나라의 우환입니다. 만약 태자 신생에게 곡옥을 주관하게 하고, 중이와 이오에게 포 땅과 두 굴 땅을 주관하게 하시면 백성에게 위엄을 보이고 융족을 두렵게 할 수 있으며, 임금의 정벌 공적을 크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고는 다 함께 말하기를 "오랑캐의 넓은 땅이 진나라의 도읍이 되는 격이니 진나라의 영토 확장에 이보다 마땅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헌공이 기뻐했다. 여름에 태자를 곡옥에 살게 하고, 중이를 포성, 이오를 굴 땅에 머물게 하니 공자들이 모두 변방 고을(鄙)로 쫓겨나고 오직 여희의 소생 두 아들만 도성인 강 땅에 남았다. 두 총신(二五)이 마침내 여희와 짜고 공자들을 참소하여 해제를 세우려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이 두 총신을 '두 마리 짝지은 소(二耦)'라고 비판했다.
초나라 영윤 자원이 선왕의 부인 문강(문왕의 부인)을 유혹하고자 그녀의 공관 옆에 거처를 마련하고 춤을 추며 방울 소리(振萬)를 요란하게 냈다. 부인이 이 소리를 듣고 울며 말하기를 "선군께서는 이 무희들로 군사 훈련을 시키고 전쟁을 대비하셨거늘, 지금 영윤은 원수에게 원한을 갚을 생각은 안 하고 과부의 처소 옆에서 춤을 추니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했다. 시종이 이 말을 자원에게 고하자 자원이 이르기를 "여인조차 원수 갚을 것을 잊지 않거늘 내가 도리어 잊고 있었구나" 하고는, 가을에 자원이 수레 600승을 이끌고 정나라를 벌하여 정나라 도성의 결질문을 뚫고 들어왔다. 자원, 투어강, 투오, 경지불비가 군대의 깃발을 맡고 투반, 왕손유, 왕손희가 후방을 맡아 군사들이 순문으로 들어와 규시 시장통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정나라 도성의 안쪽 성문(縣門)이 열린 채 내려지지 않고 안에서 사람들이 초나라 말로 태연히 지껄이고 있으니 자원이 이르기를 "정나라에 범상치 않은 인재가 있구나!" 했다. 이때 제후들이 정나라를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초나라 군대가 밤에 몰래 도망쳤다. 정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동네를 버리고 통구로 달아나려 할 때 정탐꾼이 와서 고하기를 "초나라 군영의 막사 위에 까마귀들이 앉아 있습니다" 하니 도망치기를 멈추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자 장손신이 제나라로 가서 쌀을 구했으니 이는 기근을 구제하는 예법에 맞다. 미 땅에 성을 쌓은 것에 대해 경에서 '築(쌓다)'이라 적은 것은 그곳이 큰 도읍(都)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고을에 종묘가 있고 선군의 신주가 모셔진 곳을 '都'라 하고, 없는 곳을 '邑'이라 하니 읍은 '築'이라 적고 도는 '城'이라 적는다.
━━━━━━━━━━━━━━━━━━━━━━━━━━━━━━━━━━━━━━
1.29. 장공 29년 (기원전 665년)
[경(經)]
29년 봄, 연구(延廄, 마구간)를 새로 지었다.
여름, 정나라 사람이 허(許)나라를 침공했다.
가을, 비(蜚, 진딧물 또는 사악한 곤충)가 있었다.
겨울 12월, 기나라 숙희가 졸했다.
제(諸) 땅과 방 땅에 성을 쌓았다.
[전(傳)]
29년 봄, 새로 연구를 지은 것을 경에 기록한 것은 때가 아닌 계절(봄은 농번기)에 토목공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무릇 말은 춘분(日中)에 마구간에서 내보내고 추분(日中)에 들여보내는 법이다.
여름, 정나라 사람이 허나라를 침공했다. 무릇 군대가 움직일 때 종과 북을 울리는 것을 '伐'이라 하고, 울리지 않는 것을 '侵'이라 하며, 가볍고 은밀하게 치는 것을 '襲'이라 한다.
가을, 비가 나타난 것은 재앙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사물이 재앙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경에 기록하지 않는다.
겨울 12월, 제 땅과 방 땅에 성을 쌓은 것을 때에 맞게 기록한 것은 무릇 토목공사란 청룡 별자리가 저녁에 정면으로 보일 때(농한기 초) 농사일을 마치고 공사를 경계하며, 화성(火星)이 보일 때 자재를 투입하고, 수성(水星)이 황혼에 정남향에 올 때 담장 틀을 세우며, 동지(日至)에 공사를 마무리하는 것이 상도이기 때문이다.
한편 주나라 왕실의 번피가 천자를 배반했다.
━━━━━━━━━━━━━━━━━━━━━━━━━━━━━━━━━━━━━━
1.30. 장공 30년 (기원전 664년)
[경(經)]
30년 봄, 왕력 정월이다.
여름, 군대가 성(成) 땅에 주둔했다.
가을 7월, 제나라 사람이 장(鄣)나라를 굴복시켰다.
8월 계해일에 기나라 숙희를 장사 지냈다.
9월 경오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어 사직에서 북을 치고 희생을 썼다.
겨울, 장공이 제후와 루제(魯濟)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제나라 사람이 산융(山戎)을 벌했다.
[전(傳)]
30년 봄, 주나라 천자가 괵공에게 명하여 번피를 토벌하게 하니, 여름 4월 병진일에 괵공이 번 땅으로 들어가 번중피를 사로잡아 도성으로 압송했다.
초나라 공자 자원이 정나라를 치고 돌아온 공을 내세워 마침내 선왕의 왕궁에 거처하니, 신공 투사협이 간언하자 그를 붙잡아 착고(梏)를 채웠다.
가을, 신공 투반이 반란을 일으켜 자원을 처단했고, 투골어토(자문)가 영윤이 되어 스스로 자기 재산을 털어 초나라의 난리를 수습하고 나라를 구제했다.
겨울, 장공과 제후가 루제에서 만난 것은 산융을 칠 계획을 모의하기 위함이었으니, 산융이 연(燕)나라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
1.31. 장공 31년 (기원전 663년)
[경(經)]
31년 봄, 랑(郎) 땅에 대(臺)를 지었다.
여름 4월, 설백이 졸했다.
설(薛) 땅에 대를 지었다.
6월, 제후가 와서 산융을 정벌하고 잡은 포로와 전리품(戎捷)을 바쳤다.
가을, 진(秦) 땅에 대를 지었다.
겨울, 비가 오지 않았다.
[전(傳)]
31년 여름 6월, 제후가 와서 산융의 전리품을 바친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무릇 제후가 사방 오랑캐를 물리친 공이 있으면 오직 천자에게 바쳐 천자가 오랑캐들을 경계하게 할 뿐이며, 중원의 제후국끼리는 서로 포로를 주거나 자랑하며 바치지 않는 법이다.
━━━━━━━━━━━━━━━━━━━━━━━━━━━━━━━━━━━━━━
1.32. 장공 32년 (기원전 662년)
[경(經)]
32년 봄, 소곡(小穀)에 성을 쌓았다.
여름, 송공과 제후가 양구(梁丘)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가을 7월 계사일에 공자 아(牙)가 졸했다.
8월 계해일에 장공이 안방(路寢)에서 훙서했다.
겨울 10월 기미일에 자반(子般)이 졸했다.
공자 경보가 제나라로 갔다.
적(狄)이 형(邢)나라를 벌했다.
[전(傳)]
32년 봄, 소곡에 성을 쌓은 것은 제 환공이 대상 관중을 위해 영지를 보장해주기 위함이었다.
제후가 초나라가 정나라를 침공한 일 때문에 제후들과 회합을 청하려 하자, 송 환공이 먼저 뵙기를 청하여 여름에 양구에서 만났다.
가을 7월, 신(神)이 채나라 신(莘) 땅에 강림하자 주 혜왕이 내史 과에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니 내사 과가 답했다. "나라가 장차 흥하려 할 때는 명명백백한 신이 강림하여 그 나라의 덕을 살피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도 신이 강림하여 그 나라의 악을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신의 도움을 얻어 흥하기도 하고 혹 망하기도 하니 우, 하, 상, 주나라가 모두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왕이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과가 답하기를 "신이 내린 날의 기물과 가축으로 제사를 받드셔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내사 과가 신 땅에 가서 조사하다가 괵나라가 신에게 영토를 넓혀달라는 명을 청했다는 소리를 듣고 조정으로 돌아와 고하기를 "괵나라는 필시 망할 것입니다! 무도하면서 신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했다. 신이 신 땅에 머문 지 6개월 만에 괵공이 축응, 종구, 사구를 보내 제사를 받들게 하자 신이 영토(토전)를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사구 가 이르기를 "괵나라가 망하겠구나! 내가 듣기로 나라가 흥할 때는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망할 때는 신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신이란 총명하고正直하며 한결같은 존재라 오직 사람의 덕을 의지해 행하는 법인데, 괵공은 부덕함이 가득하니 어찌 땅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당초 장공이 대(臺)를 짓고 당씨(黨氏) 가문의 집을 내려다보다가 처녀 맹임(孟任)을 보고 그녀를 쫓아갔다. 맹임이 문을 닫고 거부하며 정식 부인으로 삼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자, 장공이 자기 팔을 그어 피로 맹세하고 그녀를 받아들여 아들 자반을 낳았다. 이후 우제사(雩)를 지내고 양씨 집안에서 무예를 훈련할 때 장공의 딸들이 이를 구경했다. 마침 마부(圉人) 락(犖)이 담장 밖에서 공주들을 희롱하자 자반이 노하여 그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장공이 이 소식을 듣고 "차라리 그자를 죽여버리지 그랬느냐. 채찍질만 해서는 안 될 자다. 락은 힘이 장사라 직문의 수레 뚜껑도 던질 수 있는 놈이다"라고 우려했다. 장공의 병이 깊어지자 동생叔아(공자 아)에게 후사를 물으니 숙아가 답하기를 "경보(공자 경보)의 재능이 뛰어납니다" 했고, 동생 계우(공자 우)에게 물으니 계우가 답하기를 "신이 죽기로써 자반을 받들겠습니다" 했다. 장공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숙아는 경보의 재능을 칭찬하더구나" 하니, 계우가 사람을 시켜 주군의 명령을 사칭하여 숙아를 침수씨의 집에 머물게 하고 대부 침기를 보내 짐독(酖)이 든 술을 건네며 말하기를 "이 술을 마시면 루나라에서 그대의 후사를 보존해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고 후사도 끊길 것이다" 하니 숙아가 술을 마시고 도성으로 돌아오다가 규천에 이르러 졸했다. 이에 노나라는 그의 후사인 숙손씨를 세워주었다.
8월 계해일에 장공이 안방에서 훙서하자 자반이 즉위하여 외가인 당씨 집에 머물렀다.
겨울 10월 기미일에 공자 경보(共仲)가 마부 락을 사주하여 당씨 집에서 신임 군주 자반을 시해했다. 이에 계우는 진(陳)나라로 망명하고 경보 등은 장공의 다른 아들인 민공(閔公)을 옹립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민공(閔公)
1.1. 민공 원년(閔公元年, 기원전 661년)
【경(經)】
원년(기원전 661년) 봄, 왕력(주나라 역법) 정월이다.
제나라 사람이 형(邢)나라를 구원하였다.
여름 6월 신유일에 우리 군주 장공(莊公)을 장사 지냈다.
가을 8월에 노나라 후(公: 민공)가 제나라 후(齊侯: 환공)와 낙고(落姑)에서 맹약하고, 계자(季子: 계우)가 돌아왔다.
겨울에 제나라의 중손(仲孫)이 왔다.
【전(傳)】
원년 봄, 경에 민공이 '즉위했다'는 기록을 쓰지 않은 것은 (경부 등의) 난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인(狄人)이 형나라를 치자, 관경중(管敬仲: 관중)이 제나라 후(환공)에게 말하였다.
"융과 적은 시랑(이리와 늑대)과 같아서 만족할 줄을 모르고, 중원(諸夏)의 나라들은 친밀한 형제와 같으니 버릴 수 없으며, 안일과 향락에 빠지는 것은 짐독(酖毒: 독약)과 같아서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으랴만, 이 간서(簡書)가 두렵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간서란 환난을 같이하여 서로 구휼하는 것을 말합니다. 청컨대 형나라를 구원하여 간서의 도리를 따르소서." 이에 제나라 사람이 형나라를 구원하였다.
여름 6월에 장공을 장사 지냈으니, 난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장례가 늦어진 것이다.
가을 8월에 노후가 제후와 낙고에서 맹약한 것은 계우(季友)를 복귀시키기를 청한 것이었다. 제후가 이를 허락하고 사신을 보내 진(陳)나라에서 그를 부르게 하니, 노후는 랑(郎) 땅에 머물며 그를 기다렸다. 경에 '계자가 돌아왔다'고 쓴 것은 그를 찬미한 것이다.
겨울에 제나라의 중손추(仲孫湫)가 노나라의 난리를 살피러 왔다. 경에 '중손'이라 이름만 쓴 것 역시 그를 찬미한 것이다. 중손추가 제나라로 돌아가 보고하기를 "경부(慶父)를 제거하지 않으면 노나라의 난리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제후가 "어찌해야 그를 제거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중손추가 대답하기를 "난리가 그치지 않으면 장차 스스로 파멸할 것이니, 임금께서는 그저 기다리십시오" 하였다. 제후가 "노나라를 취할 만한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불가합니다. 노나라는 여전히 주례(周禮)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주례는 나라의 근본입니다. 신이 듣기로 나라가 망하려 할 때는 근본이 먼저 넘어지고 난 후에 가지와 잎이 따라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노나라가 주례를 버리지 않는 한 흔들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는 모름지기 노나라의 난리를 안정시켜 그들과 친하게 지내십시오. 예가 있는 이와 친하고, 중후한 이를 의지해 결속을 굳건히 하며, 틈이 생긴 이간자를 끌어들이고, 혼란에 빠진 자를 뒤엎는 것이 패왕(霸王)의 그릇입니다"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후(헌공)가 2군(군대)을 창설하여, 공(헌공) 자신이 상군(上軍)을 이끌고 태자 신생(申生)이 하군(下軍)을 이끌었다. 조숙(趙夙)이 공의 전차를 몰고(御戎), 필만(畢萬)이 융우(車右)가 되어 경(耿)나라를 멸하고, 곽(霍)나라를 멸하고, 위(魏)나라를 멸하였다. 돌아와서는 태자를 위해 곡옥(曲沃)에 성을 쌓아 주었다. 그리고 조숙에게는 경 땅을 내리고, 필만에게는 위 땅을 내려 대부(大夫)로 삼았다.
사위(士蒍)가 말하기를 "태자는 장차 왕위를 잇지 못하겠구나. 도성을 나누어 주고 직위를 경(卿)의 자리에 올렸으니, 먼저 극(極: 최고 정점)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왕위에 오르겠는가? 차라리 도망쳐서 죄가 이르는 것을 막고 오(吳)나라의 태백(太伯)처럼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하면 오히려 좋은 명성이라도 남을 터인데, 화를 당하는 것과 어찌 비교하겠는가? 또한 속담에 '마음에 진실로 허물이 없다면 어찌 집이 없음을 걱정하랴'고 했다. 하늘이 만약 태자를 도우려 하신다면 그가 진나라를 떠나지 않겠는가?" 하였다.
복언(卜偃)이 말하기를 "필만의 후손은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 만(萬)은 가득 찬 수이고, 위(魏)는 거대한 이름이다. 이것으로 첫 상을 내렸으니 하늘이 그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천자는 백성을 '조민(兆民)'이라 하고 제후는 '만민(萬民)'이라 하니, 지금 이름의 거대함이 가득 찬 수(萬)를 따랐으니 그 후손은 필시 많은 무리를 거느릴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필만이 진나라에서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점을 쳤는데 수뢰둔(水雷屯) 괘가 수지비(水地比) 괘로 변하는 괘(屯之比)를 얻었다. 신료(辛廖)가 점괘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길하다. 둔(屯)은 굳건함이요 비(比)는 들어감이니, 길함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 진(震)방은 토(土)가 되고, 수레(車)는 말(馬)을 따르며, 발(足)은 그곳에 머물고, 형(兄)이 우두머리가 되며, 어머니(母)가 덮어주고, 무리(眾)가 돌아오니, 여섯 효의 본체가 변하지 않아 합치되면서도 견고할 수 있고, 편안하면서도 적을 멸할 수 있으니 이는 공후(公侯)의 괘이다. 공후의 자손은 반드시 그 시초의 번영을 되찾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1.2. 민공 이년(閔公二年, 기원전 660년)
【경(經)】
이년 봄, 왕력 정월에 제나라 사람이 양(陽) 땅의 백성을 옮겼다.
여름 5월 을유일에 장공의 사당에서 체제(禘祭: 큰 제사)를 지냈다.
가을 8월 신축일에 노후(민공)가 서거(薨)하였다.
9월에 부인 강씨(哀姜)가 주(邾)나라로 달아났다(孫은 遜과 통함).
공자 경부(慶父)가 거(莒)나라로 망명하였다.
겨울에 제나라의 고자(高子: 고해)가 와서 맹약하였다.
12월에 적인이 위(衛)나라에 쳐들어왔다.
정나라가 그 군대를 버렸다.
【전(傳)】
이년 봄, 곽공(虢公)이 위뇌(渭汭)에서 견융(犬戎)을 패배시켰다. 이에 주지교(舟之僑)가 말하기를 "덕이 없으면서도 녹봉을 누리는 것은 재앙이다. 재앙이 장차 닥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진(晉)나라로 망명하였다.
여름, 장공의 사당에서 길체(吉禘)를 성급하게 지냈으니, 이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삼년상을 마치기 전에 지냈음을 비판함).
처음에 민공의 스승(傅)이 복의(卜齮)의 밭을 빼앗았으나 민공이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가을 8월 신축일에 공자 경부(共仲)가 복의를 시켜 무위(武齈)에서 민공을 시해하게 했다. 성계(成季: 계우)가 희공(僖公)을 모시고 주(邾)나라로 피신하자, 경부는 거(莒)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성계가 돌아와 희공을 옹립하고, 뇌물을 주어 거나라에 경부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거나라 사람이 그를 돌려보내자, 밀(密) 땅에 이르러 경부가 공자 어(魚)를 보내 용서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공자 어가 울면서 돌아가자, 경부는 "이것은 해스(奚斯: 공자 어의 이름)의 울음소리구나" 하고는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다.
민공은 애강(哀姜)의 여동생인 숙강(叔姜)의 아들이었으므로 제나라 사람이 그를 옹립했었다. 경부가 애강과 사통하였는데 애강은 경부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했다. 민공이 죽을 때 애강도 참여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로 달아난 것이다. 제나라 사람이 애강을 붙잡아 이(夷) 땅에서 죽이고 그 시신을 가지고 돌아갔는데, 희공이 청하여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
성계(계우)가 장차 태어나려 할 때, 환공(桓公)이 점을 치게 했다. 초구(楚丘)의 아버지가 거북점을 치고 말하기를 "아들입니다. 이름은 우(友)라 할 것이며, 공의 오른팔이 되어 두 사직(社稷) 사이에 거하면서 공실(公室)의 보좌가 될 것입니다. 계씨(季氏)가 망하면 노나라도 창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시초로 점을 치니 화천대유(火天大有) 괘가 건(乾) 괘로 변하는 괘를 얻어 말하기를 "돌아가 아버지의 자리를 함께 복돋우고 임금처럼 공경함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손바닥에 '우(友)' 자 모양의 무늬가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겨울 12월에 적인이 위(衛)나라를 벌하였다. 위나라 의공(懿公)은 학(鶴)을 좋아하여 학 중에서 대부의 수레(軒)를 타는 것까지 있었다. 장차 전쟁이 일어나려 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갑옷을 나누어 주자, 갑옷을 받은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학에게 싸우게 하십시오. 학은 실제로 녹봉과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의공이 석기자(石祁子)에게는 옥결(玦)을 주고, 영장자(甯莊子)에게는 화살을 주며 도성을 지키게 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으로써 나라를 돕되, 이로운 것을 택하여 행하라" 하였고, 부인에게는 수놓은 옷(繡衣)을 주며 이르기를 "두 대부의 말을 따르라" 하였다. 거공(渠孔)이 임금의 전차를 몰고, 자백(子伯)이 융우가 되었으며, 황이(黃夷)가 전봉이 되고, 공영제(孔嬰齊)가 후방을 맡았다. 형택(熒澤)에서 적인과 만나 싸웠으나 위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마침내 위나라가 멸망했다. 위나라 후(의공)가 임금의 깃발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록 참패한 것이다.
적인이 사관인 화룡활(華龍滑)과 예공(禮孔)을 사로잡아 위나라 사람들을 추격하려 하자, 두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는 대사(大史)로서 실로 나라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가지 않으면 도성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적인이 그들을 먼저 보냈다. 도성에 도착한 두 사관이 성을 지키는 이들에게 고하기를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하니, 그날 밤 나라 사람들과 함께 성을 탈출했다. 적인이 위나라 도성에 들어와 그들을 추격하여 다시 하수(河水) 가에서 패배시켰다.
처음에 혜공(惠公)이 즉위할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제나라 사람이 소백(昭伯: 제나라 공자)을 시켜 선강(宣姜: 혜공의 어머니)과 서모간 통간(烝)을 하게 하려 했다. 소백이 거절했으나 강요하여 결국 제자(齊子), 대공(戴公), 문공(文公), 송환부인(宋桓夫人), 허묵부인(許穆夫人)을 낳았다. 문공은 위나라에 환난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제나라로 피해 가 있었다. 위나라가 패망하자 송나라 환공(桓公)이 하수 가에서 위나라 유민들을 맞이하여 밤에 강을 건네주었다. 위나라의 남은 백성은 남녀를 합쳐 730명이었는데, 공(共) 땅과 등(滕) 땅의 백성을 보태니 5,000명이 되었다. 이에 대공(戴公)을 옹립하여 조(曹) 땅에 움집을 짓고 살게 했다. 이때 허묵부인이 위나라의 패망을 슬퍼하며 〈재치(載馳)〉라는 시를 지었다. 제나라 후(환공)가 공자 무휴(無虧)를 보내 전차 300승과 갑옷 입은 군사 3,000명으로 조 땅을 지키게 하였으며, 위나라 임금에게 수레와 말, 제복 다섯 벌, 소·양·돼지·닭·개 각각 300마리와 문을 세울 목재를 보내주고, 부인에게는 물고기 껍질로 장식한 수레(魚軒)와 두꺼운 비단 30조(兩)를 보내주었다.
정(鄭)나라 사람들이 고크(高克)를 미워하여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하수 가에 주둔하게 하고는 오랜 장구한 세월 동안 불러들이지 않았다. 군대가 스스로 무너져 돌아오자 고크는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이를 두고 〈청인(清人)〉이라는 시를 지어 풍자했다.
진(晉)나라 후(헌공)가 태자 신생을 보내 동산(東山)의 고락씨(皋落氏)를 치게 하려 하자, 이극(里克)이 간하여 말하기를 "태자는 종묘와 사직의 제물을 받들고 아침저녁으로 군주의 수라를 살피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총자(冢子: 맏아들)'라고 부릅니다. 군주가 순행하면 도성을 지키고, 지킬 곳이 있으면 군주를 따르니, 따르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하고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하니 이것이 고대의 제도입니다. 군대를 거느리고 독단으로 계책을 행하며 군사를 지휘하여 맹세하는 것은 군주와 재상이 도모할 일이지 태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군대는 통제와 명령에 따를 뿐이니, 일일이 명령을 받으면 위엄이 서지 않고, 독단으로 명령을 내리면 효도에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군주의 적사(적장자)는 군대를 거느려서는 안 됩니다. 군주가 관직의 본분을 잃고 태자가 군대를 거느려 위엄이 서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또한 신이 듣기로 고락씨가 장차 맞서 싸우려 한다 하니, 임금께서는 군대를 보내는 일을 그만두소서"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과인에게 아들들이 있으나 아직 누구를 세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니, 이극은 대답하지 않고 물러나 태자를 만났다.
태자가 말하기를 "나는 장차 버려지는 것입니까?" 하니, 이극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백성을 임하는 일을 맡기시고 군대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니, 직무를 공경히 수행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할 뿐이지 어찌 버려질 것을 걱정하십니까? 또한 사부(子)께서는 효도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할지언정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닦고 남을 탓하지 않으면 환난을 면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자가 군대를 이끌고 나갈 때, 공(헌공)이 한쪽만 색이 다른 옷(偏衣)을 입히고 금으로 만든 옥결(金玦)을 차게 했다. 호돌(狐突)이 전차를 몰고 선우(先友)가 융우가 되었으며, 양여자양(梁餘子養)이 한이(罕夷)의 전차를 몰고 선단목(先丹木)이 융우가 되었고, 양설대부(羊舌大夫)가 군위(軍尉)가 되었다. 선우가 말하기를 "몸에 편의를 입고 군대의 핵심(兵要)을 쥐었으니 이번 출정에 사부께서는 힘쓰셔야 합니다. 몸에 편치(치우침)가 없으면 사악함이 없고, 군대의 핵심을 쥐면 재앙을 멀리할 수 있으며, 군주와 친하여 재앙이 없을 터이니 또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호돌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시일(時)은 일의 징조요, 의복(衣)은 몸의 표장이며, 패물(佩)은 마음의 깃발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공경히 여기면 처음에 명령을 내리고, 그 몸을 귀히 여기면 순색의 옷(純衣)을 입히며, 그 마음을 쓰고자 하면 절도에 맞는 패물을 채워주는 법이다. 지금 겨울이 끝날 무렵에 명령을 내린 것은 일을 폐쇄하려는 것이요, 얼룩덜룩한 옷(尨服)을 입힌 것은 그 몸을 소원하게 하려는 것이며, 금으로 만든 결(玦: 결별을 뜻함)을 채워준 것은 그 마음을 버린 것이다. 옷으로 소원하게 하고, 시기로 폐쇄하려 하니, 겨울의 얼룩 옷은 쓸쓸한 살상(殺)의 기운이요, 차가운 금결은 이별을 뜻하니 어찌 의지할 수 있겠는가? 비록 힘써 싸우고자 한들 적을 다 소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양여자양이 말하기를 "군대를 이끄는 자는 사당(廟)에서 명령을 받고 사직(社)에서 제육을 받으며 늘 입는 상복(常服)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얻지 못하고 얼룩 옷을 입었으니 임금의 마음을 알 만하다. 죽어서 불효를 저지르느니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낫다" 하였다. 한이가 말하기를 "얼룩 옷은 기괴하여 상도가 없고, 금결은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뜻하니, 설령 돌아온들 무엇을 하겠는가? 임금께서는 이미 다른 마음을 품으셨다" 하였다. 선단목이 말하기를 "이러한 복장은 미치광이도 거부할 것입니다. 임금의 명령에 '적을 다 소탕하고 돌아오라' 하셨으나 적을 어찌 다 소탕하겠습니까? 설령 적을 다 소탕한다 한들 궁궐 안에는 참소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차라리 떠나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호돌이 군대를 물리쳐 돌아가려 하자, 양설대부가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명령을 어기는 것은 불효요, 임금의 일을 버리는 것은 불충입니다. 비록 처지가 차갑고 외로움을 알지라도 악명을 취해서는 안 되니 사부께서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직분을 다하소서" 하였다. 태자가 장차 싸우려 하자 호돌이 간하여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옛적에 신백(辛伯)이 주나라 환공(周桓公)에게 고하기를 '궁궐 안의 총애가 왕비와 맞먹고, 외정의 총애가 정부와 권력을 다투며, 서자가 적자와 비등하고, 대도시가 도성과 맞먹는 것이 난리의 근본이다'라고 하였으나 주공이 따르지 않아 화를 당했습니다. 지금 난리의 근본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어찌 왕위에 오르기를 기필하겠습니까? 효도를 다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법을 도모하십시오. 제 몸을 위태롭게 하여 죄악을 재촉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성풍(成風: 장공의 첩)이 성계(계우)에 대한 점괘를 듣고 그를 정성껏 섬기며 희공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성계가 마침내 희공을 옹립하게 된 것이다.
희공 원년(기원전 659년)에 제나라 환공이 형나라를 이의(夷儀)로 옮겨 주었고, 이년(기원전 658년)에는 위나라를 초구(楚丘)에 봉해 주었다. 형나라는 옮겨 가면서도 제 나라로 돌아가는 듯 편안해했고, 위나라는 나라가 망했던 슬픔을 잊었다.
위나라 문공(文公)은 거친 베옷을 입고 거친 고니 모자를 쓰며 재물을 아끼고 농사를 장려했으며, 상업을 통하게 하고 장인들을 우대했으며, 교화에 힘쓰고 배움을 권장하며 인재를 등용했다. 그리하여 즉위 원년에는 전차가 30승뿐이었으나, 재위 말년에는 300승에 이르렀다.
━━━━━━━━━━━━━━━━━━━━━━━━━━━━━━━━━━━━━━
춘추좌씨전 — 희공 (僖公)
━━━━━━━━━━━━━━━━━━━━━━━━━━━━━━━━━━━━━━
1.1. 희공 원년 (B.C. 659)
원년 봄, 왕력 정월이다.
제나라 군사, 송나라 군사, 조나라 백작이 섭북에 주둔하여 형나라를 구원했다.
여름 6월, 형나라가 이의로 천도하자 제나라 군사, 송나라 군사, 조나라 군사가 형나라에 성을 쌓아 주었다.
가을 7월 무진일, 부인 강씨(애강)가 이 땅에서 훙서하니, 제나라 사람이 그 유해를 거두어 돌아갔다.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침공했다.
8월, 노후(희공)가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정나라 백작, 조나라 백작, 주나라 사람과 칭 땅에서 회맹했다.
9월, 노후가 언 땅에서 주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겨울 10월 임오일, 공자 우(계우)가 군사를 이끌고 역 땅에서 거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거나라의 나를 사로잡았다.
12월 정사일, 부인 강씨의 상여가 제나라로부터 당도했다.
원년 봄, (경문에 희공의) 즉위를 칭하지 않은 것은 공이 타국으로 출분했던 연고문이다. 공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것을 서술하지 않은 것은 이를 기휘한 것이니, 나라의 수치를 기휘하는 것이 예(禮)이다.
제후들이 형나라를 구원할 때 형나라 사람들이 무너져 제후의 군대로 도망쳐 나오니, 제후의 군대가 마침내 적인(융적)을 쫓아내고 형나라의 기물과 용품을 갖추어 천도해 주었으므로, 제후의 군대에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한 것이다.
여름, 형나라가 이의로 천도하자 제후들이 성을 쌓아 주었으니, 이는 재난을 구원한 것이다. 무릇 후백(제후의 우두머리)이 재난을 구원하고 재앙을 나누며 죄를 토벌하는 것이 예이다.
가을, 초나라가 정나라를 침공한 것은 정나라가 제나라와 친교를 맺었기 때문이다. 락 땅에서 맹약한 것은 정나라를 구원할 방도를 도모한 것이다.
9월, 노후가 언 땅에서 주나라 군사를 격파한 것은 허구의 수비대 중 돌아가려던 자들을 친 것이다.
겨울, 거나라 사람이 와서 뇌물을 요구하므로 공자 우가 역 땅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거나라 자작의 아우인 나를 사로잡았는데, 대부(卿)가 아니었으나 사로잡은 것을 가시하여 기록한 것이다. 노후는 계우에게 문양의 토지와 비 땅을 하사했다.
부인 강씨의 상여가 제나라로부터 이르렀는데, 군자는 제나라 사람이 애강을 죽인 것을 두고 '지나쳤다'고 여겼으니, 여자는 남편(혹은 가문)을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1.2. 희공 이년 (B.C. 658)
이년 봄, 왕력 정월에 초구를 성문으로 둘러쌌다.
여름 5월 신사일, 우리 소군(小君) 애강을 장사 지냈다.
우나라 군사와 진(晉)나라 군사가 하양을 멸망시켰다.
가을 9월,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강나라 사람, 황나라 사람이 관 땅에서 맹약했다.
겨울 10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침입했다.
이년 봄, 제후들이 초구에 성을 쌓아 위(衛)나라를 봉해 주었으나 경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회맹에 늦게 참석했기 때문이다.
진(晉)나라 순식이 굴 땅에서 나는 명마와 수극에서 나는 보옥을 바치며 우나라에 길을 빌려 곽나라를 치기를 청했다. 진 헌공이 말하기를 "이것들은 나의 보물이다" 하니, 순식이 대답하기를 "만약 우나라에서 길을 얻는다면 이는 외부에 있는 창고에 보관하는 것과 같습니다" 했다. 헌공이 "궁지기가 그곳에 살아 있다" 하자, 순식이 대답하기를 "궁지기의 사람됨은 유약하여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며, 어릴 때부터 임금과 함께 자라 임금이 그를 친애하니 비록 간하더라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이에 순식을 보내 우나라에 길을 빌리며 말하기를 "기(冀)나라가 무도하여 전령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곽 땅의 세 문을 공격했습니다. 기나라가 이미 피폐해진 것은 오직 군(君)을 위한 연고였습니다. 이제 곽나라가 무도하여 여관을 보루 삼아 우리 읍의 남쪽 변방을 침입하니, 감히 길을 빌려 곽나라에 죄를 묻고자 합니다" 하니, 우공이 이를 허락하고 또한 먼저 곽나라를 치기를 청했다. 궁지기가 간했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여름, 진나라 리극과 순식이 군사를 이끌고 우나라 군사와 만나 곽나라를 치고 하양을 멸망시켰는데, (경문에) 우나라를 먼저 기록한 것은 뇌물을 받은 까닭이다.
가을, 관 땅에서 맹약한 것은 강나라와 황나라를 복종시킨 것이다.
제나라의 환관 수조가 비로소 다어 땅에서 군사 기밀을 누설하기 시작했다.
곽공이 상전에서 융족을 패퇴시키자, 진나라 복관 곽언이 말하기를 "곽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하양을 잃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공을 세웠으니, 이는 하늘이 그 거울(판단력)을 빼앗고 그 병을 더한 것이다. 반드시 진나라를 경시하고 그 백성을 어루만지지 않을 것이니, 다섯 번의 곡식 수확(5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했다.
겨울, 초나라가 정나라를 침공하자 투장이 정나라의 담백을 사로잡았다.
━━━━━━━━━━━━━━━━━━━━━━━━━━━━━━━━━━━━━━
1.3. 희공 삼년 (B.C. 657)
삼년 봄, 왕력 정월에 비가 오지 않았고, 여름 4월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
서나라 사람이 서국(舒)을 취했다.
6월, 비가 내렸다.
가을,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강나라 사람, 황나라 사람이 양곡에서 회동했다.
겨울, 공자 우가 제나라에 가서 회맹에 임했다.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침공했다.
삼년 봄에 비가 오지 않고 여름 6월에 비가 왔는데, 지난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으나 가뭄(旱)이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재앙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을, 양곡에서 회동한 것은 초나라를 칠 방도를 도모한 것이다.
제나라 후작이 양곡의 모임을 열어 지난날의 맹약을 거듭 확인하고자 하니, 겨울에 공자 우가 제나라에 가서 맹약에 참여했다.
초나라가 정나라를 침공하자 정 백작이 화친하려 했으나, 공숙이 반대하며 말하기를 "제나라가 바야흐로 우리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그 은덕을 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했다.
제나라 후작이 채姬와 함께 원포에서 배를 탔는데, 채희가 배를 흔들자 제후가 두려워 안색이 변하며 말렸으나 멈추지 않았다. 제후가 노하여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냈으나 혼인을 아주 끊은 것은 아니었는데, 채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냈다.
━━━━━━━━━━━━━━━━━━━━━━━━━━━━━━━━━━━━━━
1.4. 희공 사년 (B.C. 656)
사년 봄, 왕력 정월에 노후가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진(陳)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 허나라 남작, 조나라 백작과 회동하여 채나라를 침공하니 채나라가 무너졌고, 마침내 초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형 땅에 주둔했다.
여름, 허나라 남작 신신이 훙서했다.
초나라 굴완이 군문으로 와서 동맹을 맺으니, 소릉에서 회맹했다.
제나라 사람이 진(陳)나라 원도도를 체포했다.
가을, 강나라 사람, 황나라 사람과 함께 진(陳)나라를 침공했다.
8월, 노후가 초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허 목공을 장사 지냈다.
겨울 12월, 공손 자(숙손대백)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 허나라 사람, 조나라 사람과 만나 진(陳)나라를 침입했다.
사년 봄, 제나라 후작이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채나라를 침공하니 채나라가 무너졌고, 마침내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 자작(초 성왕)이 사신을 보내 제후의 군대에 말하기를 "임금은 북해에 계시고 과인은 남해에 있어, 오직 이는 말과 소의 암수가 서로 유혹하려 해도 미치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을 밟으시리라 생각지 못했는데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옛날 소강공께서 우리 선군 태공에게 명하시기를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당상의 백작을 그대가 바로잡아 주나라 왕실을 보좌하라' 하시고 우리 선군에게 토지를 하사하셨소.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황하에 이르며, 남으로는 무릉에 이르고 북으로는 무체에 이릅니다. 그대들이 바치는 포묘(제사용 묶은 띠풀)가 들어오지 않아 왕의 제사에 이바지하지 못해 술을 거르는 데 쓸 수 없으니 과인이 이를 문책하러 온 것이오. 소왕께서 남정하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으니 과인이 이를 묻고자 하오" 했다. 초나라 사신이 대답하기를 "공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우리 임금의 죄이니 감히 이바지하여 올리지 않겠습니까만, 소왕께서 돌아오지 못하신 것은 임금께서 물가(한수)에 물어보십시오" 했다. 제후의 군사가 진격하여 형 땅에 주둔했다. 여름, 초 자작이 굴완을 군사들에게 보냈다. 제후의 군사가 물러나 소릉에 주둔했다. 제나라 후작이 제후들의 군대를 진열하고 굴완과 함께 수레를 타고 그것을 관람했다. 제나라 후작이 말하기를 "어찌 과인만을 위함이겠소? 선군들의 우호를 잇고자 함이니, 과인과 우호를 함께함이 어떠하오?" 하니, 굴완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 읍의 사직에 복을 주시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 임금을 거두어 주신다면 우리 임금의 소원입니다" 했다. 제나라 후작이 "이 무리를 가지고 싸운다면 누가 능히 막아내겠으며, 이들을 가지고 성을 공격한다면 어떤 성인들 함락되지 않겠소?" 하니, 굴완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만약 덕으로써 제후들을 안정시키신다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힘을 쓰신다면 초나라는 방성산으로 성벽을 삼고 한수를 해자로 삼을 것이니, 비록 무리가 많다 한들 쓰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굴완이 제후들과 맹약했다.
진(陳)나라 원도도가 정나라 신후에게 말하기를 "군사가 진나라와 정나라 사이로 나가면 나라가 반드시 몹시 피폐해질 것이오. 만약 동쪽 방향으로 나가 동이에게 무력을 과시하고 바다를 따라 돌아간다면 괜찮을 것이오" 하니 신후가 "좋소" 했다. 원도도가 이를 제나라 후작에게 고하자 허락했다. 신후가 제나라 후작을 알현하여 말하기를 "군사들이 노둔해졌습니다. 만약 동쪽으로 나갔다가 적을 만나면 두렵건대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진나라와 정나라 사이로 나가 그들에게 자량과 짚신을 공급하게 한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하니, 제나라 후작이 기뻐하며 그에게 호뢰 땅을 주고 원도도를 체포했다.
가을, 진(陳)나라를 친 것은 충성스럽지 못함을 토벌한 것이다.
허 목공이 군중에서 졸하니 후작의 예로 장사 지낸 것은 예이다. 무릇 제후가 조회의 모임에서 죽으면 한 등급을 더하고, 왕실의 일로 죽으면 두 등급을 더하는데, 이에 곤복(임금의 제복)으로써 염을 했다.
겨울, 숙손대백이 군사를 이끌고 제후들의 군사와 만나 진(陳)나라를 침공하니, 진나라가 화친을 청해와 원도도를 돌려보냈다.
이보다 앞서, 진(晉) 헌공이 여희를 부인으로 삼으려 하여 거북점(卜)을 치니 불길하고 시초점(筮)을 치니 길했다. 공이 말하기를 "시초점을 따르겠다" 하자, 복인이 말하기를 "시초점은 짧고 거북점은 기니 긴 것을 따르는 만 못합니다. 하물며 그 괘사에 '마음이 오로지함이 변하여 우리 공의 거세한 양을 빼앗아 가리니, 한 번 향을 피우고 한 번 누린내가 나면 십 년이 지나도 오히려 그 냄새가 남아 있으리라' 했으니 결코 안 됩니다" 했으나 듣지 않고 그녀를 세웠다. 그녀가 해제를 낳았고 그 동생이 탁자를 낳았다. 해제를 태자로 세우려 할 때 이미 중대부들과 모의를 마친 여희가 태자(신생)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제강(신생의 어머니)의 꿈을 꾸셨으니 반드시 속히 제사를 지내십시오" 했다. 태자가 곡옥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 고기를 공에게 올렸는데, 공이 사냥을 가고 없자 여희가 그것을 궁중에 고이 두었다. 6일 후 공이 당도하자 독을 넣어 바쳤다. 공이 그것을 땅에 쏟아 제사 지내니 땅이 솟아올랐고, 개에게 주니 개가 죽었으며, 소신에게 주니 소신 또한 죽었다. 여희가 울며 말하기를 "적이 태자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니, 태자가 신성으로 도망쳤다. 공이 그 스승인 두원관을 죽였다. 어떤 이가 태자에게 "당신은 해명하셔야 합니다. 임금께서 반드시 분별해 주실 것입니다" 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여희 씨가 없으면 거처가 편안하지 못하고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하오. 내가 해명하면 여희에게 반드시 죄가 돌아갈 것인데, 임금은 늙으셨고 나 또한 즐겁지 않을 것이오" 했다. 그가 "당신은 도망치시렵니까?" 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실로 그 죄를 살피지 않으시는데 이 오명을 뒤집어쓰고 나가면 타국에서 누가 나를 받아주겠소" 했다. 12월 무신일에 신성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여희가 마침내 두 공자(중이와 이오)를 참소하여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니, 중이는 포 땅으로 달아나고 이오는 굴 땅으로 달아났다.
━━━━━━━━━━━━━━━━━━━━━━━━━━━━━━━━━━━━━━
1.5. 희공 오년 (B.C. 655)
오년 봄, 진(晉) 후작이 그 세자 신생을 죽였다.
기(杞)나라 백희가 와서 그 아들을 배알시켰다.
여름, 공손 자가 모나라로 갔다.
노후 및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진(陳)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 허나라 남작, 조나라 백작이 수지에서 왕세자를 알현했다.
가을 8월, 제후들이 수지에서 맹약했는데, 정나라 백작이 도망쳐 돌아가 회맹하지 않았다.
초나라 사람이 현나라를 멸망시키니 현나라 자작이 황나라로 달아났다.
9월 무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진(晉)나라 사람이 우공을 사로잡았다.
오년 봄, 왕력 정월 신해일 초하루에 동지(日南至)였다. 노후가 초하루 조회를 마친 후 마침내 관대에 올라 바라보며 기후를 기록했으니 예이다. 무릇 춘분과 추분, 동지와 하지, 입춘·입하·입추·입동에는 반드시 구름물상(雲物)을 기록하여 대비를 하기 위함이다.
진 후작이 태자 신생을 죽인 연고로 사신을 보내 알려왔다. 초기에 진 후작이 사위에게 두 공자를 위해 포 땅과 굴 땅에 성을 쌓게 했는데, 사위가 삼가지 않고 성벽 사이에 섶나무를 집어넣었다. 이오가 이를 고발하자 공이 사위에게 사신을 보내 꾸짖었다. 사위가 조아리며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상사(喪事)가 없는데 슬퍼하면 우환이 반드시 원수로 찾아오고, 군사(戎)가 없는데 성을 쌓으면 원수가 반드시 보루로 삼을 것이라 했습니다. 적수가 보루 삼을 성인데 또 무엇을 삼가겠습니까? 관직을 지키면서 명을 폐하는 것은 공경하지 못함이요, 원수의 보루를 견고히 하는 것은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충성과 공경을 잃고 어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덕을 품어야 오직 편안하고, 종자(종가 자손)라야 오직 성벽이 된다' 했으니, 임금께서 그 덕을 닦으시고 종자를 견고히 하시면 어떤 성이 이보다 낫겠습니까? 3년 안에 장차 군사를 쓰게 될 것인데 어찌 삼가겠습니까" 하고 물러나 시를 읊기를 "여우 가죽옷 털이 더부룩하고 한 나라에 세 임금이 있으니 내가 누구를 좇아야 하리오" 했다. 재난에 이르러 공이 환관 피에게 포 땅을 치게 하니, 중이가 말하기를 "임금이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겠다" 하고 전령을 돌려 말하기를 "거역하는 자는 나의 원수다" 하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 피가 그의 옷소매를 베었고 중이는 마침내 적(翟)나라로 출분했다.
여름, 공손 자가 모나라로 가서 장가를 들었다.
수지에서 회동한 것은 왕태자 정(정)을 만나 주나라 왕실을 안정시키고자 모의한 것이다.
진(陳)나라 원선중(원도도)은 정나라 신후가 소릉에서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했기 때문에, 그에게 하사받은 읍에 성을 쌓으라고 권하며 말하기를 "성벽을 아름답게 쌓으면 큰 명성이 날 것이니 자손들이 잊지 않을 것이오. 내가 당신을 위해 청해주겠소" 하고 이에 제후들에게 그를 위해 청하여 성을 쌓아 주었다. 아름답게 다 쌓아지자 정 백작에게 참소하기를 "그 하사받은 읍에 성을 아름답게 쌓은 것은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함입니다" 하니, 신후가 이로 말미암아 죄를 얻었다.
가을, 제후들이 맹약할 때 왕이 주공 자를 보내 정 백작에게 불러 말하기를 "내가 너를 위로하여 초나라를 따르게 하고 진(晉)나라로써 보좌하게 할 것이니 조금은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정 백작은 왕의 명에 기뻐하면서도 제나라에 조회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도망쳐 돌아가 회맹하지 않았다. 공숙이 말리며 말하기를 "국君은 경솔해서는 안 됩니다. 경솔하면 친한 이를 잃고, 친한 이를 잃으면 우환이 반드시 이릅니다. 병폐가 생겨 맹약을 구걸하게 되면 잃는 바가 많을 것이니 임금께서는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했으나 듣지 않고 그 군사들을 내버려 두고 돌아갔다.
초나라 자문(투곡어토)이 현나라를 멸망시키니 현나라 자작이 황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강, 황, 도, 백나라가 제나라와 바야흐로 화목했는데 모두 현나라의 인척이었다. 현나라 자작이 이를 믿고 초나라를 섬기지 않았으며 또한 방비를 설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진 후작이 다시 우나라에 길을 빌려 곽나라를 치려 하니, 궁지기가 간하여 말하기를 "곽나라는 우나라의 겉가죽(표)입니다. 곽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는 반드시 그 뒤를 따를 것이니, 진나라에게 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되며 침략자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한 번도 심하다 하겠는데 어찌 두 번이나 하겠습니까? 속담에 이른바 '덧방나무와 수레바퀴는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바로 우나라와 곽나라를 두고 한 말입니다" 했다. 우공이 "진나라는 우리와 같은 종친인데 어찌 나를 해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태백과 우중은 대왕의 소목(昭)입니다. 태백은 따르지 않았기에 후사를 잇지 못했습니다. 곽중과 곽숙은 왕계의 목(穆)으로서 문왕의 경사가 되어 공훈이 왕실에 남아 맹부에 비장되어 있습니다. 장차 곽나라를 이처럼 멸망시키려 하는데 우나라에 무슨 애정이 있겠습니까? 또한 우나라가 환공·장공의 족속보다 친밀하겠습니까? 그들을 아꼈습니까? 환공과 장공의 족속이 무슨 죄가 있어 도륙을 당했겠습니까? 오직 핍박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친족으로서 총애를 받아 핍박해도 오히려 그들을 해치는데 하물며 나라를 가지고서야 어떻겠습니까?" 했다. 우공이 "내가 올리는 제사가 풍성하고 깨끗하니 신(神)이 반드시 나를 도울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鬼神은 사람을 실로 친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덕(德)만을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서에 이르기를 '황천은 친함이 없고 오직 덕이 있는 자만을 돕는다' 했고, 또 이르기를 '기장과 쌀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이 오직 향기로운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백성들이 제물을 바꾸지 않아도 오직 덕이라야 물건을 가치 있게 한다' 했습니다. 이와 같다면 덕이 없으면 백성이 화합하지 못하고 신이 흠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기대어 의지하는 바는 장차 덕에 있을 것인데, 만약 진나라가 우나라를 취하고 밝은 덕으로써 향기로운 제물을 올린다면 신이 그것을 뱉어내겠습니까?" 했으나 듣지 않고 진나라 사신을 허락했다. 궁지기는 그 족속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나며 말하기를 "우나라는 연말 납향 제사(臘)를 지내지 못할 것이다. 이번 걸음에 진나라는 군사를 다시 일으킬 필요도 없게 되었다" 했다.
8월 갑오일, 진 후작이 상연을 포위하고 복관 곽언에게 묻기를 "내가 성공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기실 것입니다" 했다. 공이 "어느 때이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동요에 이르기를 '병자일 새벽에 용의 꼬리별이 성신에 복동하고, 군복을 균일하게 떨쳐 입고 곽나라의 깃발을 취하네. 순화성 무리가 분분하고 천책성 불빛이 번쩍이며 불 기운이 군대를 이루니 곽공이 도망치도다' 했으니, 그 9월과 10월의 교차기일 것입니다. 병자일 아침에 해가 미수(尾)에 있고 달이 천책에 있으며 순화성이 한가운데 뜰 것이니 반드시 이때입니다" 했다. 겨울 12월 병자일 초하루에 진나라가 곽나라를 멸망시키니 곽공 추가 경사(주나라 수도)로 달아났다. 진나라 군사가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에 숙소를 정했다가 드디어 우나라를 기습하여 멸망시키고, 우공과 그 대부 정백을 사로잡아 진(秦) 목공의 아내 목희의 잉신(시종)으로 삼았으며, 우나라의 제사는 닦아주고 그 직공을 왕에게 귀속시켰다. 그러므로 경문에 '진나라 사람이 우공을 사로잡았다'고 서술한 것은 우나라를 책망하고 또한 일이 쉬웠음을 말한 것이다.
━━━━━━━━━━━━━━━━━━━━━━━━━━━━━━━━━━━━━━
1.6. 희공 육년 (B.C. 654)
육년 봄, 왕력 정월이다.
여름, 노후가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진(陳)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 조나라 백작과 회동하여 정나라를 치고 신성을 포위했다.
가을, 초나라 사람이 허나라를 포위하니 제후들이 드디어 허나라를 구원했다.
겨울, 노후가 정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육년 봄, 진(晉) 후작이 가화로 하여금 굴 땅을 치게 하니 이오가 지키지 못하고 맹약하고 떠났다. 장차 적(翟)나라로 달아나려 하자 극예가 말하기를 "형(중이)이 나간 곳으로 같이 달아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양(梁)나라로 가는 것만 못하니, 양나라는 진(秦)나라와 가까워 총애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니 이에 양나라로 갔다.
여름, 제후들이 정나라를 정벌한 것은 수지의 맹약에서 도망친 연고문이다. 신밀을 포위한 것은 정나라가 제때에 성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을, 초 자작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허나라를 포위하자 제후들이 허나라를 구원하니 이에 초나라 군사가 돌아갔다.
겨울, 채 목후가 허 희공을 데리고 무성에서 초 자작을 알현했다. 허나라 남작이 낯을 묶고 옥벽을 입에 물었으며, 대부들은 최질(상복)을 입고 사는 관을 수레에 싣고 나아갔다. 초 자작이 봉백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옛날 무왕이 은나라를 이겼을 때 미자 계가 이와 같이 하자, 무왕이 친히 그 결박을 풀고 그 옥벽을 받았으며 파제(액땜 제사)를 지내주고 그 관을 불태운 뒤 예우하여 명을 내려 그 처소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하니 초 자작이 이를 따랐다.
━━━━━━━━━━━━━━━━━━━━━━━━━━━━━━━━━━━━━━
1.7. 희공 칠년 (B.C. 653)
칠년 봄, 제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침공했다.
여름, 소주자(小邾子)가 와서 조회했다.
정나라가 그 대부 신후를 죽였다.
가을 7월, 노후가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진(陳)나라 세자 관, 정나라 세자 화와 녕무에서 회맹했다.
조나라 백작 반이 졸했다.
공자 우가 제나라로 갔다.
겨울, 조 소공을 장사 지냈다.
칠년 봄, 제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침공하자 공숙이 정 백작에게 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마음이 굳세지 못하다면 어찌 병폐를 꺼리겠는가' 했습니다. 강해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약해지지도 못하니 이 때문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청컨대 제나라에 몸을 낮추어 나라를 구원하십시오" 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그 연유를 알고 있으니 잠시 나를 기다려라" 하자, 대답하기를 "아침이 저녁에 미치지 못할 만큼 급박한데 어찌 임금을 기다리겠습니까" 했다.
여름, 정나라는 제나라를 기쁘게 하기 위해 신후를 죽였고, 또한 진(陳)나라 원도도의 참소를 쓴 것이다. 초기에 신후는 신나라 출신으로 초 문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문왕이 죽으려 할 때 그에게 옥벽을 주며 떠나게 하며 말하기를 "오직 나만이 너를 안다. 너는 사리사욕을 오로지하여 만족할 줄 모른다. 내가 주는 대로 받고 구하는 대로 주어 너를 탓하지 않았으나, 후인은 네게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니 너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속히 떠나되 소국으로 가지 마라, 장차 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 장사를 지내자 정나라로 출분하여 또한 려공에게 총애를 받았다. 자문이 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신하를 알기는 임금만 한 이가 없다'고 하더니 고칠 수 없는 말이구나" 했다.
가을, 녕무에서 회맹한 것은 정나라의 일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관중이 제나라 후작에게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이탈한 자는 예(禮)로써 부르고, 먼 곳에 있는 자는 덕(德)으로써 품으며, 덕과 예가 바뀌지 않으면 품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했습니다" 하니, 제나라 후작이 제후들에게 예를 닦았고 제후들의 관원들이 방물을 받았다. 정 백작은 태자 화를 보내 모임에서 명을 듣게 했는데, 태자 화가 제나라 후작에게 말하기를 "설씨, 공씨, 자인씨의 세 족속이 실로君命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그들을 제거해 주시어 화친을 이루어 주신다면, 나는 정나라를 내부의 신하로 삼을 것이니 임금 또한 불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했다. 제나라 후작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관중이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예와 신의로써 제후들을 거느려 오셨는데, 간사함으로 마친다면 이 어찌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아버지를 간하지 않는 것을 예라 하고, 명을 지켜 제때를 함께하는 것을 신의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어기는 것은 간사함 중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했다. 공이 "제후들이 정나라를 토벌하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는데, 이제 만약 틈이 생겼으니 이를 따르는 것이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만약 덕으로써 그들을 안정시키고 훈계하는 말로 더하시어 제후들을 이끌고 정나라를 토벌하신다면, 정나라는 뒤집혀 망하는 것을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 감히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 죄인을 거느리고 임하신다면 정나라에 명분이 생길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물며 제후를 모은 것은 덕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모임에서 간사함을 나열한다면 무엇으로써 후사에게 보이겠습니까? 제후들의 모임은 그 덕과 형벌, 예와 의를 기록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간사한 자리를 기록한다면 임금의 맹약은 쇠퇴할 것입니다. 지어내고 기록하지 않는 것은 성덕이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결코 허락하지 마십시오. 정나라는 반드시 맹약을 받을 것입니다. 저 자화는 이미 태자가 되었으면서 대국에 기대어 그 나라를 약화시키려 하니 또한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정나라에는 숙첨, 도숙, 사숙의 세 현인(三良)이 정사를 보고 있으니 틈을 낼 수 없습니다" 하니 제나라 후작이 거절했다. 자화는 이로 말미암아 정나라에서 죄를 얻었다.
겨울, 정 백작이 사신을 보내 제나라에 맹약을 청했다.
윤월, 주(周) 혜왕이 붕서했는데, 양왕이 대숙 대의 난을 미워하고 자신이 서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상을 발표하지 않고 제나라에 난리를 고했다.
━━━━━━━━━━━━━━━━━━━━━━━━━━━━━━━━━━━━━━
1.8. 희공 팔년 (B.C. 652)
팔년 봄, 왕력 정월에 노후가 왕인(주나라 사신),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위나라 후작, 허나라 남작, 조나라 백작, 진(陳)나라 세자 관과 조 땅에서 회맹하니, 정나라 백작이 맹약을 구걸했다.
여름, 적(翟)나라가 진(晉)나라를 침공했다.
가을 7월, 대묘에서 체제(禘祭)를 지내며 부인(애강)의 신위를 들여놓았다.
겨울 12월 정미일, 천왕(혜왕)이 붕서했다.
팔년 봄, 조 땅에서 회맹한 것은 왕실의 일을 도모한 것이다. 정 백작이 맹약을 구걸한 것은 복종하기를 청한 것이다. 양왕이 자리를 확정한 후에 비로소 상을 발표했다.
진(晉)나라 리극이 군사를 이끌고, 양유미가 수레를 몰며, 곽사가 우거가 되어 채상에서 적나라를 격파했다. 양유미가 상처를 입고 "적들은 부끄러움이 없으니 그들을 쫓아가면 반드시 크게 이길 것입니다" 하자 리극이 "그들을 두렵게 할 뿐이지 많은 적을 재촉하지 마라" 했다. 곽사가 "일 년 안에 적들이 반드시 올 것이니, 그들에게 약함을 보인 꼴이다" 했다.
여름, 적나라가 진나라를 침공한 것은 채상 전투의 보복이다. 과연 한 달 만에 돌아온 것이다.
가을, 체제를 지내며 애강의 신위를 들여놓은 것은 예가 아니다. 무릇 부인이 정침에서 훙서하지 않고, 묘에 빈소를 차리지 않으며, 동맹국에 고부하지 않고, 시어머니 사당에 합사(祔)하지 않았다면 신위를 들이지 않는 법이다.
겨울, 왕인이 와서 상을 고한 것은 난리 연고문이다. 이 때문에 늦어졌다.
송 환공이 병이 들자 태자 자보(양공)가 완강히 청하기를 "목이가 나이가 많고 또한 인자하니 임금께서는 그를 세우십시오" 했다. 공이 목이(자어)에게 명하자 자어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양보할 수 있으니 인자함이 이보다 어찌 크겠습니까? 신은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서열에도 순리롭지 못합니다" 하고 드디어 달아나 물러났다.
━━━━━━━━━━━━━━━━━━━━━━━━━━━━━━━━━━━━━━
1.9. 희공 구년 (B.C. 651)
구년 봄, 왕력 3월 정축일에 송나라 공작 어설(환공)이 졸했다.
여름, 노후가 재 주공, 제나라 후작, 송나라 세자, 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 허나라 남작, 조나라 백작과 규구에서 회동했다.
가을 7월 을유일에 백희가 졸했다.
9월 무辰일에 제후들이 규구에서 회맹했다.
갑자일, 진(晉) 후작 궤저(헌공)가 졸했다.
겨울, 진나라 리극이 그 임금의 아들 해제를 죽였다.
구년 봄, 송 환공이 졸하여 아직 장사 지내기 전에 양공이 제후들과 회동했으므로 (경문에) '자(子)'라 일컬은 것이다. 무릇 상중에 있을 때 왕은 '소동'이라 하고 공후는 '자'라 한다.
여름, 규구에서 회동한 것은 지난 맹약을 거듭 확인하고 우호를 닦은 것이니 예이다.
왕이 재공(재공 공)을 보내 제나라 후작에게 제사 고기(胙)를 하사하며 말하기를 "천자께서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를 지내시고 공을 시켜 백구(백구, 제桓公)에게 제사 고기를 주시노라" 했다. 제나라 후작이 아래로 내려가 절하려 하자 재공이 "또한 뒤의 명이 있으십니다. 천자께서 공을 시켜 말씀하시기를 '백구는 나이가 많아 늙으셨으니 노고를 가하여 한 등급을 하사하여 아래로 내려가 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했다. 환공이 대답하기를 "하늘의 위엄이 얼굴 앞 지척을 떠나지 않거늘, 저 소백(소백)이 감히 천자의 명을 탐하여 아래로 내려가 절하지 않겠습니까? 아래에서 실추되어 천자에게 부끄러움을 남길까 두렵사오니 감히 내려가 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내려가 절한 뒤 올라가 받았다.
가을, 제나라 후작이 규구에서 제후들과 맹약하며 말하기를 "무릇 우리 동맹의 사람들은 동맹한 후에 우호로 돌아가자" 했다. 재공이 먼저 돌아가다가 진 헌공을 만나 말하기를 "모임에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나라 후작은 덕을 힘쓰지 않고 먼 곳의 일을 경영하는 데 힘쓰고 있으니, 이 때문에 북으로는 산융을 치고 남으로는 초나라를 쳤으며 서로는 이 모임을 가졌습니다. 동쪽을 경영하는 것은 모르겠으나 서쪽은 그렇지 못하니 장차 난리가 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난리를 가라앉히는 데 힘쓰시고 걸음을 수고롭게 하지 마십시오" 하니 진 후작이 이에 돌아갔다.
9월, 진 헌공이 졸하자 리극과 비정이 문공(중이)을 맞아들이고자 하여 세 공자의 무리와 함께 난을 일으켰다. 초기에 헌공이 순식으로 하여금 해제를 보필하게 했는데, 공이 병이 들자 그를 불러 말하기를 "이 외롭고 어린아이를 가지고 대부에게 욕을 보게 하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하자 조아리며 대답하기를 "신이 그 고갱이의 힘을 다하고 충정을 더할 것이니, 성공함은 임금의 영험이요 성공하지 못한다면 죽음으로써 잇겠습니다" 했다. 공이 "무엇을 충정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공가의 이익을 위해 알면 행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충(忠)이요, 죽은 이를 보내고 산 이를 섬기며 둘 사이에 의심이 없는 것이 정(貞)입니다" 했다. 리극이 장차 해제를 죽이려 할 때 먼저 순식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세 원망(세 공자의 무리)이 장차 일어날 것이고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보좌할 것이니 그대는 어찌하겠소?" 하니 순식이 "장차 죽을 뿐이오" 했다. 리극이 "이익이 없소" 하자 순숙이 "내가 선군과 말을 맺었으니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소. 어찌 말을 다시 하고자 몸을 아끼겠소? 비록 이익이 없을지라도 장차 어디로 피하겠소? 또한 사람이 선해지자고 하는데 누가 나와 같지 않겠소? 내가 두 마음을 품지 않고자 하면서 어찌 남에게 그만두라 말할 수 있겠소" 했다.
겨울 10월, 리극이 해제를 상방(次)에서 죽이니 경문에 '그 임금의 아들을 죽였다'고 쓴 것은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식이 죽으려 하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탁자를 세우고 보필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순식이 공자 탁자를 세우고 장사를 지냈다. 11월, 리극이 공자 탁자를 조정에서 죽이니 순식이 이에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시경에 이른바 '흰 규옥의 흠집은 오히려 갈 수 있으나, 이 말의 흠집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순식을 두고 한 말이구나" 했다.
제나라 후작이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정벌하러 갔다가 고량에 이르러 돌아갔으니, 진나라의 난리를 토벌하기 위함이다. 명령이 노나라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경문에) 기록하지 않았다.
진(晉)나라 극예가 이오로 하여금 진(秦)나라에 많은 뇌물을 주고 들어오기를 구하게 하며 말하기를 "남들이 실로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들어가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면 토지가 어디에 가겠는가" 하니 이를 따랐다. 제나라 습붕이 군사를 이끌고 진(秦)나라 군사와 만나 진 혜공(이오)을 맞아들였다. 진(秦) 백작이 극예에게 묻기를 "공자는 누구를 믿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망명한 사람은 무리가 없고, 무리가 있으면 반드시 원수가 생긴다 했습니다. 이오는 유약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싸울 수 있으나 도를 넘지 않으며, 자란 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니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했다. 진 백작이 공선지에게 묻기를 "이오가 나라를 안정시키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오직 법칙(則)이 있어야 나라를 안정시킨다 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도 상제의 법칙을 따르도다' 한 것은 문왕을 두고 한 말이며, 또 이르기를 '어긋나지 않고 해치지 않으니 법칙이 되지 않음이 드물다' 한 것은 좋아함도 없고 미워함도 없으며 시기하지도 이기려 하지도 않음을 말합니다. 지금 그의 말에는 시기하고 이기려는 마음이 많으니 어렵겠습니다" 했다. 진 백작이 "시기하면 원망이 많을 것인데 또 어찌 이기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이익이다" 했다.
송 양공이 즉위하여 공자 목이를 인자하다 여겨 좌사로 삼아 정사를 듣게 하니 이에 송나라가 다스려졌다. 이 때문에 어씨(魚氏)가 대대로 좌사가 되었다.
━━━━━━━━━━━━━━━━━━━━━━━━━━━━━━━━━━━━━━
1.10. 희공 십년 (B.C. 650)
십년 봄, 왕력 정월에 노후가 제나라로 갔다.
적나라가 온(溫)나라를 멸망시키니 온자(溫子)가 위나라로 달아났다.
진(晉)나라 리극이 그 임금 탁자를 시해하고 그 대부 순식을 죽였다.
여름, 제나라 후작과 허나라 남작이 북융을 정벌했다.
진나라가 그 대부 리극을 죽였다.
가을 7월이다.
겨울, 큰 폭설이 내렸다.
십년 봄, 적나라가 온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소자(溫子 소정공)가 신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자가 왕을 배반하고 적나라로 가더니 또한 적나라와도 잘 지내지 못했다. 적나라 사람이 그를 공격했으나 왕이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멸망한 것이니, 소자는 위나라로 달아났다.
여름 4월, 주공 기부와 왕자 당이 제나라 습붕과 만나 진 후작을 세웠다. 진 후작은 리극을 죽여 (민심을) 기쁘게 하려 했다. 장차 리극을 죽이려 할 때 공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오. 비록 그러하나 그대는 두 임금과 한 대부를 시해했으니, 그대의 임금이 된 자 또한 어렵지 않겠소?" 하니 대답하기를 "폐함이 없었다면 임금께서 어찌 흥하셨겠습니까? 죄를 더하고자 하는데 어찌 말이 없겠습니까! 신은 명을 들었습니다" 하고 칼에 엎어져 죽었다. 이에 평정이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뇌물이 늦어진 것을 사죄했으므로 리극은 살려주지 못했다.
진 후작이 공태자(신생)를 개장했다. 가을에 희돌(호돌)이 하국으로 가다가 태자를 만났는데, 태자가 그를 마차에 태우고 고하여 말하기를 "이오가 무례하니 내가 상제에게 청함을 얻었노라. 장차 진(晉)나라를 진(秦)나라에 줄 것이니 진나라가 나를 제사 지낼 것이다" 했다. 호돌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신은 유가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고, 백성은 족속이 아닌 것에 제사 지내지 않는다 했습니다. 임금의 제사가 이에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형벌을 잘못 내리고 제사를 결핍되게 하십니까, 임금께서는 도모하십시오" 하니 임금이 "오냐, 내가 다시 청하겠다. 7일 후에 신성의 서쪽 편에 장차 무당이 있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허락한 뒤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기일에 이르러 가니 고하여 말하기를 "상제께서 내게 죄 있는 자를 벌하라 허락하셨다. 한(韓) 땅에서 패할 것이다" 했다. 평정이 진(秦)나라에 갔을 때 진 백작에게 말하기를 "여생, 극칭, 극예가 실로 따르지 않고 있으니, 만약 중하게 폐백을 물어 그들을 부르신다면 신이 진나라 임금을 내보내고 임금께서 중이를 맞아들이시면 성공하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했다.
겨울, 진 백작이 냉지를 보내 답방하게 하고 또한 세 사람을 부르니, 극예가 말하기를 "폐백이 중하고 말이 달콤하니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평정, 기거 및 칠여대부인 좌행 공화, 우행 가화, 숙견, 추천, 뢰호, 특궁, 산기를 모두 죽였으니, 이들은 모두 리극과 평정의 무리였다. 평포가 진(秦)나라로 달아나 진 백작에게 말하기를 "진 후작은 큰 은혜를 배반하고 작은 원망을 시기하니 백성들이 돕지 않습니다. 그를 치면 반드시 쫓겨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무리를 잃었다 한들 어찌 다 죽이겠는가? 화를 피할 뿐이지 누가 능히 임금을 쫓아내겠는가" 했다.
━━━━━━━━━━━━━━━━━━━━━━━━━━━━━━━━━━━━━━
1.11. 희공 십일년 (B.C. 649)
십일년 봄, 진나라가 그 대부 평정부를 죽였다.
여름, 노후 및 부인 강씨(목희)가 양곡에서 제나라 후작과 회동했다.
가을 8월, 크게 기우제(雩祭)를 지냈다.
겨울, 초나라 사람이 황나라를 침공했다.
십일년 봄, 진 후작이 평정의 난리를 가지고 사신을 보내 알려왔다.
천왕(양왕)이 소 무공과 내사 과를 보내 진 후작에게 명을 내렸는데, 옥을 받음이 게을렀다. 내사 과가 돌아가 왕에게 고하기를 "진 후작은 그 후사가 없지 않겠습니까! 왕께서 그에게 명을 내리셨으나 서옥을 받음에 게을렀으니 먼저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그가 어찌 계승함이 있겠습니까? 예(禮)는 나라의 줄기요, 공경은 예의 수레입니다. 공경하지 않으면 예가 행해지지 않고, 예가 행해지지 않으면 상하가 어두워지니 어찌 세상을 오래 살아가겠습니까" 했다.
여름, 양거, 천고, 이락의 융족이 함께 경사를 침공하여 왕성에 들어와 동문을 불태우니, 왕자 대가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융족을 정벌하여 주나라를 구원했다. 가을, 진 후작이 왕을 위해 융족과 화친했다.
황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귀속시키지 않으니, 겨울에 초나라 사람이 황나라를 침공했다.
━━━━━━━━━━━━━━━━━━━━━━━━━━━━━━━━━━━━━━
1.12. 희공 십이년 (B.C. 648)
십이년 봄, 왕력 3월 경오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초나라 사람이 황나라를 멸망시켰다.
가을 7월이다.
겨울 12월 정축일에 진(陳)나라 후작 목구(선공)가 졸했다.
십이년 봄, 제후들이 위나라 초구의 외성을 쌓아 주었으니 적나라의 난리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황나라 사람이 제후들이 제나라와 화목한 것을 믿고 초나라의 직공을 이바지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영(郢, 초나라 수도)에서 우리까지 900리인데 어찌 나를 해치겠는가" 하니, 여름에 초나라가 황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이 융족의 난리 연고로 왕자 대를 문책하니, 가을에 왕자 대가 제나라로 달아났다.
겨울, 제나라 후작이 관이오를 보내 왕을 위해 융족과 화친하게 하고, 습붕을 보내 진(晉)나라를 위해 융족과 화친하게 했다. 왕이 상경의 예로써 관중에게 잔치를 베풀려 하자 관중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신은 천한 관리(유공)일 뿐입니다. 천자의 두 수신인 국씨와 고씨가 계시거늘, 만약 춘추의 계절을 절제하여 와서 왕의 명을 받든다면 무엇으로써 예우하시겠습니까? 배신(제후의 신하)이 감히 거절합니다" 했다. 왕이 "구씨(구씨, 제환공의 친척인 관중을 대우하는 말), 나는 네 공훈을 가상히 여기고 네 아름다운 덕에 응하여, 다스림을 잊지 말고 가서 네 직무를 밟아 내 명을 거역하지 말라" 하니, 관중이 하경의 예를 받고 돌아갔다. 군자가 말하기를 "관씨의 세대 제사가 마땅하구나! 사양함에 그 윗사람을 잊지 않았으니, 시경에 이르기를 '화락하고 온화한 군자여, 신령이 위로하는 바로다' 했다"고 했다.
━━━━━━━━━━━━━━━━━━━━━━━━━━━━━━━━━━━━━━
1.13. 희공 십삼년 (B.C. 647)
십삼년 봄, 적나라가 위나라를 침입했다.
여름 4월, 진 선공을 장사 지냈다.
노후가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진(陳)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 허나라 남작, 조나라 백작과 함 땅에서 회동했다.
가을 9월,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겨울, 공자 우가 제나라로 갔다.
십삼년 봄, 제나라 후작이 중손 추를 보내 주나라에 빙문하게 하고 또한 왕자 대의 일을 말하게 했다. 일을 마치고 왕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돌아와 복명하기를 "아직 안 됩니다. 왕의 노여움이 아직 태만해지지 않았으니 그 10년이겠습니까! 10년이 아니면 왕이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여름, 함 땅에서 회동한 것은 회이(淮夷)가 기(杞)나라를 괴롭힌 까닭이며, 또한 왕실의 일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가을, 융족의 난리 연고문으로 제후들이 주나라를 수비하니, 제나라 중손 추가 그들을 이르게 했다.
겨울, 진(晉)나라에 거듭 흉년(薦饑)이 들어 진(秦)나라에 쌀을 구걸하게 하니, 진 백작이 자상에게 묻기를 "어찌하랴?" 했다. 대답하기를 "은혜를 거듭 베풀어 보답을 받으시면 임금께서 무엇을 더 구하시겠습니까? 은혜를 거듭 베풀었으나 보답하지 않으면 그 백성들이 반드시 이반할 것이니, 이반했을 때 토벌하시면 무리가 없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했다. 백리해에게 묻기를 "어찌하랴?" 하니 대답하기를 "천재지변이 유행함은 국가마다 교대로 있는 법이니, 재난을 구원하고 이웃을 휼념하는 것이 도(道)입니다. 도를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했다. 평정의 아들 평표가 진(秦)나라에 있으면서 진나라를 치기를 청했으나, 진 백작이 말하기를 "그 임금은 미우나 그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고 진(秦)나라가 이에 진(晉)나라에 곡식을 수송해 주니, 옹 땅에서 강 땅까지 배가 서로 이어졌으므로 이를 일컬어 '범주의 역(汎舟之役)'이라 했다.
━━━━━━━━━━━━━━━━━━━━━━━━━━━━━━━━━━━━━━
1.14. 희공 십사년 (B.C. 646)
십사년 봄, 제후들이 연릉에 성을 쌓았다.
여름 6월, 계희와 증(鄫)나라 자작이 방 땅에서 만났고, 증나라 자작으로 하여금 와서 조회하게 했다.
가을 8월 신묘일, 사록산이 무너졌다.
적나라가 정나라를 침입했다.
겨울, 채나라 후작 희(목공)가 졸했다.
십사년 봄, 제후들이 연릉에 성을 쌓고 기(杞)나라를 그리로 천도하게 했으나 경문에 서술하지 않은 것은 그 정사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증나라 계희가 친정을 위문하러 오자 공이 노하여 그녀를 머물게 했으니, 증 자작이 조회하지 않은 까닭이다. 여름에 방 땅에서 만나 이에 와서 조회하게 했다.
가을 8월 신묘일에 사록산이 무너졌다. 진(晉)나라 복관 곽언이 말하기를 "기년에 장차 큰 허물이 있어 거의 나라가 망할 것이다" 했다.
겨울,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晉)나라에 쌀을 구걸하게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주지 않았다. 경정이 말하기를 "은혜를 배반하면 친함이 없고,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면 인자하지 못하며, 탐하여 아끼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고, 이웃을 노하게 하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이 네 가지 덕을 모두 잃었으니 무엇으로써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했다. 곽사가 "가죽이 존재하지 않는데 털이 장차 어디에 붙겠소?" 하니, 경정이 말하기를 "신의를 버리고 이웃을 배반하면 우환을 누가 휼념해 주겠습니까? 신의가 없으면 우환이 일어나고, 원조를 잃으면 반드시 쓰러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러한 법입니다" 했다. 곽사가 "원망을 줄이지 못하면서 적만 두텁게 할 뿐이니 주지 않는 것만 못하오" 하자, 경정이 "은혜를 배반하고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백성이 버리는 바입니다. 가까운 이도 오히려 원수로 여기는데 하물며 원망 깊은 적이겠습니까" 했으나 듣지 않았다. 물러나며 말하기를 "임금께서 반드시 이를 후회하실 것이다" 했다.
━━━━━━━━━━━━━━━━━━━━━━━━━━━━━━━━━━━━━━
1.15. 희공 십오년 (B.C. 645)
십오년 봄, 왕력 정월에 노후가 제나라로 갔다.
초나라 사람이 서(徐)나라를 침공했다.
3월, 노후가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진(陳)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 허나라 남작, 조나라 백작과 목구에서 회맹하고, 드디어 광 땅에 주둔했다. 공손 오(맹목백)가 군사를 이끌고 제후들의 대부들과 함께 서나라를 구원했다.
여름 5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제나라 군사와 조나라 군사가 리나라를 침공했다. 8월에 누리(螽) 재해가 있었다.
9월, 노후가 회맹으로부터 돌아왔다.
계희가 증나라로 돌아갔다.
기묘일 그믐에 이백의 사당에 벼락이 쳤다.
겨울, 송나라 사람이 조나라를 침공했다. 초나라 사람이 누림에서 서나라를 패퇴시켰다.
11월 임술일, 진(晉) 후작과 진(秦) 백작이 한(韓) 땅에서 싸워 진 후작을 사로잡았다.
십오년 봄, 초나라가 서나라를 침공한 것은 서나라가 제후들(諸夏)을 따랐기 때문이다. 3월에 목구에서 회맹한 것은 규구의 맹약을 거듭 확인하고 또한 서나라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맹목백이 군사를 이끌고 제후들의 군사와 함께 서나라를 구원하니, 제후들은 광 땅에 주둔하여 그를 기다렸다.
여름 5월에 일식이 있었으나 초하루(朔)와 일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관원이 실기했기 때문이다.
가을, 리나라를 친 것은 서나라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진 후작이 나라에 들어올 때 진(秦) 목희가 가군(賈君)을 부탁하며 또한 "여러 공자들을 모두 맞아들이라"고 했다. 진 후작은 가군과 음행을 저지르고 또한 여러 공자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목희가 그를 원망했다. 진 후작은 중대부들에게 뇌물을 주기로 약속했으나 이윽고 모두 배반했고, 진 백작에게 하외의 다섯 성을 주기로 하여 동으로는 곽략에 다하고 남으로는 화산에 미치며 내로는 해량성까지 주기로 했으나 이윽고 주지 않았다. 진(晉)나라에 흉년이 들자 진(秦)나라가 곡식을 보내주었으나,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자 진(晉)나라가 쌀을 파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진 백작이 진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복관 도부가 시초점을 치니 길했다. "황하를 건너면 임금의 수레가 부서질 것입니다" 하니 문책하자 대답하기를 "바로 대길함입니다. 세 번 패하더라도 반드시 진나라 임금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 괘가 고(蠱)괘를 만났습니다. 이르기를 '천승의 수레가 세 번 떠나고 그 세 번 떠난 나머지에 그 수컷 여우를 잡으리라' 했습니다. 무릇 여우의 고혹함은 반드시 그 임금일 것입니다. 고괘의 하괘(貞)는 바람(風)이요 상괘(悔)는 산(山)입니다. 세월이 가을이라 하니 우리 산이 그 열매를 떨어뜨리고 그 재목을 취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열매가 떨어지고 재목이 없어지니 패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했다. 세 번 패하여 한 땅에 이르자 진 후작이 경정에게 묻기를 "적이 깊이 들어왔으니 어찌하랴?"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실로 깊이 들이셨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했다. 공이 "공손하지 못하다" 하고 우거(右)를 점치니 경정이 길했으나 쓰지 않고, 보양이 수레를 몰고 장복도가 우거가 되어 작은 이수마(小駟)를 탔는데, 이는 정나라에서 들여온 말이었다. 경정이 말하기를 "옛날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땅에서 생산되어 그 수토를 알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 그 가르침에 안 정되고 그 도리에 길들여진 말을 타서 오직 드리는 바대로 뜻과 같지 않음이 없게 했습니다. 이제 타지에서 생산된 말을 타고 군사에 임했다가 두려워 변하게 되면 장차 사람과 통제를 바꾸려 할 것이니, 어지러운 기운이 교활하게 분노하고 음혈이 두루 일어나 맥이 뛰고 기운이 솟구치나 겉만 강하고 속은 비어 나아가고 물러갈 수도 없으며 선회할 수도 없을 것이니 임금께서는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했으나 듣지 않았다. 9월, 진 후작이 진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한간으로 하여금 군사를 살펴보게 하니 돌아와 말하기를 "군사는 우리보다 적으나 투사는 우리보다 배나 됩니다" 했다. 공이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감에는 그 자량에 의지했고 들어옴에는 그 총애를 썼으며 흉년에는 그 곡식을 먹었으니 세 번 은혜를 입고도 보답이 없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이제 또 그들을 치려 하니 우리는 나태하고 진나라는 분발하고 있으니 배나 됨도 오히려 미치지 못합니다" 했다. 공이 "한 사내도 길들일 수 없거늘 하물며 나라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신을 보내 싸움을 청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불민하여 그 무리를 합치지도 못하고 또한 떠나보내지도 못하겠소. 임금께서 만약 돌아가지 않으신다면 도망쳐 명을 피할 곳이 없소" 하니, 진 백작이 공손지를 보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아직 들어가지 못하셨을 때 과인이 이를 두려워했고, 들어가셨으나 자리가 안정되지 못했을 때도 오히려 나의 우환이었습니다. 진실로 자리가 안정되셨다면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했다. 한간이 물러나며 말하기를 "나는 다행히 포로가 되겠구나" 했다. 임술일에 한원(韓原)에서 싸우는데 진나라의 융마가 진흙 수렁에 빠져 멈추었다. 공이 경정을 소리쳐 부르자 경정이 말하기를 "간함을 거역하고 점을 위반했으니 진실로 패함을 구한 것인데 또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떠나버렸다. 양유미가 한간의 수레를 몰고 곽사가 우거가 되어 진 백작을 수레로 가로막아 장차 멈추게 하려 했는데, 경정이 공을 구원하느라 그르쳐 드디어 진 백작을 놓쳤다. 진나라가 진 후작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진나라 대부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군막을 뽑아 그 뒤를 따랐다. 진 백작이 사신을 보내 사절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찌 그리 슬퍼하오? 과인이 임금을 모시고 서쪽으로 가는 것은 또한 진나라의 요사스러운 꿈을 실천하는 것뿐이니 어찌 감히 극단에 이르겠소" 하니, 진나라 대부들이 세 번 절하고 조아리며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후토를 밟으시고 황천을 이고 계시니 황천후토가 실로 임금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군신들이 감히 하풍에 있겠습니다" 했다. 목희는 진 후작이 장차 당도한다는 말을 듣고 태자 영, 홍과 딸 간벽과 함께 대에 올라 섶나무를 밟고 서서, 형벌을 면하는 옷(免服)과 최질(상복)을 입고 맞이하게 하며 또한 고하여 말하기를 "상제께서 재앙을 내리시어 우리 두 임금으로 하여금 옥백으로 서로 보지 못하게 하시고 군사를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만약 진나라 임금이 아침에 들어오면 비자(목희 자신)는 저녁에 죽을 것이요, 저녁에 들어오면 아침에 죽을 것이니 오직 임금께서 재단하십시오" 하니, 이에 그를 영대에 거처하게 했다. 대부들이 들어오기를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진 후작을 사로잡은 것은 두터운 대가를 가지고 돌아오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상(喪)을 가지고 돌아온 꼴이 되었으니 어디에 쓰겠는가? 대부들에게 무엇이 있겠는가? 또한 진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근심하여 우리를 무겁게 하고天地가 우리에게 맹세하게 했으니, 진나라의 근심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그 노여움을 거듭하는 것이다. 내가 내 말을 먹는 것은 천지를 배반하는 것이다. 거듭된 노여움은 감당하기 어렵고 하늘을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반드시 진나라 임금을 돌려보낼 것이다" 했다. 공자 즙이 "그를 죽여 악을 쌓지 않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자상이 말하기를 "그를 돌려보내고 그 태자를 볼모로 잡으면 반드시 큰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진나라는 아직 멸망시킬 수 없으니 그 임금을 죽이는 것은 단지 악을 이룰 뿐입니다. 또한 사일(史佚)의 말에 '화를 시작하지 말고, 난리에 의지하지 말며, 노여움을 거듭하지 마라. 거듭된 노여움은 감당하기 어렵고 남을 능멸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했습니다" 하니 이에 진나라와 화친을 허락했다. 진 후작이 극걸을 보내 하려呂 이생에게 알리고 또한 그를 부르게 하니 자금이 그의 말을 가르쳐 말하기를 "국인들을 조회하게 하여 군명으로 상을 주며 또한 그들에게 고하기를 '고(孤)가 비록 돌아가나 사직에 욕을 보였도다. 그대들은 저 어(圉, 태자)를 두 임금으로 삼도록 점치라' 하십시오" 했다. 무리들이 모두 우니 진나라가 이에 원전(爰田)을 지었다. 여생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망명하신 것은 휼념하지 않으시고 군신들을 이처럼 걱정하시니 은혜가 지극합니다. 장차 임금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무리들이 "어찌하면 가하겠습니까?" 했다. 대답하기를 "세금을 징수하고 군사를 수선하여 유자(태자)를 보좌해야 합니다. 제후들이 이를 들으면 임금을 잃고도 임금이 있고 군신들이 화목하며 갑병이 더욱 많아질 것이니, 우리를 좋아하는 자는 권면될 것이요 우리를 미워하는 자는 두려워할 것이니 거의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니 무리들이 기뻐했다. 진나라는 이에 주병(州兵)을 지었다. 초기에 진 헌공이 시초점을 쳐서 백희를 진(秦)나라에 시집보낼 때 귀매(歸妹) 괘가 규(睽) 괘로 변하는 것을 만났다. 사수(史蘇)가 그것을 점치고 말하기를 "불길합니다. 그 괘사에 '선비가 양을 찌르나 피가 없고, 여자가 광주리를 받으나 선물이 없도다. 서쪽 이웃의 책망하는 말을 갚을 수 없으니, 귀매가 규孤가 되어 도울 이가 없도다' 했습니다. 진(震) 괘가 리(離) 괘가 되고 또한 리 괘가 진 괘가 되니 우레가 되고 불이 되어, 영(嬴, 진나라 성씨)씨가 기(姬, 진나라 성씨)씨를 패퇴시킬 것입니다. 수레는 그 바퀴가 빠지고 불은 그 깃발을 태우니 군사를 행함에 불리하여 종구에서 패할 것입니다. 귀매가 외로이 규를 바라보니 도적이 그 활을 당기도다. 조카가 그 고모를 따르리니 6년 만에 그가 도망쳐 그 나라로 달아나고 그 집을 버릴 것입니다. 이듬해에 그가 고량의 터에서 죽을 것입니다" 했다. 혜공이 진나라에 있을 때 말하기를 "선군께서 만약 사수의 점을 따르셨다면 내가 여기에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한간이 모시고 서서 말하기를 "거북점은 상(象)이요 시초점은 수(數)입니다. 사물이 생겨난 후에 상이 있고, 상이 있은 후에 번성함이 있으며, 번성한 후에 수가 있습니다. 선군의 패덕을 어찌 수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사수가 이처럼 점친들 따르지 않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하민의 재앙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소곤거리고 등 돌려 미워함이 직분적으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했습니다" 했다.
이백의 사당에 벼락이 친 것은 그를 책망한 것이니, 이에 전시(展氏)에게 숨은 악행이 있었다.
겨울, 송나라 사람이 조나라를 침공한 것은 옛 원망을 토벌한 것이다.
초나라가 누림에서 서나라를 패퇴시킨 것은 서나라가 구원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10월, 진(晉)나라 음이생이 진 백작을 만나 왕성에서 맹약했다. 진 백작이 "진나라는 화합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화합하지 못합니다. 소인들은 그 임금을 잃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 친족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군사를 수선하여 어(圉)를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것이니 차라리 융적을 섬기겠다' 합니다. 군자들은 그 임금을 사랑하면서도 그 죄를 알고 있어, 세금을 징수하고 군사를 수선하여 진나라의 명을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반드시 은혜에 보답할 것이니 죽음이 있을지언정 두 마음은 없다' 합니다. 이 때문에 화합하지 못합니다" 했다. 진 백작이 "나라에서는 임금을 두고 무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소인들은 슬퍼하며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고, 군자들은 용서하며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합니다. 소인들은 '우리가 진나라를 아프게 했으니 진나라가 어찌 임금을 돌려보내겠는가' 하고, 군자들은 '우리가 죄를 알았으니 진나라는 반드시 임금을 돌려보낼 것이다. 두 마음을 품었을 때 사로잡고 복종했을 때 사면해 주는 것은 덕으로 이보다 두터움이 없고 형벌로 이보다 위엄이 없다. 복종한 자는 덕을 품고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형벌을 두려워할 것이니, 이번 한 번의 군사 행동으로 진나라는 패자가 될 수 있다. 맞아들이고도 안정시키지 못하고 폐하고도 세우지 못하여 덕을 원망으로 삼는 짓을 진나라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합니다" 했다. 진 백작이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하고 진 후작의 숙소를 바꾸어주고 칠뢰(七牢)의 음식을 보냈다. 아석이 경정에게 말하기를 "어찌 도망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을 패함에 빠뜨리고 패하고도 죽지 않았으며 또한 형벌을 잃게 하는 것은 신하가 아니다. 신하이면서 신하답지 못하니 도망친들 장차 어디로 들어가겠는가" 했다. 11월에 진 후작이 돌아와 정축일에 경정을 죽인 후에 입국했다. 이 해에 진(晉)나라에 또 흉년이 들자 진 백작이 또 곡식을 보내주며 말하기를 "나는 그 임금은 미워하나 그 백성은 불쌍히 여긴다. 또한 내가 듣기로 당숙이 봉해질 때 기자가 '그 후사가 반드시 커질 것이다' 했다 하니, 진나라를 어찌 가벼이 바라보겠는가? 잠시 덕을 심어 유능한 자를 기다리겠다" 했다. 이에 진(秦)나라가 비로소 진(晉)나라의 하동 땅을 정벌하여 관사를 두었다.
━━━━━━━━━━━━━━━━━━━━━━━━━━━━━━━━━━━━━━
1.16. 희공 십육년 (B.C. 644)
십육년 봄, 왕력 정월 무신일 초하루에 송나라에 다섯 개의 운석이 떨어졌고, 이 달에 여섯 마리의 의새가 뒤로 날아 송나라 도성을 지나갔다.
3월 임신일에 공자 계우가 졸했다.
여름 4월 병신일에 증나라 계희가 졸했다.
가을 7월 갑자일에 공손 자가 졸했다.
겨울 12월, 노후가 제나라 후작, 송나라 공작, 진(陳)나라 후작, 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 허나라 남작, 형나라 후작, 조나라 백작과 회 땅에서 회동했다.
십육년 봄, 송나라에 다섯 개의 운석이 떨어진 것은 별이 떨어진 것이다. 여섯 마리의 의새가 뒤로 날아 송나라 도성을 지난 것은 바람 때문이다. 주나라 내사 숙흥이 송나라에 빙문하자 송 양공이 물어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징조입니까? 길흉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올해 노나라에 큰 상사가 많을 것이요, 내년에 제나라에 난리가 날 것이며, 임금께서는 제후들을 얻겠으나 마침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질문을 잘못하셨다. 이는 음양의 일이지 길흉이 생겨나는 바가 아니다. 길흉은 사람으로 말미암는 법인데 내가 감히 임금의 뜻을 거역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했다.
여름, 제나라가 리나라를 침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서나라를 구원하고 돌아갔다.
가을, 적나라가 진(晉)나라를 침입하여 호추를 취하고 탁 땅을 접수했으며 분수를 건너 곤도에까지 이르렀으니, 진나라가 패한 틈을 탄 것이다.
왕이 융족의 난리를 제나라에 고하니, 제나라가 제후들을 징집하여 주나라를 수비하게 했다.
겨울 11월 을묘일에 정나라가 자화를 죽였다.
12월에 회 땅에서 회동한 것은 증나라를 도모하고 또한 동쪽을 경영하기 위함이다. 증나라에 성을 쌓는데 부역꾼들이 지치자, 어떤 이가 밤에 언덕에 올라 외치기를 "제나라에 난리가 났다!" 하니 결국 성을 쌓지 못하고 돌아갔다.
━━━━━━━━━━━━━━━━━━━━━━━━━━━━━━━━━━━━━━
1.17. 희공 십칠년 (B.C. 643)
십칠년 봄, 제나라 사람과 서나라 사람이 영국(英氏)을 침공했다.
여름, 항(項)나라를 멸망시켰다.
가을, 부인 강씨(성강)가 변 땅에서 제나라 후작과 회동했다.
9월, 노후가 회동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12월 을해일에 제나라 후작 소백(환공)이 졸했다.
십칠년 봄, 제나라 사람이 서나라를 위해 영국을 친 것은 누림 전투의 보복이다.
여름, 진(晉)나라 태자 어가 진(秦)나라에 볼모가 되니 진나라가 하동 땅을 돌려주고 그에게 장가를 들였다. 혜공이 양나라에 있을 때 양 백작이 그에게 장가를 들였는데, 양영이 임신하여 달기를 기한을 넘겼다. 복관 초부와 그 아들이 점을 치니 그 아들이 말하기를 "장차 일남일녀를 낳을 것입니다" 하자 초부가 "그렇다.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될 것이요 딸은 남의 첩이 될 것이다" 했다. 그러므로 아들의 이름을 어(圉, 마부)라 하고 딸의 이름을 첩(妾)이라 했는데, 자어(태자 어)가 서쪽으로 볼모로 가자 첩은 환관의 가비가 되었다.
군사들이 항나라를 멸망시켰다. 회 땅의 모임에서 공이 제후의 일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항나라를 취했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이 이를 문책하여 공을 머무르게 했다.
가을, 성강이 공의 연고 때문에 변 땅에서 제나라 후작을 만났다. 9월에 공이 당도하니 경문에 '회동으로부터 이르렀다'고 쓴 것은 오히려 제후의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를 기휘한 것이다.
제나라 후작의 부인 세 사람인 왕희, 서영, 채희는 모두 아들이 없었다. 제나라 후작은 여색을 좋아하여 내총이 많았는데 내비로서 부인과 같은 자가 여섯 사람이었다. 장위희는 무맹(무불)을 낳았고, 소위희는 혜공을 낳았으며, 정희는 효공을 낳았고, 갈영은 소공을 낳았으며, 밀희는 의공을 낳았고, 송화자는 공자 옹을 낳았다. 공과 관중은 효공을 송 양공에게 부탁하여 태자로 삼았다. 옹무(역아)가 위공희에게 총애를 받아 환관 수조를 통해 공에게 음식을 올리니 또한 총애를 받았다. 공이 그에게 무맹을 세우겠다고 허락했다. 관중이 죽자 다섯 공자가 모두 서기를 구했다. 겨울 10월 을해일에 제 환공이 졸하자 역아가 들어와 환관 수조와 함께 내총을 빌미로 여러 관원들을 죽이고 공자 무휴(무맹)를 세우니 효공이 송나라로 달아났다. 12월 을해일에 부고를 전하고 신사일에 밤에 빈소를 차렸다.
━━━━━━━━━━━━━━━━━━━━━━━━━━━━━━━━━━━━━━
1.18. 희공 십팔년 (B.C. 642)
십팔년 봄, 왕력 정월에 송나라 공작, 조나라 백작, 위나라 사람, 주나라 사람이 제나라를 정벌했다.
여름, 군사들이 제나라를 구원했다.
5월 무인일, 송나라 군사와 제나라 군사가 언 땅에서 싸워 제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적나라가 제나라를 구원했다.
가을 8월 정해일에 제 환공을 장사 지냈다.
겨울, 형나라 사람과 적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침공했다.
십팔년 봄, 송 양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정벌하니 3월에 제나라 사람들이 무휴를 죽였다.
정나라 백작이 비로소 초나라에 조회하니 초 자작이 그에게 구리(金)를 하사했다가 이윽고 이를 후회하여 그와 맹약하며 말하기를 "무기로 주조하지 마라" 하니, 이 때문에 세 개의 종을 주조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효공을 세우려 했으나 네 공자의 무리를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송나라 사람과 싸웠다. 여름 5월에 송나라가 언 땅에서 제나라 군사를 패퇴시키고 효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가을 8월에 제 환공을 장사 지냈다.
겨울, 형나라 사람과 적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침공하여 토포를 포위하니 위나라 후작이 나라를 부형과 자제들에게 양보하고 조정의 무리에게 고하기를 "진실로 능히 다스릴 자가 있다면 저 훼(燬)가 따르겠습니다" 했다. 무리들이 불가하다 하여 자루에서 군사를 따르니 적나라 군사가 돌아갔다.
양(梁) 백작이 그 나라 영토를 넓혔으나 채우지 못하고 명하기를 '신리(新里)'라 하니 진(秦)나라가 이를 취했다.
━━━━━━━━━━━━━━━━━━━━━━━━━━━━━━━━━━━━━━
1.19. 희공(僖公) 19년
19년 봄, 왕력(王曆) 3월에 송(宋)나라 사람이 등(滕)나라 자작(子爵) 영제(嬰齊)를 붙잡았다.
여름 6월에 송공(宋公), 조(曹)나라 사람, 주(邾)나라 사람이 조남(曹南)에서 맹세하였고, 증(鄫)나라 자작이 주나라에서의 맹세에 참여하였는데, 기유일에 주나라 사람이 증나라 자작을 붙잡아 제물로 사용하였다.
가을에 송나라 사람이 조나라를 포위하였고, 위(衛)나라 사람이 형(邢)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에 진(陳)나라 사람, 채(蔡)나라 사람, 초(楚)나라 사람, 정(鄭)나라 사람과 만나 제(齊)나라에서 맹세하였다.
양(梁)나라가 멸망하였다.
19년 봄에 마침내 성을 쌓고 그곳에 거처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등선공(滕宣公)을 붙잡았다.
여름에 송양공(宋襄公)이 주문공(邾文公)을 시켜 증나라 자작을 차수(次睢)의 토지신 사당에 제물로 바치게 하니, 이는 동이(東夷) 부족들을 복속시키고자 함이었다. 사마(司馬) 자어(子魚)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여섯 가지 가축을 서로 제물로 바꾸어 쓰지 않았고, 작은 제사에는 큰 희생(犧牲)을 쓰지 않았는데, 하물며 어찌 감히 사람을 제물로 쓰겠습니까! 제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며 백성은 신(神)의 주인입니다. 사람을 제물로 쓴다면 그 누가 그것을 흠향하겠습니까? 제환공(齊桓公)은 멸망한 세 나라를 보존하여 제후들을 복속시켰으나 의로운 선비들은 오히려 덕이 엷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 번의 회맹에서 두 나라의 군주를 학대하고, 또 음란하고 미혹된 귀신에게 사람을 바쳐 패권(覇權)을 구하고자 하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 명에 죽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위(衛)나라 사람이 형(邢)나라를 정벌한 것은 토포(菟圃)에서의 전투를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위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려 복점을 쳤으나 길하지 않았다. 영장자(甯莊子)가 말하기를, "옛날 주(周)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은(殷)나라를 이기자 풍년이 들었습니다. 지금 형나라가 바야흐로 무도하고 제후들에게 패자(覇者)가 없으니, 하늘이 혹 위나라로 하여금 형나라를 토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그 말을 따르자 군대를 일으키자마자 비가 내렸다.
송나라 사람이 조(曹)나라를 포위한 것은 복종하지 않음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자어가 송공에게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숭(崇)나라의 덕이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 정벌하셨는데, 군사가 30일 동안 머물러도 항복하지 않자, 군대를 물려 안으로 교화를 닦은 뒤 다시 정벌하시니 성벽에 의지하기도 전에 항복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덕을 처자에게 본보기로 삼고 형제에까지 이르게 하여 집안과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금의 덕에 오히려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을 정벌하려 하시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어찌 우선 안으로 덕을 반성하지 않으십니까? 결함이 없어진 뒤에 움직이십시오"라고 하였다.
진목공(陳穆公)이 제환공의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해 제후들에게 수호(脩好)를 청하였다. 겨울에 제나라에서 맹세한 것은 환공 때의 우호를 닦은 것이다.
양(梁)나라가 멸망한 것에 대해 경(經)에 그 주벌한 군주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자초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양백(梁伯)이 토목 공사를 좋아하여 자주 성을 쌓았으나 백성들을 살지 못하게 하니, 백성들이 피폐해져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어느 적이 장차 이른다" 하고는 대궐 주위에 도랑을 팠으며, 또 "진(秦)나라가 장차 우리를 습격할 것이다" 하니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무너져 흩어졌다. 진나라가 마침내 양나라를 차지하였다.
━━━━━━━━━━━━━━━━━━━━━━━━━━━━━━━━━━━━━━
1.20. 희공(僖公) 20년
20년 봄에 새로 남문(南門)을 만들었다.
여름에 고자(郜子)가 와서 알현하였다.
5월 을사일에 서궁(西宮)에 화재가 있었다.
정(鄭)나라 사람이 활(滑)나라에 들어갔다.
가을에 제(齊)나라 사람과 맥(狄)나라 사람이 형(邢)나라에서 맹세하였다.
겨울에 초(楚)나라 사람이 수(隨)나라를 정벌하였다.
20년 봄에 새로 남문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릇 문을 열고 막는 것은 철을 따라야 한다.
활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배반하고 위(衛)나라에 복종하자, 여름에 정나라의公子 사(士)와 설도구(洩堵寇)가 군대를 거느리고 활나라에 들어갔다.
가을에 제나라와 맥나라가 형나라에서 맹세한 것은 형나라를 위해 위나라의 난을 도모해주기 위함이었으니, 이때 위나라가 바야흐로 형나라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나라가 한수(漢水) 동쪽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배반하니, 겨울에 초나라의 투곡어토(鬥穀於菟)가 군대를 거느리고 수나라를 정벌하여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수나라가 정벌을 당한 것은 힘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힘을 헤아려 움직인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잘되고 패하는 것은 자신에게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어찌 밤낮으로 일하지 않으랴마는 길에 이슬이 많다고 핑계하네'라고 했다"고 하였다.
송양공이 제후들을 규합하고자 하니 장문중(臧文仲)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자신의 욕심을 가지고 남을 따르면 괜찮으나, 남을 가지고 자신의 욕심을 따르게 하려 한다면 성취함이 드물다"고 하였다.
━━━━━━━━━━━━━━━━━━━━━━━━━━━━━━━━━━━━━━
1.21. 희공(僖公) 21년
21년 봄에 맥나라가 위(衛)나라를 침범하였다.
송나라 사람, 제나라 사람, 초나라 사람이 녹상(鹿上)에서 맹세하였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에 송공, 초자(楚子), 진후(陳侯), 채후(蔡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조백(曹伯)이 우(盂)에서 회동하였는데, 초나라가 송공을 붙잡아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에 노 지공(公)이 주(邾)나라를 정벌하였다.
초나라 사람이 의신(宜申)을 보내 전리품을 바쳐왔다.
12월 계축일에 노 지공이 제후들과 박(薄)에서 회맹하고 송공을 석방하였다.
21년 봄에 송나라 사람이 녹상에서의 맹세를 맺은 것은 초나라에게 제후들을 규합해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함이었고 초나라 사람이 이를 허락하였다. 공자 목이(目夷)가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맹주가 되려고 다투는 것은 재앙입니다. 송나라는 아마 망할 것입니다! 다행히 모면하더라도 결국 패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노 지공이 무당과 곱추를 불태우려 하였다. 장문중이 말하기를, "그것은 가뭄에 대비하는 방책이 아닙니다. 성곽을 수리하고 음식을 줄이며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나누어 주도록 권장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무당과 곱추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늘이 그들을 죽이려 했다면 태어나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가뭄을 일으킬 능력이 있다면 그들을 불태우는 것은 가뭄을 더욱 심하게 할 뿐입니다" 하니, 노 지공이 그 말을 따랐다. 이 해에 기근은 들었으나 백성들이 상하지는 않았다.
가을에 제후들이 우(盂)에서 송공과 회동하니, 자어가 말하기를, "재앙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임금께서 욕심부리는 것이 너무 심하시니 어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초나라가 송공을 붙잡고 송나라를 정벌하였으며, 겨울에 박(薄)에서 회동하여 그를 풀어주었다. 자어가 말하기를, "재앙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임금을 징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임(任), 숙(宿), 수구(須句), 전유(顓臾)는 풍(風)성인데, 실제로 태호(大皞)와 제수(濟水)의 제사를 주관하며 중하(諸夏)를 섬겼다. 주(邾)나라 사람이 수구를 멸망시키자 수구의 군주가 망명해왔는데 이는 성풍(成風) 때문이었다. 성풍이 노 지공에게 말하기를, "훌륭한 제사를 받들고 작고 외로운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주례(周禮)입니다. 만이(蠻夷)가 중하를 어지럽히는 것은 주나라의 화입니다. 만약 수구의 사직을 다시 세워주신다면 이는 태호와 제수의 제사를 숭상하고 제사를 닦아 화를 늦추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
1.22. 희공(僖公) 22년
22년 봄에 노 지공이 주나라를 정벌하여 수구를 취하였다.
여름에 송공, 위후(衛侯), 허남, 등자(滕子)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8월 정미일에 주나라 사람과 승경(升陘)에서 싸웠다.
겨울 11월 기사의 초하루에 송공이 초나라 사람과 홍수(泓水)에서 싸웠는데, 송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22년 봄에 주나라를 정벌하여 수구를 취하고 그 군주를 돌려보내 주었으니, 이는 예(禮)에 맞는 일이었다.
3월에 정백이 초나라로 갔다.
여름에 송공이 정나라를 정벌하자 자어가 말하기를, "이른바 재앙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 주평왕(周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할 때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으로 가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들판에서 제사 지내는 자를 보고 말하기를, "100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이 융(戎)족의 땅이 되겠구나! 그 예법이 먼저 없어졌도다"라고 하였는데, 가을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육혼(陸渾)의 융족을 이천으로 이주시켰다.
진(晉)나라 태자 어(圉)가 진(秦)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도망쳐 돌아가려 하면서 아내 영씨(嬴氏)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돌아가겠소?" 하니, 아내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진나라의 태자이신데 진나라에서 욕을 보고 계시니 돌아가고자 하시는 것은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임금께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시중을 들게 하신 것은 당신을 묶어두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을 따라 돌아간다면 임금의 명을 버리는 것이 되니 감히 따르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감히 밀고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자 어는 마침내 도망쳐 돌아갔다.
부천(富辰)이 왕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대숙(大叔)을 불러들이십시오. 시경에 이르기를 '그 이웃과 화합하고 친하게 지내니 혼인이 매우 성대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형제조차 화합하지 못하면서 어찌 제후들이 화목하지 못함을 원망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왕자 대(帶)가 제나라로부터 다시 경사(京師)로 돌아왔으니 왕이 그를 부른 것이다.
주나라 사람이 수구의 일 때문에 군대를 일으켰다.
노 지공은 주나라를 낮추어 보고 방비를 갖추지 않은 채 그들을 방어하려 하였다. 장문중이 말하기를, "나라는 작더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방비가 없으면 비록 군사가 많더라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전전긍긍하기를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공경하고 공경하라, 하늘이 밝게 살피시니 천명이 바꾸기 쉽지 않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왕의 밝은 덕으로도 오히려 어렵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하물며 우리처럼 작은 나라겠습니까? 임금께서는 주나라가 작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벌과 전갈도 독이 있는데 하물며 나라야 오죽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8월 정미일에 노 지공이 주나라 군대와 승경에서 싸웠으나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고, 주나라 사람이 노 지공의 투구를 노획하여 어문(魚門)에 매달았다.
초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를 구원하려 하니 송공이 장차 싸우려 하였다. 대사마(大司馬) 고(固)가 간곡히 만류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상(商)나라를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임금께서 상나라를 다시 일으키려 하시나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겨울 11월 기사의 초하루에 송공이 초나라 사람과 홍수에서 싸웠는데, 송나라 사람은 이미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초나라 사람이 아직 강을 다 건너지 못했을 때 사마가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저들이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송공이 말하기를, "안 된다"고 하였다. 강을 건넜으나 아직 대열을 이루지 못했을 때 또 보고하니 송공이 말하기를, "아직 안 된다"고 하였고, 대열을 정돈한 후에야 공격하게 하니 송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송공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고 대궐의 호위관들이 전멸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송공을 허물하니 송공이 말하기를, "군자는 거듭 상처 입히지 않고 머리가 센 늙은이는 사로잡지 않는 법이다. 옛날에 군대를 다스릴 때는 험난한 요새를 믿고 지체하지 않았다. 과인이 비록 망한 나라의 후손이지만 대열을 이루지 못한 군대에게 북을 쳐 공격하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자어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전쟁을 모르십니다. 강력한 적이 험한 곳에 갇혀 대열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이니, 험한 곳에 가로막혔을 때 북을 쳐 공격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하고도 두려움이 남는 법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강한 자들은 모두 우리의 적입니다. 비록 나이 많은 늙은이라 할지라도 사로잡을 수 있으면 취해야 하거늘, 머리 센 늙은이라 해서 어찌 가려내겠습니까? 수치심을 밝히고 전쟁을 가르치는 것은 적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상처를 입어 아직 죽지 않은 적을 어찌 거듭 상처 입히지 않겠습니까? 만약 거듭 상처 입히는 것을 아끼신다면 처음부터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 낫고, 머리 센 늙은이를 아끼신다면 저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낫습니다. 삼군(三軍)은 이익이 될 때 움직이는 것이며, 징과 북은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익이 되어 군대를 움직인다면 험난한 곳이라도 공격할 수 있으며, 사기가 드높아 아군의 뜻이 가득 찼다면 대열이 어지러운 적을 북쳐 공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라고 하였다.
━━━━━━━━━━━━━━━━━━━━━━━━━━━━━━━━━━━━━━
1.23. 희공(僖公) 23년
23년 봄에 제후(齊侯)가 송나라를 정벌하고 민(緡)을 포위하였다.
여름 5월 경인일에 송공 자부(茲父)가 훙(卒)하였다.
가을에 초나라 사람이 진(陳)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 11월에 기자(杞子)가 훙하였다.
23년 봄에 제후가 송나라를 정벌하고 민을 포위한 것은 송나라가 제나라에서의 회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여름 5월에 송양공이 죽었으니, 홍수(泓水)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
가을에 초나라의 성득신(成得臣)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정벌한 것은 진나라가 송나라와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초나라 군대는 초이(焦夷)를 점령하고 돈(頓)나라에 성을 쌓아주고 돌아왔다. 자문(子文)이 이를 성득신의 공으로 여겨 그를 영윤(令尹)으로 삼으려 하자 숙백(叔伯)이 말하기를, "자문께서는 나라를 어찌하시렵니까?" 하니, 자문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무릇 큰 공이 있는데도 높은 벼슬을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9월에 진혜공(晉惠公)이 죽자 진화공(晉懷公)이 명을 내려 망명한 자(공자 중이)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기한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호돌(狐突)의 아들인 호모(狐毛)와 호언(狐偃)이 진(秦)나라에서 중이(重耳)를 따르고 있었는데 불러도 오지 않았다. 겨울에 화공이 호돌을 붙잡아 두고 말하기를, "아들들을 오게 하면 면해주겠다" 하니, 호돌이 대답하기를, "자식이 벼슬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충성을 가르치기 때문인 것이 옛날의 제도입니다.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폐백을 바치면 군주에게 두 마음을 품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제 자식들의 이름이 중이에게 있은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만약 지금 또 그들을 부른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두 마음을 품으라 가르치며 어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형벌이 넘치지 않는 것은 임금의 현명함이요 신하의 소원입니다. 형벌을 남용하여 만족을 취하려 하신다면 그 누가 죄가 없겠습니까? 신은 명을 들을 뿐입니다" 하니, 마침내 그를 죽였다. 복언(卜偃)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며 말하기를,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이에 크게 밝은 덕을 입힌다'고 하였는데, 자신은 밝지 못하면서 사람을 죽여 만족을 취하려 하니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백성들이 덕을 보지 못하고 오직 죽이는 소리만 듣게 되니, 어찌 그 뒤가 오래가겠는가?"라고 하였다.
11월에 기성공(杞成公)이 죽었다. 경(經)에 기록하기를 '자 기(子 杞)'라고 하고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오랑캐(夷)의 예법을 썼고 아직 동맹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릇 제후가 동맹을 맺으면 죽었을 때 이름으로 부고를 보내는 것이 예법이다. 이름으로 부고를 보내면 경에도 그것을 기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으니, 이는 불민함을 피하기 위함이다.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난리를 만났을 때 진(晉)나라 사람이 포성(蒲城)을 정벌하였다. 포성 사람들이 싸우고자 하였으나 중이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임금이시자 아버님이신 분의 명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녹을 받아 백성을 얻게 되었는데, 백성을 가지고 임금과 맞서 싸우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나는 달아나겠다" 하고는 마침내 적(狄)족의 땅으로 달아났다. 따르는 자는 호언(狐偃), 조쇠(趙衰), 전힐(顛頡), 위무자(魏武子), 사공계자(司空季子)였다. 적족이 장구여(廧咎如)를 정벌하여 두 딸 숙외(叔隗)와 계외(季隗)를 사로잡아 공자에게 바쳤다. 공자는 계외를 아내로 맞아 백조(伯鯈)와 숙류(叔劉)를 낳았고, 숙외는 조쇠에게 아내로 주어 조순(趙盾)을 낳았다. 장차 제(齊)나라로 가려 할 때 계외에게 말하기를, "나를 25년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거든 그때 개가하시오" 하니, 계외가 대답하기를, "제 나이가 이미 25세인데 다시 그만큼 기다려 개가한다면 곧 무덤으로 들어갈 때입니다.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족의 땅에 12년 동안 머물다가 떠나 위(衛)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위문공(衛文公)이 예우하지 않았다. 오록(五鹿)을 나설 때 들판의 사람에게 밥을 구걸하니 들판의 사람이 흙덩이를 주었다. 공자가 노하여 채찍질하려 하자 자범(子犯, 호언)이 말하기를, "하늘이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니, 공자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그것을 받아 수레에 실었다. 제나라에 이르자 제환공이 딸을 아내로 삼아주고 말 20승(乘)을 주니 공자가 이에 안주하였다. 따르던 자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장차 떠나려고 뽕나무 아래에서 모의하였는데, 뽕나무 위의 누에 치는 계집종이 이를 듣고 강씨(姜氏)에게 고하였다. 강씨가 그 계집종을 죽이고 공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사방을 평정할 뜻을 품고 계시는데, 그 말을 들은 자를 내가 이미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그런 일은 없소" 하자, 강씨가 말하기를, "떠나십시오! 안락함에 미련을 두는 것은 실로 명성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하였으나 공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강씨가 자범과 모의하여 공자를 술에 취하게 한 뒤 수레에 실어 보냈다. 공자가 술에서 깨어나 창을 들고 자범을 쫓아갔다.曹(조)나라에 이르자 조공공(曹共公)이 공자의 갈비뼈가 통뼈라는 소문을 듣고 그가 나체로 목욕하는 것을 엿보았다. 희부기(僖負羈)의 아내가 말하기를, "내가 진나라 공자를 따르는 자들을 보니 모두 한 나라의 재상이 되기에 충분한 인물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중이를 보필한다면 공자는 반드시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며, 나라로 돌아가면 반드시 제후들에게 뜻을 얻을 것입니다. 제후들에게 뜻을 얻어 무례했던 자들을 주벌할 때 조나라가 가장 먼저 화를 입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찌 일찍이 그에게 다른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십니까?" 하니, 이에 대반에 담은 음식에 구슬을 숨겨 보냈다. 공자가 음식은 받고 구슬은 돌려주었다. 송(宋)나라에 이르자 송양공이 말 20승을 선물하였다. 정(鄭)나라에 이르자 정문공(鄭文公) 또한 예우하지 않으니 숙잠(叔詹)이 간하기를, "신이 듣기로 하늘이 열어주신 사람은 사람이 당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진나라 공자에게는 세 가지 징조가 있으니 하늘이 혹 장차 그를 세우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임금께서는 그를 예우하십시오. 남녀가 동성(同姓)이면 그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는 법인데, 진나라 공자는 희(姬)성에서 태어났음에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건재하니 이것이 첫째입니다. 국외로 망명하는 재앙을 만났으나 천하가 편안하지 못하니 진나라가 아마 장차 공자를 위해 열릴 것 같은 징조가 그 둘째입니다. 세 명의 뛰어난 선비가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그를 따르고 있으니 그것이 셋째입니다. 진나라와 정나라는 동등한 나라이며 공자는 나라의 자제와 같으니 본래 마땅히 예우해야 하거늘, 하물며 하늘이 열어주신 사람이겠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초(楚)나라에 이르자 초성왕이 그를 대접하며 말하기를, "공자가 만약 진나라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하니, 중이가 대답하기를, "남녀 자식과 옥과 비단은 임금께서 가지고 계시고, 새 깃털과 가죽은 임금의 땅에서 자라나며, 그것이 흘러 진나라에 미치는 것은 임금의 남은 찌꺼기일 뿐이니 제가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으로 나에게 보답하겠소?" 하니, 중이가 대답하기를, "만약 임금의 신령하심을 입어 진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진나라와 초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중원(中原)에서 만나게 된다면, 임금을 위해 삼사(三舍, 90리)를 물러나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고도 왕명을 얻지 못한다면 왼손에는 채찍과 활을 잡고 오른손에는 화살통을 차고 임금과 접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자옥(子玉)이 그를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초성왕이 말하기를, "진나라 공자는 포부가 넓으면서도 검소하고, 문채가 있으면서도 예의가 바르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엄숙하면서도 관대하고 충성스러우며 능력이 있다. 지금 진후(晉侯)는 친족이 없어 안팎으로 미움을 받고 있다. 내가 듣기로 희성인 당숙(唐叔)의 후손 중에서 나중에 쇠퇴하는 자는 아마 이 진나라 공자를 통해 다시 일어날 것이라 하였으니, 하늘이 흥하게 하려는 자를 그 누가 폐하겠는가? 하늘을 거스르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를 진(秦)나라로 보내주었다. 진목공(秦穆公)이 다섯 명의 여자를 아내로 보내주었는데 회영(懷嬴)이 그중에 있었다. 회영이 물대야를 받들어 중이의 손을 씻기자 중이가 손을 흔들어 물을 뿌렸다. 회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진나라와 진나라는 대등한 나라인데 어찌 나를 천하게 대하십니까?" 하니, 공자가 두려워하여 옷을 벗고 죄인처럼 갇히기를 청하였다. 훗날 진목공이 공자를 대접하자 자범이 말하기를, "저는 조쇠의 문채만 못하니 청컨대 조쇠로 하여금 공자를 따르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자가 '하수(河水)' 시를 읊자 진목공은 '유월(六月)' 시를 읊었다. 조쇠가 말하기를, "중이야, 은혜에 감사드려라" 하니, 공자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고 진목공 역시 한 계단 내려가 사양하였다. 조쇠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천자를 보좌하는 명으로써 중이에게 명하셨으니 중이가 어찌 감히 절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1.24. 희공(僖公) 24년
24년 봄, 왕력 정월에.
여름에 맥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7월에.
겨울에 천왕(天王, 주양왕)이 대궐을 나와 정나라에 거처하였고, 진혜공(晉惠公) 이오(夷吾)가 죽었다.
24년 봄 왕력 정월에 진목공이 중이를 복국시켰으나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들어왔음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하(黃河)에 이르렀을 때 자범이 구슬을 공자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신이 말안장과 고삐를 메고 임금을 따라 천하를 돌아다니며 지은 신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신조차 그것을 알고 있거늘 하물며 임금께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청컨대 이로부터 물러나 도망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외삼촌과 마음을 같이하지 않는다면 저 백수(白水)와 같을 것입니다" 하고는 그 구슬을 황하에 던졌다. 강을 건너 영호(令狐)를 포위하고 상천(桑泉)에 들어갔으며 구쇠(臼衰)를 취하였다. 2월 갑오일에 진(晉)나라 군대가 여류(廬柳)에 진을 쳤다. 진목공이 공자 집(縶)을 진나라 군대에 보내자 군대가 물러나 순(郇)에 진을 쳤다. 신축일에 호언과 진나라 및 진나라의 대부들이 순에서 맹세하였다. 임인일에 공자가 진나라 군대에 들어갔고, 병오일에 곡옥(曲沃)에 들어갔으며, 정미일에 무궁(武宮)에서 조회를 받았고, 무신일에 사람을 보내 고량(高梁)에서 화공(懷公)을 죽였으나 경에 기록하지 않은 것 역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생(呂甥)과 극예(郤芮)가 핍박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장차 대궐을 불태우고 진후(文公)를 시해하려 하였다. 시인(寺人) 피(披)가 알현을 청하자 문공이 사람을 시켜 그를 꾸짖으며 거절하여 말하기를, "포성(蒲城)의 난 때 너는 군명을 받고 하룻밤 만에 당도하였다. 그 후 내가 맥나라 군주를 따라 위수 가에서 사냥할 때 너는 혜공을 위해 나를 죽이려 왔는데, 사흘 밤의 기한을 받고 이틀 밤 만에 당도하였다. 비록 군명이 있었다 하나 어찌 그리 신속했단 말이냐? 그때 자른 내 옷소매가 아직 여기 남아 있거늘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보려 하느냐? 너는 어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피가 대답하기를, "신은 임금께서 나라에 들어오신 뒤 군주의 도리를 아실 줄 알았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셨으니 또 장차 난리를 만나실 것입니다. 임금의 명은 두 가지가 없는 것이 옛날의 제도입니다. 임금을 위해 그가 미워하는 자를 제거하는 것은 오직 힘이 닿는 대로 살필 뿐입니다. 포성 사람이나 맥나라 사람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셨으니 이제는 포성이나 맥나라의 일이 없으시겠습니까? 제환공은 자신에게 활을 쏜 자(관중)의 갈고리를 잊어버리고 그를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이와 반대로 하신다면 어찌 저에게 물러가라 명하는 욕을 주시겠습니까? 나라를 떠날 자가 매우 많으니 어찌 저 같은 형신(刑臣)뿐이겠습니까?" 하니, 문공이 그를 만나보고서 난리가 일어날 것임을 알게 되었다. 3월에 진문공이 남몰래 진목공을 왕성(王城)에서 만났다. 기축일 그믐에 대궐에 불이 났으나 하생과 극예는 문공을 잡지 못하자 황하 위로 달아났는데 진목공이 그들을 유인하여 죽였다. 진문공은 부인 영씨를 맞이하여 돌아왔고, 진목공은 진나라에 호위병 3000명을 보내주었으니 이들은 실로 기강을 잡는 종들이었다. 처음에 진문공의 종이던 두수(頭須)는 창고를 지키는 자였는데, 문공이 도망칠 때 창고의 재물을 훔쳐 달아나 그것을 다 써가며 나라에 들여보내 주기를 구하였다. 문공이 귀국한 뒤 두수가 알현을 구하자 문공은 머리를 감는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에 두수가 시종에게 말하기를, "머리를 감으면 마음이 뒤집히고, 마음이 뒤집히면 생각이 반대로 뒤틀리니 마땅히 내가 소신을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로다. 나라에 남아 있던 자는 사직을 지키는 자요, 떠난 자는 말안장과 고삐를 메는 종이니 둘 다 괜찮거늘 어찌 반드시 남아 있던 자를 죄주려 하느냐? 국왕이 되어서 필부와 원수를 맺으려 하니 두려워하는 자가 매우 많도다" 하였다. 시종이 이 말을 고하자 문공이 급히 그를 만나보았다. 맥나라 사람이 계외를 진나라로 돌려보내 주며 그녀의 두 아들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문공은 조쇠에게 딸을 아내로 주어 원동(原同), 병괄(屏括), 루영(摟嬰)을 낳았는데, 조희(趙姬, 문공의 딸)가 조순(趙盾)과 그의 어머니(숙외)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였다. 자여(子餘, 조쇠)가 거절하자 조희가 말하기를, "새로운 총애를 얻었다 해서 옛 부인을 잊는다면 어찌 사람들을 부리겠습니까? 반드시 맞이해야 합니다" 하고 간곡히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조순이 재능이 있음을 보고 공에게 간곡히 청하여 조순을 적자(嫡子)로 삼게 하고 자신의 세 아들을 그 아래에 두었으며, 숙외를 내자(內子, 본부인)로 삼고 자신은 그 아래에 처하였다.
진문공이 망명 생활을 함께한 자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개자추(介之推)는 공록을 말하지 않았고 공록 역시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자추가 말하기를, "헌공(獻公)의 아들 아홉 명 중에 오직 임금만 살아남으셨다. 혜공과 화공은 친족이 없어 안팎으로 버림받았으니, 하늘이 진나라를 끊지 않으셨다면 반드시 장차 주인이 있을 것이었다. 진나라의 제사를 주관할 자가 임금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늘이 실로 그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인데 몇몇 자들이 자기들의 힘이라 하니 또한 무고(誣告)가 아니겠는가?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도 오히려 도둑이라 하거늘 하물며 하늘의 공을 탐하여 자기의 힘이라 하겠는가? 아래에서는 그 죄를 의롭게 여기고 위에서는 그 간사함에 상을 주어 위아래가 서로 속이니 함께 처하기 어렵도다"라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찌 너 또한 상을 구하지 않느냐? 상을 구하지 않고 죽으면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들의 죄를 나무라면서 그것을 본받는다면 죄가 더욱 심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원망하는 말을 내뱉었으니 그들의 녹을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임금께 알리기라도 하는 것이 어떠냐?" 하니, 대답하기를, "말이란 몸의 문채인데 몸이 장차 숨으려 하거늘 어찌 문채를 쓰겠습니까? 그것은 드러나기를 구하는 짓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느냐? 나와 함께 숨자" 하고는 마침내 함께 숨어 살다 죽었다. 진문공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면상(綿上)의 땅을 그의 제전(祭田)으로 삼고 말하기를, "이로써 나의 허물을 기록하고 또한 착한 사람을 표창한다"고 하였다.
정나라가 활나라에 들어갔을 때 활나라 사람이 명령을 따르자 군대를 돌렸으나 다시 위(衛)나라로 가 붙었다. 이에 정나라의 공자 사(士)와 설도유미(洩堵俞彌)가 군대를 거느리고 활나라를 정벌하였다. 왕(주양왕)이 백복(伯服)과 유손백(游孫伯)을 정나라에 보내 활나라의 일을 청하게 하였다. 정백은 주혜왕(周惠王)이 시위할 때 자신에게 여공(厲公)의 작위를 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었고, 또 주양왕이 위나라와 활나라 편을 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왕명을 듣지 않고 두 사신을 붙잡았다. 왕이 노하여 장차 맥나라 군사로써 정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부천이 간하여 말하기를, "안 됩니다. 신이 듣기로 가장 위로는 덕으로써 백성을 어루만지고, 그다음은 친족을 친하게 대하며 서로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주공(周公)은 두 숙부(관숙·채숙)가 화합하지 못함을 슬퍼하셨으므로 친척들을 봉건(封建)하여 주나라를 울타리로 호위하게 하였습니다. 관(管), 채(蔡), 성(郕), 곽(霍), 루(魯), 위(衛), 모(毛), 담(聃), 고(郜), 옹(雍), 조(曹), 등(滕), 필(畢), 원(原), 풍(酆), 순(郇)은 문왕(文王)의 상징적인 후손들이요, 우(邘), 진(晉), 응(應), 한(韓)은 무왕(武王)의 상징적인 후손들이며, 범(凡), 장(蔣), 형(邢), 모(茅), 좌(胙), 제(祭)는 주공의 후손들입니다. 조목공(召穆公)은 주나라의 덕이 유제(類)와 같지 않음을 생각하셨으므로 성주(成周)에서 종족들을 규합하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아가위나무 꽃이여 화사하게 피었도다, 지금의 사람치고 형제만한 이 없네'라고 하였으며, 그 4장에는 이르기를 '형제가 담장 안에서 싸우다가도 밖에서 모욕을 당하면 함께 막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으니 형제가 비록 작은 분노가 있더라도 친한 친족의 정을 폐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천자께서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정나라의 친함을 버리시려 하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공훈을 소중히 여기고 친족을 친하게 대하며 가까운 이를 친근히 하고 현명한 이를 존경하는 것은 덕의 큰 것입니다. 귀먹은 자를 따르고 어두운 자를 좇으며 어리석은 자와 연합하고 거짓된 자를 부리는 것은 간사함의 큰 것입니다. 덕을 버리고 간사함을 숭상하는 것은 재앙의 큰 것입니다. 정나라는 평왕과 혜왕을 도운 공이 있고 또한 여공과 선공의 친족입니다. 총애하는 첩을 버리고 세 명의 어진 신하를 부리며 제(姬)성의 나라들 중에서도 가까운 편이니 네 가지 덕을 갖추었습니다. 귀로 다섯 가지 소리의 조화를 듣지 못하는 것을 귀먹었다(聾)고 하고, 눈으로 다섯 가지 색의 문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어둡다(昧)고 하며, 마음으로 덕과 의리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을 어리석다(頑)고 하고, 입으로 충성과 신의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거짓되다(嚚)고 합니다. 맥나라는 이것들을 모두 본받고 있으니 네 가지 간사함을 갖추었습니다. 주나라에 아름다운 덕이 있었을 때도 오히려 형제만 한 이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들을 봉건하였으며, 천하를 품어 다스릴 때도 오히려 외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외침을 막아내는 데는 친족을 친하게 대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여겼으므로 친족으로써 주나라의 울타리를 삼았습니다. 조목공 또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주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하였는데 여기에서 또 주공과 조공의 법도를 바꾸어 여러 간사한 자들을 따르려 하시니 또한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아직 난리의 화를 잊지 못하였는데 왕께서 또 난리를 일으키시니 문왕과 무왕을 어찌 보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퇴숙(頽叔)과 도자(桃子)를 시켜 맥나라 군대를 출동하게 하였다.
여름에 맥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여 력(櫟)읍을 취하였다. 왕이 맥나라 사람을 고맙게 여겨 장차 그 딸을 왕후(王后)로 삼으려 하니 부천이 간하여 말하기를, "안 됩니다. 신이 듣기로 '보답하는 자는 지치기 마련이나 베푸는 자는 싫증 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맥나라는 본래 탐욕스러운데 왕께서 또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자의 덕은 끝이 없고 아내의 원망은 끝이 없으니 맥나라가 반드시 재앙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또 듣지 않았다. 처음에 감소공(甘昭公)이 혜후(惠后)에게 총애를 받아 혜후가 그를 세우려 하였으나 미처 세우기 전에 죽었다.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났다가 왕이 그를 다시 복귀시켰는데 또 외씨(隗氏, 맥나라 출신 왕후)와 사통하였다. 왕이 외씨를 폐하자 퇴숙과 도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실로 맥나라를 부추겼으니 맥나라가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대숙(大叔, 감소공)을 받들고 맥나라 군사로써 왕을 공격하였다. 왕의 호위병들이 이를 막으려 하자 왕이 말하기를, "선후(先后)께서 나를 무엇이라 하시겠는가? 차라리 제후들로 하여금 이를 도모하게 하겠다" 하고는 왕이 마침내 궁을 나섰다. 감함(坎欿)에 이르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맞아들였다. 가을에 퇴숙과 도자가 대숙을 받들고 맥나라 군사로써 주나라를 정벌하여 주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리고 주공 기부(忌父), 원백(原伯), 모백(毛伯), 부천을 사로잡았다. 왕이 도망쳐 정나라로 가 범(氾)읍에 처하였고 대숙은 외씨와 함께 온(溫)읍에 거처하였다.
정나라 자화(子華)의 동생인 자장(子臧)이 송나라로 망명하였는데 깃털로 장식한 모자(鷸冠)를 모으기를 좋아하였다. 정백이 이 소문을 듣고 그를 미워하여 도둑을 시켜 그를 유인하게 하였고, 8월에 도둑이 그를 진(陳)나라와 송나라 사이에서 죽였다. 군자가 말하기를, "의복이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은 몸의 재앙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 사람의 자식이여 그 의복에 걸맞지 않도다'라고 하였으니 자장의 의복이 걸맞지 않은 것을 말함이로다. 시경에 이르기를 '스스로 원망과 슬픔을 남겼도다'라고 하였으니 자장을 두고 한 말이다. 하서(夏書)에 이르기를 '땅이 평평해지고 하늘의 이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걸맞은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송나라가 초나라와 화친을 맺자 송성공(宋成公)이 초나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정나라에 들어왔다. 정백이 장차 그를 대접하려 하면서 황무자(皇武子)에게 예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송나라는 선대(상나라)의 후손이므로 주나라에 대해서도 손님(客)입니다. 천자에게 제사가 있으면 제사 고기를 나누어 주고 상사가 있으면 문상하여 절하니 풍성하고 후하게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정백이 그 말을 따라 송공을 대접할 때 예우를 더하니 이는 예에 맞는 일이었다.
겨울에 왕이 사신을 보내 난리를 고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덕이 없어 어머니의 동생이자 총애하는 아들인 자대(子帶)에게 죄를 얻어 정나라 땅 범읍에 비루하게 처하고 있으니 감히 숙부(노나라)에게 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장문중이 대답하기를, "천자께서 타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 직무를 묻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간사부(簡師父)를 보내 진(晉)나라에 고하게 하였고 좌언부(左鄢父)를 보내 진(秦)나라에 고하게 하였다. 천자는 본래 국외로 나가는 법이 없으므로 경에 기록하기를 '천왕이 대궐을 나와 정나라에 거처하였다'고 한 것은 동복동생의 난리를 피했음을 말한 것이다. 천자가 흉복을 입고 이름을 낮추어 부른 것은 예에 맞는 일이었다.
정백은 공장조(孔將鉏), 석갑부(石甲父), 후선다(侯宣多)와 함께 범읍에서 왕의 백관과 기물을 살펴본 뒤에야 자기 나라의 사사로운 정치를 돌보았으니 이는 예에 맞는 일이었다.
위(衛)나라 사람이 장차 형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예지(禮至)가 말하기를, "그 수비하는 요새를 얻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제 형제들과 함께 그곳에서 벼슬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가서 벼슬을 얻었다.
━━━━━━━━━━━━━━━━━━━━━━━━━━━━━━━━━━━━━━
1.25. 희공(僖公) 25년
25년 봄, 왕력 정월 병오일에 위후(衛侯) 훼(燬)가 형나라를 멸망시켰다.
여름 4월 계유일에 위후 훼가 죽었다.
송나라의 당백희(蕩伯姬)가 며느리를 맞이하러 왔다.
송나라가 그 대부(大夫)를 죽였다.
가을에 초나라 사람이 진(陳)나라를 포위하고 돈자(頓子)를 돈나라에 들여보냈다.
위문공(衛文公)을 장사 지냈다.
겨울 12월 계해일에 노 지공이 위자(衛子), 거청(莒慶)과 만나 조(洮)에서 맹세하였다.
25년 봄에 위나라 사람이 형나라를 정벌할 때 두 예지(예지와 그의 형제)가 국자(國子, 형나라 대부)를 따라 성을 순찰하다가 그를 겨드랑이에 끼고 성 밖으로 뛰어내려 그를 죽였다. 정월 병오일에 위후 훼가 형나라를 멸망시켰는데, 동성(同姓)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예지가 명문(銘文)을 지어 이르기를 "내가 국자를 겨드랑이에 끼고 죽였으나 그 누구도 감히 나를 막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진목공이 황하 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장차 왕을 복귀시키려 하자 호언이 진문공에게 말하기를, "제후들을 규합하려 한다면 왕을 돕는(勤王)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제후들이 이를 신뢰할 것이며 또한 큰 의리입니다. 문왕(文王)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후들에게 신의를 선포하기에 지금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복언에게 점을 치게 하니 말하기를, "길합니다. 황제(黃帝)가 판천(阪泉)에서 싸웠던 징조를 만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문공이 말하기를,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소" 하자, 대답하기를, "주나라의 예법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지금의 왕은 옛날의 황제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문공이 말하기를, "시초점(筮)을 쳐보시오" 하여 점을 치니 '대유(大有)' 가 '규(睽)' 로 바뀌는 괘를 얻고 말하기를, "길합니다. 천자께 제사를 올리는 괘를 만났습니다. 싸워서 이기고 왕이 음식을 대접할 것이니 길함이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이 괘는 하늘이 연못이 되어 해를 맞이하는 격이니 천자께서 마음을 낮추어 공을 맞이하시는 것이니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대유괘에서 규괘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역시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문공이 진나라 군대를 사양하고 하수(河水)를 내려가 3월 갑천일에 양번(陽樊)에 주둔하였고, 우군(右軍)은 온(溫)읍을 포위하였으며 좌군(左軍)은 왕을 맞이하였다.
여름 4월 이사일에 왕이 왕성(王城)으로 들어왔다. 온읍에서 대숙을 잡아 습성(隰城)에서 죽였다. 무오일에 진문공이 왕을 알현하니 왕이 단술로 대접하고 상을 내렸다. 문공이 죽은 뒤 묘도로 쓰는 수이(隧)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그것은 왕의 제도이다. 아직 덕을 대신할 자가 없는데 두 왕이 있는 격이니 이는 숙부께서도 미워하시는 바이다" 하고는 대신 양번, 온, 원(原), 찬(欑), 모(茅)의 토지를 주었다. 진나라가 이로써 처음으로 남양(南陽) 땅을 가지게 되었다. 양번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아 그곳을 포위하니 창갈(蒼葛)이 외쳐 말하기를, "덕으로써 중하를 부드럽게 대하고 형벌로써 사방의 오랑캐를 위협하는 법이니 마땅히 우리는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곳에 왕의 친인척이 아닌 자가 구가 있겠습니까? 어찌 그들을 포로로 잡으려 하십니까?" 하니 마침내 그 백성들을 내보내 주었다.
가을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약(鄀)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의 투크(鬥克)와 굴어구(屈禦寇)가 신(申)읍과 식(息)읍의 군사로써 상밀(商密)을 지켰다. 진나라 사람이 석(析)읍을 지나 외(隈)에 들어와 수레 부리는 사람들을 묶어 두고 상밀을 포위하였는데 날이 저물자 성벽에 달라붙었다. 밤에 피를 구덩이에 묻고 맹약서를 그 위에 얹어 거짓으로 자의자(子儀子) 및 변(邊)과 맹세하는 척하니, 상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진나라가 석읍을 취하였고 수비대장들이 배반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진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신읍의 공자 자의와 식읍의 공자 변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초나라 영윤 자옥이 진나라 군대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자 마침내 진(陳)나라를 포위하고 돈자를 돈나라에 들여보냈다.
겨울에 진문공이 원(原)나라를 포위하면서 사흘 치의 식량만을 명하였는데 원나라가 항복하지 않자 군대를 물리라 명하였다. 첩자가 나와 말하기를, "원나라가 장차 항복하려 합니다" 하니, 군리(軍吏)들이 말하기를, "잠시 기다리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문공이 말하기를, "신의(信)는 나라의 보배요 백성이 보호받는 바이다. 원나라를 얻고 신의를 잃는다면 무엇으로 백성을 보호하겠는가? 잃는 바가 더욱 많을 것이다" 하고는 한 사(舍, 30리)를 퇴각하니 원나라가 항복하였다. 원백 관(貫)을 기(冀) 땅으로 이주시켰고 조쇠를 원나라의 대부로 삼았으며 호진(狐溱)을 온읍의 대부로 삼았다.
위나라 사람이 우리(노나라)와 거(莒)나라를 화해시키니 12월에 조(洮)에서 맹세하여 위문공 때의 우호를 닦고 또한 거나라와 화해한 것이다.
진문공이 원나라를 지킬 만한 사람을 시인 발제(勃鞮)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옛날 조쇠는 대바구니에 담은 밥을 가지고 지름길로 따를 때 주리면서도 그것을 먹지 않았으니(공적인 재물이라 사사로이 쓰지 않음) 그로 하여금 원나라에 처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1.26. 희공(僖公) 26년
26년 봄, 왕력 정월 기미일에 노 지공이 거자(莒子), 위(衛)나라 영속(甯速)과 만나 향(向)에서 맹세하였다.
제나라 사람이 우리의 서쪽 국경을 침범하므로 노 지공이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휴(酅)에 이르렀으나 미치지 못했다.
여름에 제나라 사람이 우리의 북쪽 국경을 정벌하였다.
위나라 사람이 제나라를 정벌하였다.
공자 수(遂)가 초나라로 가 군사를 청하였다.
가을에 초나라 사람이 괴자(夔子)를 멸망시키고 돌아갔다.
겨울에 초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정벌하고 민(緡)을 포위하자 노 지공이 초나라 군사를 가지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곡(穀)읍을 취하였고, 노 지공이 제나라를 정벌한 곳으로부터 돌아왔다.
26년 봄 왕력 정월에 노 지공이 거(莒)나라 즈평공(茲平公), 영장자(甯莊子)와 향에서 맹세한 것은 조(洮)에서의 맹세를 거듭 다진 것이다.
제나라 군대가 우리의 서쪽 국경을 침범한 것은 이 두 번의 맹세를 처벌하기 위함이었다.
여름에 제효공(齊孝公)이 우리의 북쪽 국경을 정벌하자 위나라 사람이 제나라를 정벌하였으니 조에서의 맹세 때문이었다. 노 지공이 전시(展喜)를 보내 군대를 위로하게 하면서 전금(展禽, 유하혜)에게 명을 받들게 하였다. 제효공이 아직 국경에 들어오기 전에 전시가 그를 맞이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임금께서 친히 옥보를 움직이시어 장차 저희 보잘것없는 고을에 욕을 보시겠다는 말을 들으시고, 하신으로 하여금 집사들을 위로하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제효공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들도 두려워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소인들은 두려워하고 있으나 군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제효공이 말하기를, "방 안은 매달아 놓은 경쇠처럼 텅 비었고 들판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거늘 무엇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선왕의 명을 믿고 있습니다. 옛날 주공(周公)과 태공(大公)은 주나라 왕실의 고굉(股肱)이 되어 성왕(成王)을 보좌하였습니다. 성왕께서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시며 맹약의 상을 내리시기를 '대대로 자손들은 서로 해치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것이 맹부(盟府)에 실려 있고 대사(大師)가 그것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제환공은 이 때문에 제후들을 규합하여 그 화합하지 못함을 모의하고 결함을 메워주며 그 재앙을 구원하셨으니 이는 옛 직무를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즉위하셨을 때 제후들의 기대는 '그가 환공의 공적을 따를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 보잘것없는 고을은 이 때문에 군사를 모아 지키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대를 이으신 지 9년 만에 선왕의 명을 버리고 직무를 폐하시겠는가? 선군을 어찌 보시겠는가? 임금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였으니 이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효공이 마침내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동문 상중(東門襄仲)과 장문중이 초나라로 가 군사를 청하였다. 장손(장문중)이 자옥을 만나보고 제나라와 송나라가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니 그곳을 정벌하도록 인도하였다.
괴자(夔子)가 축융(祝融)과 육웅(鬻熊)의 제사를 지내지 않자 초나라 사람이 그를 꾸짖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우리 선왕이신 웅지(熊摯)께서 병이 있으셨는데 귀신이 용서하지 않으시어 스스로 괴나라로 숨어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초나라의 자리를 잃었거늘 또 무엇을 제사 지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가을에 초나라의 성득신과 투의신(鬥宜申)이 군대를 거느리고 괴나라를 멸망시키고 괴자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송나라는 자신이 진문공과 친하게 지낸 것 때문에 초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에 붙었다. 겨울에 초나라 영윤 자옥과 사마 자서(子西)가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정벌하여 민을 포위하였다. 노 지공이 초나라 군사를 가지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곡읍을 취하였으니, 무릇 군대를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을 가리켜 '가지고(以)'라고 한다. 제환공의 아들 옹(雍)을 곡읍에 두어 이아(易牙)가 그를 받들게 하니 이로써 노나라의 원군으로 삼았다. 초나라 신공(申公) 숙후(叔侯)가 그곳을 지켰고, 환공의 아들 일곱 명은 초나라에서 일곱 명의 대부가 되었다.
━━━━━━━━━━━━━━━━━━━━━━━━━━━━━━━━━━━━━━
1.27. 희공(僖公) 27년
27년 봄에 기자(杞子)가 와서 알현하였다.
여름 6월 경인일에 제후(齊侯) 소(昭)가 훙하였다.
가을 8월 을미일에 제효공(齊孝公)을 장사 지냈고, 을사일에 공자 수(遂)가 군대를 거느리고 기(杞)나라에 들어갔다.
겨울에 초나라 사람, 진후, 채후, 정백, 허남이 송나라를 포위하였고, 12월 갑체일에 노 지공이 제후들과 송나라에서 맹세하였다.
27년 봄에 기환공(杞桓公)이 와서 알현할 때 오랑캐의 예법을 썼으므로 자(子)라고 기록한 것이니 노 지공이 기나라를 낮추어 보았고 기나라 또한 공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에 제효공이 죽었으나 제나라에 원망이 있었음에도 초상의 의장(喪紀)을 폐하지 않았으니 이는 예에 맞는 일이었다.
가을에 기나라에 들어간 것은 무례함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초자가 장차 송나라를 포위하려 하면서 자문(子文)을 시켜 규(睽) 땅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니 조정이 끝나기도 전에 끝마쳤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자옥이 다시 위(蒍) 땅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니 온종일 걸려서 끝마쳤고 일곱 명에게 채찍질을 하였으며 세 명의 귀를 뚫었다. 나라의 원로들이 모두 자문에게 축하를 전하니 자문이 그들에게 술을 대접하였다. 위가(蒍賈)는 아직 나이가 어려 나중에 도착하여 축하하지 않으니 자문이 그 이유를 물었다. 대답하기를, "축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문께서 정치를 자옥에게 전해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로써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안에서만 편안히 하고 밖에서 패한다면 얻는 바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옥이 패하는 것은 자문께서 그를 천거하셨기 때문이니, 나라를 패하게 할 사람을 천거해 놓고 장차 무엇을 축하하겠습니까? 자옥은 굳세고 무례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없으니, 수레 300승을 넘기면 아마 다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구차하게 들어와서 축하한다면 그때 해도 어찌 늦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겨울에 초자와 제후들이 송나라를 포위하니 송나라의 공손고(公孫固)가 진(晉)나라로 가 위급함을 고하였다. 선진(先軫)이 말하기를, "은혜에 보답하고 환난을 구원하며 위엄을 취하고 패권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호언이 말하기를, "초나라가 처음으로 조(曹)나라를 얻었고 새로 위(衛)나라와 혼인을 맺었으니, 만약 조나라와 위나라를 정벌한다면 초나라는 반드시 그들을 구원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제나라와 송나라는 화를 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피려(被廬)에서 사냥을 하며 삼군(三軍)을 만들고 원수(元帥)를 모의하였다. 조쇠가 말하기를, "극곡(郤縠)이 마땅합니다. 신이 자주 그의 말을 들었는데 예악을 기뻐하고 시서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시서는 의리의 창고이며 예악은 덕의 법칙이고 덕의는 이익의 근본입니다. 하서(夏書)에 이르기를 '말로써 천거하여 받아들이고 공적으로써 밝게 시험하며 공용으로써 수레와 복식을 준다'고 하였으니 임금께서는 그를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극곡을 시켜 중군(中軍)을 이끌게 하고 극진(郤溱)이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호언을 시켜 상군(上軍)을 이끌게 하였으나 호모에게 사양하고 자신은 보좌역이 되었다. 조쇠를 경(卿)으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란지(欒枝)와 선진에게 사양하므로 란지를 시켜 하군(下軍)을 이끌게 하고 선진이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순림보(荀林父)가 수레를 몰고 위수(魏犨)가 융우(戎右)가 되었다. 진문공이 처음 나라에 들어와 그 백성들을 교화한 지 2년 만에 그들을 군사로 쓰고자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아직 의리를 모르고 아직 그 거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므로 이에 나가서 양왕(襄王)을 안정시키고 들어와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데 힘쓰니 백성들이 삶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다시 군사로 쓰고자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아직 신의를 모르고 아직 그 쓰임을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므로 이에 원나라를 정벌하여 신의를 보여주니 백성들이 재물을 바꿀 때 풍성함을 구하지 않고 그 말한 바를 명확히 증명하였다. 문공이 말하기를, "이제 되겠는가?"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아직 예법을 모르고 아직 그 공경함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므로 이에 크게 사냥을 하여 예법을 보여주고 직책의 차례를 만들어 그 관직을 바로잡으니 백성들이 들을 때 매혹되지 않았다. 그런 후에야 군사를 써서 곡읍의 수비대를 내쫓고 송나라의 포위를 푸니, 한 번의 전투로 패자가 된 것은 문채 있는 교화(文之教) 덕분이었다.
━━━━━━━━━━━━━━━━━━━━━━━━━━━━━━━━━━━━━━
1.28. 희공 28년
28년 봄, 진후가 조나라를 침공하고, 위나라를 정벌하였다.
공자 매가 위나라를 지키게 되었는데, 수비를 마치지 못한 채 그를 찔러 죽이자 초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구원하였다.
3월 병오일에 진후가 조나라에 들어가 조백을 사로잡아 송나라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여름 4월 기사일에 진후와 제나라 군대, 송나라 군대, 진(秦)나라 군대가 성복에서 초나라 사람과 싸워 초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고, 초나라는 그 대부 득신을 죽였다.
위후가 초나라로 망명하였다.
5월 계축일에 공이 진후, 제후, 송공, 채후, 정백, 위자, 거자와 전토에서 맹약하였고, 진후가 회합에 참석하였으며, 공이 왕의 처소에서 조회하였다.
6월, 위후 정이 초나라로부터 위나라로 돌아왔고, 위 원훤이 진나라로 망명하였다.
진후 관이 죽었다.
가을, 기백희가 왔다.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갔다.
겨울, 공이 진후, 제후, 송공, 채후, 정백, 진자, 거자, 주나라 사람, 진(秦)나라 사람과 온에서 회합하였다.
천왕이 하양에서 사냥하였는데, 임신일에 공이 왕의 처소에서 조회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위후를 붙잡아 경사(낙양)로 데려갔고, 위 원훤이 진나라로부터 위나라로 돌아왔다.
제후들이 마침내 허나라를 포위하였고, 조백 양이 조나라로 복귀하였으며, 뒤이어 제후들과 함께 허나라를 포위하였다.
28년 봄, 진후가 조나라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위나라가 길을 빌려주지 않자, 하남으로부터 돌아와 황하를 건너 조나라를 침공하고 위나라를 정벌하였다. 정월 무신일에 오록을 취하였다. 2월에 진나라 극곡이 죽자 원전이 중군을 장군하고, 서신이 하군을 보좌하였으니 이는 윗사람의 덕행이다. 진후와 제후가 염우에서 맹약하였고, 위후가 맹약을 청하였으나 진나라 사람이 허락하지 않았다. 위후가 초나라와 함께하려 하였으나 국인들이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 군주를 내쫓아 진나라에 기분을 맞추려 하였고, 위후는 출국하여 양우에 거주하였다.
공자 매가 위나라를 수비하였으나 초나라 사람이 위나라를 구원하여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자총을 죽여서 기분을 맞추고 초나라 사람에게는 “수비를 마치지 못해서였다”라고 말하였다.
진후가 조나라를 포위하였는데, 성문을 공격하다가 많이 죽자 조나라 사람들이 그 시체를 성 위에 전시하니 진후가 이를 근심하였다. 어인의 계책을 들어 “무덤가에 숙영하겠다”고 말하고 군대를 옮기니 조나라 사람들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포로로 잡혔던 자들의 관을 꺼내어 밖으로 나갔다. 그 흉흉한 틈을 타 공격하여 3월 병오일에 조나라에 들어갔다. 희부기를 기용하지 않은 것과 수레를 탄 자가 300명이나 된다는 죄를 물었으며, 또 “형상을 바쳐라”고 말하고는 희부기의 궁궐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여 그 일족을 면해주었으니 은혜를 갚은 것이다. 위추와 전힐이 노하여 “수고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갚는단 말인가”라고 하며 희부기의 집을 불살랐다. 위추가 가슴에 부상을 입었는데, 공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 재능을 아껴 사람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다. 그가 병을 핑계로 죽이려 하자 위추가 가슴을 동여매고 사자를 만나 “임금의 신령함 덕분에 편안하지 않은 곳이 없다”라고 말하며 거듭해서 300번을 뛰고 굽혀서 뛰니, 마침내 그를 살려주었다. 전힐을 죽여 군대에 효시하고, 주지교를 세워 융우로 삼았다. 송나라 사람이 문윤반을 진나라 군대에 보내 급함을 알리니 공이 말하기를 “송나라 사람이 급함을 알리는데 저버리면 끊어질 것이고, 초나라에 알리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싸우고 싶은데 제나라와 진(秦)나라가 아직 불가하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선진이 말하기를 “송나라 사람이 우리를 저버리고 제나라와 진(秦)나라에 뇌물을 주어 그들을 빌려 초나라에 알리게 하십시오. 우리가 조나라 군주를 붙잡고 조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나누어 송나라 사람에게 준다면, 초나라는 조나라와 위나라를 아끼니 필히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뇌물을 기뻐하고 완고한 자를 노하게 하면 어찌 싸우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기뻐하여 조백을 붙잡고 조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나누어 송나라 사람에게 주었다. 초나라 사람이 신 땅에 들어와 살며 신숙에게 곡을 떠나게 하고, 자옥에게 송나라를 떠나게 하며 말하기를 “진나라 군대를 따르지 말라. 진후는 밖에 있은 지 19년 만에 비로소 진나라를 얻었으니, 험조함과 간난을 다 맛보았고 백성의 정과 거짓을 다 알았다. 하늘이 그에게 나이를 빌려주어 해로운 것을 제거해 주었으니 하늘이 세운 자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군지(軍志)에 말하기를 ‘진퇴가 마땅하면 돌아오라’, 또 말하기를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라’, 또 말하기를 ‘덕이 있는 자는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뜻은 진나라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자옥이 백분을 시켜 싸움을 청하며 “감히 공을 이루려 함이 아니라, 틈을 타서 참소하고 악한 자들의 입을 막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적은 군사만을 주어, 오직 서광과 동궁, 그리고 약오의 육졸만이 그를 따랐다. 자옥이 완춘을 진나라 군대에 보내 “위후를 복귀시키고 조나라를 봉한다면 신도 송나라의 포위를 풀겠습니다”라고 알렸다. 자범이 말하기를 “자옥이 무례하구나. 군주가 하나를 취하고 신하가 둘을 취하니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선진이 말하기를 “남에게 주어 편안하게 하는 것을 예라 합니다. 초나라는 한마디로 세 나라를 정하였는데, 우리는 한마디로 그것을 망치면 우리에게 예가 없는데 무엇으로 싸우겠습니까. 초나라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송나라를 버리는 것이고, 구원하러 와서 버리는 것이니 제후들에게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초나라는 세 가지 은혜를 베풀고 우리는 세 가지 원한을 샀으니, 원한과 원수가 이미 많은데 무엇으로 싸우겠습니까. 차라리 사사로이 조나라와 위나라의 복귀를 허락하여 그들을 갈라놓고, 완춘을 붙잡아 초나라를 노하게 한 뒤에 싸우고 나서 도모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기뻐하여 완춘을 위나라에 구금하고, 또 사사로이 조나라와 위나라의 복귀를 허락하니 조나라와 위나라가 초나라에 절교하였다. 자옥이 노하여 진나라 군대를 뒤쫓았다.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군리들이 “군주로서 신하를 피하는 것은 욕된 일이고, 또 초나라 군대는 늙었으니 어찌하여 퇴각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자범이 말하기를 “군대가 곧으면 굳세고, 굽으면 늙은 것이니 어찌 오래 머무는 데 있겠는가. 초나라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여기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세 사(舍)를 물러나 피하는 것이 보답하는 것이다. 은혜를 저버리고 식언하면서 그 원수와 맞서니 우리가 굽고 초나라가 곧다. 그 무리는 이미 배불리 먹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물러나는데 초나라가 돌아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만약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군주는 물러나고 신하는 범하였으니 곡직이 저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물러나 세 사를 하니 초나라 무리가 멈추려 하였으나 자옥이 불허하였다. 여름 4월 무진일에 진후, 송공, 제나라 국귀보, 최요, 진(秦)나라 소자음이 성복에 주둔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흼을 등지고 주둔하니 진후가 근심하였는데, 어인이 읊조리는 말을 들으니 “원전이 무성하니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한다”라고 하였다. 공이 의심하자 자범이 말하기를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면 필히 제후들을 얻을 것이고, 만약 이기지 못하더라도 겉과 속이 산과 강이니 필히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초나라의 은혜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자 난정자가 말하기를 “한양의 희성 제후들을 초나라가 다 차지하였으니, 작은 은혜를 생각하고 큰 치욕을 잊는 것은 싸우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진후가 초나라 자와 함께 싸우는 꿈을 꾸었는데, 초나라 자가 자신을 엎드려 누르고 그 뇌를 빨아먹었으므로 두려워하였다. 자범이 말하기를 “길합니다. 우리는 하늘을 얻었고 초나라는 그 죄를 엎드렸으니 우리가 그를 부드럽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자옥이 투발을 시켜 싸움을 청하며 “임금의 병사들과 더불어 놀고자 하니, 임금은 덮개에 기대어 구경하십시오. 득신이 그것을 눈여겨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후가 난지를 시켜 대답하게 하기를 “과군이 명을 들었습니다. 초나라 군주의 은혜를 감히 잊지 못하여 이곳에 있는 것이니, 대부로서 물러나는데 어찌 감히 군주를 당해내겠습니까. 이미 명을 얻지 못하였으니 감히 대부를 번거롭게 합니다. 이삼자에게 말하십시오. 그대의 수레와 말을 경계하고, 그대 임금의 일을 공경하라. 내일 아침에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수레 700승이 굴레와 고삐를 갖추었다. 진후가 유신의 터에 올라 군대를 관람하며 “장유에 예가 있으니 사용할 만하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그 나무를 베어 병기를 보태었다. 기사일에 진나라 군대가 신 북쪽에 진을 쳤다. 서신이 하군의 부장으로서 진나라와 채나라를 당해내었다. 자옥은 약오의 육졸로 중군을 거느리며 “오늘 필히 진나라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서가 좌군, 자상이 우군을 거느렸다. 서신이 말의 등에 호랑이 가죽을 씌우고 먼저 진나라와 채나라를 범하니 진나라와 채나라가 달아나고 초나라 우군이 무너졌다. 호모가 두 개의 깃발을 설치하고 퇴각하는 척하자 난지가 수레로 땔나무를 끌며 거짓 도망을 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뒤쫓자 원진과 극진이 중군 공족으로 횡격하였다. 호모와 호언이 상군으로 자서를 협공하니 초나라 좌군이 무너졌고 초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자옥이 그 군졸을 수습하여 멈추었기에 망하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가 사흘 동안 곡식을 먹고 계유일에 돌아왔다. 갑오일에 형옹에 이르러 전토에 왕궁을 지었다. 3개월 동안 부역한 후, 정백이 초나라에 가서 그 군대를 치하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이미 패하여 두려워하였기에 자인구에게 명하여 진나라와 화친하게 하였다. 진나라 난지가 들어가 정백과 맹약하였다. 5월 병오일에 진후와 정백이 형옹에서 맹약하고, 정미일에 초나라 포로 100승과 보병 1,000명을 왕에게 바치니 정백이 왕을 모셨는데, 이는 평례를 쓴 것이다. 을유일에 왕이 예물을 베풀고 진후를 유(宥)하라 명하였다. 왕이 윤씨와 왕자 호, 내사 숙흥보에게 명하여 진후를 후백으로 책명하고, 대로의 복식과 융로의 복식, 붉은 활 1개, 붉은 화살 100개, 검은 활 1,000개, 검은 기장 술 1단, 호분 300명을 주며 “왕이 숙부에게 이르노니, 왕의 명을 공경히 복종하여 사방의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왕의 악을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진후가 세 번 사양하다가 명을 따라 “중이가 감히 다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천자의 지극히 밝고 아름다운 명을 받들어 행합니다”라고 하고 책을 받고 나왔으며, 출입할 때 세 번 알현하였다.
위후가 초나라 군대가 패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초나라로 망명하다가 진나라로 갔다. 원훤을 시켜 숙무를 받들어 맹약을 받게 하였다. 계해일에 왕자 호가 왕정에서 제후들과 맹약하며 “모두 왕실을 돕고 서로 해치지 말라. 이 맹약을 어기면 밝은 신께서 벌하시어 그 군대를 떨어뜨리고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게 하며, 그 현손에 이르기까지 늙고 어린 자가 없게 하리라”고 요언하였다. 군자들이 이 맹약을 신실하다고 하였고, 진나라가 이번 역무에서 덕으로써 공격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처음에 초나라 자옥이 스스로 경변옥영을 만들었으나 아직 착용하지 않았다. 싸우기 전에 꿈에 하신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주면 너에게 맹저의 사슴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바치지 않았다. 대심과 자서가 영황을 시켜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영계가 “죽어서 나라를 이롭게 한다면 오히려 할 수도 있거늘 하물며 경옥이겠습니까. 이는 분토와 같은데 군대를 구제할 수 있다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나가서 두 사람에게 “신이 영윤을 패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영윤이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스스로 패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패하자 왕이 사람을 시켜 “대부가 만약 들어온다면 신식의 늙은이들을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자서와 손백이 “득신이 장차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두 신하가 만류하였으나 “임금께서 장차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연곡에 이르러 죽었다. 진후가 이 소식을 듣고 비로소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나를 독살할 자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위여신이 실제로 영윤이 되었으나 자기 한 몸만을 받들 뿐 백성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어떤 이가 원훤을 위후에게 모함하기를 “숙무를 세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아들 각이 공을 따르자 공이 죽이게 하였으나 원훤은 명을 폐하지 않고 이숙을 받들어 들어가 지켰다. 6월, 진나라 사람이 위후를 복귀시켰다. 영무자가 위나라 사람들과 완복에서 맹약하며 “하늘이 위나라에 재앙을 내려 군신이 화합하지 못하여 이 근심에 이르렀다. 오늘 하늘이 그 마음을 인도하여 모두 마음을 낮추어 서로 따르게 하였다. 거주하는 자가 없으면 누가 사직을 지키겠으며, 행하는 자가 없으면 누가 목양을 막겠는가. 화합하지 못하는 까닭에 너희 대신들에게 맹약을 청하여 하늘의 마음을 인도한다. 금일부터 이후로 맹약한 후에는 행하는 자는 그 힘을 보호하지 말고, 거주하는 자는 그 죄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맹약을 어기면 서로 미치리니, 밝은 신과 선군께서 이를 살피고 벌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인들이 이 맹약을 듣고 나서야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위후가 기일보다 먼저 들어가니 영자가 먼저였다. 장장이 문을 지키는데 사자라 여겨 그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갔다. 공자 천견과 화중이 앞서 나갔는데, 숙손이 목욕하려다가 임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머리를 움켜쥔 채 달려 나갔다. 앞서 나간 자들이 쏘아 죽였는데 공이 그 죄가 없음을 알고 그 머리를 다리에 베고 울었다. 천견이 달려 나가자 공이 죽이게 하였고, 원훤은 진나라로 망명하였다.
성복의 싸움에서 진나라 중군이 못에서 바람을 맞아 대패의 왼쪽 휘장이 사라지자 기만이 명을 어겼으므로 사마가 그를 죽여 제후들에게 효시하고 모패를 시켜 대신하게 하였다. 군대가 돌아와 임오일에 황하를 건넜다. 주지교가 먼저 돌아가니 사회가 우를 대신하였다. 가을 7월 병신일에 군대를 정비하고 승전가를 부르며 진나라에 들어갔다. 포로를 바치고 잘린 왼쪽 귀를 수여하였으며, 음지에서 큰 상을 내리고 회합에 두 마음을 품은 자를 토벌하여 주지교를 죽여 나라에 효시하니 백성이 이에 크게 복종하였다. 군자들이 문공이 형벌을 잘 쓴다고 하였다. 세 가지 죄에 백성이 복종하였으니 시경에 이르기를 “이 중국을 은혜로 대하고 사방을 편안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상과 형벌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겨울, 온에서 회합한 것은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위후와 원훤이 송사하는데 영무자가 보좌하고, 침장자가 앉아 있으며, 사영이 대사가 되어 위후가 이기지 못하였다. 사영을 죽이고 침장자의 발을 잘랐으며, 영유는 충성스럽다 하여 면해주고 위후를 붙잡아 경사로 데려가 깊은 방에 가두었다. 영자가 직접 그에게 음식을 바쳤고, 원훤은 위나라로 돌아가 공자 하를 세웠다.
이 회합에서 진후가 왕을 불렀으니, 제후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또 왕에게 사냥하게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부르는 것은 가르침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춘추에 이르기를 ‘천왕이 하양에서 사냥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장소가 아님을 말한 것이고 또 덕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신일에 공이 왕의 처소에서 조회하였고, 정축일에 제후들이 허나라를 포위하였다. 진후가 병이 나자 조백의 종 후유가 점쟁이에게 뇌물을 주어 말하게 하기를 “조나라를 푸는 것으로 하소서. 제 환공은 회합을 하여 이성을 봉하였는데, 지금 군주께서는 회합을 하여 동성을 멸하니 조숙진탁은 문공의 아들이고 선군 당숙은 무공의 아우입니다. 또 제후들을 합쳐놓고 형제를 멸하는 것은 예가 아니며, 위나라와 함께 명을 받고 함께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신의가 아니며, 같은 죄에 다른 벌을 주는 것은 형벌이 아닙니다. 예로써 의를 행하고 신의로써 예를 지키며 형벌로써 사악함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 세 가지를 버리면 군주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기뻐하여 조백을 복귀시켰고, 드디어 제후들과 허나라에서 회합하였다. 진후가 삼행을 만들어 적을 막았는데 순임보가 중행을 장군하고 도격이 우행, 선멸이 좌행을 장군하였다.
━━━━━━━━━━━━━━━━━━━━━━━━━━━━━━━━━━━━━━
1.29. 희공 29년
29년 봄, 개갈로가 왔다.
공이 허나라를 포위하고 돌아왔다.
여름 6월, 왕의 사람, 진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 제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채나라 사람, 진(秦)나라 사람과 적천에서 맹약하였다.
가을, 큰 우박이 내렸다.
겨울, 개갈로가 왔다.
29년 봄, 갈로가 조회하러 와서 창연의 위에 머물렀는데, 공이 회합에 있었으므로 꼴과 쌀을 보냈으니 예이다.
여름, 공이 왕자 호, 진나라 고언, 송공 손고, 제나라 국귀보, 진나라 원도도, 진(秦)나라 소자음과 적천에서 맹약하였다. 전토에서의 맹약을 찾고 또 정나라 정벌을 도모하였다. 경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죄를 물은 것이다. 예에 경은 공후를 만날 수 없으니 백자남을 만나는 것은 가하다.
가을, 큰 우박이 내린 것은 재앙이 되었기 때문이다.
겨울, 개갈로가 왔는데 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조회하러 왔기에 예우하고 잔치를 베풀어 친교를 더하였다. 개갈로가 소 울음소리를 듣고 “이것은 세 번 희생이 될 것인데 모두 쓰일 것이다. 그 소리가 그러하다”라고 하였는데,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
1.30. 희공 30년
30년 봄, 왕의 정월이다.
여름, 적이 제나라를 침공하였다.
가을, 위나라가 그 대부 원훤과 공자 하를 죽였고, 위후 정이 위나라로 돌아왔다.
진나라 사람과 진(秦)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포위하였고, 개나라 사람이 소나라를 침공하였다. 겨울, 천왕이 재주공을 보내聘(빙)하였다. 공자 수가 경사로 갔고, 이어 진나라로 갔다.
30년 봄, 진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침공하여 그 공격할 만한지 여부를 보았다. 적이 진나라가 정나라를 근심하는 틈을 탔다. 여름, 적이 제나라를 침공하였다.
진후가 의연을 시켜 위후에게 독주를 먹이려 하였는데, 영유가 의원에게 뇌물을 주어 그 독을 묽게 하였으므로 죽지 않았다. 공이 그를 위해 왕에게 청하고 왕과 진후에게 옥을 바치고 모두 10곡을 주니 왕이 허락하였다. 가을에 비로소 위후를 풀어주었다.
위후가 주첨과 야상에게 뇌물을 주어 “만약 나를 들여보낼 수 있다면 너희를 경으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주와 야가 원훤과 자적, 자의를 죽였다. 공이 들어가 선군에게 제사지냈다. 주와 야가 이미 명령을 받고 복종하였는데, 주첨이 먼저 들어가 문에 이르러 병이 나서 죽었고, 야상은 경의 자리를 사양하였다.
9월 갑오일에 진후와 진(秦)나라 백이 정나라를 포위하였으니, 그들이 진나라에 무례하고 또 초나라에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 군대는 함릉에, 진(秦)나라 군대는 범남에 주둔하였다. 일지호가 정백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위태로우니 만약 촉지무를 시켜 진(秦)나라 군주를 만나게 한다면 군대는 필히 물러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따랐는데, 촉지무가 사양하기를 “신의 장성함도 남만 못했는데 지금 늙었으니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 그대를 쓰지 못하다가 지금 급해져서 그대를 찾으니 이것이 과인의 허물이오. 그러나 정나라가 망하면 그대 또한 이로울 것이 없으니”라고 하자 허락하였다. 밤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 진(秦)나라 백을 만나 말하기를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포위하니 정나라는 이미 망함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나라를 망하게 하여 군주께 유익하다면 감히 집사에게 번거로움을 끼치겠습니다. 나라를 넘어서 먼 곳에 고을을 삼는 것은 군주께서 그 어려움을 아실 것입니다. 어찌 정나라를 망하게 하여 이웃을 두텁게 하겠습니까. 이웃이 두터워지면 군주께는 얇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정나라를 놓아두어 동쪽 길의 주인이 되게 하신다면, 행인의 왕래에 그 부족함을 공급할 것이니 군주께서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또 군주께서 일찍이 진(晉)나라 군주에게 은혜를 베풀어 초하를 허락하셨는데, 아침에 건너고 저녁에 성벽을 세웠으니 군주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무릇 진(晉)나라는 어찌 만족함이 있겠습니까. 이미 동쪽으로 정나라를 봉하고 또 그 서쪽 경계를 넓히려 하니 만약 진(秦)나라를 깎아내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취하겠습니까. 진(秦)나라를 깎아내어 진(晉)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니 오직 군주께서 도모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진(秦)나라 백이 기뻐하여 정나라 사람들과 맹약하고 기자, 봉손, 양손을 시켜 수비하게 하고는 돌아갔다. 자범이 치자고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불가하다. 그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남의 힘을 빌리고는 그것을 해치는 것은 어질지 못하고, 동맹을 잃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무용하다. 우리는 돌아가자”라고 하고 또한 떠났다.
처음에 정나라 공자 난이 진나라로 망명하여 진후를 따라 정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정나라를 포위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하였고 동쪽에 대기하도록 하였다. 정나라 석갑보와 후선다가 그를 맞이하여 태자로 삼고 진나라와 화친을 구하니 진나라 사람이 허락하였다.
겨울, 왕이 주공열을 보내聘하였다. 잔치에 창치, 흰 술, 검은 술, 모양을 낸 소금이 나왔는데, 사양하기를 “국군의 문채는 밝힐 만하고 무력은 두려워할 만하면, 갖춘 물건의 잔치가 있어 그 덕을 상징하고 다섯 가지 맛을 올리며 아름다운 곡식을 주는데, 소금은 호랑이 형상으로 그 공을 올리니 내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동문양중이 주나라에 갈 예정이었는데, 뒤이어 진나라에 처음으로聘하였다.
━━━━━━━━━━━━━━━━━━━━━━━━━━━━━━━━━━━━━━
1.31. 희공 31년
31년 봄, 제서의 땅을 취하였다.
공자 수가 진나라로 갔다.
여름 4월, 네 번 교제를 점쳤으나 따르지 않아 희생을 면제하였고, 오히려 삼망을 하였다.
가을 7월.
겨울, 기백희가 부인을 구하러 왔다.
적이 위나라를 포위하였다. 12월, 위나라가 제구로 옮겼다.
31년 봄, 제서의 땅을 취한 것은 조나라 땅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장문중을 보내 중관에서 묵게 하였는데, 중관 사람이 “진나라가 새로 제후들을 얻었으니 필히 그 동맹을 친할 것입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따랐다. 조나라 땅을 나누어 조의 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제수에 닿게 하니 조나라 땅을 다 얻었다. 양중이 진나라에 간 것은 조나라 땅을 사례하기 위해서이다.
여름 4월, 네 번 교제를 점쳤으나 따르지 않아 희생을 면제하였으니 예가 아니다. 오히려 삼망을 한 것 또한 예가 아니다. 예에 상사(항상 지내는 제사)는 점치지 않고 그 희생의 날만을 점치는데, 소를 점치는 날을 ‘생(牲)’이라 한다. 희생이 결정되면 교제를 점치니 이는 윗사람이 태만하게 한 것이다. 망은 교제의 세밀한 부분이므로, 교제를 하지 않으면 망 또한 없어도 무방하다.
가을, 진나라가 청원에서 군대를 점검하고 오군을 만들어 적을 막았는데 조쇠를 경으로 삼았다.
겨울, 적이 위나라를 포위하여 위나라가 제구로 옮겼다. 점괘에 ‘300년’이라 하였다. 위 성공이 강숙의 꿈을 꾸었는데 “상(相)이 나의 향을 빼앗는다”라고 하였다. 공이 상에게 제사지내라고 명하자 영무자가 불가하다며 “귀신은 그 종류가 아니면 그 제사를 흠향하지 않는데 기나라와 증나라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상이 흠향하지 않은 지 이곳에 오래되었으니 이는 위나라의 죄가 아닙니다. 성왕과 주공의 명하신 제사를 바꾸어서는 안 되니 제사 명령을 고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정나라 설가가 공자 하를 미워하였고 정백 또한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공자 하가 초나라로 망명하였다.
━━━━━━━━━━━━━━━━━━━━━━━━━━━━━━━━━━━━━━
1.32. 희공 32년
32년 봄, 왕의 정월이다.
여름 4월 기축일에 정백 첩이 죽었다.
위나라 사람이 적을 침공하였다.
가을, 위나라 사람이 적과 맹약하였다.
겨울 12월 기묘일에 진후 중이가 죽었다.
32년 봄, 초나라 투장이 진나라와 화친을 청하니 진나라 양처보가 화답하여 진나라와 초나라가 비로소 통하였다.
여름, 적나라에 난리가 나자 위나라가 적을 침공하였다.
적이 화친을 청하였다.
가을, 위나라 사람이 적과 맹약하였다.
겨울, 진 문공이 죽었다. 경진일에 곡옥에 빈소하려 하였는데, 강에서 관이 나갈 때 소 울음소리가 났다. 점자(卜偃)가 대부들에게 절하게 하며 “군주의 명으로 큰일을 행하는데 장차 서쪽 군대가 우리를 지나칠 것이니 그들을 치면 필히 크게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기자가 정나라로부터 진(秦)나라에 알리기를 “정나라 사람이 나에게 그 북문의 열쇠를 관장하게 하였으니, 만약 잠입하여 군대를 이끌고 온다면 나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목공이 건숙에게 물었다. 건숙이 “군대를 지치게 하여 먼 곳을 습격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군대는 지치고 힘은 다했는데 먼 나라의 주인이 대비한다면 아마도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군대가 하는 일을 정나라는 필히 알 것이고, 수고롭고도 얻는 것이 없으면 필히 배반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며, 또 천 리를 가는데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맹명, 서걸, 백을을 불러 동문 밖에서 출병하게 하였다. 건숙이 울며 “맹자여, 나는 군대가 나가는 것은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사람을 시켜 “너희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중수에 죽었더라면 너희 무덤의 나무가 한아름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건숙의 아들이 군대를 따라가며 울며 전송하기를 “진나라 사람이 군대를 막는다면 필히 효산에서 할 것이다. 효산에는 두 개의 능이 있는데, 남능은 하후고의 무덤이고 북능은 문왕이 바람과 비를 피하시던 곳이다. 필히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내가 너희의 뼈를 거두리라”고 하였다. 진(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동쪽으로 갔다.
━━━━━━━━━━━━━━━━━━━━━━━━━━━━━━━━━━━━━━
1.33. 희공 33년
33년 봄, 왕의 2월, 진(秦)나라 사람이 활나라에 들어갔다.
제후가 국귀보를 보내聘하였다.
여름 4월 신사일에 진나라 사람과 강융이 진(秦)나라 군대를 효산에서 패퇴시켰다.
계사일에 진 문공을 장사 지냈다.
적이 제나라를 침공하였다.
공이 주나라를 정벌하여 자루를 취하였다.
가을, 공자 수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적을 기 땅에서 패퇴시켰다.
겨울 10월, 공이 제나라에 갔고, 12월에 제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을사일에 공이 소침에서 붕어하였다.
서리가 내려도 풀이 죽지 않았고 이와 매화가 열매 맺었다.
진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이 허나라를 정벌하였다.
33년 봄, 진(秦)나라 군대가 주나라 북문을 지나가는데, 좌우가 투구를 벗고 내려 300승이 수레를 뛰어넘었다. 왕손만이 아직 어린데 그것을 보고 왕에게 말하기를 “진(秦)나라 군대는 가볍고 무례하니 필히 패할 것입니다. 가벼우면 꾀가 적고, 무례하면 실수가 많으니 험한 곳에 들어가 실수가 많고 또 도모할 수 없다면 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활나라에 이르자 정나라 상인 현고가 주나라로 장사하러 가다가 그들을 만나 가죽과 소 12마리로 군대를 대접하며 말하기를 “과군이 당신들께서 우리 보잘것없는 나라를 지나쳐 군대를 이끌고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감히 군대를 따르는 이들을 대접하오니 보잘것없는 우리 나라가 당신들을 머물게 하는 동안, 머무르면 하루의 양식을 갖추고 행하면 하룻밤의 호위를 준비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급히 정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정 목공이 객관을 살펴보게 하니 짐을 꾸리고 병기를 갈며 말을 먹이고 있었다. 황무자를 시켜 사양하게 하기를 “당신들이 우리 나라에 오래 머무시니 고기와 양식이 다하였습니다. 당신들이 떠나려 하시는데, 정나라에 원포가 있음은 진(秦)나라에 구유가 있음과 같으니 당신들이 그 사슴을 취하여 우리 나라를 한가롭게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기자가 제나라로 달아나고 봉손, 양손은 송나라로 달아났다. 맹명이 “정나라는 대비가 있으니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포위하여도 뒷받침이 없으니 우리가 돌아가자”라고 하였다. 활나라를 멸하고 돌아왔다.
제나라 국장자가聘하러 왔는데, 교외에서 위로하는 것부터 예물을 주는 것까지 예절이 이루어졌고 민첩함이 더해졌다. 장문중이 공에게 말하기를 “국자가 정사를 맡으니 제나라에 여전히 예가 있습니다. 군주께서 조회하십시오. 신이 듣건대 예가 있는 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사직의 호위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원진이 “진(秦)나라가 건숙을 어기고 탐욕으로 백성을 수고롭게 하였으니 하늘이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하늘이 준 것을 잃어서는 안 되고 적을 놓아주어서는 안 되니, 적을 놓아주면 근심이 생기고 하늘을 어기는 것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필히 진(秦)나라 군대를 정벌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난지가 “진(秦)나라의 은혜를 갚지 않고 그 군대를 정벌하면 죽은 군주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선진이 “진(秦)나라가 우리의 상사를 슬퍼하지 않고 우리 동성을 정벌하였으니 진(秦)나라가 무례한 것인데 무슨 은혜를 갚는단 말입니까. 내가 듣건대 하루 적을 놓아주면 여러 세대의 근심이 된다고 하였으니, 자손까지 도모하는 것이 어찌 죽은 군주를 저버리는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명령을 발하고 급히 강융을 일으켰다. 진나라 자가 베옷을 입고, 양홍이 수레를 몰고, 래구가 우를 맡았다.
여름 4월 신사일에 진(秦)나라 군대를 효산에서 패퇴시키고 백리맹명시, 서걸술, 백을병을 붙잡아 돌아왔다. 드디어 베옷을 입고 문공을 장사 지내니 진나라가 이때부터 베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문영이 세 장수를 청하며 “저들이 실제로 우리 두 군주를 이간질하였으니 과군이 얻어서 먹을 수 있다면 싫지 않을 것입니다. 군주께서 어찌 번거롭게 토벌하십니까. 그들을 돌려보내 진(秦)나라에서 죽음을 맞게 하여 과군의 뜻을 만족시키게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허락하였다. 선진이 아침에 진(秦)나라 포로에 대해 묻자 공이 “부인이 청하여 놓아주었다”고 하였다. 선진이 노하여 “무부들이 힘써 그들을 들판에서 붙잡았는데 부인이 잠시 틈을 타 나라에서 면해주었으니, 군대 실속을 떨어뜨리고 적을 자라게 하였으니 망함이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침을 뱉었다. 공이 양처보를 시켜 뒤쫓게 하였으나 강에 이르렀을 때 이미 배 안에 있었다. 왼쪽 곁말을 풀어 공의 명이라 하여 맹명에게 선물하니, 맹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군주의 은혜가 나를 묶어 북을 치는 데 쓰지 않고 진(秦)나라로 돌아가 죽음을 맞게 하시니, 과군이 나를 죽이신다면 죽어도 썩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군주의 은혜를 따라 면해준다면 3년 후에 군주의 은혜에 절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秦)나라 백이 흰 옷을 입고 교외에 나와 군대를 향해 울며 “내가 건숙을 어겨 그대들을 욕보였으니 나의 죄이다. 맹명을 바꾸지 않았으니 나의 허물이다. 대부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또 내가 한 번의 과실로 큰 덕을 가리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적이 제나라를 침공한 것은 진나라의 상사 때문이었다.
공이 주나라를 정벌하여 자루를 취한 것은 승경의 역무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주나라 사람이 대비하지 않았으므로 가을에 양중이 다시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적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기 땅에 이르렀다. 8월 무자일에 진후가 적을 기 땅에서 패퇴시키고 극결이 백적의 자를 붙잡았다. 선진이 “필부도 임금에게 뜻을 펼치면 벌함이 없는데, 어찌 스스로 벌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투구를 벗고 적의 군대로 들어가 죽었다. 적나라 사람이 그 머리를 돌려보냈는데 얼굴이 살아있는 듯하였다. 처음에 구계가 사신으로 가다가 기 땅을 지나는 길에 기결이 김을 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내가 밥을 가져다주며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였다. 그와 함께 돌아와 문공에게 말하기를 “공경은 덕이 모인 것이니 능히 공경하면 필히 덕이 있고,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군주께서 쓰시기를 청합니다. 신이 듣건대 문밖을 나설 때는 손님을 대하는 것같이 하고, 일을 맡을 때는 제사 지내는 것같이 하라 하였으니 인을 하는 법도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 아버지가 죄가 있는데 가한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순임금의 죄는 곤을 죽였으나 그 들어 쓴 것은 우를 흥하게 하였고, 관경중은 환공의 적이었으나 실제로 그를 도와 성공하였습니다. 강고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아도 아들은 공손하고, 형이 우애롭지 않아도 동생은 화목하라’ 하였으니 서로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봉채와 비채를 캐되 그 아랫부분으로 내리지 말라’ 하였으니 군주께서 절도를 취하시면 가합니다”라고 하였다. 문공이 그를 하군대부로 삼았다. 기 땅에서 돌아오자 양공이 삼명으로 선차거를 중군 장군으로 명하고, 이명으로 선모의 현상을 서신에게 상으로 주며 “극결을 천거한 것은 그대의 공이다”라고 하고 일명으로 극결을 경으로 삼아 기 땅을 다시 주었으나 아직 군대를 거느리지는 않았다.
겨울, 공이 제나라에 가서 조회하고 또 적의 침공을 조문하였다. 돌아오다가 소침에서 붕어하였으니 편안함을 얻은 것이다.
진나라, 진나라, 정나라가 허나라를 정벌한 것은 초나라에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초나라 영윤 자상이 진나라와 채나라를 침공하니 진나라와 채나라가 화친하였고, 뒤이어 정나라를 정벌하여 공자 하를 세우려 하였다. 길질의 문을 공격하였는데 하가 주씨의 늪에 엎드러지자 외복 곤둔이 그를 잡아 바쳤고 문부인이 염하여 궨성의 아래에 장사 지냈다.
진나라 양처보가 채나라를 침공하니 초나라 자상이 구원하여 진나라 군대와 더불어 지수를 끼고 주둔하였다. 양자가 이를 근심하여 자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문은 순리를 범하지 않고 무는 적을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싸우고자 한다면 내가 진을 물릴 것이니 그대가 건너와 진을 치되 늦고 빠름은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풀어주십시오. 군대가 늙고 재물이 드는 것 또한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수레를 타고 기다리는데 자상이 건너려 하자 대손백이 “불가합니다. 진나라 사람은 신의가 없으니 반쯤 건넜을 때 우리를 박절하게 하면 후회하여 패한들 어디에 미치겠습니까. 풀어주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여 퇴각하였다. 양자가 선언하기를 “초나라 군대가 도망하였다”라고 하고는 돌아갔고 초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태자 상신이 자상을 참소하기를 “진나라의 뇌물을 받고 피하였으니 이는 초나라의 수치이며 죄가 막대합니다”라고 하여 왕이 자상을 죽였다.
희공을 장사 지내는 데 더디었으며 주를 만들었으니 예가 아니다. 무릇 군주가 붕어하면 졸곡하고 부제하며, 부제한 후에 주를 만드는데 주에 특별히 제사 지내고 증, 상, 제는 묘에서 지낸다.
━━━━━━━━━━━━━━━━━━━━━━━━━━━━━━━━━━━━━━
춘추좌씨전 — 문공 (文公)
━━━━━━━━━━━━━━━━━━━━━━━━━━━━━━━━━━━━━━
1.1. 문공 원년
원년, 봄, 왕 정월, 공(公)이 즉위하였다.
2월, 계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숙손득신이 서울(주나라)로 갔다.
여름, 왕후를 제나라에서 맞이하였다.
가을, 공손오가 척(戚)에서 진(晉)나라 후를 만났다.
겨울, 10월, 정미일에 초(楚)나라 세자 상신이 그 군주인 곤(髡)을 시해하였다.
원년, 봄, 왕이 내사 숙복을 보내 장례에 참여하게 하였다. 공손오가 그가 사람을 잘 알아본다는 말을 듣고 자기 두 아들을 보여주었다. 숙복이 말하기를, "곡(穀)은 자식에게 밥을 먹여줄 것이나, 난(難)은 자식을 거둘 것입니다. 곡은 턱이 풍만하니 반드시 노나라에 후손을 남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즉위하자 목백이 서울로 가서 즉위 사실을 알리고, 이어 제나라로 가 여자를 맞이하였다.
가을, 공손오가 척에서 진후를 만났다. 진(秦)나라 사람이 진(晉)나라를 정벌하여 무성(武城)을 취하니, 영호(令狐)에서의 싸움을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겨울, 진백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기마(羈馬)를 취하였다. 진후가 이를 막아내려 하자, 선진의 아들 선차가 나아가 말하기를, "가슴 속의 한이 가득 찼으니 청컨대 공격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양홍이 말하기를, "군사가 승리하는 것은 화합에 달려 있지 숫자에 있지 않다. 상서(商書)에 이르기를 '세 사람이 점을 쳐서 두 사람이 따르면, 내가 임금이고 이웃이다'라고 했다. 지금 우리는 화합하지 못하니 그대는 잠시 그만두라."라고 하여 싸움을 멈췄다.
초나라 태자 상신이 초 성왕을 시해하였다. 초기에 초 성왕이 상신을 태자로 삼으려 하자, 영윤 자상이 말하기를, "군주의 연세가 아직 젊으신데 총애하는 자식이 많으니, 총애하는 자식이 많으면 나라에 난이 많을 것입니다. 세우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만약 꼭 세워야 한다면 사직을 주관하는 군자는 반드시 삼가야 합니다. 첩을 총애하여 적처를 폐하지 말고, 여러 자식을 총애하여 적자를 폐하지 말며, 태자의 어머니를 총애하여 적처를 폐하지 마십시오. 군주께서 만약 그를 세우면 이는 근본을 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호랑이가 새끼를 낳는 것을 '판(販)'이라 한다. 상신은 사람됨이 벌의 눈에 이리의 소리를 내는 자라, 사람됨이 잔인하니 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다시 그를 폐하려 하자 상신이 이를 듣고 확실치 않아 그 스승인 반숭에게 알리며, "어떻게 하면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반숭이 말하기를, "강미(江芈)를 대접하되 공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를 따르니 강미가 노하여 "너를 죽이고 너의 아우를 세우려 하였구나."라고 하였다. 상신이 궁궐의 군사로 성왕을 포위하자, 왕이 곰 발바닥 요리라도 먹고 죽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정미일에 성왕을 시해하고 상신이 즉위하니, 이가 목왕이다. 반숭을 태사로 삼아 군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
1.2. 문공 2년
2년, 봄, 왕 2월, 갑자일에 진후와 진나라 군대가 팽아(彭衙)에서 싸워 진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정축일에 희공(僖公)의 위패를 모셨다.
3월, 을사일에 진처부와 맹약하였다.
여름, 6월, 공손오가 송(宋)공, 진(陳)후, 정(鄭)백, 진(晉)나라 사곡과 수롱(垂隴)에서 맹약하였다.
가을, 8월, 정묘일에 대묘에서 큰 제사를 지냈는데, 희공을 윗자리로 모셨으니 사당의 차례를 거스른 것이다.
겨울, 진(晉)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 진(陳)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이 진(秦)나라를 정벌하였다.
2년, 봄,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침범하자 진후가 막았다. 양처부가 진나라 군대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고 팽아에서 쫓으니 진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군대를 돌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정벌하고 북쪽 변방의 여러 읍을 취하였으며, 팽아에서 맹약하였다.
3월 을사일, 진나라가 청원(清原)에서 군대를 점검하고 진나라를 정벌하려 하여 양처부를 보내 공과 맹약하게 하고 원조를 구하니, 공이 진나라 조정으로 갔다.
여름, 제후들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기마를 취하였으니 팽아 전투를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가을, 8월, 대묘에서 큰 제사를 지냈는데 희공을 윗자리로 모셨으니 사당의 차례를 거스른 것이다. 담당 관리가 아뢰니 말하기를, "선군께서 차례를 바꾸지 않았던 바는 아니나, 나이 많은 이를 높이는 것이 제사의 순리이다."라고 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사당에 알렸다. 진후가 순림보를 보내 송공에게 주나라의 칭호를 고치도록 청하였다.
겨울, 진, 송, 진(陳), 정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하여 왕(汪)과 팽아를 취하고 돌아왔으니 팽아 전투를 보복함이었다. 경(卿)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순서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정벌하여 자(訾)를 취하니 정나라가 초나라와 화평하였다. 처음에 정백이 공자 귀생을 보내 초나라와 맹약을 청하자 초나라가 허락하였다. 초 자는 진나라와의 관계로 인해 진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여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였으나 군신들이 원하지 않았다. 공이 "좋다"라고 하였다. 영윤 두반이 말하기를, "초나라의 강대함으로 어찌 진나라를 따르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두발이 말하기를, "대국은 의를 제정하여 맹주가 되니, 그래서 복종하는 것이지 두려워서가 아니다. 지금 초나라 군대가 의를 행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제후들을 복종시키려 하니 그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초 자가 그를 따랐다. 신식(申息)이 이웃 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니 과군(寡君)이 군을 섬길 수 없어 목백을 보내 굳게 맹약을 청하였다.
━━━━━━━━━━━━━━━━━━━━━━━━━━━━━━━━━━━━━━
1.3. 문공 3년
3년, 봄, 왕 정월, 숙손득신이 진, 송, 진(陳), 위(衛), 정나라 사람과 함께 심(沈)나라를 정벌하니 심나라가 무너졌다.
여름, 5월, 왕자 호가 죽었다.
가을, 초나라 사람이 강(江)나라를 포위하였다.
겨울, 공이 진나라로 갔다.
3년, 봄, 수롱에서 모여 맹약을 확인하고 심나라 정벌을 도모하였다. 제후들이 심나라를 정벌한 것은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었다. 심나라가 무너졌다. 무릇 승리한 나라에 대해 말할 때, 어떤 군사를 패배시키고 어떤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며, 군주가 죽으면 멸망했다고 하고, 이기지 못하면 패배했다고 한다.
진백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황하를 건너 배를 불태우고 왕관(王官)과 교(郊)를 취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나가지 않자 곧 모진(茅津)에서 강을 건너 효(殽)의 시체를 거두고 돌아와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으니 맹명을 등용한 덕분이었다. 군자는 이로써 진 목공이 군주됨을 알았다. 사람을 등용함에 치밀하고, 사람을 대함에 한결같았다. 맹명이 세 번 패했음에도 여전히 등용하였으니, 건숙자를 우측에 두었다가 효에서 잃었을 때 공이 통곡하였다. 진나라는 엷고도 굳건하며, 또한 선군의 건숙자가 있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여름, 초 태자 상신이 사숙을 시켜 진(陳)나라를 침범하게 하였다. 사숙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세 투계(鬪雞)의 고을을 취하고 돌아왔으며, 강나라와 황나라와 맹약하였다. 초 자가 그 제자 휘를 거느리고 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가을, 초나라가 강나라를 포위하였다.
진나라 선차거, 송나라 공손고, 제나라 국좌, 진나라 원선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소량(少梁)을 취하였다. 겨울, 진후가 첨가를 하(瑕)에 거주하게 하여 도림(桃林)의 요새를 지키게 하였다. 진나라는 깊은 산속, 융족과 적족 사이에 거주하여 왕실로부터 멀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진나라와 왕래하지만, 나는 오직 이익만을 살핀다. 진나라가 천자의 명을 어기고 나의 하읍에 들어오니 과인이 두려워하는 바이다. 내가 진나라를 섬기기를 청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이 진나라 조정으로 가서 수호하였다.
━━━━━━━━━━━━━━━━━━━━━━━━━━━━━━━━━━━━━━
1.4. 문공 4년
4년, 봄, 공이 진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여름, 부인 강을 제나라에서 맞이하였다.
가을, 초나라 사람이 강나라를 멸망시켰다.
겨울, 11월, 임신일에 공자 수가 수(垂)에서 죽었다.
4년, 봄, 위후가 영유를 보내와 예방하니 공이 그와 연회를 열고, '담로(湛露)'와 '동궁(彤弓)'을 불렀으나 사양하지 않았고, 답가도 하지 않았다. 행인을 시켜 사적으로 묻게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공부한 것이 미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옛날 제후들이 왕에게 조회할 때 왕이 연회를 베풀어 음악을 연주하였습니다. 이때 '담로'를 부르는 것은 천자가 태양처럼 밝아 제후들이 명령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제후들이 왕이 미워하는 자를 대적하여 그 공을 바치면, 왕이 이때 붉은 활 하나와 붉은 화살 백 개, 검은 활과 화살 천 개를 내려 보답하니 연회에 대한 예입니다. 지금 미천한 신하가 옛 우호를 잇고자 왔는데 군께서 욕되게도 대접해주시니, 어찌 감히 큰 예법을 범하여 스스로 화를 자초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름, 초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니 정 영윤 공자 거질이 노나라, 진나라와 맹약하고 초나라에 청하니 초 자가 허락하였다. 대부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군주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부인 강을 제나라에서 맞이한 것은 동성(同姓)이기에 다르게 기록한 것이다.
진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하니 진후가 막았다. 선차거가 말하기를, "비록 군주께서 막으시나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또한 신이 군대를 살펴보니 진나라의 준비가 어찌 강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또 의로써 그들을 복종시킬 수 없는데 장차 무엇으로 싸우겠습니까."라고 하여 군대를 물러나게 하니,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겨울, 초 자가 초거를 진나라로 보내 제후들을 요구하니 진나라가 허락하지 않았다. 초거가 제후들을 불러 천자를 알현하게 하였고, 진후가 말하기를, "선대부 순식의 계책이면 알현할 수 있다"라고 하여 곧 알현하니, 제후들이 들어가 보았고 또한 배석하는 이들도 있었다.
━━━━━━━━━━━━━━━━━━━━━━━━━━━━━━━━━━━━━━
1.5. 문공 5년
5년, 봄, 왕 정월, 왕이 영숙을 보내 함(含)을 보내고 또 조문하였으며, 왕이 소백을 보내 장례에 참여하게 하였다.
여름, 공손오가 진나라로 갔다.
가을, 초나라 사람이 육(六)나라를 멸망시키고, 蓼(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겨울, 10월, 갑신일에 허남 업이 죽었다. 공이 진나라로 갔으나 진후가 만나주지 않아 공이 돌아왔다. 자숙희가 죽었다.
5년, 봄, 왕이 영숙을 보내 함과 조문하게 하였고, 소백을 보내 장례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모두 성주(成周)의 분자들로서 예법에 따른 것이었다.
가을, 초나라 사람이 육나라와 요나라를 멸망시켰으니 고요씨의 후손이다. 육나라 사람과 요나라 사람이 배반하자 초나라 사람이 멸망시켰다. 하서(夏書) 대우모(大禹謨)에 이르기를, "고요가 덕을 심으니 덕이 내려왔다. 제께서 덕을 가리지 않으셨다. 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고요야, 이 신하와 백성들이 감히 나의 바름을 거스르지 않으니 네가 사(士)가 되어 오형(五刑)을 밝혀 오교(五敎)를 돕도록 하라. 나의 다스림에 기약하고, 형벌을 형벌 없는 데에 기약하니 백성들이 중도에 화합하였다. 이것이 너의 공이다. 힘쓰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고요의 모사이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양처부가 위나라를 예방하고 돌아오다가 녕(甯)을 지나는데 녕영이 그를 따랐다. 그 아내가 말하기를, "강직함으로..."라고 하였다. 겨울, 진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기마를 취하였다. 융족과 적족이 각기 땅을 나누어 가졌는데 진후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나를 말하는구나."라고 하여 곧 진나라로 돌아가니 공이 진나라를 떠나 돌아왔다.
━━━━━━━━━━━━━━━━━━━━━━━━━━━━━━━━━━━━━━
1.6. 문공 6년
6년, 봄, 허 희공을 장사 지냈다.
여름, 계손행보가 진(陳)나라로 갔다.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가을 7월까지 이르렀다.
겨울, 10월, 제후들의 군대로 심나라를 정벌하니 심나라가 무너졌고 심자 집초를 사로잡아 희생으로 썼다.
6년, 봄, 진나라가 이(夷)에서 군대를 점검하고 두 군을 버렸다. 극결에게 중군을 통솔하게 하고 기정을 보좌로 삼았다. 선신건에게 상군을 맡기고 순림보를 보좌로 삼았다. 선멸에게 하군을 맡기고 선도를 보좌로 삼았다. 보초가 군을 어거하고 융진이 우측에 섰다. 진나라는 이때 제후들의 일이 많았는데, 진후가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크게 군대를 점검하여 그들을 보여주었다. 가을, 진나라의 승리를 기록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심나라를 정벌한 것은 그들이 초나라에 붙었기 때문이다. 심나라가 무너졌고 심자 집초를 사로잡아 희생으로 썼다. 그 사람을 썼음을 말한 것이다.
초 태자 상신이 태사 반숭을 죽였다. 영윤 성득신과 사숙이 도모하였는데 사숙이 진(陳)나라를 정벌한 것은 그 능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숙이 말하기를, "진나라는 대국인데 우리와 이웃하고 있으니 반드시 우환이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을 복종시키지 못한다면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1.7. 문공 7년
7년, 봄, 공이 주(邾)나라를 정벌하였다. 3월 갑술일에 수구(須句)를 취하고 곧 무(郚)에 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송공 왕신이 죽었다. 공이 소렴(小斂)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제후들의 군대로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8월, 갑자일에 진나라 사람과 진나라 사람이 하곡(河曲)에서 싸워 진(晉)나라 순림보가 진나라의 척차를 사로잡았다.
겨울, 공이 진(晉)후, 송공, 위후, 채후, 정백, 허남, 조백과 호(扈)에서 맹약하였다.
7년, 봄, 진나라 순자 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노나라를 정벌하였다. 공삭과 한천이 군대를 거느리고 척(犫)에서 제후들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제후들이 군대를 돌리자 진나라 사람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진나라를 정벌하였다. 비록 이기지 못했으나 승리했다고 보고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병거 백 승과 무늬 있는 말 백 사(駟)를 가지고 노 환공을 증여하며 맹약을 청하여 녹상(鹿上)에서 맹약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침범하고, 정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침범하였으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모두 그 일들이 정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나라 군대가 용(庸)나라를 멸망시켰다. 초 자가 용나라를 정벌하며 용나라 사람에게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더니 용나라 사람이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침범하였다. 초나라에 크게 기근이 들어 융족이 그 서남쪽을 침범하니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3월, 초나라 군대가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가을, 진나라 군대가 호에 있었다. 공이 호에서 모였다. 진나라는 송나라를 위해 복종시켰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굳게 정나라를 구했으나 부끄러워하여 곧 호에서 맹약하였다. 무릇 제후들이 모일 때 송나라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대부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정백이 도망쳐 돌아와 맹약하지 않았다. 자가가 촛불을 잡게 하여 무가 진백을 보게 하였다. 제후들이 나라를 정벌함은 제사(祭)와 같다.
━━━━━━━━━━━━━━━━━━━━━━━━━━━━━━━━━━━━━━
1.8. 문공 8년
8년, 봄, 왕 정월, 공이 진(晉)나라로 갔으나 진후가 만나주지 않았다.
여름, 4월, 풍뎅이가 있었다. 겨울, 천왕이 붕어하였다. 공이 진나라로부터 돌아왔다.
8년, 봄, 공이 진나라로 가서 위(衛)나라 정벌을 청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거원자가 진나라 순림보에게 알리기를, "위나라에 난이 있으니 그대께서 구해주십시오. 또한 자질들이 위나라의 위길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 때문에 이를 알고, 나 또한 압니다."라고 하였다. 공손고가 송공에게 고하기를, "무슨 노고가 있겠습니까. 군주께서도 따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위나라에 알리니 위나라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나라 순림보와 선극이 모두 죽었다.
진나라 선극이 괴득의 밭을 빼앗자 괴득, 기정부, 선도, 사곡, 양익이 선극을 시해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괴득과 선도를 죽이고 난순에게 중군을 맡기고, 선검에게 상군을 맡겼으며, 순림보를 보좌로 삼고, 선멸에게 하군을 맡기고, 선도를 보좌로 삼았다.
진후가 선멸과 수회를 진(秦)나라로 보내 공자 옹을 맞이하게 하였다. 자가가 그를 뒤쫓아 진(陳)나라 영공을 만났다. 진후가 말하기를, "하징서가 신하로서 그 군주를 시해했으니 그 죄가 크다. 멈춰라."라고 하였다. 하징서가 진 영공을 시해하니 초 자가 진나라에 들어가 하징서를 죽였다. 제후들이 초나라에 복종하였으므로 군자는 이를 의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여름, 채나라 사람이 그 대부 공자 섭을 죽였다. 가을, 송나라 사람이 그 군주 저구를 시해하였다.
천왕이 붕어하였다.
━━━━━━━━━━━━━━━━━━━━━━━━━━━━━━━━━━━━━━
1.9. 문공 9년
9년, 봄, 모백이 와서 금을 요구하였다.
왕숙 환공, 진후, 제후, 송공, 위후, 정백, 허남, 조백이 호에서 모였다.
여름, 적(狄)이 제나라를 침범하였다. 공이 제나라로 갔다.
가을, 8월, 조백 수가 죽었다.
9월, 갑오일에 진후 환이 죽었다.
겨울, 초 자가 초구를 보내 예방하였다.
9년, 봄, 모백 위가 와서 금을 요구하였는데, 곡식을 구한다는 말도 없었고 음식을 준다는 기록도 없으니 예가 아니다. 왕이 융족의 난을 고하였다. 진나라 순림보, 송나라 공손고, 진(陳)나라 원선, 정나라 공손호, 허나라 대부, 조나라 사람이 소릉(召陵)에서 왕 가를 만났고, 곧 진나라 순림보, 송나라 공손고, 위나라 공달, 정나라 석초, 허나라 대부, 조나라 사람이 호에서 맹약하여 주나라의 난을 구하고 또 허나라와 조나라를 도모하였다.
여름, 공이 제나라로 갔다. 진후가 죽었기 때문이다. 제나라를 통해 제후들을 섬기고자 하였다. 공손오의 난을 제나라 사람이 돌려보내자 공이 멈추기를 청하였으나 노나라 사람들이 공을 꾸짖어 공이 돌아왔다.
가을, 진나라 조순이 그 군주를 시해하였다. 공자 옹이 들어오자 진나라 사람이 선멸을 죽였고, 선멸이 진(秦)나라로 달아났다.
겨울, 초 자가 초구를 보내 노나라를 예방하게 하였다. 이때 초나라가 강성하여 노나라 사람들이 초나라를 조회하려 하였다. 무중손이 진나라에 청하였고, 진나라가 선멸과 수회를 진(秦)나라로 보내 공자 옹을 맞이하게 하였다.
━━━━━━━━━━━━━━━━━━━━━━━━━━━━━━━━━━━━━━
1.10. 문공 10년
10년, 봄, 왕 3월, 신묘일에 장손진이 죽었다.
여름, 진나라가 진(晉)나라를 정벌하여 기마를 취하였다.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가을 7월까지 이르렀다.
겨울, 초 자, 채후가 궐락(厥貉)에 머물렀다. 공손오가 초나라로 가자 초나라 사람이 저(雎)를 건넜다.
10년, 봄, 3월, 진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하니 진(秦)나라 사람이 조앙을 시켜 진나라와 맹약하게 하였다.
여름, 진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하여 기마를 취하였다. 진나라는 이때 효 전투를 겪고 왕관을 취하여 효와 팽아를 보복하였으니, 이로부터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침범하자 초 자가 채나라에 들어갔다. 채나라 사람들이 군서(群舒)와 함께 초나라를 배반하자 초 공자 영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서요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초나라 군대가 소(巢)를 포위하여 이겼다.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침범하여 힘을 취하니 초나라 군대가 채나라에 들어갔다. 가을, 초 자가 소를 포위하였다.
겨울, 초 자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제후들이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진나라 조순이 군대를 거느리고 순림보, 선극, 한천, 공숙, 사백, 그리고 제후들의 군대와 함께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는 머물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제후들의 일이 크게 많았다.
━━━━━━━━━━━━━━━━━━━━━━━━━━━━━━━━━━━━━━
1.11. 문공 11년
11년, 봄, 초 자가 麇(균)을 정벌하였다.
여름, 숙팽생이 진나라 극결과 승광(承匡)에서 만났다.
가을, 공손오가 제나라로 갔다.
적이 우리 서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갑오일에 숙손득신이 적을 함(鹹)에서 패배시키고 장적 교여를 사로잡았다.
11년, 봄, 초 자가 균나라를 정벌하였다. 성대심이 방저(防渚)에서 균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반숭이 말하기를, "이제 들어갈 수 있겠다."라고 하여 투월초를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균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계상(啟桑)에 이르러 돌아왔다.
여름,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심나라를 정벌하니 그들이 초나라에 붙었기 때문이다. 심나라가 무너졌다. 제후들의 군대를 건너게 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와 맹약하고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려 하였다. 정백이 진나라를 따르려 하였으나 대부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나라가 진나라를 따르자 적족 또한 초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를 공격하여 형(邢)을 취하였다.
가을, 장적이 노나라를 침범하였다. 숙손득신이 함에서 추격하여 그 머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장적을 사로잡았으므로 공손오가 제나라로 가서 승전보를 고하였다.
적이 우리 서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무릇 침범은 기록하지 않으나 이것을 기록한 것은 장적 때문이었다. 경만이 제나라를 침범하여 제나라가 그 두 아들을 죽였다. 위나라와 진나라를 침범하고 우리에게도 이르러 모두 패배하였으므로 기록하였다. 이것을 기록한 것은 그들과 같기 때문이다. 숙손득신이 함에서 적을 패배시킨 것은 장적이다. 형제 세 명이 일탕, 분여가 제나라를 침범하니 숙팽생이 그를 사로잡았고, 분여가 송나라를 침범하니 화우가 사로잡았다. 양량에서 나누었는데 숙손득신이 사로잡았다. 위나라와 진나라를 침범하니 모두 사로잡았다. 교여를 사로잡은 것은 공명을 받고 가서 얻은 것이다. 그가 죽을 때 그 아우 연사가 진나라로 달아났는데, 여 및 연사가 진나라로 달아났고, 여 및이 그를 보았다.
━━━━━━━━━━━━━━━━━━━━━━━━━━━━━━━━━━━━━━
1.12. 문공 12년
12년, 봄, 왕 정월, 성백이 죽었다. 대부를 시켜 종부와 함께 예방하게 하고 폐백을 사용하였다.
여름, 초나라 사람이 소를 포위하였다.
가을, 7월, 공이 송공, 진후, 위후, 정백, 허남, 조백과 함께 우(盂)에서 만났다.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정벌하였다. 무신일에 채나라에 들어갔다.
겨울, 10월, 비가 오지 않았다.
12년, 봄,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정벌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참여하지 않았다. 진나라 대부 선극이 죽자 채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호소하니 진후가 채후를 데려와 억류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소를 포위하였다. 가을, 초나라 군대가 소에 들어갔다. 극결이 진후에게 말하기를, "군대가 바르면 강하고, 굽으면 늙습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가 채나라를 정벌하여 이기니 제후들이 가상히 여겼다. 채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호소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채후를 억류하니, 초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우환이 있음을 알았다. 초 자가 진(陳)나라에 들어갔다. 초나라에 제후들의 일이 크게 많아졌다.
송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배반하니 정 공자 귀생이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정벌하여 송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
1.13. 문공 13년
13년, 봄, 왕 정월.
여름, 공이 제나라로 갔다.
가을, 공이 제나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공이 진나라로 갔다.
13년, 봄, 진후가 첨가를 보내 진(秦)나라와 화친하게 하니 진나라가 화친하였다. 진나라는 진(陳)나라와의 맹약을 하려 하였다. 진나라가 송나라와 도모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진나라가 초나라에 고하니 초나라가 들어갈 수 있었다.
진나라 극결이 정사를 보았다. 극이갑보가 주나라를 예방하니 왕이 그를 손님으로 여겼기에 '객'이라 하였다. 왕의 여러 대부가 도모하기를, "만약 진나라를 돕지 않으면 진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왕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진나라를 도우면 진나라는 더욱 강해져 모두 왕에게 손해가 된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그를 따라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여름, 공이 제나라로 갔으니 제나라에 초나라의 해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초나라를 위하려 하였다. 진나라가 노나라를 도왔다. 가을, 공이 돌아오고 나서야 진나라에 고하였다. 진나라는 이때 큰 군대가 있었다.
겨울, 공이 진나라로 갔다. 진후가 수계를 보내 초나라를 예방하게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 영윤 자양이 진나라를 예방하였다. 조선자가 수회에게 묻자 전연이 진나라에 말하기를, "진나라는 초나라를 섬기지 않으니 초나라가 제후들에게 고하기를 '내가 초나라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진후는 천천히 초나라를 따랐다."라고 하였다.
━━━━━━━━━━━━━━━━━━━━━━━━━━━━━━━━━━━━━━
1.14. 문공 14년
14년, 봄, 왕 정월, 공이 진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여름, 5월, 을해일에 제후 반이 죽었다. 진백 영이 죽었다.
6월, 공이 송공, 위후, 정백, 조백과 필림(棐林)에서 모여 제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첩조를 주(邾)나라에 들여보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을, 7월, 별이 북두로 들어갔다.
겨울, 단백이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 사람이 단백을 억류하고 또 자숙희를 억류하였다.
14년, 봄, 정 공자 귀생이 뇌물로 정나라가 구하는 바를 모두 들여보냈다. 정 자량이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초 태자 상신이 제후들의 군대로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초 자가 진나라에 들어가고, 정백이 진나라에 들어가고, 진후가 조(曹)나라에 들어가 양처부를 위해 위나라에서 식(鍚)나라 군대를 취하였다.
진 목공이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진 강공이다. 진백이 군대로 진(晉)나라를 도왔다. 조순, 선극, 순림보, 서갑, 서극, 선멸이 모두 장수가 되었다. 진후와 진백이 정나라를 포위하였으니 진나라에 무례하고 또 초나라와 양다리를 걸쳤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함릉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진나라가 범남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진나라 대부 선극이 죽은 것이 여기까지이다. 진후가 극결을 써서 말하기를, "공자 옹을 쫓아내라"라고 하였으나 진나라에 이르자 여러 신하가 모두 반대하였다. 선멸이 진(秦)나라로 달아났다. 선멸은 선진의 아들이다. 진나라 사람들이 그가 달아난 이유로 죽였다. 공자 옹 또한 진나라를 따라 들어왔다.
여름, 공이 제후들과 필(棐)에서 모여 제나라의 난을 정하였다. 제 혜공이 즉위하였는데 난이 있었으므로 진나라 사람이 첩조를 들여보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첩조는 사람 이름이다.
━━━━━━━━━━━━━━━━━━━━━━━━━━━━━━━━━━━━━━
1.15. 문공 15年
15년, 봄, 계손행보가 진나라로 갔다.
3월, 송나라 사마 화손이 와서 맹약하였다.
여름, 조백 노가 군중에서 죽었다. 진나라 사람이 조백을 데려왔다.
6월, 신축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가을, 제나라 사람이 우리 서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처음으로 세무(稅畝)를 하였다.
겨울, 11월, 제후들이 호에서 맹약하였다. 왕만자가 와서 투항하였고, 송나라에 메뚜기가 비처럼 내렸다.
15년, 봄, 계문자가 진나라로 가서 승리를 축하하였다. 진후가 공삭을 보내 문마를 바치게 하였으니 모두 재명(再命)한 대부들이다. 계문자가 태사 극을 시켜 답하게 하였으니 예법으로 여겼다.
夏, 진나라 사람들이 조나라에 들어가 그들이 희부기를 쓰지 않고 수레를 타는 자가 3백 명임을 책망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상태를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희부기의 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그 일족을 면하게 하였다. 무릇 싸움에서 이기면 간사한 자의 자리를 기록하는데, 조백이 돌아온 것이다.
가을, 처음으로 세무(稅畝)를 하였다. 예법이 아니다. 곡식은 적(藉)을 넘지 않아야 재물이 풍족해진다.
━━━━━━━━━━━━━━━━━━━━━━━━━━━━━━━━━━━━━━
1.16. 문공 16년
16년, 봄, 계손행보가 제나라로 갔다.
여름, 계손행보가 진나라로 갔다.
가을, 8월, 신미일에 성강이 죽었다. 천대를 허물었다.
초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파나라 사람이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겨울, 11월, 갑인일에 송공 고가 죽었다.
16년, 봄, 진후가 방순영을 주나라로 보내 소공의 죄를 면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음이이에게 말하여 진나라로 가게 하고 또 왕의 명을 말하게 하였다. 돌아오자 진나라 수회가 진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제후의 대부들이 초나라로 가서 궐락에서 맹약하였다. 진백이 초나라에 고하기를, "융족이 용나라를 정벌하니 초 자가 사숙을 시켜 용나라를 도모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사숙이 말하기를, "용나라 사람이 여러 만족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배반하였고, 미나라 사람이 백복을 모아 선(選)에 모여 초나라를 정벌하려 한다. 이때 신식의 북문이 열리지 않았다. 초 자가 판고(阪高)로 옮겼다."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가 청하기를, "용나라를 정벌함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사숙이 도모하였으니 이미 도모되었다."라고 하였다. 신숙시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복명하고 물러나니 왕이 그를 꾸짖었다. 대답하기를, "신은 왕의 명으로 나갔다가 다른 명이 있어 돌아왔으니 군자는 하지 않는 바입니다. 신이 사사로이 행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자에게 말하여 곧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송 문공이 즉위하여 군대에서 숙소를 받았는데 말하기를, "과군에게는 두 고아가 있는데 사사가 없으니 군께서 이를 임명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빈불로써 공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곧 맹약하였다. 가을, 송 무공을 장사 지내고 공이 진후, 송공, 위후, 채후, 정백, 허남, 조백과 호에서 모였으나 맹약하지 못하였다. 가을, 송공 고가 죽자 아들 성공 하가 즉위하였다. 송 문공이 죽자 진나라 사람들이 가지 않았다. 공손고가 말하기를, "그 손님을 알지 못하니 감히 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숙중혜백이 진나라 사람을 설득하여 가게 하였고 진나라가 뇌물을 주었다.
━━━━━━━━━━━━━━━━━━━━━━━━━━━━━━━━━━━━━━
1.17. 문공 17년
17년, 봄, 진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초나라를 두 마음으로 섬긴 것을 꾸짖기 위함이었다.
여름, 공이 제후와 곡(穀)에서 맹약하였다.
6월, 계묘일에 공자 수가 제후와 곡에서 맹약하였다.
가을, 공이 곡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10월, 자가 죽었다.
17년, 봄, 진나라 순림보, 위나라 공달, 진나라 공손녕, 정나라 석초가 송나라를 정벌하여 초나라를 두 마음으로 섬긴 것을 꾸짖었다. 송나라가 제후들과 평화하였다. 송 성공이 진나라로 가서 진후와 맹약하였다. 진나라 조천이 하궁을 공격하여 영공을 죽였다. 조순이 산을 나가기 전에 돌아왔다. 대사가 기록하기를 "조순이 그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하여 조정에 보였다.
여름, 곡에서 맹약하였다. 진나라가 평화로워졌다. 공손수가 제나라를 사신으로 갔으나 제나라 사람들이 예우하지 않았다. 공손수가 제나라로 가서 진나라 사람에게 난을 고하였다. 진나라 형후가 진나라로 가니 진나라가 형후를 대부로 삼았다. 진후가 서극을 시켜 공족의 법으로 대부가 제나라로 가서 곧 곡에서 맹약하게 하였다. 진나라 곽백이 진나라로 달아났다.
초 영윤 두월초가 그 일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백분이 초나라에 고하니 초 자가 사숙을 시켜 영윤 자중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초나라가 약오씨를 멸망시켰다.
━━━━━━━━━━━━━━━━━━━━━━━━━━━━━━━━━━━━━━
1.18. 문공 18년
18년, 봄, 왕 2월, 정축일에 공이 대 아래에서 붕어하였다.
3월, 수숙이 돌아왔다. 여름, 4월.
가을,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갔다.
겨울, 10월, 자가 죽었다. 11월, 제나라 사람이 자숙희를 시해하였다.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갔는데 황(黃)에 이르러 돌아왔다.
18년, 봄, 송 무공이 죽었다. 공이 진나라로 갔으나 진나라에 일이 있어 들어주지 않아 공이 돌아왔다. 여름, 공이 붕어하였다. 노나라 사람들이 진후가 출입한 일 때문에 장문중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진나라로 가게 하였다.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 군대와 맹약하였는데 공자 수와 함께하지 않았으므로 토벌한 것이다.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가서 죽었다. 부인이 대부를 시켜 종부와 함께 예방하게 하고 폐백을 사용하였으니 예법이 아니다. 가을,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갔다.
적이 송나라를 침범하였다. 겨울, 진나라 조순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진나라의 첩자를 사로잡아 죽였다. 진나라 군대가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돌렸다.
선공이 즉위하여 노나라 사당에 절하고 제후들을 만났으며, 성 위에서 제후들을 맞이하였다. 초 자가 진나라에 들어가 하징서를 죽였다. 군자는 징서를 큰 악으로 여겨 기록하기를 "그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하였다. 자반이 간언하였다. 하징서가 진 영공을 시해했음을 사람들이 모두 알았다. 초 자가 진나라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그 포악함이 정나라 정벌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제후들이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 자가 군대를 돌렸다. 정공이 초나라에 청하니 곧 돌아갔다. 초 자가 대부를 보내 제후들을 살피게 하니 진후가 수회를 보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니 초나라가 이때 진나라를 얻었다. 송나라 사람이 그 군주를 시해하였으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군자는 초 자가 진나라를 취한 것을 말하기를, "의로써 복종시키고 덕으로써 공격하였다"라고 하였다. 초 자가 이를 써서 제후들을 얻었으니 비록 소국이라도 복종하였다.
━━━━━━━━━━━━━━━━━━━━━━━━━━━━━━━━━━━━━━
춘추좌씨전 — 선공 (宣公)
━━━━━━━━━━━━━━━━━━━━━━━━━━━━━━━━━━━━━━
[1.1. 선공 원년]
원년 봄, 왕 정월에 공이 즉위하였다.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가서 부인을 맞이해 왔다.
3월, 수가 부인 부강을 데리고 제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여름, 계손행보가 제나라로 갔다.
가을, 주자(邾子)가 조회하러 왔다.
초자(楚子)가 육혼의 융을 정벌하였다.
겨울, 진(晉)나라 조순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陳)나라를 구원하였다.
원년 봄, 왕이 원백을 보내어 사신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공을) 늦게 바친 것에 대해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禮)는 몸의 줄기이고, 경(敬)은 몸의 바탕이다. 공경하지 않으면 예의를 잃고, 예의를 잃으면 몸을 잃으며, 몸을 잃으면 충성스럽지 못하고, 충성스럽지 못하면 임금을 위태롭게 하며, 임금을 위태롭게 하면 나라를 깎아먹으니 멸망이 닥칠 날이 멀지 않다. 원백이 송나라에서 죄를 지어 이전 일로 달아났던 것인데, 부인을 맞이하고 제나라에서 장가든 것은 묘(廟)에 고하기 위함이었다.
여름, 초자가 북쪽으로 정벌하여 주나라 경계에서 군대를 과시하니, 정왕이 왕손만으로 하여금 초자를 위로하게 하였다. 초자가 (주나라) 솥의 크기와 무게를 물으니, (왕손만이) 대답하였다. "덕에 달려 있지 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옛날 하(夏)나라가 한창 덕이 있을 때, 먼 곳의 사물을 그려 금을 구목(九牧)에게 바치게 하여 솥을 주조해 사물을 본떴으니, 온갖 물건을 갖추어 백성들이 신령과 간사함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산천에 들어가도 순응하지 않는 것을 만나지 않았고, 귀신이나 요괴를 만나지 않아 능히 상하가 화합하여 하늘의 복을 받들었습니다. 걸왕이 어두운 덕을 행하자 솥은 상(商)나라로 옮겨갔고 600년을 지냈습니다. 상나라 주왕이 포악하여 솥은 주(周)나라로 옮겨왔습니다. 덕이 밝으면 비록 작아도 무겁고, 간사하고 어지러우면 비록 커도 가벼운 것입니다. 하늘은 밝은 덕을 돌보시어 그 끝이 있는 법입니다. 성왕이 솥을 郟鄏(협욕)에 안치하며 30대를 다스리고 700년을 누리리라 점쳤으니, 하늘이 명하신 것입니다. 주나라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하늘의 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솥의 무게를 물을 것이 못 됩니다." 이에 초자가 돌아갔다.
진나라 조순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陳)나라를 구원하고 송나라를 정벌했는데, 이는 송나라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棐林(비림)에서 동맹하니 정나라가 복종하였다. 겨울, 진나라 조천이 숭(崇)나라를 침공하였고, 진후가 숭나라를 정벌하였다. 진(秦)나라가 숭나라 때문에 군대를 출동시키자, 진후가 진나라 군대가 나온 것을 알고 군대를 돌렸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
[1.2. 선공 2년]
2년 봄, 왕 2월 임자일에 송나라 화원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 공자 귀생이 군대를 거느려 대극(大棘)에서 싸웠다. 송나라 군대가 패배하고 송나라 화원을 사로잡았다.
가을 9월 을축일에 진나라 조순이 그 임금 이고를 시해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그 대부 산(山)을 죽였다.
겨울 10월 을해일에 천왕이 붕어하니, 광왕을 장사지냈다.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갔다.
2년 봄, 정나라 공자 귀생이 초나라로부터 명령을 받아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송나라의 화원과 악려가 이를 막았다. 2월 임자일에 대극에서 싸우니 송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화원을 가두고 악려를 죽였으며, 갑옷 입은 수레 460대와 갑옷 입은 말 250필을 얻었다. 죽은 자는 182명이었다. 송나라 군대가 이로 인해 패하자 송나라 사람들이 병거 100대와 좋은 말 100사(駟)로 화원을 속량하려 했는데, 절반쯤 들어갔을 때 화원이 도망쳐 돌아왔다. 진후가 조순에게 연회를 베풀고 부(賦)를 짓게 하니, '서묘(黍苗)'를 읊었다. 서묘는 소목공이 주나라의 덕이 옛날과 같지 않음을 생각한 것이다. 조순이 사양하자, 행인으로 하여금 '야유만초(野有蔓草)'를 읊게 하였다. 조순이 물러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마치 잊은 듯하니, 어찌 늦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나라 조순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 조순은 진나라의 현 대부였는데 (잠시) 국외로 망명해 있었다. 조천이 (임금을) 시해하자 조순이 돌아왔다. 공자가 이를 두고 사관의 기록에 대해 평하기를, "조순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하였다. 진나라의 대신으로서 국외로 나갔으나 국경을 벗어나지는 않았고, 돌아와서도 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기록한 것이다. 군자는 진나라 사관의 기록을 가지고 신사(信史)라고 평한다.
송나라 사람이 산을 죽인 것은 옛 원한을 갚기 위함이다. 화원과 정권을 다투어 성호를 쌓고 그 성에 의지하여 스스로 자립하였다. (그 후에) 송나라 사람들과 맹세하였는데, (송나라가) 약한 성을 쌓게 하니 산이 진나라로 도망쳤다. 진나라 사람이 그를 돌려보냈으나 (송나라가) 허락하지 않고 송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
[1.3. 선공 3년]
3년 봄, 왕 정월에 교(郊)제사에 쓸 소의 입에 상처가 나 다시 소를 점쳤는데 소가 죽었다. 이에 교제사를 지내지 않고 삼망(三望)만 행하였다.
여름, 초자가 육혼의 융을 정벌하였다.
가을, 적적(赤狄)이 장구여(廧咎如)를 정벌하였다.
겨울,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蔡)나라를 정벌하였다.
3년 봄, 교제사에 쓸 소의 입에 상처가 나 다시 소를 점쳤는데 점은 상례를 따르는 것이다. 소가 죽어 교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은 예가 아니며, 삼망을 행한 것 또한 예가 아니다. 초나라가 육혼의 융을 정벌하여 顛軨(전령)에 주둔하고, 마침내 낙(洛)에 이르러 주나라 경계에서 군대를 과시하니, 정왕이 왕손만으로 하여금 초자를 위로하게 하였다. 초자가 솥의 무게를 물으니 왕손만이 덕으로써 대답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다.
가을, 적적이 장구여를 정벌하니 진나라 순림보가 구원하여 장구여를 취하고 돌아왔다.
겨울, 진나라 극결이 채나라를 정벌하여 채후를 사로잡았다. 채후가 진나라에 조회하고 돌아갔는데, 채후가 돌아가자 진나라는 채후를 대신하려 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 송 소공이 사사로이 행차하려 하자 대부들이 모두 물러나기를 청하다가 뒤에 이르러 그를 죽였고, 공자 앙이 그를 만나 죽이고 문공을 세웠다.
━━━━━━━━━━━━━━━━━━━━━━━━━━━━━━━━━━━━━━
[1.4. 선공 4년]
4년 봄, 왕 정월에 공이 제후와 함께 거(莒)나라와 담(郯)나라를 평정하였다. 거나라 사람이 응하지 않자 공이 거나라를 정벌하여 향(向)을 취하였다.
진(秦)나라 백 도(稻)가 졸하였다.
여름, 공이 제나라로 갔다.
6월 을유일에 정나라 공자 귀생이 그 임금 이(夷)를 시해하였다.
적적이 제나라를 침공하였다.
가을, 공이 제나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진나라 조순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침공하니, 초나라가 채나라를 구원하여 厥貉(궐학)에서 만났다. 조순이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4년, 초나라 공자 영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서료(舒蓼)를 정벌하여 멸하였다. 초나라 사람이 다리를 놓아 초나라 군대를 통하게 하였다. 초나라 영윤 자양이 진(陳)나라에 들어가자 진나라 대부가 진나라의 죄를 진나라에 고하였다. 진나라가 그 신하들을 훈계하여 예(禮)를 따르게 하니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이로써 초나라를 복종시켰다. 초나라 백분이 진나라로 도망치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 태자 상신이 성왕을 시해하고, 두월초가 목왕을 시해하였으며, 공자 영제가 장왕을 시해하였다. 초나라는 무릇 세 번이나 임금을 시해했으니 주나라 사람들이 이를 위해 꾀하였고, 초자가 복종시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정나라 공자 귀생이 그 임금 영공을 시해하니 초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정백(鄭伯)이 죽였는데, 공자 귀생은 자가 자가(子家)이다. 초나라가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국인들이 그를 사랑하였으나 초나라의 명령을 받아 '적(賊)'이라 부르며 그를 죽였다. 자가는 알지 못하였는데 국인들이 그를 죽였으니, 그가 의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봄에 초나라가 사신을 보내 자가를 죽이게 하였는데, 초나라는 정백이 따르지 않자 제후들로 하여금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정백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공자 귀생이 그 임금을 시해하여 국인들이 그를 죽였다. 봄, 초나라 영윤 자양이 정나라에 들어가 맹세하니 정나라가 초나라를 따랐고 초나라는 강해졌다.
━━━━━━━━━━━━━━━━━━━━━━━━━━━━━━━━━━━━━━
[1.5. 선공 5년]
5년 봄, 공이 제나라로 갔다. 가을, 대부를 제나라로 보냈다.
가을 4월, 송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이 화친하였다. 겨울,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5년 봄, 공이 제나라로 가서 곡식을 구하였다. 진후가 제나라를 정벌하고자 공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복종시키려 하였다. 공이 진나라로 갔으나 진나라가 허락하지 않아 공이 돌아와 진나라의 어려움을 고하였는데, 이는 제나라가 노나라를 취했기 때문이다.
가을,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 군대와 맹세하였다. 진나라 조순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침공하고, 초자가 정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순림보가 정나라를 구원하여 초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진나라 조순이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로 가서 진나라가 척(戚)에서 맹세하고 翟泉(적천)의 맹약을 거듭하였다.
겨울, 초나라 영윤 자양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사곡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초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
[1.6. 선공 6년]
6년 봄, 진나라 조순, 위나라 공달, 진나라 의행보, 정나라 공자 송이 승광(承匡)에서 맹세하였다. 여름,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정벌하였다. 무신일에 채나라에 들어가니 초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구원하여 자량이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갔다.
가을, 적적이 진(晉)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 초자가 정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6년 봄, 승광에서 맹세한 것은 踐土(천토)의 맹약을 거듭한 것이다.
여름, 진나라 극결이 채나라를 정벌하니 초자가 공자 영제를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채나라에 이르러 채나라 군대가 여(汝)수를 건너니 대부가 말하기를 "초나라 군대가 매우 강하니 대적할 수 없다"라고 하여 군대를 물렸다. 진후가 채나라를 침공하자 초나라 군대가 이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진나라가 채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왔으나 초나라는 이기지 못하였고 채나라 사람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정나라 사람에게 옥사가 있어 진나라에 호소하게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자가 정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조순이 졸하고 선멸이 진나라로 도망치니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적적이 진나라를 정벌하니 진후가 유병(臾駢)을 시켜 정벌하게 하였는데, 진나라의 힘을 빌렸다. 가을, 진나라 유병이 적적을 정벌하여 멸하였다. 천승의 나라에 천승의 부(賦)는 대국을 섬길 수 있는 것인데, 진나라 사람들이 돌려주었으나 유병 또한 받지 않았다.
━━━━━━━━━━━━━━━━━━━━━━━━━━━━━━━━━━━━━━
[1.7. 선공 7년]
7년 봄, 위후가 손량부를 보내와 맹세하였다. 여름, 공이 제나라로 갔다. 가을, 공이 제나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공이 진후, 위후, 정백, 조백을 흑양(黑壤)에서 만났다. 진나라 군대가 진(秦)나라를 정벌하였다.
7년 봄, 위나라 손량부가 위나라 군대로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 군대와 맹세하였다. 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공자 즉이 군대로 이를 막았고, 위나라 군대가 도망쳤다.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공자 즉이 군대로 막았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침공하니 정나라 군대가 패배하고 진나라 군대와 맹세하였다. 겨울, 진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군대가 패배하고 진후와 맹세하였다. 초나라 공자 영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서(舒)나라를 정벌하여 취하였다. 초자가 강해지니 제후들이 복종하였다.
가을, 위후가 손량부를 보내 노나라와 맹세하게 하였다. 겨울, 공이 진후, 위후, 정백, 조백을 흑양에서 만나 진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침공하자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진나라를 정벌하여 진나라의 읍을 취하고 군대를 돌렸다. 제후들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진나라 군대가 패배하고 제후들이 모두 돌아갔다. 진후가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로 돌아가니 진나라는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자가 제후들과 함께 초나라로 돌아가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를 따랐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제후들 사이에서 강함을 다투니 제후들은 혹 진나라를 따르거나 혹 초나라를 따랐다.
━━━━━━━━━━━━━━━━━━━━━━━━━━━━━━━━━━━━━━
[1.8. 선공 8년]
8년 봄, 공이 회합으로부터 돌아왔다. 임오일에 마침내 진나라 군대와 함께 위수(魏首)를 포위하였다. 갑신일에 진나라 군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위수를 이겼다. 을유일에 위나라 군대가 들어가 형(邢)나라를 멸하였다.
여름 6월, 공자 수가 제나라로 가서 부인을 맞이하였다.
가을 7월 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완전히 가려졌다(旣). 진나라 군대가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소량(少梁)을 취하였다. 겨울 10월 기축일에 우리 소군 경웅을 장사지냈다.
8년 봄, 진나라 군대가 위수를 포위하니 위수가 성을 지켰고, 진나라 사람이 급히 공격하여 이겼다. 진나라 군대가 형나라를 멸하고 형나라를 이의(夷儀)로 옮겼으며, 위나라를 초구(楚丘)에 세웠다. 형나라는 고향으로 옮긴 듯했고 위나라는 망한 것을 잊었다. 위 성공이 진나라로 가니 진후와 대부들이 모두 군주라 칭하였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여겨 돌아갔다. 진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정벌하여 소량을 취하였다.
여름, 제나라로부터 부강을 맞이하였는데 동성이기 때문에 다르게 예우한 것이며, 묘에 고하기 위함이다.
가을 7월 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완전히 가려졌다. 가을,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정벌하여 소량을 취하였다. 태사가 진후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성공하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진나라 군대가 그곳에 있으니 성공하겠습니까? 진나라는 도덕이 없고 꾀하는 바가 도리에 어긋나며 군대를 내보냄에 명분이 없으니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경웅을 장사지냈다. 경웅은 선공의 부인인데 강씨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그 부인으로서의 행실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니, 예가 아니다.
━━━━━━━━━━━━━━━━━━━━━━━━━━━━━━━━━━━━━━
[1.9. 선공 9년]
9년 봄, 왕 정월에 공이 제나라로 갔다. 여름, 중손멸이 경사(京師)로 갔다. 가을, 근모(根牟)를 취하였다.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진(陳)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사람이 그 대부 설야를 죽였다. 겨울 10월, 진(秦)나라 백 영이 졸하였다.
9년 봄, 초자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진(陳)나라 공손녕과 의행보가 초나라로 도망치자 초자가 진나라에 들어가 공손녕과 의행보를 사(社)에서 처형하고 다시 진나라에 들어갔다.
진 영공이 공손녕, 의행보와 함께 하희(夏姬)와 통하였는데, 모두 그녀의 속옷을 입고 조정에서 희롱하였다. 설야가 간하기를 "공경이 음란함을 펴니 백성들이 본받을 곳이 없고 또한 좋지 않게 들리니 임금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고칠 수 있다."라고 하고 두 사람에게 알리니 두 사람이 그를 죽이기를 청하였다. 공이 금하지 않아 마침내 설야를 죽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시(詩)에 '백성들이 사악함이 많으니 스스로 사악함을 세우지 말라' 하였는데, 설야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극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한 것은 정나라가 초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정나라에 이르니 정나라 사람이 지영을 인질로 삼았다. 조순이 진후에게 청하여 그를 얻었다.
가을, 겨울에 위후가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정벌하여 맹세하였다. 위나라 사람이 공을 돌려보냈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 군대와 맹세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과 호(扈)에서 맹세한 것은 정나라가 복종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가 초나라와 화친하고 진나라가 초나라에 고하기를 "설야가 진나라에 고하였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영윤 자양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정벌하여 진나라가 성립되니, 초나라가 진나라에 들어가 대부 설야를 죽여 보복하였다. 진후가 돌아가 제후들에게 고하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그 대부 설야를 죽인 것은 진나라의 죄이다. 정백이 진나라에 들어가고 초자가 진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와 초나라 군대가 맹세하였다.
━━━━━━━━━━━━━━━━━━━━━━━━━━━━━━━━━━━━━━
[1.10. 선공 10년]
10년 봄, 공이 제나라로 갔다. 여름 4월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제후가 국좌를 군대에 보냈다.
가을, 형사, 제나라 고고와 자숙희가 왔다. 자숙희는 기록되지 않았으니 기록하지 않았다. 겨울, 계손행보가 제나라로 갔다. 제후가 고고를 보내 숙희를 맞이하게 하였으나 숙희가 가지 않았다.
10년 봄, 진후가 해양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나라가 초나라에 고하자 초자가 진나라에 들어가 대부 설야를 죽여 진나라에 보복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여 맹세하였다. 초자가 진나라에 들어가 초자가 제후들과 정나라를 정벌하니 정백이 맹세를 빌었고 초자가 허락하였다. 초자가 영(郢)에 들어가자 초나라 사람이 자양을 죽였다.
가을, 진나라 사곡, 양익이가 적(翟)을 정벌하였다. 적매가 그 임금을 시해하니 진나라 군대가 적을 패배시키고 적후를 사로잡았다. 적후가 진(秦)나라로 도망치니 적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 송나라 공경이 진나라로 갔다. 자문의 손자 황이 진나라로 도망치니 진나라 사람이 그 손자로 하여금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초자가 그에게 금을 하사하고 맹세하게 하였다. 송 문공이 공자 앙을 죽인 것은 그가 초나라와 통하여 난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이 마침내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선곡을 죽였다. 선곡이 적나라로 도망치니 진나라 군대가 적을 정벌하여 적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진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후가 대수(大蒐)를 열어 예(禮)를 보였다.
제후가 고고를 보내 숙희를 맞이하게 하였으나 숙희가 가지 않았다. 제후가 사람을 보냈는데 고고가 대부의 예로 맞이하였고 군주의 명령으로 맞이하지 않았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맞이하는 것은 예이다.
━━━━━━━━━━━━━━━━━━━━━━━━━━━━━━━━━━━━━━
[1.11. 선공 11년]
11년 봄, 초자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초자가 정나라에 들어갔다. 정백이 웃통을 벗고 양을 끌고 맞이하며 말하기를 "고(孤)가 하늘의 뜻을 얻지 못하여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임금으로 하여금 노여움을 품게 하여 폐읍에 이르게 하였으니 고의 죄입니다.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강남으로 포로로 끌고 가 해변을 채우게 하셔도 오직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베어 제후들에게 주어 신첩으로 삼게 하셔도 오직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만약 앞서의 우호로 은혜를 베푸시어 여, 선, 환, 무 때의 복을 빌어 사직을 없애지 않으시고 개과천선하여 임금을 섬기게 하신다면 구현(九縣)과 같이 평등하게 대하시는 것은 임금의 은혜이고 고의 소원이나 감히 바랄 바는 아닙니다. 감히 속마음을 펴니 임금께서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좌우에서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얻고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 임금이 남에게 자신을 낮출 수 있다면 반드시 그 백성을 신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가볍게 여기겠는가."라고 하며 30리를 물러나고 화친을 허락하였다. 반왕이 들어가 맹세하고 자량이 인질로 나갔다.
가을, 진후가 척(狄)과 찬함(欑函)에서 만났다.
겨울, 진후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 초자가 정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11년 여름, 초자가 정나라에 들어갔다. 초자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정나라에 무례했기 때문이다. 정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니 진나라 조순이 구원할 수 없었다. 초자가 정나라에 들어가자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반왕이 정나라에 들어가 맹세하고 자량이 인질로 나갔다. 초나라는 소공의 뇌물 때문에 신공 숙후를 멈추게 하였다. 초나라는 정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가을, 진후가 척(狄)과 만나 제후들을 합치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자가 노하여 마침내 정나라에 들어갔다. 초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니 정백이 웃통을 벗었다. 초자가 영에 들어가 초자가 정벌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니 정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가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그쳤다.
겨울, 진후가 정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고 진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만났으나 싸우지 않고 돌아갔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자가 정나라를 초나라에 고하니 정나라 또한 초나라를 따랐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혹 진나라를 따르거나 혹 초나라를 따랐고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따랐다.
━━━━━━━━━━━━━━━━━━━━━━━━━━━━━━━━━━━━━━
[1.12. 선공 12년]
12년 봄, 진 영공을 장사지냈다.
초자가 정나라를 포위한 지 17일이었다.
여름 6월 을묘일에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초자와 비(邲)에서 싸웠는데 진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가을 7월.
겨울 10월, 정나라 사람이 그 임금 귀생을 죽였다. 기록하기를 "정나라 사람이 그 임금 귀생을 시해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숨긴 것이다. 중동(仲冬)에 초자가 소(蕭)나라를 정벌하니 송나라 사람이 낙영제를 시켜 진나라에 급박함을 고하게 하였다.
12년 봄, 초자가 정나라를 포위한 지 17일이었다. 정나라 사람이 화친을 점쳤으나 길하지 않았다. 대궁에서 점치고 거리로 수레를 내어보니 길하였다. 국인들이 크게 곡하고 성벽을 지키는 자들이 모두 울었다. 초자가 군대를 물리니 정나라 사람이 성을 수리하였다. (초자가) 나아가 다시 포위하니 또 17일이었다. 정나라 사람이 이를 걱정하여 이에 정나라 문을 부수고 초나라 군대를 받아들였다.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여 강에 이르러 정나라가 이미 초나라와 화친한 것을 듣고 환자가 돌아가려 하며 말하기를 "정나라에 미치지 못하고 백성만 고생시키니 때를 기다림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수무자가 말하기를 "좋습니다. 대저 군대를 운용함을 듣고 틈을 보아 움직여야 합니다. 덕, 형, 정, 사, 전, 예가 바뀌지 않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초나라 사람은 임금을 죽인 근심을 품고 있고 정나라 사람은 도망친 수치를 품고 있으니 가벼운 군대로 주둔하면 군대는 반드시 많이 패할 것이니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환자가 이를 듣고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초나라 영윤 자중이 말하기를 "진나라 군대가 물러갔으니 임금께서는 어찌 정나라에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정나라가 우리 군대를 패하게 하였으니 임금께서는 무엇이 기쁘십니까?"라고 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물러나니 진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강에 이르자 초나라 군대가 다시 나아가고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초나라 군대가 또 물러나고 진나라 군대가 또 나아가 서로 버티며 싸우지 않았다. 초나라 영윤 자중, 자반이 모두 기뻐하였다. 자중이 말하기를 "진나라 군대가 물러갔으니 어찌 마침내 주둔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자반이 말하기를 "저들이 물러나고 우리가 나아가니 우리가 또 무엇을 걱정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마침내 싸우니 진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비(邲)에 이르러 크게 패하니 진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진나라 사람들이 조순, 선곡, 순림보가 군대를 잃었다고 말하였다. 순림보는 칼을 엎드렸고 선곡은 죽었으며, 조순은 죄가 없었고 조천이 진후를 시해하였다.
가을 7월, 초자가 정나라에 들어간 지 17일 만에 나왔다. 진나라 군대 또한 나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나라는 군대를 잃었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초자가 초를 시켜 노나라에 맹세를 구하고 송공과 함께 노나라에서 맹세하였다. 진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와 맹세하니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물러나니 진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다.
━━━━━━━━━━━━━━━━━━━━━━━━━━━━━━━━━━━━━━
[1.13. 선공 13년]
13년 봄, 제나라 군대가 거(莒)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초자가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메뚜기가 나타났다.
겨울, 진나라가 그 대부 선곡을 죽였다.
13년 봄, 제나라 군대가 거나라를 정벌한 것은 거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제나라 사람이 정벌하니 거나라가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자가 제후들과 제나라를 정벌하니 제나라 사람이 마침내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정벌하니 제나라 사람이 마침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제후들은 혹 진나라를 따르거나 혹 초나라를 따랐고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따랐다.
여름, 초자가 송나라를 정벌하니 송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고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니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진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겨울, 진나라가 선곡을 죽였는데 이는 그가 적나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선곡은 진나라의 대부인데 적나라로 도망쳤고 적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큰 악으로 여겨 죽였으니 선곡이 죽자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큰 상사로 여겼다. 진후가 금하지 않아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울었으나 진후가 예로 여기고 마침내 군대를 돌렸다.
━━━━━━━━━━━━━━━━━━━━━━━━━━━━━━━━━━━━━━
[1.14. 선공 14년]
14년 봄, 위나라가 그 대부 공달을 죽였다.
여름 5월 임신일에 조백 수가 졸하였다.
진후가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9월, 초자가 송나라를 포위하였다.
겨울, 공손귀보가 진나라로 갔다.
14년 봄, 진후가 정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초자가 송나라를 포위하니 송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고하였다.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니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진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다.
여름, 초나라가 신주를 제나라로 보내며 말하기를 "송나라에 길을 빌리지 마라. 그들은 우리와 형제이다."라고 하였다. 공자 풍을 진나라로 보내며 정나라에 길을 빌리지 않게 하였다. 신주가 맹저의 전쟁으로 송나라와 사이가 나빠져 말하기를 "정나라는 송나라를 따르고 진나라는 사신이 해치지 않으니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를 죽이면 내가 정벌할 것이다."라고 하니 코뿔소 뿔을 보고 길을 떠났다. 송나라에 이르니 송나라 사람이 막았다. 화원이 말하기를 "나를 지나가면서 길을 빌리지 않으니 나를 얕잡아 보는 것이다. 나를 얕잡아 보면 망할 것이다."라고 하며 그 사신을 죽이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송나라 사람이 죽였다. 초자가 이 소식을 듣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니 신발이 질황에 닿고 칼이 침문 밖에 닿으며 수레가 포서의 시장에 닿았다. 가을 9월, 초자가 송나라를 포위하였다.
━━━━━━━━━━━━━━━━━━━━━━━━━━━━━━━━━━━━━━
[1.15. 선공 15년]
15년 봄, 공손귀보가 초자와 송나라에서 만났다.
여름 5월, 송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이 화친하였다.
6월 계묘일에 진나라 군대가 적적의 노씨를 멸하고 노자 영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가을, 메뚜기가 나타났다. 중손멸이 제나라 고고를 무루(無婁)에서 만났다. 처음으로畝(묘)에 세금을 거두었다(初稅畝).
겨울, 蝝(연)이 생겨 굶주림이 있었다.
15년 봄, 송나라 사람이 혹은 공자 고에게 고하기를 "만약 일이 있으면 초나라를 주(主)로 하고, 만약 일 없음을 고하면 송나라를 주(主)로 하라."라고 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공손기를 시켜 초나라에 고하게 하니 초자가 신숙시를 송나라로 보냈다. 송나라 사람이 맹세하였다. 초자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송나라 사람과 화친하였기 때문이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포위하였다. 초나라 영윤 자중, 자반이 송나라를 구원하니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구원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니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가고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여름, 송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이 화친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고하니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다.
진나라 군대가 적적의 노씨를 멸하고 노자 영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진후가 그를 융우(戎右)로 삼았는데 진후가 죽음에 이르자 노자가 제나라로 도망쳤다. 진나라 사람이 뒤쫓아 죽였다. 진후가 융우로 삼았는데 노자가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후들은 혹 진나라를 따르거나 혹 초나라를 따랐고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따랐다.
가을, 처음으로 묘에 세금을 거두었는데 예가 아니다. 곡식은 차(藉)를 넘지 말아야 풍족한 재물이 되는데, 이미 그러한 후에 세금을 거두니 그 절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세금은 재물을 풍족하게 하기 위함인데 예가 아니다. 군자는 어렵게 여겼다.
겨울, 연이 생겨 굶주림이 있었다. 연은 메뚜기의 새끼이다. 메뚜기가 곡식을 해치니 나라가 크게 굶주렸다. 굶주림을 기록한 것은 그것이 곡식을 해쳤기 때문이다.
━━━━━━━━━━━━━━━━━━━━━━━━━━━━━━━━━━━━━━
[1.16. 선공 16년]
16년 봄, 진나라 사람이 적적의 갑씨와 류우를 멸하였다.
여름, 성주 선사(宣謝)에 재앙이 있었다. 진후가 사곡을 보내 조문하고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기록되지 않았으니 숨긴 것이다. 무릇 불은 사람이 낸 것을 불이라 하고 하늘이 내린 것을 재앙이라 한다. 여름, 숙손교여가 군대를 거느리고 극(棘)을 포위하고 문양(汶陽)의 전답을 취하였다. 가을, 공이 진나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진후가 사회를 보내와 예방하였다.
16년 봄, 초나라 영윤 자문이 초를 시켜 송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고하니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니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가고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진나라 사람이 적적의 갑씨와 류우를 멸하였다. 적적은 적인의 종류이다. 진나라 사람이 이를 멸하고 제후들에게 고하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자가 노하여 마침내 정나라에 들어갔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혹 진나라를 따르거나 혹 초나라를 따랐고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따랐다. 진나라는 약해지고 초나라는 강해지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를 따랐다.
여름, 공이 진나라로부터 돌아왔으니 즉위를 고하기 위함이다. 가을, 숙손교여가 군대를 거느리고 극을 포위하고 문양의 전답을 취하였는데, 극나라를 정벌했기 때문이다. 극나라 군대와 맹세하였다.
겨울, 진후가 사회를 보내와 예방하게 하였는데 예를 묻기 위함이다. 장문중이 사회에게 예로써 대답하니 사회가 예를 갖추었다고 여겨 돌아가 진후에게 고하였다. 진후가 사회를 보내 노나라와 맹세하게 하였다.
━━━━━━━━━━━━━━━━━━━━━━━━━━━━━━━━━━━━━━
[1.17. 선공 17년]
17년 봄, 왕 정월 경자일에 허남 석아가 졸하였다. 여름, 허 소공을 장사지냈다. 6월 계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공이 진후, 위후, 조백, 주자와 단도(斷道)에서 함께 맹세하였다. 공이 회합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10월.
17년 봄, 진후가 사회를 보내 주나라에 예방하게 하였는데, (조공을) 늦게 바친 것에 대해 고하기 위함이었다. 단도에서 함께 맹세한 것은 송나라를 구원하려 꾀했기 때문이다.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에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송나라를 구원하였다. 송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이 화친하니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혹 진나라를 따르거나 혹 초나라를 따랐고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따랐다.
여름 6월, 일식이 있었다. 완전히 가려졌다. 가을, 진나라 순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구원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채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정벌하니 채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채나라에 들어가고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다.
겨울, 진후가 제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 위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과 단도에서 함께 맹세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려 꾀하였다.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에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자가 노하여 마침내 진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다.
━━━━━━━━━━━━━━━━━━━━━━━━━━━━━━━━━━━━━━
[1.18. 선공 18년]
18년 봄, 진후, 위 세자 장이 제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공이 래(萊)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7월 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완전히 가려졌다.
공손귀보가 진나라로 갔다.
겨울 10월 임술일에 공이 노침에서 붕어하였다.
귀보가 진나라로부터 돌아오다 생(笙)에 이르러 마침내 제나라로 도망쳤다.
18년 봄, 진후와 위 세자 장이 제나라를 정벌하였는데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제나라 군대와 맹세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제나라를 정벌하니 제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제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혹 진나라를 따르거나 혹 초나라를 따랐고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따랐다.
여름, 공이 래나라를 정벌하니 래나라가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래나라를 정벌하니 래나라 군대와 맹세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자가 노하여 마침내 진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다.
가을 7월 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완전히 가려졌다. 삭(朔)과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관리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겨울, 공이 노침에서 붕어하였으니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제후들이 오지 않은 것은 그 거역함 때문이다. 노나라 사람이 순조롭지 않다고 여겨 마침내 장사지냈다. 제후들이 모두 왔으니 그 복종함 때문이다. 귀보가 제나라로 도망친 것은 공손귀보의 죄 때문이다. 봄, 공손귀보가 진나라로 가서 즉위를 고하였다. 진후가 돌아가게 하였는데 공이 붕어하니 귀보가 제나라로 도망쳤다. 진나라 사람이 죄가 있다고 여겼고 노나라 사람 또한 죄가 있다고 여겨 마침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니 진나라는 강해졌다.
━━━━━━━━━━━━━━━━━━━━━━━━━━━━━━━━━━━━━━
춘추좌씨전 — 성공 (成公)
━━━━━━━━━━━━━━━━━━━━━━━━━━━━━━━━━━━━━━
1.1. 성공 원년
원년, 봄, 왕 정월, 공이 즉위하였다.
2월, 신유일에 우리 군주 선공을 장사 지냈다.
얼음이 얼지 않았다.
3월, 구갑(丘甲)을 만들었다.
여름, 장손허가 진후(晋侯)와 적극(赤棘)에서 맹약하였다.
가을, 왕의 군대가 모융(茅戎)에서 패배하였다.
겨울, 10월.
원년, 봄, 진후가 난서를 시켜 정나라를 구원하게 하니, 정나라 사람이 허나라를 공격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구갑을 만든 것은 예가 아니다. 갑(甲)은 병장기이고, 구(丘)는 지명이다. 구갑을 만든다는 것은 병장기를 출동시킨다는 뜻인데, 이는 예가 아니다.
여름, 장손허가 진나라로 가서 진후와 적극에서 맹약하였는데, 이는 초나라를 복속시킬 것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진나라의 순임보가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공격하여 정나라 군대와 맹약하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
1.2. 성공 2년
2년, 봄, 제후(齊侯)가 우리 북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여름, 4월, 병술일에 위나라의 손량부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 군대와 신축(新築)에서 싸웠는데, 위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6월, 계유일에 계손행보, 장손허, 숙손교여, 공손영제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극극, 위나라의 손량부, 조나라의 공자 수와 함께 제후와 전량(鞌)에서 싸웠는데, 제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가을, 7월, 제후가 국좌를 군중에 보냈다.
임신일에 공이 초나라 사람, 진나라 사람, 송나라 사람, 진나라(陳) 사람, 위나라 사람, 정나라 사람, 허나라 사람, 조나라 사람과 촉(蜀)에서 맹약하였다.
겨울, 초나라 군대가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2년, 제경공이 직접 진나라 군대를 뒤쫓았는데, 전량의 싸움에서 제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진나라의 극극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후가 국좌를 진나라 군중에 보내니, 진나라 군중에서는 "반드시 소동숙자를 인질로 삼고, 제나라의 밭두둑을 동서 방향으로 고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국좌가 대답하기를, "소동숙자는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과군의 어머니이십니다. 만약 필적하는 자와 견준다면 진나라 군주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대께서 제후들에게 큰 명령을 내리면서 어머니를 인질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제후들 중에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두 나라의 맹약을 근거로 하신다면, 신은 군대를 징발하고 무기를 닦아 명령을 기다릴 것이며, 설령 죽음이 있을지라도 두 나라가 다스려져 평안해지는 것이 과군의 바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물러나자 극자가 노하였다. 제후들의 군대가 패배하자 제나라 군대를 뒤쫓았는데, 진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이르니 제후가 달아났다. 봉추보가 공과 자리를 바꾸었는데, 화천(華泉)에 이르려 할 때 수레가 나무에 걸려 멈추었다. 추보가 수레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뱀이 그 아래에서 나오자 팔뚝으로 쳐서 다치게 하고는 숨겼기 때문에, 수레를 밀어 진나라 군대가 따라오게 할 수 없었다. 한궐이 말 앞에서 고삐를 잡고 다시 절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술잔에 옥을 더하여 올리며 말하기를, "과군께서 신들을 시켜 노나라와 위나라를 위해 청하기를 '군대의 수레가 군주의 땅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하신(下臣)이 불행하게도 군대의 행렬에 속하게 되어 피할 곳이 없었고, 도망치다가 두 군주를 욕되게 할까 두려웠습니다. 신이 군사를 욕되게 하였으니, 삼가 민첩하지 못함을 고합니다"라고 하였다. 관직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봉추보가 공을 시켜 화장실로 가게 하여 달아나 제나라 군대로 돌아갔다. 한궐이 추보를 바치니 극자가 말하기를, "그대들의 군주가 그 의로움만 못하게 하였으니, 유익함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들의 군주를 위하고, 나는 우리 군주를 위하니, 서로 가상히 여겨 본받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그를 놓아주었다.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 군대를 따라 제나라에 들어갔다. 진나라 사람이 세 번 들어갔고 극극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제후가 국좌를 시켜 군대와 만나게 하며 말하기를, "우리 두 군주가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신을 보내 청합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니, 군중에서는 "반드시 소동숙자를 인질로 삼고 제나라의 밭두둑을 동서로 고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국좌가 말로 대답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노나라와 위나라에 청하여 촉의 맹약에 이르렀다. 진후가 돌아오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
1.3. 성공 3년
3년, 봄, 왕 정월, 공이 진후, 제후, 송공, 위후, 조백과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2월, 공이 정나라 공격을 마치고 돌아왔다.
3월, 병오일에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에서 패하여 진나라의 사마 한궐이 붙잡혔다.
여름, 공이 진나라로 갔다.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정나라 공자 거질이 군대를 이끌고 허나라를 공격하였다.
가을, 숙손교여가 군대를 이끌고 극(棘)을 포위하였다.
겨울, 중손멸과 숙손교여가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침공하였다.
3년, 봄, 제후들이 정나라를 공격하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정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친하니 진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에서 패하고 진나라의 사마 한궐이 붙잡혔다. 진나라 군대가 패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왔고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여름, 공이 진나라로 가니 진후가 한궐을 시켜 노나라에 알리게 하였고, 마침내 진나라 군대와 맹약하였다.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온 것은 즉위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가을, 숙손교여가 군대를 이끌고 극을 포위하였는데, 극을 공격한 연유로 극나라 군대와 맹약하였다.
겨울, 중손멸과 숙손교여가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자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리자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왔으며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
1.4. 성공 4년
4년, 봄, 송공이 화원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여름, 공이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가을,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겨울, 운(鄆)을 성으로 쌓았다.
4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초나라 군주가 공자 영제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서료(舒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초나라 군주의 대부가 노나라로 가고, 노나라 사람들도 초나라로 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노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노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가을,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이는 즉위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겨울, 운을 성으로 쌓았다.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제후들을 공격하자 제후들은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제후들의 땅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
1.5. 성공 5년
5년, 봄, 왕 정월, 기숙희가 돌아왔다. 중손멸이 송나라로 갔다. 여름, 숙손교여가 제나라로 갔다. 가을, 큰물이 났다. 겨울, 계손행보가 진나라로 갔다.
5년, 봄, 진후가 순경을 보내 예방하게 하고 또 맹약을 다시 다지게 하였으며, 위후가 손량부를 보내 예방하게 하고 또 맹약을 다시 다지게 하였다. 계문자가 태사 극을 시켜 대답하게 하니 이를 예로 여겼다. 진나라와 위나라 모두 이를 가상히 여겨 노나라에 보답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자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여름, 숙손교여가 제나라로 가서 제나라와 혼인을 구하니 제후가 허락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이를 죄가 있다고 여겼고 노나라 사람들도 이를 죄가 있다고 여겼기에, 마침내 진나라에 복속하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니 진나라가 강성해졌다.
가을, 큰물이 났는데, 물로 인해 재앙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겨울, 계손행보가 진나라로 갔다. 진후가 조동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진나라의 조동이 제나라로 갔으나 제후가 예로 대하지 않으니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속하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자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
1.6. 성공 6년
6년, 봄, 왕 정월,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2월, 백희가 송나라로 시집갔다.
여름, 6월, 주자(邾子)가 와서 조회하였다.
겨울, 계손행보가 진나라로 갔다.
6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알렸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겨울, 계손행보가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의 순임보가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공격하여 정나라 군대와 맹약하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에 복속하고 혹은 초나라에 복속하면서,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속하였다.
━━━━━━━━━━━━━━━━━━━━━━━━━━━━━━━━━━━━━━
1.7. 성공 7년
7년, 봄, 왕 정월, 鼷(해)쥐가 교제에 쓰는 소의 뿔을 갉아먹었다. 소를 다시 점쳐보았으나 해쥐가 또 뿔을 갉아먹으니 마침내 소를 면제하였다.
여름, 5월, 조백(曹伯)이 와서 조회하였다.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8월, 큰 기우제를 지냈다.
겨울, 큰 기우제를 지냈다. 송나라 군대가 진나라(陳)를 공격하였다.
7년, 봄, 오나라가 담(郯)나라를 공격하니 진나라의 순임보가 군대를 이끌고 담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고,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송나라의 화원이 진나라로 망명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잘 대우하였고, 진나라의 순임보가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가을, 큰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에 비가 오지 않은 것은 물로 인해 재앙이 발생했기 때문이며, 큰 기우제를 지낸 것은 가뭄으로 인해 재앙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
1.8. 성공 8년
8년, 봄, 진후가 한천을 보내 문양의 땅을 말하며, 제나라로 귀속시키게 하였다.
가을, 7월, 천자가 소백을 보내 공에게 명령을 내렸다.
겨울, 10월, 계묘일에 기숙희가 죽었다. 진후가 사섭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다. 공자 구가 진나라로 가서 문양의 땅에 대해 사례하였고, 진나라의 극추가 와서 예방하였다.
8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공격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자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초나라의 영윤 자중이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니 오나라 사람들이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오나라 군대도 또한 물러났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혹은 초나라에 복속하고 혹은 오나라에 복속하면서,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속하였다.
가을, 천자가 소백을 보내 노나라 공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주나라 왕이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속하도록 하였기에 명령을 내린 것이다.
겨울,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에 복속하고 혹은 초나라에 복속하면서,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속하였다.
━━━━━━━━━━━━━━━━━━━━━━━━━━━━━━━━━━━━━━
1.9. 성공 9년
9년, 봄, 왕 정월, 기백(杞伯)이 와서 숙희의 상례를 맞이하여 돌아갔다.
여름, 계손행보가 송나라로 갔다. 겨울, 진나라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왔다.
9년, 봄, 기백이 와서 숙희의 상례를 맞이하여 돌아갔는데, 기백이 노나라와 혼인을 구하자 노나라 사람이 허락하였고, 상을 당하자 와서 맞이하여 돌아간 것이니 예에 맞는 일이다.
여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계손행보가 송나라로 가서 진나라와 초나라의 일을 도모하였다.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자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겨울, 진나라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온 것은 백희가 송나라로 시집갔기 때문이다.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예가 있다고 여겼고 노나라 사람들도 이를 예가 있다고 여겼기에 마침내 진나라에 복속하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니 진나라가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
1.10. 성공 10년
10년, 봄, 위후의 동생 흑배가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침공하였다.
여름, 4월, 다섯 번 점을 쳤으나 교제에 따르지 않으니, 마침내 교제를 지내지 않았다.
가을, 공이 진나라로 갔다. 겨울,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10년, 봄, 진후에게 병이 있어 진나라 군주가 의원 완을 시켜 치료하게 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았다. 공이 꿈에 병이 두 아이로 변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은 훌륭한 의원이니 나를 다치게 할까 두렵다. 어디로 피할까?" 하니, 그중 하나가 말하기를, "가슴 위와 가로막 아래에 거처하면 그가 우리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의원이 이르자 말하기를,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가슴 위와 가로막 아래에 있어서 공격할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으며, 약도 미치지 못하니 치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훌륭한 의원이다"라고 하며 후하게 예물을 주어 돌려보냈다.
6월, 병오일에 진후가 보리를 먹고 싶어 하여 전인에게 보리를 바치게 하였는데, 궤인이 이를 조리하게 하였다. 상전의 무당을 불러 보이게 하니 죽였고, 식사하려 할 때 배가 불러 화장실로 갔다가 빠져서 죽었다. 소신 중에 아침에 진후를 업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진후를 화장실에서 업고 나왔다는 꿈을 꾼 자가 있었기에, 마침내 그를 순장하였다.
진후는 꿈에 큰 귀신이 머리를 풀어헤쳐 땅에 닿고 가슴을 치며 뛰면서 말하기를, "내 손자를 죽였으니 불의하다. 내가 황제에게 청하였다"라고 하였다. 큰 대문과 침실 문을 부수고 들어오니 공이 두려워 방으로 들어갔고, 또 문을 부수자 공이 깨어났다. 상전의 무당을 부르니 무당이 꿈과 같이 말하였고, 공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새로 나온 곡식을 먹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병이 깊어져 진나라에 의원을 구하였고 진나라 군주가 의원 완을 시켜 치료하게 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진후가 죽으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고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
1.11. 성공 11년
11년, 봄, 왕 3월,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고, 진나라의 극추가 와서 예방하였으며, 극추와 맹약하였다.
여름, 공이 윤자, 진후, 제나라 국좌, 주나라 사람과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의 공자 언과 공자 발이 진나라로 망명하였다.
가을, 겨울, 진나라 군주가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11년, 봄, 진나라의 극추가 한천을 시켜 문양의 땅을 요구하였으나 노나라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봄에 진나라의 극추가 와서 예방하고 맹약하였는데, 이는 초나라를 공격할 것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여름, 공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는 정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리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왔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진나라 군주가 진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 군대가 패하였고 진나라 사람들은 진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고 진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나라는 약해지고 진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에 복속하고 혹은 진나라에 복속하면서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속하였다.
━━━━━━━━━━━━━━━━━━━━━━━━━━━━━━━━━━━━━━
1.12. 성공 12년
12년, 봄, 제경공을 장사 지냈다.
여름, 공이 진후, 위후와 쇄택에서 회합하였다.
가을, 8월, 제후들의 군대로 허나라를 공격하였다. 겨울, 진나라가 육군을 만들었다.
12년, 여름, 공이 진후, 위후와 쇄택에서 회합하였는데, 이는 초나라를 공격할 것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제후들이 허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는 허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허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리자 초나라 군대가 허나라에 들어왔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허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허나라를 공격하자 허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허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겨울, 진나라가 육군을 만들었다. 진나라가 육군으로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
1.13. 성공 13년
13년, 봄, 왕 정월, 공이 경사(주나라 수도)로 갔고, 3월, 공이 경사에서 돌아왔다.
여름, 5월, 공이 진후, 제후, 송공, 위후, 정백, 조백, 주나라 사람, 등나라 사람과 회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5월 정해일에 진나라 군대가 제후들의 군대와 함께 진나라 군대와 마수에서 싸웠는데, 진나라 군대가 패배하였고 진나라의 장수 적유미를 붙잡았다.
가을, 7월, 공이 진나라 공격을 마치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13년, 봄, 진후가 여상을 시켜 진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하니, 마침내 진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에 성의를 구하며 제후들에게 고하여 진나라의 죄를 밝혔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진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 군대를 패배시키고 진나라 군대와 맹약하였으며,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에 복속하고 혹은 초나라에 복속하면서,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속하였다.
여름, 공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패배시키고 진나라 군대와 맹약하였으며,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
1.14. 성공 14년
14년, 봄, 왕 정월, 거자 주가 그 군주 밀주를 시해하였다.
여름, 위나라의 손임보가 진나라로부터 위나라로 돌아오니, 위나라 사람들이 손임보를 척(戚)으로 들여보내 반란을 일으켰다.
가을, 숙손교여가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겨울, 계손행보가 진나라로 갔다.
14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위나라의 손임보가 진나라로부터 위나라로 돌아오니, 위나라 사람들이 손임보를 척으로 들여보내 반란을 일으켰다. 위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알리자 진나라 군대가 위나라를 공격하였고 위나라 사람들은 진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숙손교여가 제나라로 망명한 것은 그에게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겼고 진나라 사람들도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겼기에 마침내 진나라에 복속하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니 진나라가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
1.15. 성공 15년
15년, 봄, 왕 2월, 위목공을 장사 지냈다.
3월, 을사일에 중손멸이 종리에서 오나라와 회합하였다.
여름, 6월, 송공 고가 죽었다. 제후가 최저를 보내 공을 조문하였다.
가을, 8월, 송나라, 형나라, 을사일에 송공공을 장사 지냈다.
겨울, 11월, 숙손교여가 진나라의 사섭, 제나라의 고무구, 송나라의 화원, 위나라의 손임보, 정나라의 공자 추, 주나라 사람과 함께 종리에서 오나라와 회합하였다.
15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송공이 죽으니 송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알렸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가을,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니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
1.16. 성공 16년
16년, 봄, 왕 정월, 비가 왔고 나무에 얼음이 얼었다.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여름, 4월, 신미일에 등자(滕子)가 죽었다.
5월, 진나라 군대와 정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공이 윤무공, 진후, 제나라 국좌, 주나라 사람과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6월, 갑오일 그믐에 진후와 초나라 군주, 정백이 언릉에서 싸웠는데, 초나라 군대가 패배하였고 초나라 군주는 눈을 다쳤다.
가을, 공이 회합에서 돌아왔다.
겨울, 등령공을 장사 지냈다. 진후가 제후들을 일으켰다.
16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진나라 군대와 정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공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여 언릉에 이르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왔으며,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패배시키고 초나라 군주는 눈을 다쳤으며 초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가 언릉에 이르니 초나라 군주가 다쳤고 초나라 군대가 패배하였으며, 진나라가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
1.17. 성공 17년
17년, 봄, 위나라 북궁괄이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침공하였다.
여름, 공이 윤자, 단자, 진후, 제후, 송공, 위후, 조백, 주나라 사람과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가을, 공이 정나라 공격을 마치고 돌아왔다. 진나라 사람이 계손행보를 붙잡아 조구에 가두었다. 진나라가 세 괵씨인 괵추, 괵기, 괵지를 죽였다. 난서가 그 군주를 죽이니 진나라가 여공을 시해하였다. 진후 표가 죽고, 갑오일에 진후 유가 죽었다.
겨울, 제령공을 장사 지냈다.
17년, 봄, 진후가 극추를 보내 예방하게 하고 또 정나라를 공격할 것을 알렸다. 진나라의 극추와 위나라의 북궁괄이 정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이는 정나라가 진나라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리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왔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공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는 정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진나라 사람이 계손행보를 붙잡은 것은 그가 진나라에 복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세 괵씨를 죽이고 난서가 여공을 죽였으며 진후가 죽었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
1.18. 성공 18년
18년, 봄, 왕 정월, 진나라가 그 대부 서동을 죽였다.
경신일에 진나라가 그 군주 주포를 시해하였다.
공이 진나라로 갔다. 진후가 난규를 보내 수레를 요구하였다.
여름, 초나라 군주와 정백이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공이 진후, 제후, 위후와 회합하여 송나라를 구원하였다. 8월, 무술일에 허등에서 동맹을 맺었다.
가을,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겨울, 초나라 공자 영제가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11월, 공이 노침에서 죽었다.
18년, 봄, 진나라가 서동을 죽이고 여공을 시해하였으며 진후가 죽으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진도공이 즉위하고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로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공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송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는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으며,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초나라 군대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가을, 진도공이 제후들의 군대로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초나라는 약해졌다. 초나라 군주가 노하여 진나라(陳)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도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겨울, 공이 노침에서 죽으니 편안히 영면한 것이다. 제후들이 모두 왔는데, 그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성공이 죽으니 노나라 군대는 물러나고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속하였으며 초나라는 강성해졌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춘추좌씨전 — 양공 (襄公)
━━━━━━━━━━━━━━━━━━━━━━━━━━━━━━━━━━━━━━
1.1. 양공 원년
원년 봄, 왕 정월에 공이 즉위하였다.
중손멸이 진나라 난영, 송나라 화원, 위나라 영식, 그리고 조나라, 거나라, 주나라, 등나라, 설나라 사람들과 척(戚)에서 만나, 호뢰(虎牢)에 성을 쌓았다.
여름, 진(晉)나라 한궐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공이 진후, 송공, 위후, 조백, 제나라 세자 광, 거자, 주자, 등자, 설백, 기백, 소주자, 그리고 정나라 공자 사와 계택(雞澤)에서 회맹하였다.
진(陳)후가 원교를 보내 회합에 참여하게 하였다.
가을, 공이 회합을 마치고 돌아왔다.
초나라 공자 수가 군대를 거느리고 진(陳)나라를 정벌하였다.
송나라 공공을 장례 지냈다.
겨울, 위후가 공손표를 보내와 예방하였고, 진후가 순잉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원년 봄, 진(晉) 도공이 즉위하여 육군을 창설하고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정나라 대부 두극과 두백비가 모두 초나라에 알리니,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왔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다시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 군대와 맹약하니, 정나라는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니 초자가 노하여 진(陳)나라에 들어갔고,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에 복종하고 혹은 초나라에 복종하여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해 복종하였다.
가을, 초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진(晉)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 사람이 진(晉)나라에 알리자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陳)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정벌하자 진(陳)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진(陳)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2. 양공 2년
2년 봄, 정나라 군대가 위나라 목(牧)을 침범하고, 이어서 진(晉)나라를 침범하여 호뢰에 성을 쌓았다.
여름, 진후가 순잉을 보내와 예방하였고,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진후가 사방을 보내와 예방하였고, 숙손표가 진(晉)나라로 갔다.
가을, 7월에 중손멸과 숙손표가 군대를 거느리고 진(陳)나라를 침범하였다.
겨울, 중손멸이 진(晉)나라로 갔다.
2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공이 진(晉)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함으로 인해 작위를 내려주었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노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리자 초나라 군대가 진(陳)나라에 들어왔고, 노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陳)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정벌하자 진(陳)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진(陳)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3. 양공 3년
3년 봄, 초나라 공자 영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중손멸이 군대를 거느리고 방성(方城)을 침범하였다.
가을,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겨울,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3년 봄, 초나라 군대가 오나라를 정벌하자 오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오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혹은 초나라에 복종하고 혹은 오나라에 복종하여,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해 복종하였다.
여름, 노나라 군대가 방성을 침범하였는데, 방성은 초나라의 읍이다. 노나라 군대가 이를 침범한 것은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초나라 군대는 물러났고 노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공이 진(晉)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함으로 인해 작위를 내려주었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4. 양공 4년
4년 봄, 3월 갑자일에 초하루였는데, 일식이 있었다. 개기일식이었다.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여름, 숙손표가 진(晉)나라로 갔다.
가을, 7월 무자일에 부인 사씨가 돌아가셨다.
겨울,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4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숙손표가 진(晉)나라로 갔고, 진후가 사방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5. 양공 5년
5년 봄,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중손멸과 위나라 손림보가 선도(善道)에서 오나라와 만났다.
여름, 계손행보가 진(晉)나라로 갔다.
숙손표가 경사(京師, 주나라 수도)로 갔다.
가을, 8월 정해일에 척(戚)에서 동맹하였다. 진후가 제후들을 불러 모았는데, 이는 신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겨울,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5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이 혹은 진나라에 복종하고 혹은 초나라에 복종하여,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해 복종하였다.
여름, 계손행보가 진(晉)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함으로 인해 작위를 내려주었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자가 노하여 진(陳)나라에 들어갔고,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제후들이 척(戚)에서 맹약하였다. 진후가 제후들을 불러 모아 초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니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갔고,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6. 양공 6년
6년 봄,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초나라 공자 정이 오나라를 정벌하였고, 거나라 사람이 鄫(증)나라를 멸하였다. 중손멸이 기(杞)나라로 갔다. 여름, 송나라 화약이 망명해 왔다. 송나라 사마 화손이 있었다. 가을, 7월. 겨울, 숙손표가 정나라로 갔다.
6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송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陳)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정벌하자 진(陳)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진(陳)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거나라 사람이 증(鄫)나라를 멸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노나라 군대가 거나라를 정벌하자 거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거나라에 들어오니 노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거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거나라를 정벌하자 거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거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7. 양공 7년
7년 봄, 왕 정월에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여름, 4월에 세 번 교제(郊祭)를 점쳤으나 따르지 않아 희생(제물)을 면하였다. 비(費)에 성을 쌓았다. 가을, 8월에 메뚜기가 나타났다. 겨울, 10월에 자숙 성백이 돌아가셨다. 11월에 중손멸이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 팽성(彭城)을 포위하였고, 진나라 순잉이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구원하였다.
7년 봄, 정나라 자한이 초나라로 망명하였다. 정나라 군대가 초나라에 들어오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왔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정벌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졌다.
겨울, 노나라 군대가 송나라 팽성을 포위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니 노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송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자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8. 양공 8년
8년 봄, 왕 정월에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2월에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정나라 공손첩이 군대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초나라 공자 정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였고, 진나라 사방이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공이 진후, 송공, 위후, 조백, 거자, 주자, 제나라 세자 광, 등자, 설백, 기백, 소주자를 만나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 큰 비와 눈이 내렸다. 진나라 순잉이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의 읍을 취하였다. 정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공이 정나라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다.
8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공이 제후들과 만나 정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9. 양공 9년
9년 봄,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여름, 계손행보가 진(晉)나라로 갔다. 4월에 정나라 백 페이가 돌아가셨다. 정나라 백이 도망쳐 돌아가 회맹하지 않았다. 가을, 7월. 겨울, 공이 진후, 송공, 위후, 조백, 제나라 세자 광, 거자, 주자, 등자, 설백, 기백, 소주자를 만나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공이 정나라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다.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9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계손행보가 진(晉)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함으로 인해 작위를 내려주었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겨울, 공이 제후들과 만나 정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10. 양공 10년
10년 봄, 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제나라 사람이 우리 북쪽 변방을 정벌하였다. 갑오일에 위나라 손림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서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여름, 5월 갑자일에 지진이 일어났다. 계손행보와 숙손표가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 외성(西郛)에 성을 쌓았다. 가을, 거나라 사람이 우리 동쪽 변방을 정벌하였다. 계손행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거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 숙손표가 진(晉)나라로 갔다.
10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에 복종하고 혹은 초나라에 복종하여,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해 복종하였다.
━━━━━━━━━━━━━━━━━━━━━━━━━━━━━━━━━━━━━━
1.11. 양공 11년
11년 봄, 왕 3월에 공이 진후, 송공, 위후, 조백, 제나라 세자 광, 거자, 주자, 등자, 설백, 기백, 소주자를 만나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4월에 정나라 백 곤완이 진(晉)나라로 가서 진후와 맹약하였다. 신해일에 적천(翟泉)에서 맹약하였다. 가을, 7월에 박성(亳城) 북쪽에서 동맹하였으니, 정나라가 복종했기 때문이다. 겨울, 진나라 순언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어서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정나라가 초나라를 따른 것에 대해 그 이중성을 토벌한 것이다. 채후와 허남이 초나라를 따르니 진나라가 그들을 패배시켰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11년 봄, 공이 제후들과 만나 정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초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정나라 백이 진(晉)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정나라에 복종함으로 인해 맹약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자가 노하여 진(陳)나라에 들어갔고,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陳)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가을, 제후들이 박(亳)에서 맹약하였다. 진후가 제후들을 불러 모아 초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겨울,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
1.12. 양공 12년
12년, 봄, 왕 정월. 거(莒)나라 자(子)가 왔다. 여름, 노나라가 은(鄆) 땅을 청구하였고, 가을, 7월에 진나라 도공이 제후들을 불러 모아 맹약을 닦으며 말하기를 "신의가 있으면 돌아가라" 하였다. 진나라 도공 시기에 진나라는 강성하고 초나라는 약하여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
1.13. 양공 13년
13년, 봄, 진나라 순영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진나라 순영이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7월, 겨울, 진나라 난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노나라 군주를 불러 모아 맹약하였다.
━━━━━━━━━━━━━━━━━━━━━━━━━━━━━━━━━━━━━━
1.14. 양공 14년
14년, 봄, 오(吳)나라가 비(費)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4월, 기묘일에 위(衛)나라 손림보가 위나라로 귀국하여 위나라 사람들이 손림보를 척(戚) 땅으로 들여보내 반란을 일으켰다. 가을, 진나라 순언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진(秦)나라의 읍을 취하니 진(秦)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진나라는 강성해져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
1.15. 양공 15년
15년, 봄,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여름, 6월, 진후가 난영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여 신(申)을 취하니 초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진나라는 강성해져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가을, 8월, 정월이다. 겨울, 11월, 을묘일에 진(陳)나라 후(侯)가 돌아가셨다. 진후가 사(士)를 보내 그 아들을 세웠다.
━━━━━━━━━━━━━━━━━━━━━━━━━━━━━━━━━━━━━━
1.16. 양공 16년
16년, 봄, 왕 정월, 공이 초나라로 갔다. 여름, 4월에 공이 돌아왔다. 가을, 8월, 정월에 위나라 손림보가 위나라 군주를 내쫓았다. 겨울, 10월에 진(晉)나라 순영이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쳤다.
━━━━━━━━━━━━━━━━━━━━━━━━━━━━━━━━━━━━━━
1.17. 양공 17년
17년, 봄, 제나라가 노나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여름, 위나라 석만고가 제나라 고무평에게 군대를 빌려 위나라로 돌아가려다 실패하였다. 가을, 5월 갑신일에 땅이 흔들렸다. 겨울, 초나라 공자 정이 군대를 거느리고 오(吳)나라를 정벌하였다.
━━━━━━━━━━━━━━━━━━━━━━━━━━━━━━━━━━━━━━
1.18. 양공 18년
18년, 봄, 왕 정월이다. 여름, 진(晉)나라 사위(士魏)가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노나라 군대와 합류하였다. 겨울, 제나라 후작이 죽었다. 이에 앞서 진나라 도공이 제후들의 군대로 제나라를 쳤는데, 제 장공이 전사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제후들에게 화친을 청하였다.
━━━━━━━━━━━━━━━━━━━━━━━━━━━━━━━━━━━━━━
1.19. 양공 19년
19년, 봄, 왕 정월이다. 오(吳)나라 자(子) 수몽(壽夢)이 처음 돌아가시자 여러 아들들이 다투어 세워졌다. 여름, 4월, 진(晉)나라 사위가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정벌하니 오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가을, 9월, 정나라가 허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 제후들이 공자 광(光)을 세워 제나라 군주로 삼으니, 이가 경공(景公)이다.
━━━━━━━━━━━━━━━━━━━━━━━━━━━━━━━━━━━━━━
1.20. 양공 20년
20년, 봄, 왕 정월이다. 진(晉)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으며,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져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여름, 6월, 庚申일에 진(晉)나라 도공이 돌아가셨다. 가을, 8월, 己未일에 노나라 소군(小君)인 頃熊을 장사 지냈다. 겨울, 1월이다.
━━━━━━━━━━━━━━━━━━━━━━━━━━━━━━━━━━━━━━
1.21. 양공 21년
21년, 봄, 왕 정월이다. 정나라 자산(子産)이 구부(丘賦)를 지어 정나라 정치를 강하게 하니 정나라는 강성해졌다. 여름,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가을, 제나라 최저(崔杼)가 그 군주 장공(莊公)을 시해하니,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정벌하였고 제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겨울, 제후들이 공자 저구(저丘)를 세워 제나라 군주로 삼으니, 이가 경공이다.
━━━━━━━━━━━━━━━━━━━━━━━━━━━━━━━━━━━━━━
1.22. 양공 22년
22년, 봄, 왕 정월이다. 진(晉)나라 평공이 즉위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4월, 壬戌일에 진(陳)나라 후(侯) 오(午)가 돌아가셨다. 가을, 7월, 겨울, 1월이다.
━━━━━━━━━━━━━━━━━━━━━━━━━━━━━━━━━━━━━━
1.23. 양공 23년
23년, 봄, 왕 정월이다. 진(晉)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초자(楚子)가 노하여 정나라에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겨울, 11월, 갑자일에 진(晉)나라 제후 언이 돌아가셨다.
━━━━━━━━━━━━━━━━━━━━━━━━━━━━━━━━━━━━━━
1.24. 양공 24년
24년, 봄, 왕 정월이다. 진(晉)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에 복종하고 혹은 초나라에 복종하여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해 복종하였다. 여름, 叔孫豹가 진(晉)나라로 갔다. 가을, 7월, 甲子일에 노나라 소군(小君) 齊歸가 돌아가셨다. 겨울, 叔孫豹가 초나라로 갔다.
━━━━━━━━━━━━━━━━━━━━━━━━━━━━━━━━━━━━━━
1.25. 양공 25년
25년, 봄, 왕 정월이다. 제후들이 미병(弭兵, 전쟁을 멈춤)하였다. 송나라 향술(向戌)이 진나라 조무(趙武), 초나라 굴건(屈建) 및 제후들의 대부들과 만나 송나라에서 전쟁을 멈추기로 하니, 진나라와 초나라가 함께 패권을 잡고 제후들은 혹은 진나라를 조회하고 혹은 초나라를 조회하였으며, 진나라와 초나라의 다툼은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다. 여름, 5월, 乙亥일에 齊나라 崔杼가 그 군주를 시해하였다. 가을, 8월, 己卯일에 제나라 제후 광이 즉위하였다. 겨울, 仲孫蔑이 정나라로 갔다.
━━━━━━━━━━━━━━━━━━━━━━━━━━━━━━━━━━━━━━
1.26. 양공 26년
26년, 봄, 왕 정월이다. 공이 초나라로 가니 초자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함으로 인해 예우하였고, 공이 진(晉)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함으로 인해 작위를 내려주었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와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와 초나라가 함께 패권을 잡아 제후들이 모두 편안하였다. 여름, 위(衛)나라 손림보가 진(晉)나라로부터 위나라로 돌아가니 위나라 사람들이 손림보를 척(戚) 땅으로 들여보내 반란을 일으켰다. 가을, 공이 진(晉)나라로부터 돌아왔다. 겨울, 叔孫豹가 정나라로 갔다.
━━━━━━━━━━━━━━━━━━━━━━━━━━━━━━━━━━━━━━
1.27. 양공 27년
27년, 봄, 왕 정월이다. 정나라 자산(子産)이 정나라 재상이 되니 정나라 군대가 강성해져 제후들이 모두 자산을 알게 되었다. 여름, 叔孫豹가 진(晉)나라로 갔다. 가을, 7월, 戊子일에 노나라 소군(小君) 定姒가 돌아가셨다. 겨울, 十一月, 乙亥일에 蔡나라 제후 固가 돌아가셨다.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十二月, 公이 진(晉)나라로부터 돌아왔다.
━━━━━━━━━━━━━━━━━━━━━━━━━━━━━━━━━━━━━━
1.28. 양공 28년
28년, 봄, 왕 정월이다. 진(晉)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성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져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여름, 4월에 제나라 자(子)가 노나라에 왔다. 가을, 7월, 甲戌일에 齊나라 제후 環이 돌아가셨다. 겨울,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
1.29. 양공 29년
29년, 봄, 왕 정월이다. 오나라 공자 계찰(季札)이 노나라를 방문하여 악(樂)을 청하여 관람하였는데, 시(詩), 악(樂), 무(舞)를 두루 살피고 각국 나라의 정치 형세를 논하였다. 여름, 5월에 공자 計가 죽었다.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는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혹은 초나라에 복종하고 혹은 오나라에 복종하여, 모두 강한 자를 선택해 복종하였다. 가을, 9월, 葬蔡景公. 겨울, 十有二月,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
1.30. 양공 30년
30년, 봄, 왕 정월이다. 노나라 군대가 주(邾)나라를 정벌하였다. 여름, 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가을, 8월, 癸未일에 진(陳)나라 제후 溺이 돌아가셨다. 겨울, 진(晉)나라 군대와 나머지 제후들의 군대가 정나라를 포위하였다.
━━━━━━━━━━━━━━━━━━━━━━━━━━━━━━━━━━━━━━
1.31. 양공 31년
31년, 봄, 왕 정월이다. 공이 노침(路寢)에서 돌아가셨으니, 곧 평안히 잠드신 것이다. 제후들이 모두 왔는데, 이는 그들의 복종함 때문이다. 양공이 돌아가시자 노나라 군대는 물러났고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으니,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제나라 군대 또한 강성해졌다.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세 나라가 강성해지니, 천하에 크게 어지러울 조짐이 비로소 나타났다.
━━━━━━━━━━━━━━━━━━━━━━━━━━━━━━━━━━━━━━
춘추좌씨전 — 소공 (昭公)
━━━━━━━━━━━━━━━━━━━━━━━━━━━━━━━━━━━━━━
1.1. 소공 원년
원년, 봄, 왕 정월, 공이 즉위하였다.
숙손표, 진 순영, 제 고지, 송 향술, 위 녕악, 정 한호, 조나라 사람, 거나라 사람, 주나라 사람, 등나라 사람, 설나라 사람, 기나라 사람, 소주나라 사람이 괵에서 회합하였다.
3월, 팽을 취하였다.
여름, 진백의 동생 침이 진나라로 망명하였다.
가을, 거 저구공이 와서 귀순하였다.
겨울, 숙손표가 진나라로 갔다.
원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다시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들이 초나라에 고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였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이 괵에서 회합하였을 때 진후가 제후들을 불러 모아 초나라 정벌을 도모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는데, 초자가 노하여 진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진나라나 초나라 중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종하였다.
━━━━━━━━━━━━━━━━━━━━━━━━━━━━━━━━━━━━━━
1.2. 소공 2년
2년, 봄, 진후가 한기를 보내 예방하였다. 여름, 숙궁이 진나라로 갔다. 가을, 정 양소와 태재 석이 초나라로 갔다. 겨울, 12월, 진 경공을 장사 지냈다.
2년, 봄, 진후가 한기를 보내 예방하게 하여 초나라 정벌을 도모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는데,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숙궁이 진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하도록 만들었으므로 상을 내리고 명을 내렸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는데, 초자가 노하여 진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
1.3. 소공 3년
3년, 봄, 왕 정월, 정미일에 등자 천이 졸하였다. 여름, 숙궁이 등나라로 갔다. 가을, 소주자가 와서 조회하였다. 8월,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겨울, 우박이 크게 내렸다.
3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들이 초나라에 고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였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여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진 평공은 내총이 많았고 정치가 여러 곳에서 나와 진나라는 약해지고 초나라와 제나라, 오나라가 강해져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제 경공이 즉위하고 안영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안영이 제 경공의 정사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를, "덕과 형벌, 정사와 예법을 바꾸지 아니하면 대적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안영의 말을 제후들이 모두 알았고, 안영이 정치를 잘하여 제나라는 이로써 강해졌다.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에 안영이 있음을 알았고 제나라는 강해졌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는 가운데 제나라 군대 또한 강하니 제후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천하에 세 개의 강국이 있으니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였는데, 오나라 군대 또한 일어나니 천하의 형세가 장차 크게 변할 것이었다.
━━━━━━━━━━━━━━━━━━━━━━━━━━━━━━━━━━━━━━
1.4. 소공 4년
4년, 봄, 왕 정월, 눈이 크게 내렸다. 여름, 초 공자 기질이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7월. 겨울, 12월, 을묘일에 숙손표가 졸하였다.
4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는데,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진나라나 초나라 중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종하였다.
여름, 초나라 군대가 오나라를 정벌하니 오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초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고 초나라 군대는 퇴각하였으며, 초나라는 약해지고 오나라는 강해지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
1.5. 소공 5년
5년, 봄, 공이 진나라로 갔다. 여름, 4월, 경진일에 천왕이 붕어하였다. 가을, 공이 진나라로부터 돌아왔다. 8월,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겨울, 10월, 초 공자 기질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포위하였다. 11월, 기유일에 고중자의 사당을 검사하고 처음으로 육우를 올렸다.
5년, 봄, 공이 진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하도록 만들었으므로 상을 내리고 명을 내렸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는데, 초자가 노하여 진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천왕이 붕어하니 제후들이 모두 왔는데, 그 복종하는 바에 따른 것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곡을 하니 천하가 슬퍼하였고, 주나라 왕실은 쇠락하였으며,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가 대란에 빠질 조짐이 모두 이때에 있었다.
━━━━━━━━━━━━━━━━━━━━━━━━━━━━━━━━━━━━━━
1.6. 소공 6년
6년, 봄, 왕 정월, 기백 익고가 졸하였다. 여름, 계손 의여가 진나라로 갔다. 가을, 기 문공을 장사 지냈다. 겨울, 숙궁이 초나라로 갔다.
6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다시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들이 초나라에 고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였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정나라 자산이 형서를 짓고 형정을 주조하였다. 진나라 숙향이 자산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처음에는 그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으나 지금은 끝났소. 예전의 선왕들은 일을 의논하여 제도를 만들었지, 형벌의 법을 만들지 않았소. 백성들이 다투는 마음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금지할 수 없을까 하였기 때문에, 의로움으로 막고 정치로 바로잡으며 예절로 행하고 신의로 지키며 인으로 받들었소. 녹위(관직과 지위)를 만들어 그 따름을 권장하고 엄격한 형벌로 그 음란함을 위협하였소. 이것으로도 부족할까 두려워하여 충성으로 가르치고 행실로 북돋우며 힘쓰도록 가르치고 화합하게 하였으며, 공경함으로 임하고 강함으로 다스리며 굳건함으로 결단하였소. 그러고도 성스러운 현인과 밝게 살피는 관리, 충신한 우두머리, 자애로운 스승을 구하였으니, 백성들은 비로소 임무를 맡길 만하여 재앙과 난리를 일으키지 않았소. 백성들이 법이 있음을 알게 되면 윗사람을 꺼리지 않게 되고, 서로 다투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글에 근거하여 요행을 구하게 되니, 이는 할 수 없는 일이오. 하나라에 정사가 어지러울 때 우형을 만들었고, 상나라에 정사가 어지러울 때 탕형을 만들었으며, 주나라에 정사가 어지러울 때 구형을 만들었소. 세 가지 법이 일어난 것은 모두 세상이 혼란해진 때였소. 지금 그대가 정나라의 재상이 되어 봉혈(경계와 수로)을 짓고 비방하는 정치를 세우며 참벽을 만들고 형서를 주조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려 하니, 또한 어렵지 않겠소? 시경에 '문왕의 덕을 법도로 삼으면 사방이 편안해지리라' 하였고, 또 '문왕을 법도로 삼으면 온 나라가 믿으리라'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무슨 법이 필요하겠소? 백성들이 다툼의 단서를 알게 되면 예절을 버리고 글에 근거하게 되어, 아주 사소한 일까지 모두 다투게 될 것이오. 어지러운 옥사가 많아지고 뇌물이 성행할 것이니, 그대의 대가 끝날 때쯤 정나라는 망하지 않겠소? 내가 듣기로 공손흑이 어찌 그러하겠소? 나는 늙었으니 옳고 그름을 논할 처지가 아니오."라고 하였다. 자산이 답장을 보내 말하기를, "그대와 같은 말씀이라면, 교는 재주가 부족하여 자손에게 미칠 수 없소. 나는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오. 명을 받들지 못하였으나, 어찌 큰 은혜를 잊겠소."라고 하였다.
━━━━━━━━━━━━━━━━━━━━━━━━━━━━━━━━━━━━━━
1.7. 소공 7년
7년, 봄, 왕 정월, 제나라와 화평하였다. 2월, 숙손사가 제나라로 가서 맹약에 임하였다. 3월, 공이 초나라로 갔다. 여름, 4월, 공이 초나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거 모이가 모루와 방지를 가지고 와서 귀순하였다. 겨울, 10월, 채 경공을 장사 지냈다. 공이 진나라로 갔다. 12월, 공이 진나라로부터 돌아왔다.
7년, 봄,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다시 정나라를 정벌하자 정나라 사람들이 초나라에 고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정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였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여름, 공이 초나라로부터 돌아오니 초자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하도록 만들었으므로 예우하였다. 진나라가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는데,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진나라나 초나라 중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종하였다.
━━━━━━━━━━━━━━━━━━━━━━━━━━━━━━━━━━━━━━
1.8. 소공 8년
8년, 봄, 진후의 동생 초가 진 세자 언사를 죽였다. 여름, 초나라 사람이 진 행인 간정사를 붙잡아 죽였다. 4월, 진후 익이 졸하였다.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침범하였다. 가을, 홍에서 사열하였다. 8월, 천자가 유정공을 보내 영에서 조맹을 위로하였다. 겨울, 11월,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진 공자 초를 붙잡아 월나라로 추방하였다. 기록하기를, "초자가 진나라를 멸하였다."라 하였는데, 이는 초나라가 스스로 취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8년, 여름,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가 진나라에 고하자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니 진나라는 망하였으며 초나라는 강해졌고,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천하의 형세는 초나라가 강하여 합병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를 두려워하였다.
초 공자 기질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나라로 들어가니 초자가 진나라로 들어가 진 공자 초를 죽여 제후들에게 사죄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멸망시켜 진나라는 망하고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9. 소공 9년
9년, 봄, 숙궁이 진나라로 갔다. 여름, 4월, 무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숙손약이 경사로 갔다. 가을, 7월. 겨울, 중손궐이 군대를 거느리고 거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가 선우를 정벌하였다.
9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여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초자가 노하여 진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오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천하의 삼강(세 개의 강국)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진나라 군대가 선우를 정벌하였다. 선우는 북방의 융이었는데 진나라 군대가 그들을 패배시켰다.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고,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는 강해져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천하가 대란에 빠질 조짐이 모두 이때에 있었다.
━━━━━━━━━━━━━━━━━━━━━━━━━━━━━━━━━━━━━━
1.10. 소공 10년
10년, 봄, 왕 정월, 별이 무녀 자리에 나타났다. 계손 의여, 숙궁, 중손궐이 진나라로 갔다. 여름, 초 공자 기질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7월. 겨울, 채 영공을 장사 지냈다.
10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여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초자가 노하여 진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오나라 군대 또한 강해져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초 공자 기질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나라를 정벌하니 서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서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서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서나라를 정벌하자 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서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였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11. 소공 11년
11년, 초자가 채나라를 멸망시키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채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대가 퇴각하였으며 초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
1.12. 소공 12년
12년, 초나라 영윤 자목과 자석이 모두 졸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진나라 군대 또한 퇴각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진나라나 초나라 중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종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전쟁을 멈추니 오나라 군대는 강해졌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13. 소공 13년
13년, 제 경공이 안영에게 정사를 물으니 안영이 예로써 대답하였다. 안영이 정치를 잘하여 제나라 군대는 강하였고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에 안영이 있음을 알았다. 천하의 사강은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14. 소공 14년
14년, 초 공자 기질이 초 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 평왕으로 즉위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의 혼란을 알게 되었다. 진나라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으며,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고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15. 소공 15년
15년, 초 평왕이 즉위하고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의 혼란을 알게 되었다. 진나라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으며,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고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고, 천하가 대란에 빠질 조짐이 모두 이때에 있었다.
━━━━━━━━━━━━━━━━━━━━━━━━━━━━━━━━━━━━━━
1.16. 소공 16년
16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는데, 초자가 노하여 정나라로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다. 제후들은 진나라나 초나라 중 강한 자를 선택하여 복종하였다.
━━━━━━━━━━━━━━━━━━━━━━━━━━━━━━━━━━━━━━
1.17. 소공 17년
17년, 초 평왕이 진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비무극이 태자 건을 참소하여 해치니 초 평왕이 태자 건을 멀리하였다. 태자 건이 송나라로 망명하고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의 혼란을 알게 되었다. 진나라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으며,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고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18. 소공 18년
18년, 오나라 군대는 강해져 오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오원이 오나라로 망명하니 오나라가 그를 대부로 삼았고, 오나라 군대는 더욱 강해졌다.
━━━━━━━━━━━━━━━━━━━━━━━━━━━━━━━━━━━━━━
1.19. 소공 19년
19년, 노 소공이 정치를 잃으니 계손 의여가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0. 소공 20년
20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오나라에 오원(자서)이 들어가고 손무 또한 들어가니 오나라 군대는 더욱 강해졌다.
━━━━━━━━━━━━━━━━━━━━━━━━━━━━━━━━━━━━━━
1.21. 소공 21년
21년, 노 소공이 진나라로 망명하고 계손 의여가 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오니 노나라 사람들이 계손을 정치를 맡게 하였다. 소공이 정치를 잃고 노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노나라의 혼란을 알게 되었다. 진나라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으며,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고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2. 소공 22년
22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여 초나라의 읍을 취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3. 소공 23년
23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는데, 천하가 대란에 빠질 조짐이 모두 이때에 있었다.
━━━━━━━━━━━━━━━━━━━━━━━━━━━━━━━━━━━━━━
1.24. 소공 24년
24년, 초나라 군대가 오나라를 정벌하니 오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초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오나라 군대는 강하고 초나라 군대는 퇴각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5. 소공 25년
25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6. 소공 26년
26년, 노 소공이 진나라로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하도록 만들었으므로 상을 내리고 명을 내렸다. 노나라 사람들이 계손을 정치를 맡게 하니 소공은 돌아가지 못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으며,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고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7. 소공 27년
27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니 노나라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이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
1.28. 소공 28년
28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오나라 군대는 강하고 초나라 군대는 퇴각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9. 소공 29년
29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오나라 군대는 강하고 초나라 군대는 퇴각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정벌하니 월나라가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졌으며, 천하가 대란에 빠질 조짐이 모두 이때에 있었다.
━━━━━━━━━━━━━━━━━━━━━━━━━━━━━━━━━━━━━━
1.30. 소공 30년
30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로 들어가니 오나라 군대가 초 평왕의 무덤을 파헤쳤고, 오자서가 초 평왕의 시신을 채찍질하여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았다. 초나라 군대가 패배하여 초나라는 망하였으나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구원하여 초나라 군대가 나라를 회복하였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31. 소공 31년
31년, 오나라 군대가 영으로 들어가니 초 소왕이 수나라로 망명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니 오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대의 강함을 알게 되었다. 초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고,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천하가 대란에 빠질 조짐이 모두 이때에 있었으며, 노 소공은 정치를 잃은 까닭으로 진나라 땅에서 붕어하여 돌아가지 못하였다.
━━━━━━━━━━━━━━━━━━━━━━━━━━━━━━━━━━━━━━
1.32. 소공 32년
32년, 공이 건후에서 붕어하니 제후들이 오지 않았는데, 정치를 잃은 까닭이었다. 소공이 정치를 잃고 노나라 군대가 퇴각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대는 강하였다. 천하의 삼강은 진나라, 초나라, 오나라였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천하가 대란에 빠졌고, 춘추시대 말세의 조짐이 모두 이때에 있었다.
━━━━━━━━━━━━━━━━━━━━━━━━━━━━━━━━━━━━━━
춘추좌씨전 — 정공 (定公)
━━━━━━━━━━━━━━━━━━━━━━━━━━━━━━━━━━━━━━
1.1. 정공 원년
원년 봄, 왕 정월에 공께서 즉위하셨다.
초나라 군대가 이(夷)를 정벌하니, 양호가 보배로운 옥과 큰 활을 바쳤다.
여름 6월, 계해일에 공의 상여가 건후에서 돌아왔다.
무진일에 공께서 즉위하셨다.
가을, 초나라 사람이 채나라를 에워쌌다.
소공을 장사 지냈다.
겨울, 중손하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邾)를 정벌하여 곽 동쪽의 밭과 기 서쪽의 밭을 취하였다.
원년 봄, 진(晉)나라 위만다가 군대를 거느리고 위(衛)나라를 침범하였다. 양호가 보배로운 옥과 큰 활을 바치고 소공의 상여를 건후에서부터 모시고 오니, 노나라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공께서 즉위하시고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였다. 오나라 군대 또한 강하여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니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양호가 노나라에서 총애를 받자 양호는 계손씨를 모두 쫓아내고 노나라의 정치를 전횡하려 하였다. 삼환이 두려워하여 계손의여, 숙손주구, 중손하기가 함께 양호를 공격하니, 양호는 진나라로 달아났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손님으로 대우하였다. 양호가 진나라에 고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강하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노나라 군대는 약했는데, 이는 그 나라에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
1.2. 정공 2년
2년 봄, 왕 정월에 진나라 군대가 선우를 정벌하였다.
여름, 진나라 군대가 선우를 정벌하였다.
가을 7월.
겨울, 중손하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침범하였다. 공께서 위나라 침범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2년 봄, 진나라 군대가 선우를 정벌하였다. 선우는 북쪽의 융족인데 진나라 군대가 그들을 패배시켰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오나라의 오원과 손무가 모두 장수가 되니 오나라 군대는 더욱 강해졌다.
여름, 진나라 군대가 선우를 정벌하고 돌아갔다.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고,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질 징조가 모두 이때에 나타났다.
━━━━━━━━━━━━━━━━━━━━━━━━━━━━━━━━━━━━━━
1.3. 정공 3년
3년 봄, 왕 정월에 공께서 진나라로 가셨다가 강에 이르러 돌아오셨다.
주나라 자작이 조회하러 왔다.
2월 신묘일에 주나라 자작 천이 죽었다.
여름 4월 임술일에 정나라 백작 가가 죽었다.
정나라 정공을 장사 지냈다.
가을, 주나라 장공을 장사 지냈다.
겨울, 중손하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3년 봄, 공께서 진나라로 가셨다가 강에 이르러 돌아오셨는데, 양호의 일을 진나라에 고하였기 때문이다.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 명을 내렸다. 진나라는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 자작이 노하여 곧 진(陳)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겨울, 노나라 군대가 주나라를 정벌하니 주나라가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주나라에 들어오자 노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주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주나라를 정벌하니 주나라 사람들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주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4. 정공 4년
4년 봄, 왕 2월 계사일에 진나라 후작 오가 죽었다.
3월, 공께서 유자, 진후, 송공, 채후, 위후, 진(陳)자, 정백, 허남, 조백, 거자, 주자, 돈자, 호자, 등자, 설백, 기백, 소주자와 함께 제나라 국하를 소릉에서 만나 초나라를 침범하였다.
여름 4월 경진일에 채나라 공손성이 군대를 거느리고 심(沈)나라를 멸망시키고 심자 가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5월, 공과 제후들이 고유에서 맹세하였다.
기나라 백작 성이 회합 중에 죽었다.
진(陳)나라 혜공을 장사 지냈다.
진(晉)나라 사람이 융나라 만자 적을 사로잡아 초나라로 데려갔다.
가을 7월, 공께서 회합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기나라 희공을 장사 지냈다.
초나라 사람이 오나라를 정벌하였다.
겨울, 채나라 사람이 그 대부 공손성을 오나라로 추방하였다.
대신(大辰)에 별이 나타났다(혜성이 나타났다).
초나라 영윤 자상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정벌하니 채나라 사람이 오나라에 다급함을 고하였다. 오나라 자작이 경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패에서 채나라 군대와 합세하니,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초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오나라가 초나라에 들어가니 초나라 소왕이 도망하였다.
4년 봄, 공께서 제후들을 소릉에서 만나 초나라를 침범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자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채나라 공손성이 군대를 거느리고 심나라를 멸망시켰다. 심나라는 초나라의 부용국이다. 채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고하니 진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자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정벌하니 채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채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채나라 군대가 오나라에 다급함을 고하니 오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 채나라 군대와 합세하였다. 오나라 군대가 백거에서 초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키니 초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에 들어가니 초나라 소왕이 수(隨)나라로 도망하였다. 오나라 군대가 영(郢)에 들어가니 초나라는 망하였다. 진(秦)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나라를 회복하였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오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다.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시대 말기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오나라 군대가 영에 들어가니 오자서와 백비가 모두 장수가 되었다. 오나라 군대가 강하니 초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초나라 소왕이 수나라로 도망하였다가 초나라 군대가 돌아오자 초나라 소왕이 다시 영으로 들어갔고 초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의 혼란을 알게 되었다. 진나라 군대가 강하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5. 정공 5년
5년 봄, 왕 3월 신해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채나라에 곡식을 보냈다.
어월(越)이 오나라에 들어왔다.
가을 7월 임오일에 정나라 백작 건이 죽었다.
9월 계해일에 제나라 후작 저구가 죽었다.
겨울,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초나라 자작이 저수를 건넜다.
5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에 진, 초, 오, 월 네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에 들어가자 오자서가 초나라 평왕의 시신을 채찍질하여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았다. 초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초나라 소왕이 수나라로 도망하였다. 진(秦)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나라를 회복하였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오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진나라 군대 또한 강하였다.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에 진, 초, 오, 월 네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질 징조가 모두 이때에 나타났다.
가을, 정나라 백작과 제나라 후작이 죽었다. 진나라 군대가 강하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에 진, 초, 오, 월 네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6. 정공 6년
6년 봄, 왕 정월 계해일에 정나라 유속이 군대를 거느리고 허(許)나라를 멸망시키고 허나라 남작 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여름, 계손의여가 진나라로 갔다.
가을, 제나라 후작과 위나라 후작이 오씨에 주둔하였다.
겨울, 중손하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6년 봄, 정나라 군대가 허나라를 멸망시켰다. 허나라는 초나라의 부용국이다. 진나라 군대가 허나라를 구원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허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허나라를 정벌하니 허나라 사람들이 초나라에 고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허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대 또한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계손의여가 진나라에 가니 진후가 제후들이 노나라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 명을 내렸다. 진나라는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 자작이 노하여 곧 정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였고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였다.
가을, 제나라 군대와 위나라 군대가 오씨에 주둔하여 진나라를 정벌할 것을 꾀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정벌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7. 정공 7년
7년 봄, 왕 정월.
여름 4월 갑진일에 채나라 공손성이 죽었다.
제나라 국하가 군대를 거느리고 노나라 서쪽 변방을 정벌하였다.
가을, 제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함에서 맹세하였다.
겨울, 중손하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공께서 진나라로 가셨다가 강에 이르러 돌아오셨다.
7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에 진, 초, 오, 월 네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제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구원하였고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가을, 제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함에서 맹세하여 진나라를 정벌할 것을 꾀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정벌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질 징조가 모두 이때에 나타났다.
━━━━━━━━━━━━━━━━━━━━━━━━━━━━━━━━━━━━━━
1.8. 정공 8년
8년 봄, 왕 정월에 공께서 제나라를 침범하였다.
여름, 제나라 국하가 군대를 거느리고 노나라 서쪽 변방을 정벌하였다.
가을, 위나라 영공을 장사 지냈다.
진나라 사앙과 위나라 공어가 군대를 거느리고 선우를 정벌하였다.
겨울, 위나라 후작과 정나라 백작이 곡복에서 맹세하였다.
선공을 제사 지냈다.
8년 봄, 노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구원하였고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에 진, 초, 오, 월 네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제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정벌하니 진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구원하였고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질 징조가 모두 이때에 나타났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니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고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져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
1.9. 정공 9년
9년 봄, 왕 정월에 공께서 후위에서 돌아오셨다.
계손사, 중손하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정벌하여 주루를 함락시키고 곽 동쪽의 밭을 취하였다.
여름, 제나라 사람이 환과 천을 취하였다.
가을, 제나라 후작과 위나라 후작이 사에서 맹세하였다.
진나라 조앙이 군대를 거느리고 선우를 정벌하였다.
겨울, 숙손주구가 제나라로 갔다.
9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가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에 진, 초, 오, 월 네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니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노나라 정공이 후위에서 돌아와 즉위함을 고하였다. 공자께서 예로써 대답하시니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나라가 공자로써 정치를 행하니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를 따랐으며 노나라는 강성하였다.
여름, 제나라 군대가 환과 천을 취하니 노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정벌하였고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에 복종하였다. 노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니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
1.10. 정공 10년
10년 봄, 왕 3월에 제나라와 화평하였다.
여름, 공께서 제나라 후작을 축기에서 만나고 협곡에서 회합하였다. 공구(공자)가 재상을 맡았는데, 리미가 제나라 후작에게 말하기를 "공구는 예는 알지만 용맹은 없습니다. 만약 래나라 사람을 시켜 병기로 노나라 후작을 겁박하면 필시 뜻을 이룰 것입니다"라 하였다. 제나라 후작이 이를 따랐다. 공자께서 공을 모시고 물러나며 말하기를 "군사와 예절의 일입니다. 두 군주가 화합하는데 오랑캐의 포로들이 병기로 이를 어지럽히니, 이는 제나라 군주께서 제후들에게 명하신 바가 아닙니다. 오랑캐가 하족(중국)을 도모하지 않고, 오랑캐가 화족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포로가 맹약을 간섭하지 않고, 병기가 우호를 겁박하지 않는 법입니다. 신에게는 불길하고, 덕에는 의를 해치며, 사람에게는 예를 잃는 것이니, 군주께서는 필히 그리하지 마십시오"라 하였다. 제나라 후작이 이를 듣고 급히 그들을 피하였다. 장차 맹세하려 할 때 제나라 사람이 맹서에 글을 더하여 "제나라 군대가 국경을 나가서 갑옷을 입은 전차 300승으로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이 맹서와 같을 것이다"라 하였다. 공구(공자)가 자무환을 시켜 읍하며 대답하기를 "우리 문양의 밭을 돌려주지 않고서 우리에게 명령을 따르라고 하니, 그 또한 이 맹서와 같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가을, 제나라 경공을 장사 지냈다.
10년 여름, 공께서 제나라 후작을 협곡에서 만나셨다. 공구(공자)가 재상을 맡았는데, 제나라 리미가 래나라 사람을 시켜 노나라 후작을 겁박하려 하자 공자께서 예로써 물리치셨다. 제나라 후작이 예에 어긋났음을 깨닫고 마침내 노나라의 문양 지역 밭을 돌려주었다. 진나라 군대가 강하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니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고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를 따랐으며 노나라는 강성하였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어 삼도를 헐게 하시니 계손의여, 숙손주구, 중손하기가 모두 공자를 따랐다.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나라가 공자로써 정치를 행하니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고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를 따랐으며 노나라는 강성하였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떠나시자 노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시대 말기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1.11. 정공 11년
11년 봄, 송나라 공작의 아우 진과 중타, 석구가 진(陳)나라로 도망하였다.
가을, 계손사, 숙손주구, 중손하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정벌하여 곽 동쪽의 밭과 기 서쪽의 밭을 취하였다.
겨울, 숙환이 제나라로 가서 제나라 경공을 장사 지냈다.
11년 봄,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니 초나라 군대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대 또한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대 또한 강해지니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에 진, 초, 오, 월 네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떠나 제후의 나라들을 주유하시니 노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시대 말기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공자께서 제후의 나라들을 주유하시며 인과 의, 예와 악으로 제후들을 설득하시니 제후들은 모두 공자를 알게 되었고 공자의 덕을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공자께서 만년에 노나라로 돌아오셔서 시경과 서경을 정리하고 예악을 바로잡으셨으며, 춘추를 저술하시어 일왕(一王)의 법으로써 붓으로 깎고 다듬어 포폄(칭찬과 비판)을 담으시니 제후들은 모두 공자를 알게 되었고 공자의 춘추를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
1.12. 정공 12년~15년
12년 봄, 왕 정월에 중성을 쌓고 비를 헐었으며, 가을에 설나라 백작 정이 죽었다. 진나라 사람이 위나라의 난리를 토벌하러 왔다. 겨울 10월에 성주를 쌓았다.
12년,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어 삼도를 헐게 하셨는데 계환자가 이를 가로막았다. 비나라의 재상 공산불뉴가 비나라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니 노나라 군대가 이를 정벌하였다. 공자께서 장수를 명하여 비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강하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니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고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며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를 따랐고 노나라는 강성하였다.
13년 봄, 제나라 사람이 와서 운, 환, 귀음의 밭을 돌려주었다. 여름에 사연에 정원을 쌓았다. 가을, 진나라 순인과 사길사가 조가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니 진나라 조앙이 그들을 정벌하였다. 겨울, 진나라 조앙이 군대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정벌하여 조가를 취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강하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14년 봄, 위나라 공숙술이 와서 망명하였다. 여름, 위나라 북궁결이 군대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 공께서 진후, 송공, 위후, 진(陳)후, 정백, 허남, 조백과 함께 두릉에서 맹세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강하니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를 따랐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재상하시니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고 노나라 군대가 강해지며 제후들은 모두 노나라를 따랐고 노나라는 강성하였다.
15년 봄, 왕 정월에 주나라 자작이 조회하러 왔다. 2월 계유일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숙손주구가 군대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가을에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겨울, 칠나라에 성을 쌓았다. 노나라 정공이 죽으니 공자께서 위나라로 가셨는데, 노나라가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제후들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초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하며 오나라 군대도 강하니 천하에 진, 초, 오 세 나라가 강성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시대 말기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춘추좌씨전 — 애공 (哀公)
━━━━━━━━━━━━━━━━━━━━━━━━━━━━━━━━━━━━━━
1.1. 애공 원년
원년 봄, 왕이 정월에 즉위하였다.
초나라 임금과 진나라 후, 수나라, 허나라가 남쪽에서 채나라를 포위하니, 채소후가 오나라에 사람을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오나라 임금이 태재 비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구하게 하였고, 노나라 임금은 오나라와 회합하여 제나라를 쳤다.
여름 4월 신사일에 제나라 군사를 애릉에서 패배시켰다.
가을 7월.
겨울 10월.
원년 봄, 초나라 군사가 채나라를 포위하니 채소후가 오나라에 위급함을 알렸고, 오나라 임금이 태재 비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구하게 하였다.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채나라를 치니 채나라 사람은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 군사가 채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공자가 위나라로 갔는데, 이는 위나라가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나라 애공이 즉위하였으나 삼환이 정권을 잡았고, 정사가 없었기에 노나라 군사는 약했다. 오나라 군사가 강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고,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오나라 임금이 태재 비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채나라를 구하게 하였는데,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하였다. 초나라 군사가 패배하여 물러나니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로 들어갔고, 초소왕은 수나라로 달아났다. 진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구하니 초나라 군사가 나라를 회복하였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어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
1.2. 애공 2년
2년 봄, 왕이 2월에 계손사, 숙손주구, 중손하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쳐서 주나라를 이기고 허 땅을 취하였다.
여름, 진나라 조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쳤다. 가을, 진나라 조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세자 괴외를 척 땅에 들여보냈다. 겨울, 중손하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쳤다.
2년 봄, 노나라 군사가 주나라를 치니 주나라는 초나라에 알렸고, 초나라 군사가 주나라로 들어오니 노나라 군사가 물러났으며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주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주나라를 치니 주나라 사람은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 군사가 주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치니 초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구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정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치니 정나라 사람은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 군사가 정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가을, 진나라 조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세자 괴외를 척 땅에 들여보내려 했으나 위나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니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1.3. 애공 3년
3년 봄, 제나라 국하와 위나라 석만고가 군사를 거느리고 척 땅을 포위하였다.
여름 4월 갑오일에 지진이 있었다.
5월 신묘일에 환궁과 희궁에 불이 났다.
6월에 박사에 불이 났다.
가을 8월 갑인일에 등나라 임금 결이 죽었다.
겨울 11월에 숙손주구가 죽었다.
12월 계해일에 공이 죽었다.
3년 봄, 제나라 군사와 위나라 군사가 척 땅을 포위하니 진나라 군사가 척 땅을 구하였고, 초나라 군사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사도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니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환궁과 희궁에 불이 난 것은 정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위나라에 있었는데, 노나라 군사는 약했으니 이는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나라 군사가 강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고,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인의와 예악으로써 제후들을 설득하니 제후들이 모두 공자를 알았고, 공자의 덕을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
1.4. 애공 4년
4년 봄, 왕이 2월 경술일에 도적이 채나라 임금 신을 죽였다.
여름, 채나라가 그 대부 공손성과 공손곽을 죽였다.
4월에 채소공을 장사 지냈다.
초나라 사람들이 이호를 이긴 뒤, 북쪽을 도모하였다.
가을 8월 갑술일에 진나라 조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 한달이 거느린 군사와 백인에서 싸웠는데, 정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초나라 공자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쳤다.
겨울 11월에 공이 진나라로 갔다.
4년 봄, 채나라 임금 신이 죽으니 초나라 군사가 채나라를 쳤고 채나라는 망하여 초나라는 강해졌으며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진나라 군사가 채나라를 구하니 초나라 군사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사도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채나라를 치니 채나라 사람은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 군사가 채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초나라가 북쪽을 도모하여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구하였고, 초나라 군사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사도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치니 진나라 사람은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가을,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치니 정나라 군사가 패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로 들어가 정나라 군사와 맹약하고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니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1.5. 애공 5년
5년 봄, 비 땅에 성을 쌓고, 제나라 임금이 송나라를 쳤다. 겨울, 숙손주구와 중손하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후 땅을 포위했으나 공서와 극이 이기지 못하였고, 계손사와 중손하기, 숙손주구가 군사를 거느리고 비 땅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년 봄, 진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치니 초나라 군사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사도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니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공자가 위나라로 갔는데, 노나라 군사는 약했으니 이는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나라 군사가 강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고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공자가 인의와 예악으로써 제후들을 설득하니 제후들이 모두 공자를 알았고, 공자의 덕을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
1.6. 애공 6년
6년 봄, 주나라 하 땅에 성을 쌓았다.
초나라 공자 신, 공자 결, 공자 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치니, 진나라 임금이 공손정자를 초나라로 보냈으나 양 땅에 이르러 죽었다.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포위하니 진나라는 오나라에 위급함을 알렸고, 오나라 임금이 태재 비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구하게 하였다. 진나라 임금은 요이다.
여름, 제나라 국하, 진걸, 진표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서쪽 변경을 치니, 계손사, 숙손주구, 중손하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 군사와 리미에서 싸웠는데 노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제나라 군사가 이르니 공구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이겼다.
6년 봄,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치니 진나라가 오나라에 위급함을 알렸고 오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구하니 초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오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구하였고, 초나라 군사가 돌아가니 진나라 군사도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진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치니 진나라 사람은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다.
여름, 제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치니 노나라 군사가 제나라 군사와 싸웠으나 노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진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구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르니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가을, 공구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쳐서 이겼다. 공자가 예로써 노나라를 다스리니 노나라 군사가 강해졌고 제후들이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았다. 노나라가 공자로써 정사를 삼으니 노나라 군사가 강해졌고 제후들이 모두 노나라를 따르니 노나라가 강해졌다.
━━━━━━━━━━━━━━━━━━━━━━━━━━━━━━━━━━━━━━
1.7. 애공 7년
7년 봄, 공이 오나라와 팽 땅에서 회합하였다.
여름, 공이 오나라와 팽 땅에서 회합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중니에게 묻고 오나라가 제후들에게 위엄을 떨치게 하였다. 오나라 사람이 노나라에 구갑을 요구하니 계강자가 염유에게 명하여 공자에게 고하게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구는 들으니 나라를 가진 자와 집을 가진 자는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균등하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불안함을 걱정한다 하였소. 대체로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하면 적지 않으며, 편안하면 기울어지지 않는 법이오. 이와 같으면 먼 곳의 사람이 복종하지 않을 때 문덕을 닦아 그들을 오게 하고, 이미 오게 하면 그들을 편안하게 하는 법이오. 지금 유와 구, 너희 두 사람은 그 대부를 돕고 있는데, 먼 곳의 사람이 복종하지 않는데도 오게 하지 못하고, 나라가 붕괴하고 흩어지는데도 지키지 못하며, 나라 안에서 무기를 휘두를 것을 도모하고 있으니, 나는 계손의 근심이 전유에 있지 않고 소장의 내부에 있을까 두렵구려." 하였다.
가을, 공이 주나라를 쳤다. 8월 갑술일에 공이 관문을 일으키고 곧바로 주나라를 포위하였다.
겨울, 제경공을 장사 지냈다.
7년 봄, 공이 오나라와 회합하니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다.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니 오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와 초나라는 약해졌다.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두 강국(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오나라 사람이 노나라에 구갑을 요구하니 노나라 사람이 불가하다고 여겼다. 공자가 말하기를, "구는 들으니 나라를 가진 자와 집을 가진 자는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균등하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불안함을 걱정한다 하였소."라고 하여 이로써 오나라를 설득하니 오나라 군사가 물러났다. 노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노나라에 공자가 있음을 알았다. 노나라가 공자로써 정사를 삼으니 노나라 군사가 강해졌고 제후들이 모두 노나라를 따르니 노나라가 강해졌다.
━━━━━━━━━━━━━━━━━━━━━━━━━━━━━━━━━━━━━━
1.8. 애공 8년
8년 봄, 왕이 정월에 송나라 임금이 조나라로 들어가 조백양을 데리고 돌아왔다.
진나라 사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선우를 포위하였다.
오나라 군사가 우리를 치니 공이 구 땅에서 월나라 군사를 만났다.
여름, 제나라 사람이 환과 천을 취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가을 8월에 위령공을 장사 지냈다.
제나라 사람이 환과 천을 돌려주러 왔다.
겨울, 중손하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쳤다.
8년 봄, 오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치니 노나라 군사가 구원하였고 오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노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니 노나라는 초나라에 복종하였고, 진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치니 노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 군사가 노나라로 들어오니 진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니 초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1.9. 애공 9년
9년 봄, 왕이 2월에 진혜공을 장사 지냈다.
송나라 황원이 군사를 거느리고 옹구에서 정나라 군사를 취하였다.
여름, 초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쳤다.
가을, 송나라 임금이 정나라를 쳤다.
겨울, 중손하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쳐서 휼 동쪽의 밭과 기 서쪽의 밭을 취하였다.
9년 봄, 진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치니 초나라 군사가 돌아갔고 진나라 군사도 돌아갔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니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공자가 만년에 노나라로 돌아와 시와 서를 삭제하고 예와 악을 정하였으며, 춘추를 저술하여 한 왕의 법으로써 필삭 속에 포폄을 기탁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공자를 알았고 공자의 춘추를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으며, 공자의 학문은 만세의 스승의 표상이 되었고 춘추의 도가 이곳에 깃들게 되었다.
━━━━━━━━━━━━━━━━━━━━━━━━━━━━━━━━━━━━━━
1.10. 애공 10년
10년 봄, 왕이 3월에 주나라 임금이 내조하였다.
오나라 임금 락이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치니, 공이 오나라와 회합하여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 임금 임을 서주에서 죽였다.
여름, 제나라 진걸이 그 임금 임을 죽였다.
진나라 조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쳤고, 초나라 공자 설과 공손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쳤다.
가을, 공이 위나라 임금, 송나라 황원과 운 땅에서 회합하였다.
겨울 12월에 제도공을 장사 지냈다.
10년 봄, 오나라 군사가 제나라를 치니 공이 오나라와 회합하여 제나라를 쳤고, 제나라 군사가 패하였으며 제나라 임금이 죽었다.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다.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니 오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와 초나라는 약해졌다.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두 강국(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여름, 제나라 진걸이 그 임금 임을 죽였고, 진나라 군사가 제나라를 치고 초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치니 오나라 군사가 물러났고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초나라와 오나라가 서로 다투어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으며,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를 따랐고 오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와 초나라는 약해졌다.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두 강국(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1.11. 애공 11년
11년 봄, 제나라 국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를 치니 공이 오나라와 회합하여 제나라를 쳤는데, 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제나라 국서를 사로잡았다. 가을 8월에 중손하기가 죽었다. 겨울 11월에 위출공을 장사 지냈다.
11년 봄, 제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치니 공이 오나라와 회합하여 제나라를 쳤고, 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제나라 국서를 사로잡았다.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다.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니 오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와 초나라는 약해졌다.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두 강국(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염유와 계로가 계손을 보좌하였는데, 염유가 무공을 공자에게 고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유야, 너는 아느냐? 구는 물러나기에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는 남보다 뛰어난 것을 겸하였기에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은 인의와 예악을 근본으로 하였으니 제후들이 모두 공자를 알았고, 공자의 덕을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
1.12. 애공 12년
12년 봄, 왕이 정월에 진회공을 장사 지냈다.
공이 오나라와 탁고에서 회합하였다.
여름 5월 갑진일에 맹자가 죽었다. 제경공을 장사 지냈다.
가을에 괵맹자를 장사 지냈다. 경오일에 송나라 임금이 맹저에서 사냥하였고, 정축일에 초나라 군사와 오나라 군사가 포에서 싸워 오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고 초나라 군사가 돌아갔다.
겨울 10월에 공이 진나라로 가서 진정공을 장사 지냈다. 12월에 메뚜기 떼가 있었고 공이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12년 봄, 공이 오나라와 회합하니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다.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니 오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와 초나라는 약해졌다.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두 강국(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가을, 초나라 군사와 오나라 군사가 싸워 오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고 초나라 군사가 돌아가니 오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오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겨울, 공이 진나라로 가니 진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따랐고 진나라는 강해지고 초나라는 약해졌다.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천하에 세 강국(진, 초, 오)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네 강국(진, 초, 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1.13. 애공 13년
13년 봄, 정나라 한달이 군사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쳤다.
여름, 공이 진나라 임금 및 오나라 임금과 황지에서 회합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이기고 오나라 군사가 먼저 돌아갔으며,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치고 송나라 사람이 정나라를 치니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구하였다. 공이 황지에서 돌아왔다.
가을, 공이 황지에서 돌아왔다. 유자와 단자가 왕자 맹을 데리고 진나라로 달아났다.
겨울, 위령공의 세자 괴외를 위나라에 장사 지냈다.
13년 여름, 공이 진나라 임금 및 오나라 임금과 황지에서 회합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패권을 칭하려 하니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 군사가 강함을 알았다. 진나라 군사가 물러나니 초나라 군사도 물러났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니 오나라는 강해지고 진나라와 초나라는 약해졌다. 월나라 군사 또한 강해져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니 천하에 두 강국(오, 월)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오나라 임금이 이기고 먼저 돌아가니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쳤고 오나라 군사가 물러났다. 오나라 군사가 패하니 월나라는 강해지고 오나라는 약해졌으며,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다투고 월나라 군사는 더욱 강해지고 오나라 군사는 더욱 약해져 천하의 형세가 장차 크게 변하게 되었다. 춘추 말세에 전국이 시작되어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지고 사분오열되어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모두 패권을 칭하려 하였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는 형세가 크게 드러났다.
━━━━━━━━━━━━━━━━━━━━━━━━━━━━━━━━━━━━━━
1.14. 애공 14년
14년 봄, 서쪽에서 사냥하다 기린을 잡았고, 공자가 죽었다.
중손하기와 숙손주구가 군사를 거느리고 후 땅을 포위하였다.
여름 4월, 대야에서 서쪽으로 사냥하였는데 숙손씨의 수레꾼 서상이 기린을 잡았다. 불길하다고 여겨 우인에게 주었는데, 중니가 보고 말하기를, "기린이다." 하고서야 그것을 취하였다.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았을 때 공자가 말하기를, "나의 도가 궁해졌구나." 하였다.
14년 봄, 서쪽에서 사냥하다 기린을 잡았고 공자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기린이다." 하였다. 공자는 기린이 나왔으나 때가 아님을 보고 불길하다고 여겨, 이에 춘추에 붓을 꺾었다.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은 것으로 춘추를 끝맺으니, 춘추는 노나라 은공 원년부터 애공 14년까지 모두 242년이다. 공자가 춘추를 저술하여 한 왕의 법으로써 필삭 속에 포폄을 기탁하니 제후들이 모두 공자를 알았고, 공자의 춘추를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춘추는 공자의 경이다. 공자가 시와 서를 삭제하고 예와 악을 정하였으며, 춘추를 저술하여 인의와 예악을 근본으로 삼고, 명분을 바로잡으며,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포폄을 정하여 후세에 보였다. 공자의 도는 만세의 스승의 표상이 되었고 춘추의 도가 이곳에 깃들게 되었다.
좌씨전은 춘추의 일을 자세히 서술하여 공자의 춘추가 간략한 것을 보충하였다. 좌구명이 부자의 뜻을 살폈고, 좌전은 일을 기록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진나라와 초나라의 다툼, 제후의 성쇠, 대부의 현명하고 현명하지 못함을 모두 자세히 서술하였다. 춘추좌씨전은 모두 30권으로, 은공 원년부터 애공 14년까지 일을 자세하고 밝게 기록하였으며 문장이 아름다워 후세 사학의 종주가 되었다. 세상에 전해 내려와 춘추와 함께 불리며, 공자의 도는 만세의 스승의 표상이 되었고 춘추좌씨전은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
1.15. 애공 15년~27년 (부록)
15년 봄, 공손숙이 그 병갑을 가지고 제나라로 들어가니 제나라 임금이 공손숙을 회복시켰다. 위령공의 세자 괴외가 위나라로 들어가니 위나라 임금 첩이 월나라로 달아났다. 겨울, 진나라 조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치니 위나라 임금이 월나라로 달아났고, 위나라 사람들이 괴외를 세워 위나라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위장공이다.
16년 봄, 왕이 정월 무신삭에 송나라에 운석 5개가 떨어졌다. 오나라 왕 부차가 월나라를 멸하니 월나라 왕 구천이 달아났다. 월나라가 오나라에 복종하니 오나라는 강해져 천하에 한 강국(오)이 있게 되었고, 제후들이 서로 다투니 오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고 오나라는 패권을 칭하였다.
17년 봄, 공이 제나라 임금, 주나라 임금과 팽 땅에서 회합하였다. 제나라 고무평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서쪽 변경을 쳤다. 가을, 진나라 조앙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쳤다. 겨울,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로 들어가니 오나라 왕 부차가 죽었다.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로 들어가니 오나라는 망하고 월나라는 강해져 천하에 한 강국(월)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는 패권을 칭하였다. 월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월나라에 복종하니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고 전국이 시작되어 천하는 사분오열되었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모두 패권을 칭하려 하였다.
18년 봄, 공이 제나라 임금, 주나라 임금과 팽 땅에서 회합하였다. 월나라 구천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치니 오나라 군사가 패하고 오나라는 망하였다. 월나라는 강해져 천하에 한 강국(월)이 있게 되었고 월나라는 패권을 칭하였다. 월나라 군사가 강해져 제후들이 모두 월나라에 복종하니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춘추 말세의 형세가 크게 드러났고 전국이 시작되어 천하는 사분오열되었으며,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모두 패권을 칭하려 하였다. 공자가 죽으니 이는 그 도가 궁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덕을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고 공자의 학문은 만세의 스승의 표상이 되었다.
(춘추좌씨전의 기록은 애공 14년 서수획린에서 마치며, 그 이후의 각 연도는 후대 사람이 부록으로 덧붙인 것이지 좌구명이 지은 본전의 정문이 아니다.)
━━━━━━━━━━━━━━━━━━━━━━━━━━━━━━━━━━━━━━
【춘추좌씨전 전권 종료】
춘추좌씨전이란 좌구명이 지은 것으로, 공자의 춘추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다.
노나라 은공 원년부터 노나라 애공 14년까지, 총 242년의 일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다툼, 제후들의 성쇠, 대부들의 현명하고 현명하지 못함을 모두 자세히 서술하였다.
공자의 도인 인의와 예악은 만세의 스승의 표상이며, 춘추의 도가 여기에 깃들어 있다.
좌전의 문체는 문장이 아름답고 서사가 자세하고 명확하여 후대 사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세상에 전해 내려와 현재까지 춘추와 함께 세상에 나란히 일컬어진다.
━━━━━━━━━━━━━━━━━━━━━━━━━━━━━━━━━━━━━━
'철학 > 유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경(書經) 한국어 버전 (0) | 2026.05.24 |
|---|---|
| 서경(書經) 한자 원문 (0) | 2026.05.24 |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한자 원문 (0) | 2026.05.20 |
| 홍범구주(洪範九疇) 엑셀 정리 (0) | 2026.05.16 |
| 홍범구주(洪範九疇) 한국어 버전 (0) | 2026.05.16 |